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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분노의 원인




"모든 법이 일어나는 데는 원인이 있다. 붓다Buddha께서는 이 원인에 대해 설하신다.(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어느 날 사리뿟따Sāriputta(사리불, 사리자)가 스승을 찾아 온 인도를 돌아다니다가 찾지 못하고 지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고향 근처의 왕사성에서 고요하고 단정하고 평화로워보이는 한 스님이 탁발하여 공양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분의 모습에서 깨달은 성인에게서나 흘러나오는 아우라를 보았다. 그가 앗사지Assaji 존자다. 사리뿟따는 앗사지 존자가 나무 아래에 앉아 탁발해온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질문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스승이 가르친 진리를 저에게도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앗사지 존자가 말했다.


"난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진리를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간략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하나을 들으면 천 개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앗사지 존자가 사리뿟따에게 들려준 것이 위의 게송이다. 사리뿟따는 이 게송을 듣고 부처님을 찾아가게 되었고 얼마 후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이후 사리뿟따는 항상 앗사지 존자가 계시는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잠을 잤다고 한다.


모든 법이 일어나는 데는 원인이 있다. 여기서 모든 법은 물질, 정신적인 모든 현상, 즉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다. 즉 탐욕이 일어나고 분노가 일어나고 어리석음이 일어나는 데는 원인이 있다.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원인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다.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인연因緣*)에 의해 일어난 것이지 거기에 '나'라는 것은 없다. 사리뿟따는 이것을 깨닫고 수다원이 되었다. 


[인연因緣* : 인(因; 직접 원인 또는 직접 조건)과 연(緣; 간접 원인 또는 간접 조건)]


사람들은 대부분 분노 속에서 산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분노가 없는데요.“


'분노가 없다고요?'


이것은 분노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위빠사나 관찰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분노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분노는 벌컥 화를 내는 것만이 분노가 아니다. 분노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위로 솟구치는 분노(ascending anger): 화, 짜증, 스트레스


밑으로 가라앉는 분노(descending anger): 슬픔, 우울, 비탄, 한탄, 절망


분노의 원인은 내적인 불만족과 결핍감이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으키는 감정이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왜 분노가 일어났는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관찰을 해보아야 한다. 그러면 내면의 불만족과 결핍감, 상처 입은 자존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오는 상실감 등이 도사리고 있다. 


이 원인이 해결되어야 분노가 소멸한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아서 밖으로 흘러나오면 화, 짜증, 스트레스가 된다. 이것이 안으로 가라앉으면 슬픔, 우울, 비탄, 한탄, 절망이 된다.


분노는 단순히 화가 아니다. 이것을 부처님이 설법 시 사용한 고대인도어(빠알리어)로 도사(dosa)라고 한다. 그러니까 불교(부처님佛 가르침敎)에서 말하는 분노(dosa; 瞋)는 화뿐만 아니라 슬픔, 우울 절망 등과 같은 불만족과 결핍감을 해결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다.


이 불만족과 결핍감은 탐욕(lobha; 貪)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탐욕이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가 된다. 그래서 분노의 가까운 원인은 탐욕이다. 그 밑에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 원인은 '나(atta; 我)'라는 개념이다. 이것이 어리석음(moha; 癡)이다.


"나는 분노가 없는데요."


이 말은 나는 깨달은 성인이라는 의미이다. 그것도 아나함이 도달한 성인이다. 왜냐하면 분노는 아나함에서 완전히 소멸하기 때문이다. 아나함이 되려면 거의 모든 것을 초월한, 허공과 같은 청정무구한 마음이 되어야 가능하다. 거의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리고 마음이 청정해져야 분노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그대로인데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 수행으로 계발된) 고요집중의 알아차림(사띠sati)으로 시작한다. 현재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깊게(예리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냥 얕게(거칠게) 알아차리기만 하면 안 된다.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도 깊이 관찰(이어서 사띠)해야 한다. 분노가 일어났으면 왜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을까? 그 원인은 무엇인가?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은 바른 알아차림(삼마사띠)과 바른 이해(삼빠자나)가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이해가 일어나려면 원인에 대한 조사와 사유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깊은 정견(바른 봄/관찰, 조사)과 정사유(바른 사유, 분석)를 통해 충분한 이해(지혜)가 일어났을 때 비로소 분노가 힘을 잃고 소멸한다.


하나를 들으면 천 개를 깨닫는 사리뿟따와 같은 예리한 지혜가 없다면 충분한 지혜가 일어날 때까지 깊은 관찰(사띠하여 이어봄)과 조사, 그리고 깊은 사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출처 : 무념스님 포스팅, https://www.facebook.com/mahabhante/posts/873264350075980 (일부 수정 보완)]


[부처님이 요구하신 사띠(알아차림)의 수준은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2650897565222802&id=100009077529459 , http://cafe419.daum.net/_c21_/bbs_read?grpid=10H8O... ’을 참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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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사리뿟따Sāriputta(사리불, 사리자)와 앗사지Assaji 비구가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누는 장면. 사리불은 사위성에 나타난 앗사지 비구를 보고 한 눈에 비범함을 느끼고 그가 공양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간다 [출처 : http://m.jogyesa.kr/news/articleView.html?idxno=4446] [Ref. http://blog.daum.net/woonsu/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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