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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견성, 깨달음 그리고 열반

한 페친이 이런 질문을 해왔다.

“스님, 남방에서도 견성을 말하나요? 견성이 깨달음으로 가는 경유지인가요? 견성이 특별한 수행 없이도 어느 날 갑자기 번개치듯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마치 복권 당첨 되는 것처럼. 또 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사마타 수행 체험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알아차림조차 사라진 그 무엇이라고도 합니다.알아차림만으로는 부족한 걸까요? 견성을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지어 설명해 주십시오.”

1. 견성 또는 깨달음의 의미

사실 이런 고차원적이고 논란이 많은 문제에 대해 내가 토를 단다면 많은 사람들이 흥분할 것 같아서 질문을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순전히 나의 견해를 말하려고 한다. (이런 글은 정중체로 써야 하는데....)

견성은 깨달음이고, 남방에서도 깨달음에 대해 당연히 이야기한다. 그것이 남방에서는 견성이라는 단어, 그러니까 ‘성품을 본다.’라는 뭔가 고상한 것을 본 것처럼 표현하지 않고, 닙바나nibbana(열반)라고 표현할 뿐이다. 열반의 의미는 ‘불이 꺼졌다.’라는 뜻이다. 욕망의 불, 번뇌의 불이 꺼졌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욕망과 번뇌를 일으키는 ‘유신견(자아, 아상)이 소멸했다.’라는 뜻이다.

북방에서는 뭔가 있음을 보았다는 ‘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은 ‘텅 빈 그 자리’를 보는 것이고, 남방에서는 소멸을 의미하는 열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은 자아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텅 빈 고요’를 경험하는 것이므로 같다고 보아야 한다.

2. 견성이 특별한 수행없이 갑자기 일어난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것인 것이 아니고 그것도 매우 희귀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붓다는 6년 동안 지독한 수행을 한 후에 깨달았는데, 그러면 붓다는 그런 특별하고 희귀한 존재가 아니고 보통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선방이나 수행처에서 다리 아프게 가부좌를 하고 거의 평생을 수행하는데도 견성을 못하는데,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바보란 말인가? 그들은 왜 그렇게 힘들게 수행하는 것일까?

사실 ‘갑자기 깨닫는다(돈오)’는 말은 오랫동안 수행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냥 알아차림도 없이 방일하게 살다가 갑자기 견성을 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어느 날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갑자기 깨달을 수도 있다. 우주의 이치나 삶의 의미, 아니면 뇌를 스치는 번뜩이는 지혜, 머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깨달음, 마음에 커다란 감동의 물결과 함께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 땅에 발이 닿지 않는 희열과 행복감, 흥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럼 이런 것이 깨달음이냐? 견성이냐? 결론은 ‘아니다.’이다.

그런 경험이 일어난 후에 ‘자아의 소멸’, 즉 속박에서 벗어남, 내려놓음, 텅 빔, 무심함, 자유로움, 번뇌의 소멸, 욕망의 소멸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어떤 경험을 했는데 여전히 욕망에 끄달리고 여전히 생각이 계속 일어나 정처없이 흘러가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깨달았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런 저런 다양한 경험들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온 우주와 내가 하나됨을 경험했습니다.”

“온 몸을 전율하는 희열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몇 달을 깨달음의 기쁨 속에서 보냈습니다.”

“눈만 감으면 환한 빛이 떠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여전히 욕망이 일어납니까? 여전히 분노, 스트레스, 짜증이 일어납니까? 여전히 생각이 계속 흘러갑니까? 여전히 대상을 보면 반응이 일어납니까?”

그들이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여전히 그렇다고 하면, 나는 그들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그럼, 그런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3. 돈오와 점오

초기경전에 ‘법을 따르는 자’와 ‘믿음을 따르는 자’가 나온다. 법을 따르는 자는 위빠사나 수행자이다. 지혜가 강한 자들이 이 길을 간다. 믿음을 따르는 자는 사마타 수행자이다(기도하는 자가 아님). 

사마타의 길을 가는 사람은 점오(천천히 깨달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천히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고요와 평온을 충분히 경험한 후에. 무한한 평온 속에서 저 언덕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아비담마 표현에 의하면). 법을 따르는 자는 돈오(갑작스런 깨달음)라고 할 수 있다. 지혜를 일으켜 무아의 이치를 깨닫기 때문이다. 화두수행자들은 법을 따르는 자에 해당하겠다.

그래서 초기경전에는 깨달음을 체험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설명한다. 하나는 몸으로 체험하는 자와 법으로 체험하는 자이다. 몸으로 체험하는 자가 믿음의 길, 즉 사마타의 길이다. 법으로 체험하는 자는 지혜의 길, 위빠사나의 길이다. 그러나 실은 이 둘이 분명하게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으면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4. 알아차림만으로 부족한가요?

알아차림만으로 당연히 부족하다. 번뇌를 일으키는 주체, 즉 유신견(자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게 얼마나 교활한 사기꾼, 협잡꾼인지 수행하다보면 스스로 경험할 수 있다. 알아차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번뇌가 왜 일어나는지, 번뇌를 누가 일으키는지, 내면에 어떤 오염원, 어둠,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럼 알아차림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가? 무조건 무식하게 알아차림으로 밀어붙이는 수행을 할 수 있다. 지혜가 부족하지만 대신 믿음이 강하고, 정신력이 대단한 사마타 행자들이 가는 길이다. 하지만 굴뚝신심이 없다면 도중에 대부분 포기할 것이다.

5. 결론

어떤 길을 가던지 목적지는 같고, 그 결과가 욕망의 소멸, 번뇌의 소멸, 유신견(자아)의 소멸이어야 그것이 진짜 견성(깨달음)이다. 깨달았는데 여전이 욕망속에 살고 여전히 번뇌로우면 그것은 가짜 견성이다. 물론 깨달음은 다양하고 작은 깨달음도 있고 큰 깨달음도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깨달았지만 여전히 욕망이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은 깨달음이라도 욕망이 줄어들었음을, 자아가 많이 무너졌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머리로 깨달은 것이지 진짜 깨달음은 아니다. 그래서 남방에서는 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남방에서는 ‘소멸, 무너짐’이라는 의미를 지닌 열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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