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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깨달음


나는 출가하고나서 오로지 깨달음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했지만 노력만큼 효과가 없었다. 깨달음이 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방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에게 도대체 깨달음이 뭔지 물어보았다. 그분들은 조사어록에 나오는 판에 박힌 알 수 없는 언어로 대답했다.
“뜰 앞에 잣나무니라!”
이 말은 ‘니가 뭘 알겠냐?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이나 해라. 답을 미리 알려주면 공부가 되것냐? 니가 스스로 알아내야 니 것이 되는 것이지. 남이 알려주는 답은 니 것이 될 수 없어.’라는 뜻이다.

나는 화두 수행을 포기했다. 화두가 나의 성미와 맞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는데 10년의 세월을 낭비했다. 하지만 그동안 정진한 것이 완전 꽝은 아니었다. 그래도 생각은 많이 쉬어졌다. 하지만 깨달음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스승들은 생각을 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늘 강조했다. 그래서 나는 미얀마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미얀마에서 많은 스승들에게 깨달음에 대해 질문했다. 깨달음이 뭔지 알아야 그것에 포인트를 맞추어서 수행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미얀마에 처음 도착해 수행한 곳이 쉐우민 또야다. 나는 여기서 쉐우민 사야도에게 깨달음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어떤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까? 깨달음이 뭔지 알아야 깨달았을 때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쉐우민 사야도께서 대답했다.
“깨달으면 스스로 안다.”
이런 성의없는 대답이라니. 아마도 이 질문에 많이 시달렸는 모양이다. 그래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나?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말이 정답이다. 깨달음은 스스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 남이 알려줄 성질의 것이 아니다. 스승은 길을 제시하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깨달음을 미리 설명하면 머리가 그것을 만들어내어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오류가 일어난다. 이것은 스승들이 조심해야 할 문제다.
나중에 쉐우민 사야도의 가르침을 따라 오랜 수행을 한 후에 그분의 가르치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깨달음이란 진리(무아)에 대한 이해(이것을 지혜라고 부름)가 일어난 것이다. 물론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닌, 몸으로 이해한 것 같은 것이다. 이런 지혜가 일어났을 때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함께 경험한다. 그런 경험이 없이 진리를 이해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관념놀이다.”

나는 쉐우민을 떠나 파욱 또야로 갔다. 이곳은 먼저 사마디를 닦고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곳이다. 여기서 오래 머물며 수행했다. 여기서도 나는 사야도에게 깨달음에 대해 질문했다.
“열반이 도대체 뭡니까?”
“도과의 성취다.”
“그럼 수다원과에서도 열반을 경험하고, 사다함과에서도 열반을 경험하고, 아나함과에서도 열반을 경험하고, 아라한과에서도 열반을 경험한다고 아비담마에 나와있는데, 다 똑같은 열반인데 각각의 도과에서의 열반이 어떻게 다릅니까?”
“그 깊이가 다르다.”
“자신이 열반을 얻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열반을 경험하면 반조의 지혜가 일어난다. 반조의 지혜가 일어나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을 확인합니까?”
“도, 과, 열반을 비추어본다. ‘내가 도를 얻었구나’라고 비추어본다. ‘이것이 내가 버린 번뇌구나.’라고 비추어본다. ‘이것이 아직 남아있는 번뇌구나.’라고 비추어본다. ‘이 법을 대상으로 내가 꿰뚫었구나.’라고 열반을 비추어본다.”

수다원과에서는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이 소멸한다.
사다함과에서는 탐욕, 성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아나함과에서는 감각적 욕망, 성냄이 완전히 제거된다.
아라한과에서는 존재에 대한 욕망, 자만, 질투, 인색, 무명이 제거되고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다.

각각의 도과에서 열반을 경험할 때, 이와 같은 번뇌들이 제거되었음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이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를 얻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어떤 정신적인 경험을 할 때마다, 어떤 텅 빈 상태, 무한히 고요와 평온만이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이것을 비추어 반조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다음에 찾아간 곳이 마하시였다. 그당시 마하시는 그냥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미얀마 이곳저곳 떠돌다 힘들면 마하시에 와서 머물면서 몸을 추스리는 곳이었다. 음식 잘나오고 머물기 편한 곳이었다. 물론 정진 시간은 빼먹지 않았지만 마하시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하시에 머물면서 따따마란디 사야도에게 찾아가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깨달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 상태라는 것에 대해 질문했다.
“열반에 들었을 때에 식(viññāṇa, 윈냐나)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다(nothing).”
“그럼 그 상태에 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와서 안다.”
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무기(無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미얀마를 떠나온 지 10년이 넘어간다. 지금도 끝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난 아직도 깨달음이 뭔지 잘 모른다. 늘 텅비고 고요한 상태를 경험하고, 가끔 그런 상태에서 한두 시간 정도 머물다 나오지만,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물론 그런 고요한 상태에서 나오면 한두 시간은 번뇌도 없고 생각도 없는, 아주 맑은 정신이 유지된다. 그런 상태에 들어갔다 나오면 자아의 껍질이 더 얇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세상의 유혹이 의미를 잃어간다. 알아차림이 성성해지고 고요함만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상태를 즐기는 편이다. 나는 스승들이 늘상 하는 말, ‘고요함을 즐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리석은 놈이다. 에이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난 아잔 브람 스님이 깨달음에 대해 대답한 것이 매우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Are you enlightened?(당신은 깨달았습니까?)”
“No, I am so many eliminated.(나는 많이 제거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나는 자아의식이 많이 제거되었다.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많이 제거되었다. 나는 에고가 많이 제거되었다. 그 제거된 자아의식에 비례해서 번뇌도 덩달아서 많이 제거되었다. 자아의식이 소멸되어감에 따라 묶어있던 마음들이 풀려나고 많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런 뜻이다.

초기경전에는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열반, 열반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열반이 무엇입니까?”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다.”
이 한 줄이 유일한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다. 경전에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 이유가 뭘까?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오히려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일까?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는 말을 빼고 어떻게 열반을 설명한단 말인가? 수행하다보면 많은 깨달음이 일어나고 다양한 상태를 경험하지만 결국에는 탐진치 소멸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닐까?

탐진치가 소멸되면 어떻게 되냐고? 존재가 소멸하는 거냐고? 아니면 어떤 다른 상태로 존재하는거냐고? 그거야 알 수 없지! 붓다께서는 그 이후에 대해 무슨 설명을 하셨냐고? 붓다께서 입을 다무셨지.


- 무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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