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무상(無常)

<무상(無常, 빠알리어:아니짜/anicca, 산스크리트어:아니탸/anitya)>
                                     

무상(無常)이란 일체의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해서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힌두교의 <우파니샤드(Upaniṣad)>에서 강조하는 상주설(常住說)을 반대하는 개념으로서 현상계를 시간적 흐름으로 파악한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다.

무상이란 만물은 항상 변하며, 영원한 실체(實體)로 존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서, 만물의 실상(實相)을 표현한 것이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도 무상이고,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도 무상이다. 모두 변화에 기인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붓다의 세계관이다. 무상이란 허무하다는 말이 아니고 변화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상이라는 것이 불규칙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련을 맺는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코 그것만 독립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연기설로써 천명하고 있다. 

즉, 인(因)과 연(緣)이 서로 결합해 생겨난 모든 현상은 무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하다는 것은 곧 연기(緣起)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상관(無常觀)은 단순한 비관적ㆍ허무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항상 변화가 있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려야 하며, 

귀중한 생명을 방일하게 사용하는 일 없이 정진하고 노력하는 적극적인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친다. 이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무상의 참 뜻이다.
 
그런 무상은 계절에 따른 자연무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늙어가는 것도 무상이다. 젊은 시절과 비교해 몰라보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무상함을 느낀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거나 함께 했던 사람을 잃었을 때 역시 무상함을 느낀다. 따라서 이 무상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이런 무상함을 일반적으로 '인생무상'이라 한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이 느끼는 무상은 자아(自我)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무상함을 느껴도 내가 무상함을 느낀다. 

기뻐도 내가 기쁘고 슬퍼도 내가 슬프듯이 변화에 따른 무상함 역시 내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범부가 느끼는 무상이다. 그래서 범부가 느끼는 무상에는 허무하다는 뉘앙스가 다분히 담겨 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for someone else's life.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그것을 낭비하지 마세요.



여기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개발해 세계적인 부호가 된 스티브잡스(Steve Jobs, (1955~2011)가 불과 5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기 위해 병상에 누워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가 있다. 

비록 범부이기는 하나 그의 말 속에 무상과 공의 개념이 깊이 묻어있다.

I reached the pinnacle of success in the business world.
나는 사업에서 성공의 최정점에 도달했었다.

In other's eyes, my life is an epitome of success.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 삶이 성공의 전형으로 보일 것이다.

However, aside from work, I have little joy. In the end, wealth is only a fact of life that I am accustomed to.
그러나 나는 일을 떠나서는 기쁨이라고 거의 느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부(富)라는 것이 내게는 그저 익숙한 삶의 일부일 뿐이다.

At this moment, lying on the sick bed and recalling my whole life, I realize all the recognition and wealth that I took so much pride in, have paled and become meaningless in the face of impending death.
지금 이 순간에, 병석에 누워 나의 지난 삶을 회상해보면,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주위의 갈채와 막대한 부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 빛을 잃었고, 그 의미도 다 상실했다.

In the darkness, I look at the green lights from the life supporting machines and hear the humming mechanical sounds, I feel the breath of god of death drawing closer...
어두운 방안에서 생명 보조 장치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게 웅웅거리는 그 기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죽음의 사자의 숨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Now I know, when we have accumulated sufficient weath to last our lifetime, we should pursue other matters that are unrelated to wealth...
이제야 깨닫는 것은 평생 배 굶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되면 더 이상 돈 버는 일과 상관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Should be something that is more important.
그건 돈 버는 일보다는 더 중요한 뭔가가 돼야 한다.

Non-stop pursuing of wealth will only turn a person into a twisted being, just like me.
쉬지 않고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비뚤어진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바로 나 같이 말이다.

God gave us the senses to let us feel the love in everyone’s heart, not the illusions brought about by wealth.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다 줄 환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주셨다.

The wealth I have won in my life I cannot bring with me. What I can bring is only the memories precipitated by love.
내 생애에 있어 번 돈은 사후에 내가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에 의해 만들어진 추억들뿐이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순간이 아닐까. 그럴 땐 비록 범부라도 예지가 번뜩이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 그 순간의 진실한 술회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범부가 느끼는 무상함과 *각자(覺者)가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각자는 일체만유의 존재원리, ― 흐름을 파악하고 그 흐름을 무상이라 한다. 그래서 무상은 생겨난 일체의 존재가 갖는 필연적인 상태로, 이 무상을 체득하는 것이 해탈에의 첫걸음으로 연결된다.

*각자(覺者): 覺 - 삼라만상의 실상을 깨달아 아는 것. 깨달은 사람.
 
불교사상의 근원은 인간의 현실생활을 고(苦)라고 관찰하는데서 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고(苦)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면할 수 없는 것이라 해서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규정하고, 이 괴로움의 원인을 더욱 논리적으로 규명해 가면 무상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라고 할 때, 무상 그 자체가 고라는 뜻이 아니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깨닫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면 고가 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자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온,五蘊)이 모두 괴로움이다.” - 상윳따니까야 S56:11,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물질(色)도 무상하고 느낌(受)도 무상하고 지각(想)도 무상하고 형성(行)도 무상하고 의식(識)도 무상하다. 즉, 오온이 무상하다는 말이다. 이는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물은 무상하다.” - 상윳따니까야의 <찬나의 경>
 
그리하여 생노병사(生老病死)와 그 밖의 모든 괴로움도 무상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으며,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의 제일 앞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pali. Sabbe saṅkhāra anicca)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삼법인(三法印)에서 맨 먼저 나오는 것으로, 제행(諸行)에서, 제(諸)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인데, 빠알리어 sabbe가 ‘일체’ ‘모든’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행(行)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n(skt. sam)이라는 말과 kh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진 말로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 ‘형성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 ‘행(行, saṅkhāra)’은 ‘만들어진 모든 존재’ 혹은 ‘형성된 모든 것들’이란 의미로서의 ‘존재-법(法)’란 뜻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형성된 모든 것은 덧없으며, 형성된 모든 것은 괴롭고, 모든 법에는 자아(自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어떤 존재를 만들고, 어떤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무 원인과 조건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는 행이나 존재가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모조품,爲作), 혹은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빠알리어 ‘아니짜(anicca, 無常)’는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로서 ‘항상(恒常)’이라는 말의 반대말이므로 ‘무상(無常)’이라 번역한다. 즉, 글자 그대로의 뜻은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삼법인 중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첫 번째로 설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중생들의 *전도몽상(顚倒夢想, 잘못된 생각)을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즉, 이 세상에 항상 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세상에 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영원주의에 빠져 있어서 이런 전도몽상을 깨뜨리지 않고는 더 이상의 논리적 전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상을 삼법인 중에 맨 앞에 제시한 것이다.

*전도몽상(顚倒夢想): 전도(顚倒)는 바르게 보지 않고 뒤집어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꿈이나 헛것을 현실이나 진실로 착각하는 것.

무상(無常)이란 영원함(항상함)이 없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 모든 생각,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제행은 ‘인연화합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행위(제행)와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존재들은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가진다는 것이 연기설의 핵심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며, 무상하고, 고정불변의 독립된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데, 조건으로 발생된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 조건이 해체되면 실체라고 했던 것도 사라져버리니까. 그래서 독립된(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연에 의해서 생겨진 모든 사물은 한바탕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위의 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풀잎의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는 흐른다는 뜻이고, 변화하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진화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변화를 낳으며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무상(無常)이라는 말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지, 허망하다, 허무하다, 인생은 덧없다는 식의 말은 아니다. 즉, 제행무상은 일체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 마음의 형상이 12연기에 의해 시시각각 생멸변화할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무상은 고유한 존재가 없다는 말이다. 어떠한 존재도 어느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사물, 심지어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 그리고 관념 감정 등 제행 모두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경망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같다.
 
예컨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은 분자가 합성돼 형성되었고, 따라서 다시 분해된다. 이런 과정이 흐름이다. 예쁜 얼굴을 아무리 오래도록 지속하려고 성형도 하고, 화장도 하고, 약을 먹고, 하더라도 피부가 늘어지고 쭈글쭈글해지는 것을 막을수는 없다. 나이들면 다 늙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다. 무상하다는 말은 흐름 속에 있다는 얘기다. 어떤 무엇이 결정지워져서 영원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영원한 흐름 속에서 변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이 아니다. 변화하기 때문에 발전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넘어가고, 따라서 무상(無常)은 곧 무아(無我, anatta)이기도 한 것이다. 무상하기에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상은 시간적 개념이고 무아는 공간적 개념으로서, 무상과 무아는 분리할 수가 없다. 무상하기 때문에,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이다.

그래서 불교의 골격이라고 하는 무상과 무아가 병렬 교차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공부이며, 그리하여 무아를 확인하면 자의식(自意識)이 해체된다. 무정물(無情物)은 자의식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의식이 있다. 때문에 상처받고, 화나는 것이다. 

길을 가는데, “하! 저 사람 멋지네!” 이런 소리를 들으면 기분 좋아진다. 그런데 “아따, 못생겼구먼!” 이런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려운 것이다. 부부싸움이 생기는 것도 자의식 때문이다. 서로가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아라는 것을 알면 자의식이 해체돼버린다. 자의식이 해체되면 거기서 관용이 나오고, 자비가 나오고, 해탈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불교에서 수행이라는 것은 자의식을 해체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므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해 결국 소멸되고 만다는 말이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우주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 변한다.

*성주괴공(成住壞空):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네 가지 현상이나 상태.
 
그런데 불교의 여러 문헌 속에서는 무상(無常)과 멸(滅)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미혹과 번뇌를 잠재우고 제거한다는 실천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즉, 무상함을 깨닫고 아무리 집착을 해도 그 무상함을 무상하지 않음으로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놓아버리면 더이상 고(苦)가 아님을 말한다.

즉, 제행무상에서 무상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현상을 말하며, 생멸의 이치(시생멸법 是生滅法)를 말한다. 이러한 생멸의 도리 자체를 없애면 (생멸멸이 生滅滅已),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경지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 적멸위락(寂滅爲樂)의 경지가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이것이 <열반경>에 나오는 무상과 적멸에 대한 게송이다.

여기에 대한 설화가 있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설산동자로서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수행을 할 때의 일이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홀로 수행하는 설산동자를 시험해 보기 위해 제석천이 나찰(羅刹)로 변신해 나타나서 게송을 읊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 모든 것은 무상하다. 이것이 곧 생멸의 법이다. 이렇게 게송의 앞 구절을 읊었다.

설산동자는 세상에 이렇게도 좋은 법문을 누가 하는가 싶어 사방을 살펴봤더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험상궂게 생긴 나찰만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나찰에게 물었다.

“방금 ‘제행무상 시생멸법’이라는 법문을 그대가 했습니까?”

“여기 나 말고 누가 또 있나? 당연히 내가 했지.”

“그런데 그 구절로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를 마저 들려주십시오.”

설상동자는 이 진리의 게송을 듣고 한없이 기쁨을 느껴 나찰에게 나머지 구절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나찰은 이 부탁에 답했다.

“나도 들려주고 싶지만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렇다면 저가 공양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사람의 살과 뜨끈뜨끈한 피를 먹는다.”고 했다.

설상동자는 나찰에게 내 몸을 먹이로 줄테니 나머지 구절을 들려달라고 거래를 제안했다. 

거래는 성사돼, 설상동자는 나무 위로 올라가 나머지 구절을 듣는 즉시 뛰어내려 나찰에게 몸을 주기로 했다. 나찰에게 몸을 먹이로 주는 대가로 나찰은 나머지 게송을 들려주었다.

‘생멸멸이 적멸위락’ - 나고 죽는 법이 사라지면, 이것이 고요한 열반의 기쁨이라. 따라서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구절을 듣고 나서 설산동자는 약속한대로 나무에서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나찰은 곧 *제석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공중에서 그를 받아 땅에 내려놓았다.

*제석천(帝釈天): 불교의 수호신 중 하나.

이때 여러 천신들이 모여 그의 발에 절을 하면서 그토록 지극하게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구도의 정신과 서원을 찬탄했다고 한다.

///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https://blog.daum.net/511-33/12370204

※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