“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2-1
“사성제를 아는 지혜가 위빠사나, 그 지혜를 완성하면 부처님”
2-1. 부처님과 위빳사나
오늘은 여러분께 ‘부처님과 위빳사나’라는 제목으로, 위빳사나 수행이 부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불자들이 삼보에 귀의를 하고자 하면 먼저 삼보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제대로 모르면 바른 법을 알 수가 없고, 정법을 알지 못하면 불법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승가에 대한 정의도 당연히 불분명할 수밖에 없고, 깨달음에 대한 정의도 매우 이상해지고 혼란스럽게 되고 맙니다.
붓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지칭하실 때 ‘따타가따’라는 단어를 쓰셨지요. 따타가따를 한국에서는 여래如來라고 번역합니다. ‘따타’는 ‘같은, 똑같이’라는 뜻이고 ‘가따’는 ‘오신 분, 가신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나는 앞서 오셨던 부처님들과 똑같은 부처이고, 앞서 가신 부처님들과 똑같은 공덕을 갖춘 부처이다’라는 의미에서 ‘따타가따’라는 말을 쓰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의 원어인 붓다buddha를 풀이하면 ‘알았던 자, 이미 안 자’, 영어로 번역할 때는 enlightened one입니다. 또는 ‘깨어난 자, 이미 깬 자’라는 의미의 awakened one이라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알았던 자’, 또는 ‘깨어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부처님을 정의하면 어떤 혼란도 없는 확실한 정의가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아 아셨는가? ‘사성제’를 깨달아 아셔서 붓다입니다. 사성제가 부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불법,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사성제를 알아 깨치는 법(4가지 도 4가지 과 닙바나, 이 9가지)에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사성제를 깨달을 수 있는 그 법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과 깨달은 자들의 모임이 승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법·승 삼보의 개념이 확고해지면 그 어떤 혼란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붓다의 두 번째 정의인 ‘깨어난 자(Awakened one)’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어나셨다는 것은 무명, 어리석음이라는 어둠 속에서,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라는 아주 길고 긴 밤에서 깨어나셨다는 뜻입니다. 그 무명, 어리석음이라는 어둠 속,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라는 아주 길고 긴 밤에 폭 잠든 모든 범부들 중에서 최초로 깨어나신 분, 누가 와서 깨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신 분이 바로 붓다입니다. 어리석음, 무명의 반대가 지혜,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이 성취하신 지혜, 사성제, 진리, 그 깨달음이 바로 ‘깨어났다’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그 부처님의 깨달음, 사성제를 아는 지혜가 바로 위빳사나 지혜이고, 그 지혜가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 도 지혜 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께서 29세 때 큰 결심으로 출가하신 후 먼저 하신 수행은 사마타입니다. 태자께서 출가하자마자 유명한 두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알라라 깔라마, 우다까 라마뿟따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선정수행을 배우고 익혀 8선정까지 다 통과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그 스승 곁을 떠나 6년 가까이 고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행 또한 올바른 길이 아님을 깨닫고 마침내 중도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 중도가 다름 아닌 팔정도입니다. 부처님의 첫 번째 법문인 『초전법륜경』에서 중도가 팔정도이고 그 팔정도를 수행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부처님 당신도 팔정도를 수행하여 드디어 깨달음, 즉 사성제 진리를 성취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팔정도를 수행해야 부처님의 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팔정도 수행이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그러면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고행과 쾌락이라는 양 극단을 버리고 어떤 치우침에서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수행하면서 대상을 잊지 않고 깨어 있어 놓치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그것이 팔정도의 바른 노력입니다. 수행의 대상인 몸·느낌·마음·법의 사념처, 간단하게 말하면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잊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그러면서 알아차리게 되는 것을 움켜쥐지도 않고 잊지도 않으며, 조심스럽게, 주의 깊게 앞뒤로 연결시키면서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깨어 있는 것이 팔정도의 바른 사띠입니다. 몸·느낌·마음·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만 오로지 집중하여 거기에 머무는 것, 이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이 바른 집중이 있으면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생깁니다. 재가불자들이 지키는 5계, 8계 혹은 10계나 출가자들이 지키는 계율이 바로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입니다. 계율이 깨끗해야 마음이 청정해지므로 부처님 가르침인 삼학 중에서도 계가 기본입니다. 계율은 지키지 않으면서 수행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건물을 지을 때 건물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건축물이 올라갈 수 없고, 올라간다 해도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계율을 안 지키면 집중이 안 되고, 집중이 없으면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복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정·혜인데 계율이 깨끗해야 정定, 즉 마음이 청정해지고,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집중이란 마음이 깨끗해져서 번뇌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힘이 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계율을 깨끗이 지키는 않는 사람들은 때 묻은 걸레에 다시 때가 묻어도 잘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잘 모릅니다. 계율이 청정할수록 마음 또한 청정해져서 마음의 힘이 차고, 마음의 힘이 차야 그 집중의 힘으로 지혜의 꽃이 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삼학, 즉 계·정·혜를 아시지요? 그 첫 번째 가르침이 계율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몸과 입을 챙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몸으로 좋은 행동을 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이렇게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 다음이 사마디, 즉 정定인데 이것은 마음의 청정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빤냐, 지혜입니다. ‘빤냐’를 한국에서는 반야라고 말하지요.
이와 같이 위빳사나 수행으로 순간적인 멸성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매 순간마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 자체가 순간적인 멸성제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작은 멸성제가 많이 모여야 큰 멸성제에 이르고 해탈에 도달합니다. 작은 것 없이 큰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침에 깰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이 팔정도를 활성화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이 법의 바퀴가 멈추지 않도록 매 순간 팔정도라는 법, 해탈에 이르는 법의 바퀴를 굴려야 합니다. 순간적인 도성제와 순간적인 멸성제가 계속 모이고 모일 때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완벽한 자유, 완벽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8선정까지 이르렀지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선정을 버리고 다시 수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위빳사나 수행으로 무상·고·무아를 보면서 순간적인 번뇌를 죽이고 죽임으로써 마침내 깨끗하게 되어 결국 위없는 붓다가 되셨습니다.
“계율은 몸과 입으로, 수행은 마음으로 지킨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2-2
“팔정도 있는 가르침에 깨달음 있고, 팔정도가 없으면 깨달음 없다”
보살과 붓다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십바라밀을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보살행을 하신 시간과 양은 실로 엄청납니다. 우리가 붓다, 부처님이라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보살의 첫 번째 기준은 예언을 받았느냐, 다른 말로 수기를 받았느냐의 여부입니다. 예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보살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진정한 보살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보살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부처님과 만나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과거에 현존하는 부처님을 만나 수기, 즉 예언을 받아 보살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기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 여덟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 남자여야 합니다. 여자는 깨달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을 때는 남자의 몸일 때라는 뜻입니다. 셋째, 온갖 빠라미(바라밀) 공덕을 갖추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바로 그 생에 아라한이 될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넷째는 살아 계신 부처님을 만나야 하며, 다섯째는 출가자여야 합니다. 여섯째, 8선정과 신통력에 능숙해야 하고, 일곱 번째는 목숨을 걸 수 있는 정도의 큰 원력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정도의 열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여덟 번째 조건입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을 갖추었을 때 보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나를 보고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건 아라한이건, 누구든지 깨달으려면 십바라밀을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일반 아라한의 차이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십바라밀을 무수한 겁 동안 엄청난 정도로 실천해야 될 수 있는 데 비해 일반 아라한의 보살행은 수행의 양과 기간에서 훨씬 얕고 짧습니다. 즉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바라밀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같은데 그 서원誓願과 투자의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전신인 수메다 은자는 마음만 먹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는 그 때 다음 세 가지 대원력을 세우고 십바라밀로 보살행을 실천합니다. ‘나 혼자만 깨달으면 무엇 하겠는가. 내가 깨닫고 여러 중생 또한 깨닫게 하리라, 내가 윤회라는 이쪽 강가에서 해탈이라는 저쪽 강가로 건너가고 수많은 중생들 또한 나처럼 윤회의 고통에서 해탈이라는 행복으로 건너갈 수 있게끔 하리라, 그리고 내가 이 번뇌,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고 수많은 중생들이 윤회, 고통, 번뇌라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이렇게 행하신 것은 보시바라밀에 속합니다.
보살행을 할 때 계율, 즉 지계바라밀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율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 하지 마라. 저것 하지 마라.” 이런 것들만 계율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계율은 몸과 입을 챙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야 하는 것’도 계율입니다. 즉 몸으로 좋은 일 하고 입으로 좋은 말 하고, 몸으로 나쁜 일을 피하고, 입으로 나쁜 말을 피하는 것이 다 계율에 속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모든 말이 다 계율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계율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출가바라밀. 출가심 또한 바라밀, 보살행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29살 때 매우 아름다운 야소다라 부인과 갓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들 라훌라를 떠나 바로 출가할 수 있었던 힘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겁 동안 출가하여 수행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집을 떠나 일주일 또는 한 달 등을 수행처에 머무는 것도 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 깎지 않고 가사는 안 입었지만 세속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오욕락에서 떠난 것 자체가 출가입니다.
그 다음은 지혜바라밀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는 것, 제가 이렇게 가르치는 것도 지혜바라밀입니다. 그 외에 노력바라밀, 인내바라밀, 진실바라밀, 결정바라밀, 그 다음이 자애바라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정바라밀, 이것을 십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자애로도 안 되고, 연민심으로도 안 되고, 수희심으로도 못하는 일이면 항상 평정심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 평정심을 지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연민심이 지나쳐 마음이 속상하면 성냄이 되고, 자애가 잘못되면 욕심이 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그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평정심이 필요합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민심은 선업이고 화는 불선업입니다. 욕심은 불선업이고 자애는 선업이지요.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인데 사람들이 그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해 늘 혼동을 하곤 합니다. ‘항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업대로 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하고 평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고 싶든 아니면 그냥 깨닫고 싶든 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바로 십바라밀이고, 이것을 우리가 매일 실천한다면 아주 좋을 것입니다. ‘바라밀’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고귀한 사람의 고귀한 일’인데 마음이 고귀한 사람을 ‘고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나의 이익보다 남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사람,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아주 기쁘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고귀한 사람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보살행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보살행을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그런 경우를 넌지시 비판하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거북이 보살행’이라는 건데, 거북이는 걸어갈 때 항상 발을 안쪽으로 숨기면서 간답니다. 그 모양이 꼭 ‘내 것, 내 것, 내 것…….’ 하면서 걷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거북이 보살행’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보살행 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속으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을 풍자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살행 한다고 하면 우선 자신의 마음 자체가 고귀해야 합니다. 고귀한 마음이 되려면 이기적인 마음을 없애야 하고, 그러려면 바르게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할 수 있으려면 자비·자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자애는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지요.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이고, 그 사람이 배고픈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뿐 내가 이렇게 해줌으로써 나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지를 계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인하여 주는 행동이 나타나는데, 그때 주는 것으로 끝날 뿐 내가 바라는 것이 전혀 없을 때 그것이 참된 보시바라밀입니다.
지계바라밀도 같은 이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살생을 하면 지옥에 갈까 봐, 오래 못 살까 봐 무서워서 살생을 안 했다면 바라밀이 아닙니다. 살생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살아 있는 중생을 죽이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살생을 피했을 때 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계를 지킬 수 있고, 성냄으로 계를 지킬 수 있고, 어리석음으로 계를 지킬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도 진정한 바라밀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오직 계를 지키는 것이 옳아서 그것을 지켰으면 바라밀이 됩니다.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는 진정한 보살행이 불가능합니다. 수행함으로써 마음에 있는 일체의 상이 깨졌을 때라야 참된 보살행이 가능해집니다. 자기 마음 안에서 일체의 상이 남김없이 사라졌다면 모든 행이 다 보살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한국어 ‘수행’을 원어로 하면 ‘바와나’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자꾸자꾸 생기게 하는 것’, ‘좋은 마음을 반복적으로 모아 쌓는 것’ 등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계율은 몸과 입으로 지키고 바와나는 마음으로 지킵니다. ‘절 수행’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108배를 하는 동작 자체는 바와나가 아닙니다. 반복해서 절을 할 때 그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데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면서 절하고 있으면 그 마음이 바와나이지 절하는 동작 자체가 바와나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정도로 마음이 고귀해야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 팔정도 수행을 했을 때 비로소 깨달으셨듯이 여러분도 팔정도 수행을 해야 합니다.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깨달음이 있고,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깨달음이 없다.”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열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아니라 오직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과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초기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테라와다 불교 등등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그 중심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름이 아니라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있고,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없다’는 부처님의 최후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 수행의 성격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지혜 위주로 바라밀을 행하셔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붓다가 되신 분입니다. 그 가장 빠른 시간이 무수한 겁 네 겁, 즉 4아승기에 다시 10만 대겁이라니 얼른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신심 위주로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혜보다는 신심이 강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으려면 지혜 위주의 수행자에 비해 두 배정도의 시간이 더 걸린다고 보면 됩니다. 또 노력 위주의 사람이 부처가 되려면 가장 긴 시간이 필요해서 무수한 겁 16번 정도를 거쳐야 부처가 됩니다.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본인이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행하는 데에는 차이가 나지만 ‘고귀한 사람의 고귀한 일’이라고 정의되는 바라밀을 실천해야 하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한 일반적인 사람을 범부라고 합니다. 범부는 아는 것이 적고, 자신이 아는 것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늘 스승을 찾아 여기저기 방황합니다. 흔들림 없는 확고한 앎은 수다원이 되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사견과 의심이라는 두 가지 번뇌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의심이 없다는 것은 올바른 법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의심이 사라지면 자신이 귀의하는 법(도와과 닙바나)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그 법을 처음 가르치신 위 없는 스승(불佛)에 대해서도 결코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법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 법을 깨달으신 다른 분들(승僧)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스승을 찾아 헤매 다니지 않습니다. 오로지 불법승 삼보만을 모십니다.
끝으로 붓다, 부처님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에서 유행처럼 많이 하는 말인 ‘모두가 부처이다.’는 사람들을 격려한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이 말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정의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부처라고 할 때는 다음에 설명할 네 가지 부처님 중 어느 부처님을 뜻하는지 알면 좋을 것입니다. 자신이 네 종류의 부처님 중 어느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삽방뉴따 붓다, 빠쩻까 붓다, 사와까 붓다, 숫따 붓다,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아라한’의 의미부터 확실히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라한의 개념에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부처님도 아라한입니다. 부처님이 최초의 아라한이긴 하지만 아라한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라한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를 알면 그런 혼란을 없앨 수 있습니다.
아라한의 첫 번째 의미는 ‘적을 죽인 자’입니다. 이 때 적은 ‘번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과 다른 아라한과의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적’이 우리를 해치고 괴롭힐 수는 있지만, 그 적이 한평생을 쫓아다니며 계속 괴롭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가장 크게 괴롭히는 것이 죽이는 것이겠지만 그것도 한생으로 국한됩니다. 그런데 번뇌보다 무서운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번뇌는 한 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면서 끝없이 죽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번뇌라는 적을 완전히 죽인 자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의 두 번째 의미는 ‘숨기는 것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숨어서 할 때는 그것이 나쁜 짓이어서 다른 사람이 보면 부끄럽거나 당당하지 않기 때문에 몰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은 나쁜 짓을 하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마음 자체가 깨끗해서 몸과 입으로 지은 업, 그리고 마음으로 지은 업까지 깨끗해진 사람, 아니 아예 업 자체를 짓지 않는 사람, 그런 분들이 ‘아라한’입니다.
세 번째 의미로는 ‘모든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가치를 완벽하게 갖춘 인간의 모범으로, 완벽하게 성장하여 인간 중에서도 최고로 위대한 분이 아라한입니다.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인데 아라한은 더 이상 업을 만들지 않는 분입니다. 모든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크게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아라한이 했던 바라밀행과 부처님의 그것에는 워낙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남을 돕는 일을 할 때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네 부류의 부처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삽방뉴따 붓다는 동 시대에 두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분은 한 시대에 두 사람이 필요 없을 만큼 아주 완벽하고 힘이 강한 붓다입니다.
삽방뉴따 붓다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는 뜻인데 ‘모든 것을 안다’라는 말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세 가지 능력, 세 가지 힘을 갖춘 사람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알아야 하는 것을 다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는 본인만 아는 게 아니고 본인이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때 그 가르치는 방법을 완벽하게 다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가르쳐야 하는 중생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앎이 삽방뉴따 붓다의 큰 실력, 능력입니다. 삽방뉴따 붓다의 특징은 완벽함, 일체지(一切智)입니다. 깨달아야 할 모든 것을 다 깨닫고, 가르치는 방법 즉 방편이 완벽하고, 가르칠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두 번째인 빳쩨까 붓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삽방뉴따 부처님이 안 계실 때 이 세상에 아라한이 있었다면, 그 아라한이 바로 빳쩨까 붓다인데 한국에서는 ‘벽지불’로 번역하지요. 삽방뉴따 붓다와 빳쩨까 붓다의 공통점은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그 둘의 차이점은 삽방뉴따 붓다에게는 방금 전에 말한 세 가지의 완벽하게 아는 힘이 있는데, 빳쩨까 붓다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빳쩨까 붓다가 여러 중생들을 가르쳐서 깨닫게 도와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번뇌라는 적을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점에서 아라한입니다.
세 번째로 사와까 붓다는 ‘제자 붓다’입니다. 삽방뉴따 붓다, 빳쩨까 붓다, 사와까 붓다의 공통점은 ‘사성제를 안 자’라는 점에서 모두 같습니다. 즉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윤회라는 밤에서 깨어난 점에서는 모두 같다는 뜻입니다. 삽방뉴따 붓다는 삽방뉴따 지혜라는 세 가지 힘을 갖고 있는 부처님이고, 빳쩨까 붓다는 세상에 삽방뉴따 붓다께서 안 계실 때, 그 분들의 가르침이 다 사라졌을 때 따로따로 나오신 분으로, 스승 없이 깨달았으나 삽방뉴따 지혜의 힘이 없으며, 사와까 붓다는 삽방뉴따 지혜도 없고 스승 없이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스승이 있고, 그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서 깨달은 자입니다.
네 번째가 숫따 붓다로 삼장법사가 바로 숫따 붓다입니다. 번뇌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사성제를 지식으로 아는 사람이지요. 삼장법사, 이장법사, 일장법사, 맨 밑에까지 말하면 사성제를 제대로 이론적으로 아는 사람도 붓다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네 가지 부처님의 개념과 정의를 바르게 알고 있으면 ‘모두가 부처이다’라고 할 때의 부처가 어떤 부처인지를 따져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부처이다’라는 말도 쉽게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하는 일을 완벽하게 하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팔정도 수행을 하시면서 사성제를 깨달으셨듯이 여러분들도 이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 팔정도 수행을 하시어 부처님과 아라한, 모든 성인들이 성취한 생노병사, 삼세윤회, 모든 고통 벗어나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