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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무애자재(無碍自在)


노스님이 젊은 스님에게 말했다.
"남방에서는 깨달은 사람은 성관계가 불가능하다고 한다지?"


젊은 스님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남방에서는 깨달음의 단계를 네 단계로 나누는데, 수다원, 사다함에서는 성관계가 가능하지만 아나함부터는 성욕(거친 욕망)이 완전히 제거되어 성관계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건가?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생사가 자유로운데 성욕에서 자유롭지 못한단 말인가? 성관계를 할 수는 있는데 안 하는 것이지. 성욕을 완전히 제거해버리면 그건 목석이나 *무정물(無情物)과 뭐가 다른가?"

"성욕에서 자유란 성욕을 마음대로 즐겨도 된다는 자유가 아니고 성욕이 일으킬 대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동요하지 않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말입니다."


"욕망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지만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야. 깨달음은 중도를 성취하는 것이지. 모든 것에서 무애자재 해야 하는 것이지."

"중도가 그런 뜻입니까?"

"그렇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고, 번뇌즉보리이고, 생사즉열반이지."

"초기경전에서는 번뇌의 완전한 소멸이 구경의 깨달음이고, 더 이상이 윤회하지 않는 것이 무여열반이라고 가르치는데요."

"그래서 소승이라고 하는 거야. 깨달았으면 다시 태어나 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것이야. 이게 대승이지."

"그게 이론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이 소원대로 이루어질까요?. 번뇌즉보리라는 말은 욕망은 놓기 싫은데 깨달음은 얻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 아닐까요? 어떤 욕망이라도 그것에 끄달리면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생사즉열반 이라는 말은 영원히 개체적 자아를 가지고 존재하고픈 에고의 표현이 아닐까요? 아시겠지만 이것은 **상견(常見)에 해당합니다."

"욕망을 왜 제거해야 하는 것이지?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자체가 자연의 법칙이야. 자연의 흐름인데 굳이 제거해야 할 이유가 있나?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과거의 습관적 성향이고, 거기에 동조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도 하나의 욕망이야. 욕망을 나쁜 것이라고 보는 것도 잘못이야."

"물론 욕망을 나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분노이고 깨달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수행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긴 하지만 그 욕망에도 끝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남,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욕에도 끝이 있는 것입니다. 성욕에서 해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모두가 성욕을 제거해서 목석이 되어 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유지 되겠나? 우주가 자신에게 맡긴 직분에 맞게 해야할 의무를 다하면서 집착없이 행위를 하면 되는 것이야. 어떤 행위이든지 결과를 바라지 않고 현재 해야할 일에 집착없이 충실히 행하는 것이 보살이 가는 길이지."

"그 말씀은 힌두교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행위의 요가'와 같은 논리인데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일 수 있겠지만 결코 불교의 교리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파자소암이라는 화두에서 보면,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고 목석이 되는 것이 결코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모든 욕망, 즉 해로운 마음을 모두 제거하면, 지혜, 자비, 평온과 같은 유익한 마음만 남습니다. 결코 목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단계에서 가슴이 열리며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낄 때, 그것을 잘못 해석하면 수행이 거꾸로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그것이 욕망의 다른 표현인지 냉정하게 자신을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석무념 스님


주)  *무정물(無情物) :  나무·돌 따위와 같이 감각성이 없는 물건

주) **상견(常見)  :  사람은 죽으나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五蘊)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 불변(常住不變)한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 ↔ 단견(斷見)·무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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