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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삶의 나침반

가난과 빈곤과 결핍을 경험한 사람이거나 물질적 궁핍을 경험하지 못한 태생으로 부유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공감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난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과학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는 것과 지나치게 물신주의가 되었고 배금사상에 물들었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물신주의와 배금에 깊이 물든 이들은 이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나기를 거부한 채 마지막 골목에 들어서고 있다. 어쩌면 물신과 배금에 깊이 잠들어버린 사람들이 대부분 일지도 모른다. 물신과 배금은 그 자체로 ‘뽕’ 만큼이나 도취 되기 쉬운 달콤함을 주기 때문에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취에서 깨어난 어느 날 아침의 불쾌함과 쓰라린 아픔과 불안증과 두려움은 '물신과 배금을 벗어난 삶은 없는 것일까?' 시선을 돌려 보게 된다.

도시를 탈출하여 자연에 기대어 살면 얼마나 좋을까? 뭇 생명을 존중하고 식물을 가꾸며 자연식을 먹고 소박하게 살고 싶어.

미국에서 우리보다 조금 앞서 살았던 타샤튜더의 자연주의 삶은 대단히 아름다워 보인다. 기품있고 우아하면서도 소박하고 아름다운 예술적인 자연주의 삶. 타샤튜더 개인의 놀라운 창의성과 창조력. 부럽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으로부터 건너와 광활한 미국대륙에서나 꽃 피울 수 있었던 그들의 생활방식이며 그들만의 문화였다.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평화롭고 더 친 자연주의로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어떻게 무참하게 학살하고 빼앗은 땅인가. 

그 위에 자기네 방식으로 꽃 피워낸 삶의 정당성 같은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타사튜더 개인의 삶은 참 아름다워 보였지만 내가 원한 것은 좀 더 거칠고 야생적인 삶이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이 버몬트 숲에서 일군 친자연적인 삶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지만 그 또한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에서나 가능한 생활방식이었다.

그들의 삶을 흉내 내기에는 내 개인이 너무나 보잘것없었고 내가 지닌 배경도 볼품없었으며 우리나라 땅덩어리는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했다. 오히려 월든 호숫가에서 잠시 살았던 데이빗 소로우의 삶이 훨씬 동양성을 가지고 있어서 친 한국적인 맛과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소로우의 삶을 동경했다. 왜 하필 소로우이고 하필 미국인들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땅에 맞게 친 자연주의로 살아갈 수 있는 행동 양식은 없는 것일까 ? 둘러보니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민들이나 산속 조그마한 암자에 살았던 분들은 그렇게 살았더라.

낮에는 일용한 양식을 거두고 밤에는 손을 움직여 일상에 필요한 온갖 생활용품들을 손수 만들어 썼다. 그 물건들은 질박하고 아름다웠고 과장되지 않았으며 작았고 절제되었다. 나는 우리식의 삶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에 눈 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다행히도 나는 자그마한 산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빔을 기대어 더이상 쓰러지지 않게 버팀목을 대고 마당의 철분 가득한 흙에 물을 붓고 짓이겨 구멍 난 벽을 메우고 자급자족의 삶을 실험하였다. 

숲은 고요했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경쾌했으며 산을 깎아 만든 초록색 논밭과 어슬렁거리는 소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작은 마을에 심어진 아름드리 감나무 그늘은 서늘했다. 

오두막 뒤란에서는 먼저 살고 가신 할아버지가 심어 둔 대나무들이 서걱거리는 바람 소리를 실어다 주었고 할머니가 대나무 그늘에서 잘 자라나라고 심어 둔 차조기와 취와 머위와 참나물이 무성하게 자라났고 할머니가 손수 만든 귀여운 골무와 아끼던 살림 도구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수 지은 삐거덕거리는 통시(변소), 뱀이 벗어놓은 허물이 대롱대롱 달려 있고 벌들이 숭숭 구멍을 뚫어 놓은 황토 곳간 할아버지가 솜씨 있게 엮어둔 여러 망태기.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커다란 돌절구와 반쯤 썩어나간 나무 절굿공이. 

손바닥만 한 툇마루. 겨울의 거센 찬 바람을 막아줄 리 없이 덜컹거리는 부엌문. 커다란 감나무. 이 모든 것이 90여 평 남짓한 땅덩어리에 얹혀 있었다. 이 작은 땅덩어리마저 비탈진 언덕에 간신히 걸쳐 있었다.

한때 번성했을 때는 열한 집이 살았다는 산골 작은 마을에서도 제일 남루했던 집이었다. 그때는 우리(나와 열세 살 딸) 포함해서 세 집이 이 계곡 둥지에 깃들어 살았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마지막 은신처. 아쉽다.

가장 친자연적이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삶이 그곳에서 펼쳐졌었다. 문명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존적으로 살고자 하는 나의 소망은 그렇게 몇 년 사는 동안 채워지고 해소되었다. 나에게 욕구가 일어났을 때에는 모든 것을 멈추고 욕망의 근원에 집중해야지만 그 욕망을 채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나 나는 내 나이를 헤아리며 살아 왔다. 이 뜨겁고 고뇌에 찬 나의 인생이 하루라도 빨리 영글어지기를 소원하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나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아주 주요한 요소 였음이 틀림없었다.

이제 ‘종심’[從心]이라는 칠십을 맞이하고 나서부터 사유가 더 무르익고 싶어졌다.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머지 시간들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깊이 숙고하는 시간이다.

나의 인생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우리라는 믿음은 있다. 여러 간난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충족된 마음으로 살아온 결들이 쌓여 있을 테니까.

아무튼 잘 지내왔으며, 잘 지내고 있고,  잘 지낼 것이다.

오늘도 찬란한 아침 해가 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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