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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11일간의 특별한 수업

위빳사나강의: 11일간의 특별한 수업(1회)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보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1
“대상에 집중만 하면 사마타, 대상의 특성이 파악되면 위빳사나”


  

잊지 않고 항상 깨어 있음으로 완벽하게 하라
Appamādena Sampādetha

 

 

-차 례-

 

DAY-1, 위빳사나의 기본적인 이해 
DAY-2, 부처님과 위빳사나 
DAY-3, 법과 위빳사나 
DAY-4, 승가와 위빳사나 
DAY-5, 삼보의 공덕 
DAY-6, 12연기와 위빳사나 
DAY-7, 대념처경과 위빳사나 
DAY-8, 칠각지와 위빳사나 
DAY-9, 무아와 위빳사나 
DAY-10, 위빳사나 지혜 계발 과정 
DAY-11,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3번)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싸


나모: 절합니다.

땃사 바가와또: 그 존귀하신 부처님께

아라하또: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 만하며

삼마삼붓닷싸: 사성제 진리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 만하며

사성제 진리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그 존귀하신 부처님께 절합니다.

 

고통 받는 중생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위험 처한 중생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걱정 있는 중생들 모든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3번)


Dukkhappattā ca niddukkhā - 둑캅빳따 짜 닛둑카
Bhayappattā ca nibbhayā - 바얍빳따 짜 닙바야
Sokappattā ca nissokā - 소깝빳따 짜 닛소까
Hontu sabbepi pāṇino - 혼뚜 삽베삐 빠니노

(3번)


사두 사두 사두



 

1. 위빳사나의 기본적인 이해

 

반갑습니다. 

11일 간의 집중수행 첫 날인 오늘은 위빳사나 수행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위빳사나vipassanā란 무엇인가?

 

‘위빳사나’라는 단어는 ‘위’와 ‘빳사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위’는 ‘특별하게, 특별한’, ‘빳사나’는 ‘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 지혜를 ‘특별하게 보는 지혜’라고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영어로 말하면special view라고 할 수 있고, 번역하면 insight라는 말을 쓸 수가 있습니다. 아주 깊이 꿰뚫어 봄, 이것이 위빳사나의 의미입니다.

 

특별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을 세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나, 독립적인 하나의 ‘나’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기면 ‘무상하구나, 영원하지 않구나.’라고 바르게 알게 됩니다. 그 무상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위빳사나 지혜라고 합니다.
 
또한 일반 사람들은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고 그것을 행복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 그 모든 것이 고통임을 압니다. ‘이 몸과 마음,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고 하는 오온이 진짜 고통스럽구나, 이 생이 고통스럽구나, 태어남이 고통스럽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이것을 또한 위빳사나 지혜, 특별한 봄이라고 합니다. 
 
특별하게 본다는 것의 세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태어날 때의 ‘나’가 지금의 ‘나’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서 다음 생까지, 이 몸이 죽어도 영혼은 다음 생까지 간다고 보는 것이 ‘아我’입니다. 세상의 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모두 이 ‘아我’입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무아無我’를 가르치십니다. 일반 사람들은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착각하여 나, 아我, 자아가 분명히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행하여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 이것이 사견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위빳사나를 특별한 봄, 특별한 앎, 특별한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 ‘위빳사나’를 또 다른 측면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위’를 ‘여러 가지’로, ‘빳사나’는 ‘봄’, 그러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수행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꿰뚫어 보며 ‘아, 이 몸과 마음이 무상·고·무아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이 몸과 마음,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 즉 물질과 정신을 꿰뚫어 봄으로써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우리는 왜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되는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서 몸과 마음의 힘을 엄청나게 쏟아 부으면서 노력합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노는 것, 자는 것, 먹는 것, 남자와 여자가 좋아하는 것…. 이것은 즐겁긴 하지만 완전한 행복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고통의 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행복이란 다시 고통으로 돌아가는 한계가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완벽한 행복, 완벽한 자유, 고통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행복.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최종적인 행복을 알려 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번뇌입니다. 망가지고, 뜨거워지고, 타는 것, 그것이 번뇌의 원래 의미입니다. 우리한테는 원죄가 없습니다. 번뇌가 있을 뿐이지요. 그 번뇌를 제거해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왜 우리가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지 바로 답이 나오지요. 위빳사나는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법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지혜를 키우는 일입니다. 지혜가 낮은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없고, 지혜가 높을수록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지혜, 바른 견해가 필요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사실을 바르게 알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게 하는가?

 

바로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숨을 들이쉬고 있으면 들이쉬고 있음을 알고, 숨을 내쉴 때 내쉬는 것을 그대로 관찰하여 아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관찰’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면, 한국에서 지법(止法), 관법(觀法)이라고 하는데, 지법은 사마타이고, 관법은 관찰,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위빳사나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수행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상(가령, 숨) 하나에 마음을 집중시킨다면 사마타입니다. 마음을 통제하여 다른 대상은 다 무시하고 대상 하나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모두 사마타입니다. 
 
그러면 위빳사나는 어떤가. 위빳사나는 집중이 목적이 아니라 지혜가 목적입니다. 이렇게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사마타는 집중 위주이고 위빳사나는 지혜 위주입니다.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를 같은 대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똑같이 호흡을 관찰할 때 사마타 수행자는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호흡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요. 그러나 위빳사나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여 그 특성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것, 움직이는 것, 닿는 것, 부드러운 것……. 이러한 사실들, 호흡의 변화 등을 파악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자가 호흡을 본다고 하면 그 호흡이 따뜻하거나 차가운 것, 센 것, 약한 것, 그리고 들이쉬는 것도 들이쉬고 싶은 마음 하나, 들이쉬는 호흡 하나, 내쉬고 싶은 마음 하나, 내쉬는 호흡 하나, 이렇게 하나하나 변하는 과정을 파악합니다. 물질과 정신의 특징, 본성을 파악하고 그 물질과 정신의 특징들이 매순간 앞뒤가 다르게 계속 변화하는 그런 사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사마타는 그런 것이 필요 없고 오로지 마음이 호흡에 있으면 됩니다. 이제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간화선을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에 집중만 하고 있으면 사마타, 대상의 특성, 사실이 파악되면 위빳사나입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에서 벗어나는 수행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면 할수록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은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2
“수행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부처님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것”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은 네 가지입니다. 한국어로 말하면 사념처인 몸(신)·느낌(수)·마음(심)·법(법), 이것은 곧 몸과 마음이고 다른 말로 하면 색·수·상·행·식, 오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상이 다른 것이지 수행법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한 사람이 사마타식으로 했다가 위빳사나식으로 했다가 그렇게 수행 방법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한 시간 만에 바꿀 수도 있고 5분 만에도 바꿀 수 있어요. 5분 사이에도 사마타를 하다가 위빳사나로 바꿔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는 대상의 특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 몸과 마음의 특징, 본성을 파악해야 위빳사나입니다.
 
일단 처음에 우리가 시작할 때는 호흡을 보거나 배를 보라고 합니다. 아니면 자세를 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는 것을 관찰하는 거지요. 서 있으면 서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것을 관찰하고, 걷고 있으면 걷고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세를 관찰하고, 호흡을 관찰하고, 배를 관찰하고, 여러 가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는 호흡을 보자면 아침에 깰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호흡입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호흡, 대변 소변을 보면서도 호흡이지요. 그것이 사마타식입니다. 위빳사나는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을 봅니다. 지나가는 것은 벌써 지나갔습니다. 미래는 아직 안 왔어요. 지금 바로 이 순간, 1초 정도만 열심히 집중하면서 관찰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내 마음이 아는 것을 바로 뒤에서 내가 관찰하는 것, 그러므로 위빳사나는 관법, 관찰입니다. 관찰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내가 인식한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진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수행은 잊지 않으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올바른 노력이라는 것이 몸의 겉모양, 자세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호흡을 관찰하면 호흡을 놓치지 않고, 배를 관찰하면 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이 어떤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바로 바로 놓치지 않고 바르게 알려고 하는 것, 마음이 무엇을 인식하면 바로 뒤에서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순간순간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정진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정진, 바른 노력이란 잊지 않도록,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가? 내 마음이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바른 노력, 바른 정진입니다. 그렇게 놓치지 않도록, 잊지 않도록 노력하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잊지 않음이 바른 사띠입니다. 한국에서는 알아차림, 마음 챙김, 마음 새김 등으로 번역합니다. 원래 부처님 말씀 그대로의 사띠는 주의, 조심, 조심스러움, 주의 깊음, 잊지 않음,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볼 때에도 조심스럽게 주의 깊게 보고, 놓치지 않도록 봐야 합니다. 움켜쥐지 않으면서 봐야 하고, 깨어 있으면서 봐야 하지요. 그 깨어 있음을 한국말로는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바른 사띠가 생기면 대상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사띠라는 것이 잊지 않음, 즉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들이쉴 때 들이쉼이 마음속에 있고, 내쉴 때 내쉼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금 마음속에 화가 나면 마음이 화남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졸린다면 졸림을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대상을 가지는 것을 사띠라고 합니다. 사띠는 마음속의 대상을 분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수행을 어떻게 하는가? 바른 노력, 바른 사띠로 합니다. 바른 노력이 있어야 바른 사띠가 있습니다. 정정진, 정념. 그 다음이 바른 집중, 정정正定입니다.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가 있으면 바른 집중이 생깁니다. 바른 집중이란 마음이 그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딱 붙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호흡을 보면 호흡 외에 다른 것은 거의 모릅니다. 소리를 관찰하면 그 소리에 집중되는 것이지요.
 
사마타식으로 집중해도 집중이고 위빳사나식으로 집중해도 집중인데 그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마타식으로 집중될 때에는 오직 이 소리 자체에 마음이 딱 고정되어 있습니다. 위빳사나식으로 집중될 때는 그 소리의 강함, 약함, 하나 다음에 하나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집중이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른 생각, 정사유正思惟도 생깁니다. 바르게 노력하고 바르게 사띠를 가지니까 마음속에 대상이 분명해지고, 그 대상에서 마음이 딱 가만히 있어 주니까 흔들리지 않는 마음, 집중이 생기고, 그에 의해 꿰뚫어 보는 지혜가 따라옵니다. 그 대상은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질과 정신을 꿰뚫어 보니까 바른 견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일체 거짓 없이 사실 그대로를 꿰뚫어 보게 됩니다.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꿰뚫어 보는 지혜가 없을 때 사견을 가지게 됩니다. 사견을 가지는지 바른 견해를 가지는지는 바른 노력과 사띠, 집중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실을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이고 그러면 바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나면 욕심이 계속 죽어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성제, 고·집·멸·도입니다. 고성제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집성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멸성제에서 무엇을 하고 도성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성제를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고성제를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없앨까를 궁리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고통인 줄 알아야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라고 쉽게 말은 하지만 고통을 모르는데 어떻게 욕심을 버리겠습니까.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기 때문에 욕심 부리면서 그것을 계속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이란 것이 원인이 아니고 결과인데, 결과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원인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성제는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하는 것은 집성제이고 고성제는 알아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고성제를 버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가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면 고통이 없어지는 줄 알아요.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있는 경우에는 이번 생이 끝나도 다음 생에서 그 고통을 다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그 사성제를 바르게 알기 위한 수행입니다. 고苦를 바르게 알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나서 집集, 즉 욕심과 애착, 집착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 욕심과 애착, 집착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멸滅, 그래서 멸성제는 도착해야 하는 곳입니다. 멸성제는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도착해야 하는 곳입니다. 도착이라는 것은 따로 무엇을 할 게 없습니다. 목적지이기 때문에 그냥 도착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고성제는 알아야 하는 것이고,

집성제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멸성제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착해야 하는 곳, 즉 목적지입니다.

그리고 도성제는 실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수행 중에 있다면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 바른 생각, 바른 견해 등 팔정도 중 다섯 가지를 닦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말, 바른 행동을 하고 생계를 바르게 하면서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 바른 생각, 바른 견해로써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고를 아는 길입니다. 그래서 도성제를 수행 실천해야 고성제를 알고, 집성제를 버리면 멸성제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사성제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 순간 이 몸과 마음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수행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위빳사나 지혜가 바로 일어나지 않겠지요.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기 위해서, 도道지혜, 과果지혜가 생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본부터 닦아 나가야 합니다. 많이 닦는 사람이 당연히 빨리 깨닫습니다. 그래서 많이 닦아야 하고 매 순간 닦아야 합니다.
 
수행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도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길을 알려주기만 할 뿐, 그 길을 가는 것은 오직 본인 자신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매 순간 닦고, 닦고, 또 닦으면서 자신의 번뇌를 제거하는 딱 그만큼 여러분의 행복지수가 올라가고 청정해집니다. 그 청정함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궁극에는 깨달음으로 가게 할 것입니다.




“릴렉스..릴렉스.. 릴렉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3
“위빳사나는 자연스럽게, 오직 깨어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것”


1) 좌선 방법

 

지금부터는 실천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편안하게 좌선 자세를 잡아보고, 자신이 가장 편한 자세로 앉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해 보십시오. 좌선을 할 때에 가부좌를 해도 되고, 자신이 편하다면 다른 어떤 자세로 앉아도 됩니다. 여러분이 편안하게 오래 앉을 수 있는 자세로 하시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특별히 중요시한 것은 의학적인 부분과 일치합니다. 허리부터 목과 뇌까지 신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반듯하게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팔 모양이나 위치 등이 중요한 게 아니고 허리부터 머리까지 반듯하게 되는가 안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을 감으면 집중이 빨리 되는데 몸이 힘들거나 졸음, 혹은 나태, 혼침이 오는 상태라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감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 준비가 되었으면 찬찬히 마음으로 따라해 보십시오.

 
첫 번째는 수행을 준비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부처님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 붓다, 깨달은 자, 사성제를 알아 깨친 자, 붓다, 붓다, 붓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신 아라한, 아라한, 아라한…. 탐·진·치·자만·질투·시기·나태·혼침·의심·사견 등 모든 더러운 번뇌에서 떠나신 분, 아라한, 아라한, 아라한…. 부처님의 마음이 얼마나 깨끗한가, 얼마나 지혜로운가, 얼마나 고귀한가, 얼마나 평화로운가. 붓다, 붓다, 아라한, 아라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범입니다. 나도 부처님처럼 번뇌가 없는 자, 번뇌에서 벗어난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새기고 기억합니다. 이렇게 수행의 준비 과정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자애를 베푸십시오.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또한 모든 중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중생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중생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이렇게 자애를 베풂으로써 수행 도중에 생기는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고 인내력도 좋아집니다.
 
세 번째는 몸에 대한 부정관을 합니다. 내 몸에 무엇이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머리카락이 있지요. 머리카락이 더럽다, 샤워 안 하면 냄새 나고, 떨어지면 더럽다…. 머리카락 외에도 온 몸에 털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다 모아 놓고, 온 몸에 있는 털도 다 모아 놓고, 손톱 발톱도 다 떼어서 놓고 봅니다. 이빨 하나하나도 자세히 봅니다. 냄새도 느껴 보고, 색깔도 보고 모양도 봅니다. 몸에서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매우 더럽습니다. 몸에 붙어 있을 때는 괜찮은 것 같지만 분리해서 보면 더럽다는 것을 압니다.


몸 안을 봅니다. 뇌도 있고, 심장, 신장, 간, 피, 지방 덩어리, 근육, 대변, 소변…. 이 몸에 있는 것을 하나하나 떼어서 보면 진짜 더러운 것이지요.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눈에서 나오는 눈곱, 입에서, 귀에서, 코에서, 내 몸에서 매 순간 떨어져 나오는 것들이 간직하여 가질 만한 것인가.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몸에 대한 부정관을 많이 할수록 성욕이 점점 떨어지고, 욕심도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이 몸을 이용해서 아주 최상의 행복을 찾겠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네 번째는 죽음을 보는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든지 나에게 올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 거의 모두가 자신이 죽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보다 나이가 위이거나 같은 또래이거나 혹은 아래인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어요.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하였는가, 지금 이 순간 죽어도 괜찮을 만큼 충실하게 살았는가, 이 삶의 가치를 얻었는가…. 죽음은 언제 어디서든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앉아 있다가 일어서기 전에, 눈을 감고 있다가 뜨기 전에, 눈을 뜨고 있다가 감기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생각하면서 수행을 하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알게 되고, 죽기 전에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짜 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는 사람을 깊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수행의 준비 과정으로 이렇게 부처님을 생각하고, 자애를 베풀고, 몸의 부정함을 보고, 죽음을 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로는 출가심입니다. 나는 출가자다, 오욕락五欲樂을 떠난 출가자다 하는 그 출가심을 지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출가심이 강한 사람은 수행 중 오욕락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지만, 출가심이 약한 자는 수행 중에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도는 것이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등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므로 출가심을 키움으로써 내 수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한 출가심이 있어야 수행 도중에 오욕락을 별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수행 대상을 놓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몸으로 주의를 돌려 봅니다. 몸을 느껴 보세요.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를 스캔하듯이 관찰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몸에 쓸데없는 힘을 주고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편안하게 충분히 이완시켜 보십시오.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 왼쪽 발바닥과 오른쪽 발바닥을 비교해 보세요. 만약 힘주고 있다면 그 힘을 빼십시오. 오른쪽 발목과 왼쪽 발목을 비교해 보세요. 힘주고 있나요? 힘을 빼십시오. 왼쪽 종아리에 오른쪽 종아리에, 힘주고 있다면 그 힘도 남김없이 버리십시오. 편안하게 허리부터 머리까지 반듯하게 세우고, 그것을 유지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근육들의 힘을 빼십시오. 왼쪽 무릎에 오른쪽 무릎에 당기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을 빼시고, 오른쪽 허벅지 왼쪽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다면 그 힘도 빼십시오. 배꼽에 힘주고 있다면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버립니다. 필요 없이 숨을 많이 참고 있다면 그것 또한 필요 없으니 편안하게 이완시키세요. 골반에, 허리에, 등의 왼쪽 부분 오른쪽 부분….

 

온몸에서 힘을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편안하게, 편안하게 하십시오. 왼쪽 어깨 오른쪽 어깨를 편안하게, 그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양쪽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편안하게 힘을 빼 보십시오.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도록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 목의 오른쪽 왼쪽, 뒤통수, 머리 위…. 이마도 왼쪽 이마 오른쪽 이마, 양쪽을 비교하듯이 스캔해 보세요. 억지로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느껴 보세요. 왼쪽 눈썹 오른쪽 눈썹, 힘을 빼시고 편안하게. 오른쪽 볼 왼쪽 볼, 힘주고 있으면 힘을 빼세요, 편안하게. 인상 쓸 필요도 없지요. 입술도 딱 다물 필요 없이 미소 짓는 듯 편안하게….

 

내 마음이 어떤가, 그 마음의 느낌을 봅니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불편하다, 편하면 편하다, 그렇게 마음의 사실을 알려고 합니다. 몸의 사실 마음의 사실을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한가 편안한가, 속이 시원한가 갑갑한가. 갑갑하면 갑갑함, 갑갑함, 갑갑함…. 마음이 조급한가요, 아니면 차분한가요. 차분하다면 차분하다, 차분하다, 차분하다. 급하면 급하다, 급하다, 급하다…. 마음이 맑게 깨어 있나요, 아니면 무겁고 해태, 혼침이 있나요. 해태, 혼침이 있다면 그것을 보는 겁니다. ‘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마음이 약해지고, 또 느낌이 안 좋고 단단하구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관찰해 보세요.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약해졌다가, 없어졌다가, 또 생겼다가…. 몸도 편안하게 마음도 편안하게 합니다.

 

또 호흡을 보고 싶은 사람은 코끝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것을 알면서 들이쉬고, 내쉴 때 내쉬는 것을 알면서 내쉽니다. 호흡을 일부러 할 필요 없고 자연스럽게, 원래 숨 쉬는 것 그대로를 알기만 하면 됩니다. 노력하는가, 안 하는가. 노력을 하면 잊지 않고, 노력을 안 하면 바로 잊어버립니다. 무슨 노력을 하는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노력입니다.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하고, 내쉴 때 내쉬는 것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마음이 달라붙어서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사띠가 있는가, 잊고 있는가. 잊고 있다면 잊고 있음을 알고,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생각, 생각, 생각…. 그 생각하는 마음을 관찰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 들숨 날숨, 들숨 날숨….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놓치지 않고 계속 합니다. 한 번씩 현재 본인의 마음 상태를 확인합니다. 마음이 괴로운지 편안한지를 느껴 봅니다. 마음이 괴롭다면 그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괴롭다, 괴롭다, 괴롭다…. 불편하다면 불편함, 불편함, 불편함…. 편안하다면 편안함, 편안함, 편안함…. 그리고 다시 들숨 날숨…. 일차적인 대상으로 들숨 날숨을 보되 내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면 그것을 관찰합니다.

 

눈감고 들숨 날숨을 관찰하고 있는데 눈 속에 어떤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봄, 봄, 그 봄을 관찰합니다. 보는 것이 없어지면 다시 들숨 날숨을 봅니다. 들숨 날숨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조금 있다 보니 호흡은 잊어버리고 소리를 듣고 있어요. 그러면 들음, 들음, 들음 하면서 들음을 관찰합니다. 소리가 없어졌다면 다시 들숨 날숨. 들숨 날숨을 관찰하고 있는데 냄새가 나요. 그러면 냄새, 냄새, 냄새. 향기, 향기, 향기…. 없어지면 다시 들숨 날숨. 들숨 날숨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몸에서 추위, 더위, 딱딱함, 부드러움, 가벼움, 움직임, 때림 그런 것이 느껴지면 마음이 거기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관찰합니다.

 

마음이 조용해지면 다시 들숨 날숨. 호흡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조금 있다 보니 다시 잊어버리고 있어요. 그러면 다시 생각하고 있네, 생각, 생각, 생각. 귀찮다면 귀찮음, 귀찮음, 귀찮음. 게을러지면 게으름, 게으름, 게으름…. 이렇게 이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관찰합니다. 바른 노력으로 관찰, 바른 사띠로 관찰해 봅니다. 오 분, 십 분….

 

다시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를 파악합니다. 몸의 상태가 흐트러졌다면 다시 잡아주는 게 좋습니다. 잡아줄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잘 관찰해서 허리가 구부러졌으면 구부러진 것을 알고, 허리를 펴려는 마음을 먼저 알아차립니다. 그 다음에 허리를 편다, 펼 때 힘이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 합니다. 그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모두 알아차리면서 하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내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 힘주는 한 순간 한 순간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머리가 숙여지면 머리를 조심해서 다시 제 자리로 올려줍니다. 올릴 때도 주의 깊게, 알면서 합니다. 알고, 알고, 알고…. 그것이 깨어 있음의 바른 의미입니다.


 

2) 행선 방법
 
행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수행과정에서 행선行禪이라는 것을 우리가 일부러 하게 되는데, 실은 움직일 때 관찰하는 모든 것이 행선입니다. 다음은 행선할 때의 방법입니다. 
 
서 있을 때부터 관찰합니다. 서 있음, 서 있음, 서 있음……. 팔짱을 껴도 되고, 앞에 내려놓아도 되고, 뒷짐을 져도 됩니다. 손을 움직이면서 하면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잡고 있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편안한 대로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는 똑바로 하고 시선만 밑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여 밑을 보지 않도록 하십시오. 많은 수행자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경행을 하는데 그것은 안 좋은 자세입니다. 그렇게 하면 머리가 아플 수 있고, 목도 아프고, 또 다리의 움직임이 보이니까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머리를 될 수 있으면 반듯하게 하고 시선만 아래로 두도록 합니다.

 

서 있음을 볼 때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내 몸을 관찰합니다. ‘서있음.’이라고 하지만 명칭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내 몸의 상태를 스스로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 발가락을 알 수도 있고, 허리를 알 수도 있고, 다른 어디를 알 수도 있고,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알면 됩니다. 서 있을 때 힘이 들어가는 곳, 느낌이 일어나는 그 부분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그 힘을 보는 것입니다. 서있음, 서 있음, 서 있음….

 

그 다음으로 왼발로 걸을 때 왼발, 오른발로 걸을 때 오른발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걷습니다. 보폭을 넓게 하면 자세히 관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짧게, 그리고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걸을 때도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하면서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일치시킵니다. 왼발이 걸을 때 왼발의 걸음과 내 마음이 일치되게 하면서 걷습니다. 오른발이 걸을 때 오른발의 걸음걸음, 발뒤꿈치를 떼어서 앞으로 나아가고 바닥을 디딜 때까지, 그 걸음의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을 일치시키면서 걷는 거예요. 강제로 통제하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빳사나는 마음을 통제하여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오직 깨어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차를 마실 때에도 똑같습니다. 차의 향을 맡을 때, 찻잔을 앞으로 가져올 때, 잔을 조심스럽게 입에 대고, 마시고, 그 모든 과정을 그저 놓치지 않고 알아차립니다. 모든 것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합니다. 걸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그 걸음 속에 내 마음이 일치되도록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빨리 걸을 때는 오른발 왼발, 그 걸음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집중수행 기간에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속도를 늦춰서 해야 마음이 쉽게 밖으로 달아나지 않습니다. 너무 빨리 걸으면 집중이 어렵기 때문에, 수행을 할 때는 천천히 걸어야 앞뒤가 끊어지지 않게 연결시키면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너무 느린 것도 안 좋고, 너무 빠른 것도 안 좋고,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걸으면서 내 마음이 일치시키는 만큼 걸으면 되겠습니다.

 

이쪽에서 시작해서 저쪽 끝까지 걷는 동안 내 마음이 딴 데로 가버렸는가, 아니면 걷는 내내 마음이 걸음과 확실하게 일치가 되었는가,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 좋습니다. 또 끝에 가서도 바로 돌지 않고 서 있음, 서 있음, 서 있음…. 그렇게 서 있는 것을 관찰하면서 돕니다. 돌 때도 돈다, 돈다, 도는 것을 관찰하고, 돌고 나서 반대 방향을 향해 선 후 다시 서 있음, 서 있음, 서 있음을 관찰하고, 그 다음에 오른발 왼발의 움직임을 관찰합니다.

 

이렇게 왼발 오른발의 걸음을 관찰할 수 있고,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가는데 수행이 잘 된다면 이제는 한 걸음을 들음, 놓음으로 관찰해 보십시오. 발뒤꿈치가 올라갈 때, 앞부분을 뗄 때, 앞으로 나갈 때, 밑으로 내리면서 발을 디딜 때, 그때그때의 힘이 다 다릅니다. 열심히 관찰하면서 집중이 잘 되고 있으면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이 걸음에 일치하지 않고 계속 밖으로 달아난다면 행선이 매우 지루하고 한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 것입니다. 행선을 할 때에도 마음 편안하게 하고 힘을 빼야 합니다. 힘주고 있으면 몸이 때리는 것처럼 아플 수도 있고 몹시 힘이 듭니다.

 

바른 노력이라는 것은 적당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고 내가 너무 긴장하고 쓸데없이 애를 쓰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이때 명칭을 붙여서 하기도 합니다. 명칭 자체가 수행은 아니지만 명칭이 수행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 초보자는 힘이 없어서 딴 데로 마음이 자꾸 도망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풂 꺼짐이라든가 들숨 날숨, 볼 때 봄, 들을 때 들음, 이렇게 명칭을 붙여주면 마음이 대상으로 향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약해도 딴 데로 도망가지 않고 대상에 머물 수 있어서 쉽게 마음이 깨지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대상을 반복적 지속적으로 관찰하게 해줍니다. 복잡한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이 산만하고 망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명칭은 큰 도움이 됩니다. 어느 정도 수행을 해서 명칭이 없어도 마음이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명칭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명칭을 붙이거나 안 붙이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수행자가 알아서 하시면 되겠습니다.
 
모든 일은 반복할 때 스킬이 붙습니다. 수행에도 반복이 필요합니다. 바른 노력으로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수행 자체가 힘이 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수행하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몸이 있으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수행을 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는 통증을 수행하면서 또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노력으로 꾸준히 수행을 반복하다 보면 차츰 기술이 붙어서 힘이 덜 들고 덜 아프게 될 것입니다.
 
바른 노력으로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하여 집중이 이어질 때 지혜가 생깁니다. 좌선이건 행선이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좌선 중 자세를 자주 바꾸거나 수행 기간 중에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수행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집중력이 길러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좌선 끝나면 한 시간 행선, 좌선에서 모인 힘을 행선에서 이어받아서 가야 합니다. 또 행선의 힘을 좌선에서 이어받아서 가고 그런 식으로 반복합니다. 태도도 바르고 노력도 제대로 한다면, 많이 하면 할수록 깨끗해지고 청정해집니다. 이에 따라 지혜도 올라가게 되어 있어 있습니다.

 

수행은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번뇌가 자꾸 끼어들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초보자는 한 시간 닦는다 해도 한 시간에 오 분, 십 분밖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 분을 닦으면 꼭 그만큼, 십 분을 닦으면 바로 그만큼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자신이 제대로 수행한 힘을 계속 이어받아야 날이 갈수록 수행의 힘이 늘어나는데, 그런 힘을 이어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벌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수행자의 강한 의지입니다. 절대로 중간에 번뇌가 끼어들어 가지 않게 하겠다, 아침에 깨어서 밤에 잘 때까지 끊임없이 잊지 않고 깨어 있겠다, 사띠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하겠다…. 볼 때 보는 것, 들릴 때 듣는 것, 바로 이 순간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수행자들에게 지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은 시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신심과 노력, 사띠와 집중, 그리고 지혜의 힘이 수행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그 다섯 가지 힘을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따라 수행의 하루하루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행선과 좌선을 번갈아서 하게 되는데,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행선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초보자가 처음부터 좌선을 하면 거의 졸고 망상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행선은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좌선보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왼발 나가고 오른발 나가고 하는 것이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집중, 사띠, 대상을 기억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행선을 하여 집중력이 길러지면 좌선이 쉬워집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앉기 전에 먼저 행선을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행선으로 몸이 풀리고 순환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행선을 하는 과정에서 신심도 좋아지고 노력, 사띠, 집중도 좋아지고 지혜도 높아지게 됩니다. 그 힘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가서 조심해서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앉습니다. 그러면 그 행선의 수행력이 좌선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좌선이 쉽고 편하고 통증이 별로 없이 수행이 잘 됩니다. 또 이 좌선에서 길러진 차분함과 고요함을 가지고 다시 행선을 합니다. 그러면 그 연결이 잘 되면서 하루하루가 확실하게 달라집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본인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 순간을 번뇌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번뇌, 탐·진·치로 살아가던 사람도 매 순간 닦아나가면 탐·진·치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 순간의 사실만을 알게 되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도 바로 바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크게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화가 나도 화남, 화남, 화남 하고 계속 알아차리면 오래지 않아 곧 사라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일단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힘들다,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힘들다, 정법을 만나는 것이 힘들다, 신심이 있는 것이 힘들다, 출가하는 것이 힘들다.” 얻기 어려운 이 다섯 가지를 여러분은 지금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수행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벙어리처럼, 눈이 있어도 맹인처럼, 건강해도 환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움직이면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아프지 않아도 환자처럼 조심스럽게 해야 수행이 잘 된다는 뜻입니다. 작은 것 하나를 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주의 깊게 하라, 그렇게 할 때 수행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이 보인다고 다 보고 있으면 안 되지요. 항상 눈을 챙겨야 합니다. 눈이 잘 보여도 맹인처럼 살아라. 입이 있어도 벙어리처럼 살아라. 사띠 없이 보고 말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수행을 하셨습니다. 지혜를 계발하고 심리가 변화되어 인간이 성장하니까 부처가 되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몇 십 억 명 중에 나는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진 사람일지 스스로 가늠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열심히 수행하여 지혜를 계발하시고, 그 계발되는 지혜로 여러분들의 심리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심리로 여러분들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를 수행하시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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