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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생활 속의 수행_남상욱님

일장춘몽


요즘 아침마다 단상에 올라 부대 사열을 한다. 

나의 장병들은 텃밭에 도열해 있는 여러 작물들이고 사열 지휘관은 마당에 놓인 물뿌리개이며 군악대는 각종 새소리이다. 부대 깃발은 작물마다 붙인 푯말이고 단상은 현관앞 발코니이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나의 휘하 부대를 아침마다 도열시켜 경례를 받고 각 부대 장병들의 사기를 점검한다.

지난 가을에 창설된 마늘부대는 겨우내 사단장의 해외순방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동장군 부대와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살아남은 놈이 몇 되지 않는지라, 며칠 전 상추부대원을 대거 전입시켜 보충하였다.

또한 놀고 먹는 건달부대를 만들기 위해 제멋대로 잘 큰다는 땅콩부대를 최근 신설하였으며, 해마다 반복되는 부대신설도 귀찮은 노릇이라 몇 년 씩 그냥 내버려 둬도 된다는 도라지, 더덕 등의 땅굴 부대도 창설하였다.

건달부대의 명성에 걸맞게 풍류를 즐기고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사단 문선대(위문단)격인 꽃씨 부대를 대거 창설하였을 뿐 아니라, 각종 회식에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한 과일나무 부대도 만들었다.

아무튼 이놈들 덕분에 매일 아침 사열대에 서는 재미가 쏠쏠하다. 단상에 설 때 마다 사단장이 되기도 하고 학교의 교장이 되어 학생들에게 일장 훈시를 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왕이 되어 납작엎드린 대신들의 조회를 받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로빈슨 크루소의 독백이나 유아기 물활론적 사고를 즐기며 혼자서도 잘 놀고 있는데, 어제는 옆 집에 교장으로 퇴직하신 분이 홀로 적적한 나머지 친히 오셔서 가라사되 '내가 언제 교장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나네그려' 하신다.

그랬다, 은퇴자들은 교장이었고 군대의 사단장이었고 회사의 중역 또는 일반 사원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때 그의 직책이었지 그는 아니었다. 자기나름의 무대에서 여러가지 역할의 거죽을 쓰고 드라마를 엮어왔을 뿐이다. 

그것들 던져버리고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으니, 가끔 제 멋대로 드라마를 만들어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도 퍽 재미있다. 어차피 인생은 일장춘몽이고 직책이나 배역이라는 것도 입고 벗는 의복이나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허나, 꿈속에서 꿈인 줄 알고 드라마속에서 드라마인 줄 알아야 하거늘, 꿈을 깨야 꿈인 줄 알고 드라마가 끝나야 그것이 비로소 한 편의 드라마였음을 알게되니, 모든 희로애락의 질곡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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