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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붓다께서 요구하는 알아차림의 수준



 


어떤 분이 ‘부처님 말씀처럼 수행하자(如說修行)’는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부처님께서 요구하는 알아차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_아들의 살 경(S12.63)_


“비구들이여, 윤회의 괴로움에서 허덕이는 중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 그것은 음식, 감각접촉, 의도, 의식이다."


▶︎ (음식) 비구들이여,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사막을 건너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사막 한가운데서 식량이 다 떨어져 버렸다. 부부는 생각했다. ‘여기서 다 죽을 수 없으니 아들을 죽여서 그 살을 육포로 만들어 가면서 먹으면 사막을 다 건너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아들을 죽여 육포로 만들어 먹으면서 사막을 건널 것이다. 


그들은 아들의 살을 먹으면서 ‘아들아, 너는 어디 있느냐?’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고기를 먹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부부는 식도락을 위해, 맛에 탐착하기 위해, 건강한 육체를 위해 음식을 먹겠는가? 아니면 비통한 심정으로 아들의 살을 먹겠는가? 이처럼 음식을 먹을 때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이 일어나는 것에 섬세하게 깨어있고 올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당신은 음식을 먹을 때 아들의 살을 먹는 것처럼 맛에 대한 탐착이 일어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알아차리고 먹습니까? 젓가락이 제일 먼저 좋아하는 반찬으로 향할 때 거기에는 벌써 탐욕이 일어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까? 젓가락이 움직일 때 음식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섬세하게 알아차리면서 먹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식도락과 건강미 넘치는 육체를 위해 좋은 식당을 찾아다니며 좋은 음식을 찾습니까?


▶︎ (감각접촉) “비구들이여, 가죽이 통째로 벗겨진 소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파리, 모기, 진드기와 같은 온갖 곤충과 벌레들이 달라붙어 피를 빨고 살을 뜯어 먹는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은 이와 같다. 감각접촉이 일어날 때, 좋아하는 느낌, 싫어하는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 일어난다. 그 느낌에 섬세하게 깨어있고 올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당신은 눈으로 형상을 접촉하고, 귀로 소리를 접촉하고, 코로 냄새를 접촉하고, 혀로 맛을 접촉하고, 몸으로 감촉을 접촉할 때, 마치 가죽이 벗겨진 소가 곤충과 벌레가 피를 빨고 살을 뜯어 먹는 것처럼 생생하게 깨어있습니까? 감각접촉에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일어나는 느낌에 끌려가지 않고 휩쓸리지 않으려고 알아차림을 유지합니까? 아니면 오히려 감각접촉을 즐기기 위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티브이를 켜고, 음악을 듣고 있습니까?


▶︎ (의도) “비구들이여, 한 길이 넘는 숯불 구덩이에 숯불이 연기도 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자살할 의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생존에 대한 처절한 욕구가 있다. 그런데 힘센 두 남자가 당신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끌고 가서 숯불 구덩이에 던져버리려고 한다. 이것은 당신의 의도와 거리가 멀고, 소망과 거리가 멀고, 염원과 거리가 멀다. 이처럼 의도가 일어날 때 갈애(탐-갈망, 진-혐오, 치-탐진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가 함께 일어나는 것에 섬세하게 깨어있고 올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당신은 의도가 일어날 때, 거기에 갈애가 함께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까? 갈애와 함께한 의도가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이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차립니까. 숯불 구덩이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그렇게 갈애가 함께한 의도가 일어날 때, 그 의도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섬세하게 깨어있습니까? 생각에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섬세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합니까? 아니면 오히려 의도로부터 시작된 생각의 홍수를 즐기고 있습니까?


▶︎ (의식) “비구들이여, 도둑을 잡아서 왕에게 끌고 가서 처벌해달라고 할 때, 왕이 삼백 자루의 창으로 찌르라고 판결했다고 하자. 삼백 자루의 창에 찔리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처럼 의식(의식작용)으로 인해 정신-물질(물질-정신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섬세하게 깨어있고 올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의식이 일어나면 몸(물질작용)과 마음(정신작용)이 따라 일어납니다. 그 몸과 마음에 대해 ‘이것이 나의 몸이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몸과 마음으로 ‘이것이 나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에고로 울타리를 치고, 나와 나 아님을 구분하여 나 밖의 것은 쳐내고 경계합니다. 이렇게 정신-물질이 일어나는 것에 당신은 깨어있습니까? 알아차림을 유지합니까?


이것이 붓다께서 요구하는 알아차림(sati; 念)의 수준입니다.


“아들의 살을 먹는 것처럼 음식을 먹어라. 벗겨진 살에 벌레가 살을 파먹는 것처럼 감각접촉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에 깨어있어라. 숯불 구덩이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처럼 의도가 일어날 때 갈애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섬세하게 알아차려라. 창에 찔릴 때의 고통처럼 의식이 일어날 때 ‘자아’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섬세하게 알아차려라.”


이건 매우 비인륜적이고 과격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고도의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붓다께서는 수행이란 섬세한 깨어있음, 고도의 알아차림, 현상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볼 수 있는 통찰(깊은 관찰)이 필요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냥 계를 지키고 착한 행위를 하고 봉사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 비구에게 법문하신 것입니다. 재가자에게는 이런 고난도의 관찰(사띠하여 이어봄)을 요구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붓다의 말씀처럼 수행하고 싶다면 거기서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당신은 출가자에 버금가는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이처럼 고난도의 알아차림을 요구하냐고요? 이 네 가지, 즉 음식, 감각접촉, 의도, 의식이 중생을 유지하는 자양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자양분이 윤회의 괴로움에서 허덕이게 하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무념비구 포스팅, https://www.facebook.com/mahabhante/posts/718342375568179 (일부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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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께서 요구하는 알아차림(sati; 念)의 수준


칸다(무더기) 쌍윳따(상응)의 《사마디 바와나 숫따(삼매 계발 경)*, S.III.I.i.5》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사마타(사마디 바와나)로 '바른 삼매'(正定; 초선정 삼매 ~ 제4선정 삼매)를 계발해야 한다. 충분한 삼매가 있으면,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있다.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면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色)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 감각(감각접촉, 느낌; 受)·지각(想)·상카라(行; 의도)·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요히 잘 집중된 비구는 오온(색·수·상·행·식 무더기)과 그 원인(인因-직접적인 원인과 연緣-간접적인 원인) 그리고 그것의 연기(인연因緣에 따라 상호 의존하여 일어남과 사라짐)를 있는 그대로 잘 안다. 그 원인이 일어날 때 오온이 일어나고, 그 원인(또는 조건)이 완전히 소멸될 때 오온도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비구는 분명히 보고 안다.“


<각주 : 붓다께서는 특히 여러 사마디 숫따(삼매경), 사마디 바와나 숫따(삼매 계발 경)*, 사마타 숫따, 아나빠나 사띠 숫따(안반수의경), 마하大 사띠念 빳타나處 숫따經(사띠念의 확립 정착處에 대해 설한 큰大 경經; 대념처경大念處經), (신수심법에 대한 사띠 확립 정착의) 단계별 길들임경 등으로, '사마타•위빠사나를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계발하는/닦는 수행’, 한문식 표현으로 '지止•관觀(사마타•위빠사나) 겸수兼修(상호의존 수행)' 또는 ‘정定•혜慧(사마디•빤냐) 쌍수雙修(한 쌍으로 닦음)’를 누누이 강조하여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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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사띠sati'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마음챙겨 알아차림, 빠자나pajāna(or 삼빠자나sampajāna;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림, 빤냐로 봄/앎),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고대인도어 '사띠sati'를 3~4세기 경 중국에서는 '념念(생각 념; 마음에 둠憶念, 기억記憶함)'이라고 한문(중국어)으로 번역했다. 한문 념念은 '지금(今)+마음(心)'의 합성어다. '사띠sati'를 한글(한국어)로 번역하면, 지금(현재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또는 작용)을 전념하여(바르게 기억하여 또는 바르게 새겨) ‘마음챙겨 알아차림' 정도로 표현하면 부처님이 설(설명)하신 의미와 유사하다.


참고로 영어 경전에서는 '사띠sati'를 'mindfulness(주의깊음, 마음챙김), memory(기억함), recognition(알아차림),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깨어있음) of mind,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self-consciousness'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사띠는 대개 빠자나(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즉 '사띠 빠자나의 준말'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사띠(마음챙김)와 빠자나(알아차림; 앎, 이해)’로 분리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정념正念이라고 한역하는 삼마사띠samma-sati도 대개 삼빠자나sam-pajāna(바른 알아차림; 바른 앎, 바른 이해, 분명한 이해)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삼마사띠(正念; 바른 마음챙김)와 삼빠자나(正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앎, 바른 이해)’로 분리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참고로 삼빠자나sam-pajāna에서 ‘삼’을 빼면 ‘빠자나’인데, ‘빠자나’의 동사형이 ‘빠자나띠pajanati’다. ‘삼’은 ‘삼붓다, 삼보리, (팔정도의)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등등’에서처럼 단어 앞에 붙는 접두어로 ‘바른’이라는 뜻이다. 빤냐(지혜)의 동사형도 ‘빠자나띠(알다, 이해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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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알아차림)에는 얕은(거친, 무딘; rough) 사띠(알아차림)에서부터 깊은(섬세한, 예리한; fine) 사띠(알아차림)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준의 사띠(알아차림)’가 있다.


실제로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을 하다보면, ‘rough(거친, 얕은, 피상적인, 투박한, 무딘, 흐릿한, 들뜬, 느린, 미숙한, 불완전한) 사띠(알아차림)’에서부터 점점 더 ‘fine(섬세한, 깊은, 명확한, 세밀한, 정밀한, 미세한, 예리한, 또렷한, 분명한, 고요한, 빠른, 능숙한, 완전한) 사띠(알아차림)’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준의 사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사마타 수행을 가르치지 않는 수행쎈터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위빠사나 명상쎈터에서는 식사 중에도 알아차리면서 먹으라고 가르치지만, 배고파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기 바쁜 (몸과 마음의) 상태에서는 알아차림이 없거나 매우 거친(rough) 알아차림이 있을 뿐이다. 어느 정도 허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내가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사실 준비단계(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fine 사띠를 준비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일상생활 중에 섬세한(예리한, 또렷한, 빠른, 능숙한; fine) 사띠(알아차림)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비록 거친 사띠라도 일상생활에서 사띠(알아차림) 연습(훈련, 수련, 수행)은 중요하다. 하면 한만큼 그 효과가 드러나게 된다.


일상생활 중에 섬세한(예리한, 또렷한, 빠른, 능숙한; fine) 사띠(알아차림)를 유지하는 것은 '사마타 = 사마디(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 = 정정진(바른 노력)·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을 통해서, 비록 바른 선정(초선정 ~ 제4선정) 삼매에 들지는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라도 fine 사띠가 계발된 상태라야 가능해 진다.


바른 선정(초선정 ~ 제4선정) 삼매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일상수행에서의 사마타'는 쉽게 말하자면 사띠(알아차림, 마음챙겨 알아차림) 능력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고요할수록 더 잘 알아차려지고 더 잘 알아차릴수록 마음이 점점 더 고요해지고 생각이 좀 느려지고 이렇게 마음이 조금 비워진다. 


이렇게 마음이 좀 비워지고 좀 고요해지고 사띠 능력이 어느 정도라도 좀 계발된 상태가 되어야 '일상수행에서의 위빠사나', 즉 일상생활에서 ‘신수심법身受心法’ 또는 ‘오감각과 생각(의도, 의식), 감정’을 관찰(이어서 사띠)하는 수행을 비로소 제대로 할 수 있다.


부처님 설법에서 신수심법身受心法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 Kāya(身) : 몸, 신체, 물질, 색온色蘊(물질/사대色 작용 무더기蘊)


• Vedanā(受) : 감각(감각접촉 또는 느낌; 특히 ‘몸에 나타나는 현상, 물질감각’), 수온受蘊(감각 받음受 작용 무더기蘊)


• Citta(心) : 마음, '수상행식' 작용 무더기


• Dhamma(法) : 부처님이 설하신 다섯 가지의 법(오개, 오온, 육내외처, 칠각지, 팔정도를 포함한 사성제); 또는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감각). 또는 마음(찟따心, 마노意, 윈냐냐識)의 대상(法)으로서의 세상(우주자연)의 일체 모든 것(法). 또는 물질 정신적인 일체 모든 현상(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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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께서 가르친 수행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긴 글] 정각正覺에 이르는 바른 실천 http://cafe419.daum.net/_c21_/favor_bbs_read?grpid=10H8O... , https://www.facebook.com/photo?fbid=2081350152177549&set=a.1844617145850852 ’을 참조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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