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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살며 사랑하며

SBS스페셜 - '차마고도(茶馬古道) 1000일의 기록-캄'

‘SBS 스페셜’은 이 ‘차마고도(茶馬古道)’ 전구간을 세계 방송사상 최초로 3년여에 걸쳐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실크로드, 동서양을 대륙으로 잇는 대표적인 문물 교역로이다. 내륙 아시아의 험로를 관통해 중국과 유럽을 이어주던 문명의 이동통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오래된 동서 교역로가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차마고도’. 차와 말의 무역이 이뤄지던 오래된 길이라는 뜻이다. 

낯선 그 이름처럼 신비에 둘러싸인 ‘차마고도’를 ‘SBS 스페셜’이 찾았다. 오는 3월 11일과 18일, 2주간에 걸쳐 방송될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캄’(박종우 연출)이 그 프로그램이다. 

‘차마고도’는 중국 남부에서 티베트를 지나 인도를 거치는 교역로이다.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교환되던 통로로 중국 남부의 험난한 산악과 협곡지대를 모세혈관처럼 이어주던 고대의 문명 교역로였다. 

‘차마고도’의 중심부엔 ‘캄’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고 한다. 캄 지역은 중국 정부가 외부에 공개를 꺼리는 마지막 미개방 구역이다. 캄은 티베트와 중국 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부족국가의 연합체로 전체 티베트의 1/3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을 지배하고 있다. 메콩강, 살윈강, 양쯔강 등 3개의 대하가 협곡을 이루며 나란히 흐른다고 하여 삼강병류 또는 동방대협곡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서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동안 미국 내셔널지오그래픽 TV와 일본 NHK 등 세계 유수의 방송사들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도했으나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해 번번이 실패했던 배경도 있다. ‘사상 최초로 베일을 벗긴다’는 표현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작진은 외국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중국 당국 설득에만 수 개월을 소요한 끝에 HD 촬영 시스템을 현지에 반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갖은 고생 끝에 캄 지역의 험준한 자연미를 생생한 고품위 영상에 담아 내고야 말았다. 촬영 도중 소금 짐을 실은 말에 떠밀려 제작진이 30여 미터 절벽으로 추락하는 바람에 프로듀서가 부상하고 HD카메라가 파손되는 사고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SBS 스페셜’은 이 ‘차마고도’ 전구간을 세계 방송사상 최초로 3년여에 걸쳐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2004년 2월부터 3년 동안의 대장정 끝에 빛을 보게 된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캄’은 신비로운 자연 풍광과 수려한 영상으로 화제작이 될 것이라고 제작진은 확신하고 있다. 과거 한번도 외부세력에 정복된 적이 없었던 고대 왕국의 신비와 ‘차마고도’ 마지막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서유정 SBS 교양책임 PD는 “프로그램 전체에서 제작진의 집념과 혼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영상미와 음악, 작가 정신 모두 세계적 수준에 이르러 시청자의 기대를 만족시킬 것이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자료=osen) 


제작사(자) : 독립 프로덕션 '인디비전'(박종우 PD) 

차마고도 취재의 계기가 된 것은 고서점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이었다. 2004년 2월, 중국 운남성 리쟝. 동파교의 신년행사 취재를 위해 자료 수집중이던 나의 시선이 한 고서점 벽에 붙어있던 사진에 머물렀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리쟝의 고색창연한 고성,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부인 사방가의 돌길에 줄을 지어 가고 있는 말들의 행렬을 찍은 사진이었다. 묵직해보이는 자루를 두개씩 짊어진 말의 캐러밴 행렬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 그거요? 차마고도를 다니는 마방들입니다. 자주 왔었는데 몇 년전부터는 안 보이네요” ‘차마고도? 마방이라?’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 사람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느냐는 내 물음에 책방 주인은 “이제는 그 사람들 만나기 힘들지”하며 말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캄으로 가야지요” 

‘캄이라고?’ ‘캄’이란 단어를 듣자 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89년 티벳의 수도 라싸. 당시 나는 계엄령이 발효된 그곳에서 잠입 취재를 하고 있었다. 티벳 독립을 외치며 일어난 소요사태로 라싸 시내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현재 중국의 지도자인 후진타오가 당시 티벳공산당서기장으로, 직접 헬멧을 쓰고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벌여 원성이 자자했다. 무장군인들이 시내 곳곳에서 거친 검문을 하고 있었고 라싸 주변의 거대한 사원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철저하게 파괴된 그대로 방치된 채 주민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도 라싸에는 티벳 전역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온 순례자들이 끝없이 모여들었다. 그 순례자들 중에 눈길을 확 휘어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우 먼 길을 걸어 온 듯 헤질대로 헤진 의복, 검문하는 중국 군인에 대한 반항적 태도, 상대방의 눈을 얼어붙게 만드는 섬뜩한 눈길, 머리에 묶은 붉은 실타래, 검게 그을린 피부...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강빠한즈들입니다. 싸움을 잘하고 성격이 거칠어요. 그중엔 강도도 많으니 조심하세요” 중국어로 강빠한즈는 ‘캄파 건달’, ‘캄파 사나이’란 뜻인데, 거지, 악당, 한량, 산적 등 부정적 이미지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원래 캄파는 티벳어로 ‘캄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15년만에 차마고도 마방의 사진을 통해 ‘캄’이란 지명을 다시 접한 나는 1989년 라싸 에서 캄파의 얼굴을 촬영할 때 그들의 강렬한 눈빛에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마고도와 캄을 취재해보기로 했다. 차마고도는 취재 범위도 광대하거니와 최소 3년 이상의 제작기간과 독립프로덕션이 감당하기 힘든 제작비가 예상되는 대형 프로그램이어서 그동안 공동작업을 해오던 프로덕션 낙미디어와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을 하고 2004년 초여름부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막상 취재에 나서보니 캄파들은 3등 민족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마구 싸움이나 일삼는 건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뛰어난 문화를 지니고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차마고도의 첫 취재지는 윈난성에서 티벳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차카롱(중국명 옌징)의 계곡이었다. 메콩강 상류에서 고대 제염방식 그대로 소금을 만들어 마방을 조직해 인근 산악지대에 소금을 팔러 다니는 차카롱 사람들에게 차마고도는 잊혀진 옛길이 아니라 오늘에도 생생하게 이어오는 길이다. 

그러나 이해 가을 캄파 마방의 캐러밴을 촬영하던 나는 절벽의 비좁은 길에서 무거운 소금부대를 짊어진 말에 떠밀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절벽 가운데 자라난 가시나무에 걸려 생명은 건졌지만 1억원이 넘는 HD카메라가 부서져 모든 취재를 중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부서진 카메라 에 더하여 제작비 압박으로 인한 고통은 말이 아니었고 처음 기획했던 제작 스케줄에 차질을 빚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그때까지 촬영한 것들만을 가지고 에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이란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취재 초반 자료조사를 할 당시만 해도 인터넷에서 ‘차마고도’라는 검색어를 치면 그에 관한 정보가 전무했으나 방송이 나간 후 ‘차마고도’는 중국 관련 정보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단어가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 운영하는 아르테TV는 이 프로그램을 포함해 우리가 윈난성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3편을 연속 방영했다. 유럽 최대의 다큐멘터리 채널에 한국의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편성된 것은 한국 방송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차마고도’의 전구간을 계속 취재할 것이라고 밝혔듯이 2005년 초부터 다시 캄에 들어가 차마고도의 구석구석을 취재했다. 2005년,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얼굴’로 유명한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스티브 맥커리가 캄에서 촬영한 사진이 포함된 불교 관련 사진집을 미국에서 출간했다. 그러자 2004년까지는 거의 만날 수 없었던 서구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리의 작업은 국내는 물론 해외방송시장을 겨냥한 것이라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윈난성에서는 란창강(메콩강 상류)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사전 취재를 온 오스트리아 방송 제작팀을 만났고 내셔널지오그래픽TV는 리쟝시와 협약을 맺고 샹그릴라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 계획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차마고도를 따라 캄을 취재하면서 나는 역사의 그늘에 묻혔던 많은 사실들을 알아내게 되었다. 
- 캄이란 곳은 티벳과 중국 사이에 끼어있지만 어느 양편에도 속하지 않은 자기들만의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 티벳과 캄, 중국은 차마고도라는 교역로에 의해 오래전부터 서로 이어지고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 1950년 중국인민해방군에 의한 캄의 수도 참도 침공과 캄 함락은 당시 막 발발한 한국전쟁의 뉴스에 가려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 캄 합병 후 중국이 캄 영토를 감숙, 운남, 청해, 사천, 티벳 등 5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공중분해 시켜버렸다. 
- 캄 멸망 후 캄의 리탕 출신 차마고도 마방 지도자들이 티벳으로 도피하여 자생적 게릴라 조직인 추시 강드룩을 결성했다. 
- 현 14대 달라이라마의 친형이 그 게릴라 조직과 접선하여 캄의 중심지인 리탕 출신 젊은이 5명을 미국 CIA에 소개했다. 
- CIA가 캄의 젊은이들을 비밀리에 일본 오키나와까지 데려와 제주도에서 전투훈련을 받게 하려다 결국 태평양 사이판 섬의 군사캠프에서 훈련을 받게 하였다. 
- 사이판 훈련소는 황해도에 침투시키는 한국 유격대원들을 훈련시키던 스파이 캠프였다. 
- 훈련이 끝난 캄파 유격대원들을 낙하산으로 리탕에 다시 투하하여 대중국 레지스탕스 전투에 참가하게 했다. 
- 10여년간 CIA에 소속된 미국 비행기들이 제3국 항공기로 위장하여 캄에 게릴라 물자를 공급했다. 
- 달라이라마의 친형이 다시 캄의 마방 전사들을 미국까지 데려가 콜로라도주의 특별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 1959년 중국의 라싸 침공으로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할 당시 그는 중국군의 추격으로 거의 생포될뻔 하였으나 캄의 리탕 출신 차마고도 마방대장의 인도로 무사히 히말라야를 넘었다. 
- 달라이라마가 인도 영토로 들어왔을 때 당시 인도 수상 네루가 달라이라마를 중국에 인계하려 했으나 CIA가 개입하여 그 계획이 좌절되었다. 
- 네루의 달라이라마 홀대는 티벳 문화권의 독립국이던 시킴을 인도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였다. 
- 달라이라마가 인도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운 것은 CIA가 리탕의 마방 출신 겔상 노르부를 통해 전달한 20만 달러가 자금이었다. 
- 달라이라마의 인도 망명 직후 4천여명에 달하는 차마고도 마방 전사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인도로 따라 들어왔다. 
- 그들을 골칫거리로 생각하던 인도 정부는 마침 동파키스탄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차마고도 마방 전사들을 동파키스탄으로 보내 비밀리에 방글라데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 당시 차마고도 마방 전사들의 전투력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에 진압당하고 오늘날의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온 차마고도 마방 전사들은 네팔의 무스탕 지역으로 들어가 중국군을 상대로 1970년대 초까지 산발적인 레지스탕스 전투를 벌였다. 
- 키신저의 중국 방문과 닉슨의 대중국 외교 수교로 차마고도 마방 게릴라에 대한 CIA의 지원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게 되었다. 
- CIA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당시 막 왕위에 오른 네팔의 비렌드라 국왕이 중국의 경제 협력을 받기 위해 중국군과 합동으로 무스탕 지역의 차마고도 마방 레지스탕스를 토벌하기 시작했다. 
- 토벌대를 피하기 위해 인도로 철수하던 캄 레지스탕스들이 내부의 밀고로 인도국경을 넘어서기 직전에 네팔군에 포위당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 끝까지 차마고도 마방 게릴라를 지휘하던 마지막 사령관은 캄의 리탕 출신으로 젊은 시절 사이판 캠프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마방 출신이었다. 
- 1950년대 이후 문화대혁명을 거친 30여년 사이에 캄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네팔의 포카라 근처 티벳 난민촌, 북인도 다질링과 시킴 칼림퐁, 남인도 몇군데에는 당시 살아남은 캄 차마고도 마방 출신 게릴라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이들은 이제 70대 중반-80대의 나이로 가슴에 한을 품은 채 한명씩 세상을 뜨고 있다. 차마고도 촬영 중 알아낸 방대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적어도 3-4년간 취재를 계속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2005년, 취재를 위해 윈난성에 있던 나는 80년대 중국 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었던 제5세대 감독 티엔좡좡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더라무>를 보게 되었다. 그 영화는 살윈강 상류인 누강의 윈난성 빙중로 마을에서 차화롱까지 90킬로 길이의 남쪽 차마고도 일부 구간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카메라맨 출신의 감독답게 아름다운 영상에 음향효과와 음악이 뛰어났으나 스토리가 약했다. 이 영화는 ‘하늘에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NHK에도 방영되었는데 중국 주요도시에서 개봉한 결과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무대가 되는 누강 지역은 2004년 말 윈난성과 미얀마 국경 부근의 계곡을 따라 아스팔트 도로가 개통되었다. 티엔 감독이 무슨 이유로 순수한 차마고도의 전통이 남아있는 캄 지역을 외면하고 외곽지역에서 차마고도를 소재로 촬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영화를 계기로 나의 관심은 더욱 캄 지역에 집중되었다. 이제 차마고도의 오랜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차마고도의 취재에 들어가고나서 1년쯤 지났을 무렵인 2006년 초, KBS에서 <10부작 티로드(Tea Road)>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연말에 방영키로 결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캄의 가장 중요한 의식이 밀집되어 있는 신년 축제 행사 촬영을 하루 앞두고 그동안 나와 함께 캄의 계곡을 누볐던 제작팀원이 KBS 팀에 스카웃되어 한국으로 귀국해 버렸다. 2년간 발품을 팔아 겨우겨우 모은 소중한 취재정보들과 함께. 내 촬영 스케줄에 차질을 빚은 사건이었지만 당시 나는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려고 했다. 중국어는 물론 티벳어도 통하지 않고 골짜기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캄. 행사 하나를 취재하려면 직접 그 마을에 찾아가서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겨우 날짜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캄인 것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드넓은 지역을 커버해야 하는 그들의 앞길에 놓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 6월, 나는 칭짱철도의 개통식 취재를 위해 티벳의 수도 라싸에 있었다. ‘현대판 차마고도’로 불리는 칭짱철도는 중국공산당창건기념일인 7월 1일에 맞춰 개통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인 없는 포탈라 궁 전면에는 애드벌룬이 떠 있었고 ‘칭짱철도 개통 경축. 당 중앙의 세세한 관심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7월 1일 오전, 라싸역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 나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공안당국이 촬영을 엄격히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식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일반 티벳인들도 출입이 금지되었다. 개통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칭짱철도 공사를 시행한 중철(중국철도공사) 제10국 공사관계자와 일부 초대받은 티벳 관리, 그리고 중앙에서 내려온 공산당 간부들뿐이었다. 비밀스런 개통식을 벌이고 있는 4미터 높이의 붉은 담장 밖에서 나는 앞으로 티벳과 캄에 닥칠 미래를 생각했다. 이날 하루종일 중국 전역의 TV는 칭짱철도가 티벳에 가져올 경제혜택과 관광객 증가에 대한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라싸 중심가에서 2시간 넘도록 쉬지않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교외의 야영지에서 열린 마지막 차마고도 마방의 해단식을 지켜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칭짱철도 촬영을 끝낸 2006년 가을, 전에 마방 캐러밴 취재 중 절벽에서 떨어져 촬영이 중단됐던 장면을 11월의 캐러밴 시즌에 맞춰 다시 촬영하려고 마방 마을을 방문했다. 그런데 촌장이 “여름에 KBS팀이 와서 마방의 캐러밴 장면을 이미 촬영해 갔다”며 나더러 동일한 팀이 아니었냐고 묻는 것이다. 여름철은 이들이 송이버섯을 따는 시즌으로, 마방은 이 계절에 캐러밴을 움직이지 않는다. 캐러밴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의아한 마음을 가지고 서울에 돌아왔더니 KBS가 만든다던 ‘2006년 12월 방영 예정, 10부작 티로드’는 어느새 ‘방송 80주년 특집, 2007년 상반기 방영 예정, 6부작 차마고도’로 제목과 기획이 변경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방송현실에서 편당 2억이 넘는 엄청난 예산과 인원, 장비를 쏟아 붓는 거대 방송사의 대형 프로젝트는 독립제작사의 작업과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3년 전부터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 아이템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제목을 가지고 촬영하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2006년에는 청해성에서 작업을 하면서 MBC의 황하 10부작 취재팀과 자주 맞닥뜨리기도 했다. 10여명의 스태프에 경량항공기와 모터보트까지 가지고 다니던 황하 취재팀은 황하 유역에 볼거리가 없다는 이유로 황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청해성 남부 지역, 즉 과거의 캄 중앙부까지 취재범위를 넓혔고 이는 나의 취재구역과 자주 겹쳤다. 방송사의 대형 프로젝트를 지켜보면서 지난 3년간 작업했던 촬영 테이프가 창고에서 썩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차마고도 위에서 지낸 지난 1000일간의 기록을 두 편의 다큐멘터리로 엮어내기로 했다. 


그동안 내가 캄에서 보고 들은 그들의 피눈물 나는 얘기, 그 구구절절한 얘기들을 앞으로도 방송 프로그램에 담아낼 수 있을까. 티벳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들조차 1959년 중국의 티벳 침공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1950년의 캄 침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온 세계가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지금 그 사실을 새삼 들추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캄이 멸망한 이래 캄의 모든 지명은 전부 중국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캄의 주민인 캄파의 이름도 과거 우리의 창씨개명처럼 중국식으로 바뀐지 오래다. 가령 골무드라는 지명은 중국식으로 꺼얼무가 되었는데 이제는 누구도 골무드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제쿤도라는 지명도 옥수현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관점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는 티벳 민족이 한결같이 장족으로 표현이 된다. 그 장족으로 표현되는 티벳인 가운데 1/3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티벳인으로 부르는 것보다 캄파로 불러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식민지 시대를 겪은, 남의 지배를 받아본 나라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내가 캄파들에게 가졌던 연민과 동정, 그들의 피로 얼룩진 사연은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차마고도에 대한 기록만은 계속해 나갈 것이다. 차마고도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들, 캄파의 삶 속에서 차마고도가 사라질 때까지. (자료=SBS 스페셜) 


[리뷰] SBS와 KBS, 두 방송사의 '차마고도' 방송을 보고 -오마이뉴스 이영미 기자 

▲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중 한 장면 ⓒ SBS

지난 일요일 많은 시청자들은 의아한 눈길로 < KBS스페셜 >과 < SBS스페셜 >을 보았을 것이다. 두 방송사가 '중국의 차마고도'라는 같은 주제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같은 시간에 방송했기 때문. 두 방송사 모두 '세계 최초'임을 앞세웠고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을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알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같은 주제로 두 방송사가, 그것도 같은 날에 방송을 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흥미를 갖고서 두 방송을 지켜보았다. 서로의 주장을 살펴 보건대 자존심 대결도 만만치 않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데, 같은 곳을 갔다 왔다고 해서 이야기가 같을 법은 없었다. 역시 그랬다. 세상과 사물은 보고 해석하는 자의 관점이다. 두 방송을 모두 본 느낌은? 결론만 말하자면 SBS의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이 훨씬 낫다. 

SBS 차마고도 vs. KBS 차마고도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중국의 차와 티벳의 말을 교환하는, 이름 그대로 차와 말이 교환되던 무역길이다. 이 옛길은 실크로드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중국 원난성과 쓰촨성에서 생산된 소금과 차를 티벳, 인도 등으로 실어 나르던 말 캐러밴의 이동로다. 

해발 5000km에 이르는 가파른 길들은 폭 50cm 정도의 좁은 길로 아래를 바라보면 천길 낭떠러지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신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이 길을 밟아왔다. 이 무역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집단이 마방이며, 프로그램은 마방의 여정을 담고 있다. 

험난한 오지 차마고도 중심부인 캄 지역은 지난 2006년에야 외부 공개되었다. 지금껏 방송으로 다뤄진 적이 없고 미국의 내셔널지오그래픽과 일본의 NHK가 시도했으나 제작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의 방송사들에 의해 세계 최초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는 점도 뜻 깊다. 두 방송사, 좀 더 엄격히 말하면 KBS와 독립제작사 인디비전의 '배틀'이 지난 일요일(11일) 장대하게 시작된 것이다. 

< KBS스페셜 >의 '방송80년 대기획 인사이트 아시아 시리즈 차마고도 5000km를 가다'는 9월 본방송을 앞두고 있고 6부작을 방영한다고 한다. 3월11일 방송은 같은 날 방송 될 < SBS스페셜>의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을 의식해 '우리가 먼저 시작했다'는 방송기획 선점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급히 제작된 탓에 스케치 위주의 연결에다 깊이 있는 눈길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9월에 6부작이 방송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프리랜서의 근성이 빛났다 

▲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중 한 장면 ⓒ SBS

반면 < SBS스페셜 >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은 일단 구성면에서 뛰어나다.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은 프랑스 여인 알렉상드라 다비드넬의 여정에 따라 차마고도를 걸어본다. 그녀는 캄을 최초로 외부 세계에 알린 사람으로 여행금지조처에도 불구하고 캄의 오지를 여행한 모험가다. 100여년 전 발길을 다시 밟아가는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에서는 2개의 시간과 2개의 시선이 등장한다. 그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내가 그 길 위에 서 있는 듯하다. 

이 프로그램이 돋보이는 두 번째 이유는 생생한 기록 때문. 다큐멘터리는 대상에 대한 부지런함과 애정의 기록이다. 마방의 신년제사 의식인 '쏭두'에 대한 기록에는 차마고도 마방의 일상과 종교의식을 담았는데 캄의 자연, 마방들의 민속의상, 경건한 의식 등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밖에 PD가 온몸으로 헤쳐 나가는 장면들도 압권이다. 급류가 흐르는 계곡을 PD가 가죽 끈에 몸을 묶어 건너는 아슬아슬한 장면, 차마고도를 취재하다 벼랑에 떨어져 다치고 1억짜리 카메라가 부서진 사건 등은 '발로 뛴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예다. 모든 화면이 구체적으로 큼직큼직하게 담겨져 있는 것과 내레이션에 충실한 것도 장점으로 꼽고 싶다. 

▲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중 한 장면 ⓒ SBS

세 번째로 사람과 사물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다. 사람들의 노동과 땀, 문명지역과는 다른 그들 삶의 아름다움은 화면 곳곳에 배어난다. 문명의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닌, 독특한 문화를 지닌 강한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곳곳에서 묻어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그것은 빛을 발한다. 

티벳지역 중심지인 라싸 들어온 마지막 마방들은 해단식을 갖는다. 갑자기 몰려든 관광객들. 관광객들은 마방들을 붙들고서 기념 촬영하느라 야단이다. PD는 이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순식간에 관광상품으로 전락한 그들이 가슴 아팠다." 

KBS와 독립제작사 인디비전의 자존심 대결은 첫 방송을 탔다. 어느 방송이 더 나은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각각 오랜 세월 많은 애정을 쏟아부어왔다. KBS는 1년 6개월을, 인디비전은 3년을, 이 차마고도에서 땀을 흘렸다. 각각 노력한 만큼 결실이 나오겠지만 개인 제작자로서 이와 같은 긴 시간이 걸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은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부작으로 만들어진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은 11일과 18일 1,2부가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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