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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관념 세계


한 거사님이 페이스북의 글을 보고 찾아와 물었다.
“스님은 오직 초기불교만 믿습니까?”
난 초기불교 신봉자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온전히 믿는 편이 아니다. 
“저는 제가 경험할 수 있는 것만 믿습니다. 경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제 머리가 논리적으로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만 믿는 편입니다.”
“그럼 대승의 화엄경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엄경은 그것이 만들어진 취지가 재가불자들이 승가를 향해 '너희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취지로 선재동자 라는 재가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만든 것입니다.”

“화엄경이 꼭 재가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화엄철학은 중중무진법계연기 사상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모두가 다 연결되어 존재한다.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비도 와야 하고 햇빛도 비춰야 하고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한다. 그런 내용도 들어있죠. 그것이 혼자 출가해서 수행하는 것은 소승이고 함께 살면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깨달음을 얻는 대승의 길을 가자는 의미죠. 그래서 사회운동 하는 스님들에게 사회운동의 모티브를 제공하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그럼 법화경은 어떻습니까?”
“법화경은 기복신앙의 근거를 제공하는 경전입니다. 법화경을 신봉하는 법화행자들은 말세에는 기도가 최고라고 주장하죠.”
“그럼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과 다릅니까?”
“붓다는 초기경에서 ‘조약돌과 참기름 이야기’로 기도를 부정하셨습니다.”
“오직 초기경만이 붓다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옹졸하고 편협한 마음 아닙니까? 현대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과 견해와 사상들이 공존하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하는 것은 닫힌 마음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견해와 사상들도 받아들이십시오.”
“다양한 견해들이라는 것이 대부분 관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견해와 사상과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경을 믿고 따르면 그 사람 머리속에서 화엄 세계가 구축됩니다. 법화경을 믿고 따르면 그 사람 머리 속에서 법화 세계가 구축됩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그 사람 머리속에서 기독교 세계가 창조됩니다. 단멸론자와 유물론자와 무종교인의 머리속에는 그에 걸맞는 관념의 세계가 구축됩니다. 머리속에서 구축되거나 창조된 것은 관념의 세계입니다. 순전히 그 사람의 관념 세계일 뿐입니다.”

“관념과 실재가 다르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은 자유입니다. 종교에는 자유가 있잖아요? 그러나 실재는 다릅니다. 불교를 믿어도 나쁜 짓하는 사람 많고, 기독교를 믿어도 나쁜 짓하는 사람 많습니다. 종교인들도 성폭행하고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합니다. 욕망 앞에 양심은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이와 같이 화엄경을 믿든, 법화경을 믿든, 다른 종교를 믿든, 단멸론을 믿든, 영속론을 믿든, 유물론을 믿든, 과학을 믿든, 그 믿음은 관념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는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고 생각이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흘러 나옵니다. 끝없이 흐르는 생각으로 괴롭습니다. 생각이 왜 쉬지 못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이것은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믿음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착하게 살게 만들고 선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역할은 Function 입니다. 그런 좋은 기능을 하는 것일 뿐이죠, 그러나 역할과 실재는 다릅니다. 실재는 Fact 입니다. 사실을 다루는 것입니다. 다양한 믿음이 좋은 역할을 하지만 Fact 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각각의 믿음은 각각 다른 관념 세계를 창조하지만, 실재는 보편성의 법칙에 따릅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사실을 다루므로 실재를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고 주력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기도를 하거나 염불을 하면 그 순간에는 사띠가 일어나니까요. 사띠가 일어나면 나쁜 생각이 제어됩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방편을 쓸 것이 아니고 직접 뛰어드는 것이 훨씬 낫겠죠? 나쁜 생각을 바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하면 바로 사라지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재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토론을 거부했다. 그는 모든 관념적인 질문에 대답을 거부하고 침묵했다. 붓다는 자신은 오직 실재만을 가르친다고 선언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심사빠 숲에서 말씀하신 <심사빠 숲 경>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많은 것을 알지만 그것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무엇이 괴로움인가? 욕망이 일어나고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것이 괴로움이다. 그것이 충족되었다고 해도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괴로움도 끝이 없다. 생각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괴롭지 않는가? 그러므로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라. .욕망이 일어나는 그 매커니즘(연기)을 관찰하라. 관찰과 이해가 충분해지면 욕망이 소멸한다. 욕망이 소멸하면 해탈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그 복잡하고 현학적인 관념 세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을까?


- 무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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