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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불교(佛敎; 부처님 가르침) 수행자가 현대 물리학과 현대 심리학을 배우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수행으로 체험한 것이 이론으로 정리가 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다 깊고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요. 그 이유는 현대 용어로 설명된 현대 물리학과 현대 심리학의 이론을 통해서, 몸(물질 무더기, 물질작용 무더기)과 마음(정신 무더기, 정신작용 무더기)의 무엇을 봐야 하는지 보다 잘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소립자 물리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현대 물리학자이자 이화여대 명예교수인 김성구 박사가 불교 신문에 기고한 아래의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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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의 핵심만을 골라 쓴 경전이라는 뜻에서 ‘심경(心經, Heart Sutra)’이라고 부르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오온(五蘊)이 공(空, Śūnyatā)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과 재액에서 벗어났느니라[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여기서 보살(菩薩, Bodhisatta)은 '깨달음(정각, 보리)을 구하는 자'라는 뜻이고,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자유자재로 관찰하여 보리(菩提, Bodhi; 정각의 지혜)에 이르는 수행자’라는 뜻이다.

| 반야심경의 첫머리

‘공(空)’의 글자 뜻은 ‘비어있음, 없음’이나, 그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일체 사물(事物)에 실체(實體)가 없다.’는 뜻이다. ‘실체(實體)’란 ‘다른 사물과 구분되는 특정한 성질을 가진 독립된 개체’라는 뜻으로서 자성(自性)이라는 불교용어와 그 뜻이 비슷하다. 그리고 오온(五蘊)은 일체 사물의 구성요소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로 그룹핑한 것이다. 줄여서 그룹핑하면 물질(물질 무더기, 물질작용 무더기; 몸)과 정신(정신 무더기, 정신작용 무더기;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의문을 가진다. 하나는 ‘일체 사물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어떻게 ‘일체의 괴로움과 재액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일체 사물에 실체가 없다면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돌멩이나 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존재들은 무엇이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한 설명은 양자 중력이론의 연구로 이름이 있는 이탈리아의 현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로부터 듣는 것이 좋을 듯하다. 로벨리는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Reality is not what it seems)>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어난 사건은 바로 사라지지만 그 사건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새로운 사건을 생겨나게 한다. 사라진 사건 역시도 앞서 일어났다가 사라진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사건들이 인과연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인과연기적으로 얽힌 ‘사건의 흐름’,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존재’다.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세계에서는 물리계들 사이의 관계(relations between physical systems) 속에서가 아니고는 그 어떤 실재(reality)도 없다. 사물(things)이 있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사물의 개념을 낳는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대상(물건, objects)의 세계가 아니라 사건(events)의 세계이다. …… 양자역학은 세계를 이런저런 상태를 가지는 사물로 생각지 말고,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 그리고 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시간도 절대적인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로벨리는 연기법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위 내용은 사실 2500년 전에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법을 현대 물리학 용어로 설명한 것이다. 로벨리의 말대로 이 세상은 어떤 대상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사건들로 이루어졌다. 사건은 한 번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사건은 그냥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일어난 사건은 바로 사라지지만 그 사건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새로운 사건을 생겨나게 한다. 사라진 사건 역시도 앞서 일어났다가 사라진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사건들이 인과연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인과연기적으로 얽힌 ‘사건의 흐름’,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존재'다. 인과연기적으로 얽힌 사건의 흐름이 어떤 특성을 갖고 일정한 시간동안 지속하면 사람들은 ‘이 사건의 흐름’을 보고, 무엇인가가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곡해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것도 인과연기적으로 얽힌 하나의 사건의 흐름이다. 1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는 동일성(同一性)을 말해주는 아무런 요소도 없다. 몸을 이루는 물질도 모두 새 것으로 바뀌었고, 느낌이나 생각과 같은 정신적인 요소도 모두 새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인과연기적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실체)가 10년 동안 살아온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런 점은 다른 사물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나’라는 것에도, 주변에서 보는 물체에도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다. 이것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이치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건과 그 흐름으로 이루어져서 실체가 없다’는 걸 안다고 해서 어떻게 일체의 괴로움과 재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일까? ‘도일체고액’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건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실체론과 이분법적 사고

로마가 서양세계를 정복하면서 그리스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그리스의 학문은 4세기말까지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학문의 중심은 도서관이자 종합교육기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Mouseion)이었고, 무세이온의 학문을 이끈 사람은 히파티아(Hypatia, 370?~415)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히파티아는 수학과 철학을 비롯한 당대의 모든 학문분야에서 최고의 학자로 이름을 날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지성과 인품을 존경하고 있었다. 히파티아를 향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아름답고, 지성은 철학자 플라톤의 화신’이라고 묘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히파티아는 그녀를 마녀로 생각한 군중들로부터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한다. 일설에 의하면 군중들은 사금파리로 히파티아의 시체에서 살과 뼈를 발라냈다고 한다.

히파티아를 마녀로 지목하고 군중들로 하여금 그녀를 살해케 한 사람은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있던 성 키릴로스(Saint Cyrillus of Alexandria, 375?~444)였다. 키릴로스는 나중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양쪽으로부터 성인(聖人, saint)으로 추앙받는 사람인데, 당시 이단을 가리는 심판관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예수는 사랑을 가르치고, 그것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또 사람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 차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는데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주교가, 그것도 훗날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왜 히파티아를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하도록 군중을 부추겼을까? 그것은 키릴로스가 예수의 가르침과 성서를 실체론(實體論)적으로 해석하고 사물을 이분법(二分法)적으로 나누어서 보았기 때문이다.

‘실체’란 다른 것과 구분되는 독립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실체론적으로 보게 되면 반드시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사고(思考)하게 된다. ‘나 자신’이 옳고 ‘선(善)’이라면 ‘나’와 다른 상대방은 그르고 ‘악(惡)’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을 멸하는 것이 곧 정의가 된다. 키릴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저지른 행위는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었고, 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이었다. 실제로 역사상 가장 극악하고 잔인한 집단적 범죄들은 종교 또는 그와 비슷한 성스러운 동기란 미명아래 저질러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이었다. 오죽하면 아일랜드의 극작가 숀 오케이시(Sean O’Casey, 1880~1964)가 “정치는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 갔지만 종교는 그보다 열 배는 더 많은 목숨을 빼앗아 갔다.”고 말했을까.

사물에 실체가 있다면 선과 악의 대립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쪽이 멸망할 때까지 이 세상에 평화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복도 없을 것이다. ‘악’이 고정불변한 실체라면 수행을 한다고 해서 ‘악’이라는 실체가 없어질 리 없다. 따라서 악으로 인한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물에 실체가 없다면 악은 무지(無知)가 원인이므로 수행을 통해 그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첫머리에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고 설한 것이다.

[출처 :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729&fbclid=IwAR070WPk2RQA8qFwJeD5ebI7vV3R8V-FHjkC0Xmr3BAuoDqHK7_7JIhJxDQ (일부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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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동일한 나무에서 돋아난 나뭇잎도 저마다 모양이 다르고, 계절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이렇듯 ‘나’라는 것에도, 주변에서 보는 사물에도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다. 이것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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