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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생활 속의 수행_남상욱님

백수일기


한국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행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더욱 격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먹고 싶었던 차진 쌀밥에 쪽쪽 찢은 김장김치와 된장찌개를 실컷 먹었고 떡국과 더불어 누가 주지도 않는 나이도 자진해서 한 살 더 먹었다.

추운 날은 백수 공식 유니폼 츄리닝 차림으로 배추전 한 쪽 붙여먹고 온수매트 위에서 여러가지 자세로 엑스레이 찍기 놀이를 하다가 노는 입에 염불하듯 행선도 하고 좌선도 했다. 

참, 좋~다.
찾는이 없어 고요하고 적막하니 마음도 그와 같아 다만 그것을 즐겼다. 관계에서 벗어나 오롯이 있으니 텅비고 충만하여 딱히 무엇으로 채울 것이 없다. 한 생각마저 사라지니 여여하고 여여하다.

평생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열심히 하겠다는 칼날같은 결심을 하고 닥달하며 살았으니,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또 얼마나 좋은가?

세상은 나 없이도 너무 잘 돌아가니 나 하나쯤 이렇게 논들 무슨 상관인가? 나 또한 지난 삼십년간 나름 열심히 일했으니 저질러 놓은 일도, 세상에 진 빚도 어느정도 갚지 않았는가? 

성실히, 열심히, 최선을 따위의 말로 더 이상 나를 구속하지 않으련다. 적어도 지난 오십년 이상 내 속을 지배해 왔으니. 이제 더 이상 내 안에 그 무엇이 있어 감히 명령을 내리고 통제한단 말인가?

누가 뭐래도 내 식으로 살면된다. 아니, 그렇게 날 세울 거 없이 그냥 살면된다.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고, 마냥 놀기도 하다가, 뭔가 하고 싶은 일 있으면 하고 뭐, 그러다보면 또 밥값은 할테지.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 않고 무엇을 이루고자 계획하지 않으련다. 그저 인연닿는 것들 재미있게 하면 될 일이다. 의미있는 일이라면 재미없어도 그냥 하면되고, 내키면 착한 일도 하며 세상 빚도 좀 더 갚고 . . . .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으면 좋겠다. 아울러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으면 좋겠다는 이 바램마저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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