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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불교 공부는 아상을 깨는 것


당신은 열심히 교리 공부를 해서 무불통지無不通知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교학을 끝내고 수행을 시작합니다.
선사禪師를 모시고 참선을 시작합니다.

선사께서 질문을 합니다.
그대는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럼 선사는 그대를 칭찬할까요 아니면 몽둥이 찜질을 내릴까요?
몽둥이 30방입니다
.
그대는 바르게 대답했는데도 몽둥이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선사는 그대를 칭찬할까요? 아니면 몽둥이 찜질을 내릴까요.
역시 몽둥이 30방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침묵으로 대답했습니다.
진리는 언어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것을 침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선사는 그대를 칭찬할까요 아니면 몽둥이 찜질을 내릴까요.
역시 몽둥이 30방입니다.

아니, 정답을 맞추어도 30방, 몰라도 30방, 침묵해도 30방이면 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깨달음은 알고 모르고에 있지 않습니다.
아니, 알고 모르고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 안다는 자부심, 그 자만을 깨뜨리는 데에 있습니다.

수행은 아상, 에고, 자부심, 유신견, 자아를 무너뜨리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자비로운 스승이라면 몽둥이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붓다의 가르침을 장광설을 토하며 막힘없이 설한다고 해도
저승사자는 당신을 봐주지 않습니다.
가혹한 윤회의 홍수가 당신을 끌고 가버립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갑니다.
불교 공부는 세속의 지식 쌓기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유신견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요?
스승의 몽둥이가 약인데, 몽둥이가 없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유신견을 찾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러면 유신견이 어디에 있습니까?
유신견은 욕망, 분노, 어리석은 생각으로 자신의 몸을 나툽니다.
우월감과 열등감, 시기와 질투, 자만과 인색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원숭이처럼 날뛰는 그 마음이 유신견의 몸통입니다.
아는 체하고 잘난 체하는 그놈이 유신견입니다.
생각과 감정, 욕망을 일으키는 그놈이 유신견입니다.
그 생각과 감정, 욕망을 좇아가지 않고 놀아주지 않으면 유신견은 소멸합니다.
당신이 그놈에게 동조하고 동일시 할수록 덩치가 커져갑니다.

불교 공부는 유신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지, 그것을 키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상, 자부심, 자만, 에고를 키울 바에는 안 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불교 공부는 머리를 가지고 논리로 알 수 없습니다.
결코 지식 쌓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도 지식을 쌓았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실천하지도 않을거면 뭐하러 머리 아프게 지식을 쌓는지 당최 알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성제, 팔정도, 연기, 사념처를 배웠다면 다 배운 것입니다.
실천이 어렵다고요?
알아차린다는 것이 어려운가요?
왜 알아차립니까?
유신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불교 공부는 이렇게 간단합니다.

붓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내가 가르친 것을 그냥 받아들이지 마라!
나의 권위에 복종해서 맹목적으로 믿지 마라!
네 스스로 와서 보라!"

- 석무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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