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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남방불교 미얀마불교

 

당신이 미얀마 절에 가면 여러번 놀랄 것이다. 

처음에는 절이 절 같지 않아서 놀랄 것이다.
다음에는 절에 대웅전이 없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절이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다음에는 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절에 출가자보다 재가자가 더 많이 사는 것에 놀랄 것이다.
많은 재가자들이 함께 앉아 명상을 하고 있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누구든지 절에 가면 방을 내주고 명상을 가르친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누구든지 일주일이라도 출가를 했다가 환속할 수 있으며,
며칠 안에 비구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처음 절에 가면 먼저 방장 스님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방장 스님이 친히 명상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에 놀라고,
일주일에 두 번은 무조건 인터뷰를 하며 수행을 점검해준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어디가 진짜 대승인가?
대승불교인 한국불교가 진짜 대승인가?
소승이라고 알려진 미얀마 불교가 대승인가?
여기서 미얀마 불교를 남방불교의 예로 드는 것은
미얀마 불교가 가장 초기불교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남방불교라도 태국과 스리랑카는 또 사정이 다르다.
그럼 미얀마 불교를 한 번 살펴봄으로써
어떤 것이 진짜 불교이며 진짜 대승인지 알아보자.
미얀마 불교에는 三無와 三有가 있다.

 

1. 대웅전이 없다.
2. 불보살이 없다.
3. 행사가 없다.

1. 출가가 열려 있다.
2. 공간이 열려 있다.
3. 법이 열려 있다.  

 

 

대웅전이 없다.

미얀마 절에는 대웅전이 없다. 대웅전이라는 것은 성소(성스런 장소)를 말한다. 예배의 공간이자 기도의 공간이다. 모든 종교는 성소를 가지고 있다. 교회, 성당, 예배당, 기도실, 기도원, 대웅전, 약사전, 관음전, 지장전 등이 모두 성소이다. 미얀마 절에는 이런 장소가 없다. 그럼 절에 뭐가 있나? 그곳에는 담마홀Damma Hall이라고 부르는 명상홀Meditation Hall이 있다. 담마홀은 우리나라 말로 하면 선방에 해당한다. 대중들이 모여 명상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담마홀은 거대하고 화려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그런 건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함께 정진할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하고 소박한 선방이다. 절이 하나 또는 두 개의 선방과 수많은 개인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나 절에 가면 머무를 수 있도록 방을 내어준다.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가 절에 머무르면서 정진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미얀마 절은 그래서 절 같지가 않다. 그래서 미얀마 절은 절, 사원 또는 사찰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런 용어에는 기도하고 예배하는 성스런 공간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절은 그래서 승원 또는 명상원 또는 명상 센터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얀마 절은 영문으로 Temple이라고 부르지 않고 monastery라고 부른다. 그곳에는 예배나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기도가 없다. 오직 수행정진 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대하고 화려한 전각을 짓고 불상을 모실 이유가 없다. 절이 선방과 수많은 각방으로 이루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보살이 없다.

미얀마 절에는 불보살이 없다. 아미타불 약사여래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이 없다. 사실 이런 존재들은 가공의 인물이다. 힌두교에 대항하기 위해서 힌두교의 아이템을 도용해서 새로 창조한 존재들이다. 왜 창조했을까? 물론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죽으면 찾아가 의지할 수 있는 아미타불이 필요하고, 아프면 낫게 해줄 수 있는 약사여래가 필요하고,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의지하고 기도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관세음보살이 필요하고, 죽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주면 구제해줄 수 있는 지장보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얀마를 포함해서 소승불교 국가에는 이런 신적인 존재들, 즉 불보살들이 없다. 그곳에는 우리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절은 불보살을 모신 많은 전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정작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방은 적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불보살을 모신 전각에는 불전함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는 방이 적은 까닭은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영리한 한국인들은 거시경제학이나 미시경제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경제원리를 깨우쳤다.


행사가 없다.

절은 <오로지 마음을 맑히는 일에 힘쓰라(自淨基意)>는 붓다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이다. 그 외의 모든 행사는 할 수 없다. 붓다께서 제정한 율장에 의하면 절 살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버는 일체의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돈이 없으면 절이 무너지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절에 돈이 안 들어오면 사찰 운영은 어떻게 할 것이며 대중은 무슨 돈으로 살아갈 것인가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아무리 돈이 안 들어와도 절은 무너지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 돈이 없으면 서로 주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을 것이고 대중은 청정해질 것이며 사는 것이 고통스러울수록 모두가 마음공부에 매진할 것이다. 행사의 목적은 오로지 돈과 결부되어 있다. 행사는 신도를 끌어들이는 아주 좋은 수단이다. 정초기도 신중기도 백중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입시기도, 보살계 수계살림, 부처님 탄신일 연등행사, 개산제, 영산대제, 팔만대장경 이운행사, 산중 음악회, 등등등..... 무수한 이름을 가진 행사들이 돈을 목적으로 치뤄진다. 

미얀마 절에는 까티나 행사라는 것이 있다. 까티나 행사는 3개월간의 우기 안거를 끝낸 스님들에게 가사를 올리는 행사이다. 부처님 당시에 스님들이 안거를 끝내고 유행에 나서기 전에 신도들이 가사를 만들어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그 풍습이 그대로 이어져 오는 것이다. 지금은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올리는 행사가 아니고 모두가 즐기는 행사가 되었다. 신도들은 자신의 능력껏 선물을 준비한다. 선물은 가사 뿐만 아니고 과자 바구니나 비누 치솔 등과 같은 생활용품도 될 수 있다. 모두가 즐겁게 선물을 준비한다. 스님들도 준비하고 신도들도 준비한다. 준비한 선물들은 도량에 진열되고 진열된 상품마다 번호가 매겨진다. 스님들을 포함해서 신도들도 모두 동참해서 제비뽑기를 해서 당첨된 번호의 선물을 가져간다. 이것이 미얀마 절에서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유일한 행사다. 미얀마 절에서는 부처님 탄신일이라고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않는다. 평상시와 같이 법회가 열리고 명상을 한다. 재가자가 관리하는 거대한 파고다(탑)에서는 붓다탄신일에 보리수에 물주는 행사가 열리며 북적거리는 축제가 열리지만, 절은 평상시와 같이 조용히 명상을 할 뿐이다.
왜 이렇게 북방불교와 남방불교가 차이가 있을까? 행사의 목적이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일까? 포교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일까?. 그런데 남방불교는 행사를 하지 않아도 어떻게 절이 잘 운영되고 있을까?  


출가가 열려있다.

미얀마 절은 누구든지 출가할 수 있다. 우리나라 처럼 비구가 되는데 6개월 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행자생활과 4년간의 기초교육과정을 거쳐서 비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단 하루만에 비구가 될 수 있다. 비구계를 받는데도 한 시간이면 끝난다. 세속의 옷을 벗고 가사를 걸치는 정해진 요식행위가 한 시간 안에 다 이루어진다. 대부분 단기 출가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진다. 단기 출가를 했다고 비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온전히 비구로써 행위를 해야하고 비구의 대접을 받는다. 물론 신참비구로써 받아야 할 교육은 받아야겠지만 그래도 비구이다. 그리고 단기출가를 목적으로 온 사람은 며칠 또는 몇 달 만에 다시 계를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단기 출가를 목적으로 계를 받았다고 해도 그냥 죽을 때까지 비구로 살아가려면 그대로 계속 비구로 살아갈 수 있다. 단기 출가를 목적으로 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비구계는 반납하지 않는 한 비구의 자격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미얀마 국민은 모두가 출가를 한다. 출가하는 것이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영광으로 생각한다. 어렸을 때에도 한 번 출가의식을 치르고 성인이 되어서도 한 번 정도 출가의식을 치른다. 출가의식을 치를 때면 온 가족이 절에 와서 축하를 해주므로 마치 가족 잔치처럼 보인다. 출가의식 뿐만 아니고 절에서 몇 달 또는 몇 년간 수행하고 싶다면 또 출가해서 명상에 전념하다가 계를 반납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에 출가해서 정신적인 휴식기를 가질 수 있다. 정신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출가해서 명상함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돌아가 세속 생활에 전념할 수 있다. 이런 좋은 시스템 때문에 온 국민이 불교도가 될 수밖에 없다. 온 국민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며, 온 국민이 계율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므로 승가가 타락할 수 없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비구의 삶이나 그 사정을 낱낱이 알기 때문에 지켜보고 보호해주는 것이다. 영국이 미얀마를 오랫동안 식민지배하면서 미얀마인들을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시키려고 온갖 야비한 노력을 했음에도 개종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출가할 수 있는 이 제도가 바로 불국토를 만드는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절에서는 여름 불교학교가 열린다. 미얀마 여름 불교학교는 우리나라처럼 3박4일간 온갖 프로그램을 돌리며 학생들을 기쁘게 해주는 오락프로그램이 아니다. 미얀마 여름 불교학교는 학생들이 들어오면 일단 머리를 깎기고 가사를 입히고 한 달간 승려생활을 경험하게하는 단기출가 프로그램이다. 절에서 한 달간 출가하고서 여름을 보내고 방학이 끝나면 빡빡 깍은 머리로 학교로 돌아간다. 그래서 방학이 끝날 즈음에 길거리에서는 머리를 빡빡 깎고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인다. 미얀마 여름불교학교는 우리나라처럼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가 해당된다.이처럼 방학동안이라도 학생들이 절에서 명상을 하며 영혼을 쉬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시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그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하는 학생도 없을 것이며, 왕따나 괴롭힘이라는 문제도 자비명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의 출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출가의 문이 닫혀있다. 출가하려면 매우 큰 결심을 해야 한다. 출가하려고 절에 갔더라도 그 패쇄성 때문에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6개월의 행자생활과 4년간의 기초과정을 거쳐야 비구가 될 수 있다. 비구가 되었다가 세속으로 돌아가면 '속한이' 또는 '속퇴한 자'라는 비난이 따른다. 요즘은 출가의 목적도 불순하기 짝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오로지 수행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출세나 돈을 목적으로 출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출가가 세속의 연장선상에 있거나 도피처가 된 것이다. 또한 옛날의 승가는 수행자를 키우는 시스템이었지만 요즘의 승가는 성직자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다른 종교에서 신과 인간의 매개자 또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성직자처럼, 승려들도 붓다와 인간을 이어주는 중재자 역할의 성직자가 되었다. 중생들을 위해 부처에게 대신 기도해주고 복을 빌어주는 기복술사, 죽은 이들을 천도시켜주는 영적인 힘을 가진 영매술사, 주술사나 마법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출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붓다의 진짜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공간이 열려있다.

미얀마 절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누구든지 오면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절은 수많은 방들과 명상홀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절에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다. 머물면서 붓다의 말씀을 되새기며 명상을 할 수 있다. 명상을 하면서 삶을 반조하며 조용히 내면을 성찰할 수 있다. 미얀마인들은 삶이 지치고 힘들면 절에 들어간다. 절에 가서 명상을 하며 휴식기를 갖는다. 부부싸움을 하여 사이가 나빠지면 절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절에서 명상을 하며 삶을 뒤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미얀마 절은 출가자보다 재가자가 더 많이 산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우리나라 절은 '고요한 산사'를 떠올리지만, 사실 고요한 산사는 패쇄된 공간이며 그들만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고요한 절은 붓다의 말씀이 살아숨쉬는 곳이 아니고 생명력이 없고 죽어있는 공간이다. 절은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여야 하는 것이다.
미얀마 절은 그래서 절 같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단 주거시설 같다. 아침과 점심 시간에는 공양간 앞에 긴 줄이 형성된다. 승가는 승납순으로 재가자는 나이순으로 줄을 선다. 모두가 한 공간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선방은 우리나라처럼 스님 선방과 보살 선방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 선방과 남자 선방으로 나뉘어 있다. 수많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명상을 한다. 그럼 어느쪽이 '함께 가는' 대승인가? 스님들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참선을 하고 신도들은 그저 기복생활에만 전념하는 것이 대승인가? 아니면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모여서 함께 정진하는 남방의 절들이 대승인가? 스님이 찾아가도 방이 없다고 푸대접하는 우리나라 절들이 대승인가?


법이 열려있다.

이것은 신행생활과 관련된 문제이다. 스님들이 출가를 하는 목적은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이 목적은 스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초기 대승불교는 재가자들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대승은 수행이 출가자의 전유물이 아니고, 재가자들도 또한 재가에 살면서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굉장한 선언이었다. 모두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고,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승은 어떤가? 수행은 여전히 출가자들에게만 해당하고 재가자는 기복신앙에 매달리고 있다. 사실 출가자들도 수행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럼 출가자는 수행하지 않고 뭐하는가? 경전공부라도 하는가? 글쎄....
미얀마 불교는 신행생활로 경전공부와 수행, 두 가지 뿐이다. 그 이외에 기도, 염불, 절, 사경, 그 어떤 곁가지 수행은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오직 위빠사나 수행밖에 없다. 출가자는 5단계의 승가고시를 패스하기 위해 오랫동안 경전공부에 매달리지만, 재가자는 오직 명상만 한다. 재가자도 승가고시에 응시할 수 있지만 대부분 명상이 유일한 신행생활이다.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라는 붓다의 유언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미얀마에서는 수행은 어려운 것이며 깨달음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므로 신도들은 기도나 하면서 복이나 빌어라라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붓다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누구나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누구나 열심히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미얀마에서 매일 찬팅하는 법귀의에 대한 게송만 보아도 법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은 부처님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힌두교에서 밀려 점점 그 세력이 줄어들어가자,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신도들의 기호에 맞추어서 교리를 수정해가면서 교세를 확장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인도 민중들이 좋아하는 기도, 주력, 염불, 등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많은 방편을 만들어서까지 교세를 유지하고자 했건만 오히려 불교가 소멸해버렸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방편을 너무 구사하면 오히려 불교의 특성을 잃어버려 민중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불교라고 별다는 종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미얀마에서 불교가 활발하게 살아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방편을 만들지 않고 정법을 그대로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걸 보건데 바른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무한한 포용성을 가지고 있는 대승은 점점 세력을 잃어가면서 기독교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바른 법을 고수하고 있는 소승은 여전히 온 국민이 불교도이다. 자타일시성불도를 부르짖으며 불국토 건설을 기치로 내건 대승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 거창한 구호를 내걸지 않았어도 소승은 외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국토를 유지하고 있다. 왜 이런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미얀마는 63년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받았지만 여전히 불교를 신봉하고 있고, 한국은 미군이 들어오자마자 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것이 무슨 현상일까?

 

 


달마대사와 양무제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중국의 황제보살이라고 칭하는 양무제가 마중나왔다. 양무제가 물었다. 
“짐이 즉위한 후로 스님들을 받들고 사찰과 불탑을 건립하고 경전을 펴내고 불상을 수없이 조성했는데, 짐의 공덕이 얼마나 크다고 보십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했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본체가 맑고 공적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는 세속적인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무제는 두 번째 질문을 하였다.
“불법의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째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는 확연하여 아무 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요?”
“나도 모릅니다!”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의 말뜻을 알지 못하고, 나중에는 달마대사가 자신을 놀리는 줄로 여기고 얼굴까지 붉힌 채 말이 없었다. 

달마 대사께서 처음 중국에 와서 절을 보았을때 절이 너무 화려한 것에 놀랐다. 단청으로 잘 단장된 많은 화려한 전각들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절이 수행하는 공간이 아니고 기도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절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고 복을 비는 곳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스러운 것을 찾으며 기복생활에 치중하면서, 수행이 뭔지 텅비어 있어 성스러울 것조차 없는 깨달음이 뭔지도 모르는 양무제와는 마음이 맞지 않았다. 그는 양무제와 결별하고 양자강을 건너 소림사로 갔다. 소림사도 역시 화려한 전각에 기복신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행이 뭔지 몰랐다. 그는 소림사에서 나와 뒷산에 올라 동굴에 거쳐를 정했다. 그는 동굴에서 머물며 9년 동안 면벽을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도가 아니고 명상을 하며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불쌍한 중국인들에게 그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9년이나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그는 9년을 기다른 끝에 그것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을 만났다. 그가 2조 혜가 대사이다. 그는 혜가 대사에게 바른 법을 전하고, 자신을 시기질투하는 중국 승려들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것이 오늘 날의 선종이다.

중국에 최초로 수행불교를 가르친 달마대사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나이든 노보살님들이나 찾아오는 곳이 되어간다. 젊은 사람들은 성당이나 교회를 선호한다. 이것은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얀마 불교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불교가 국민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절이 열려있고 출가가 열려있고 법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대승인가?

 

- 석무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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