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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뗏목


대중들이 차를 마시는 중에 젊은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에 의지해서 수행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경전에 밝은 나이든 스님이 한 마디 했다.
"그건 법집(법에 대한 집착)이다. 붓다의 팔만사천 법문이 다 방편으로 설한 것이거늘, 법집도 아집(자신에 대한 집착)과 마찬가지로 타파해야 하는 것일세."
그러자 젊은 스님이 반론을 제기했다.
"스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붓다는 방편으로 설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방편이라는 말은 어떤 목적으로 임시로 진실이 아닌 것을 선의로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데, 붓다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붓다는 진실만을 말하는 분입니다. 붓다는 차라리 침묵할지언정 선의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에 '내가 설한 법은 뗏목과 같은 것이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 법도 버려야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비법이랴(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라는 구절을 듣지 못했는가?"
"스님께서는 강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강은 세간과 출세간을 가르는 강, 욕망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강이지."
"스님, 강은 감각적 욕망의 폭류, 존재의 폭류, 견해의 폭류, 무명의 폭류입니다. 한마디로 번뇌의 폭류입니다. 붓다께서는 '번뇌의 폭류를 건너는 뗏목은 팔정도다(S35.2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정도 닦아서 번뇌의 폭류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강을 건너셨습니까?"
"아니, 아직 건너지 못했지."
"스님은 강을 건너기도 전에 뗏목을 버릴 생각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고 나서도 법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강을 건넜으면 이미 팔정도가 온몸으로 발현됩니다. 팔정도가 뭡니까?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정진, 바른 선정입니다. 강을 건넜으면, 항상 바른 견해를 갖추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말을 할 것이고, 바르게 행위할 것이고, 바른 생계수단을 가질 것이고, 바른 알아차림과 정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고, 항상 고요와 평온 속에 노니는 바른 선정을 갖춤으로서 온몸으로 팔정도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넜다고 팔정도라는 뗏목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금강경에 나오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법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강을 건너야 합니다. 강을 건너면 붓다의 가르침이 온몸으로 실현됩니다. 이 온몸으로 실현되는 법이 두 번째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도와 과 그리고 열반입니다. 좁은 의미의 법은 이것만을 이야기합니다. 법을 성취하면 이미 온몸과 마음이 법(진리) 자체이므로 법을 버릴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뗏목을 버려라' 했을 때의 뗏목은 이 현상으로서의 법을 말합니다. 이것은 수행 과정 중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광명, 지혜, 희열, 경안, 행복, 확신, 분발, 확립, 평온, 욕구라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수행상의 열 가지 경계라고 합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광명이 일어나고, 기쁨과 희열이 일어나고, 고요와 평온, 행복감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집착하면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위빠사나 수행으로 청정함에 도달했을 때, 그 청정한 견해에 집착하고 즐기고 재산으로 여기고 내 것으로 간주한다면,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움켜쥐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뗏목을 비유해서 설한 것을 이해하겠는가?'(M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물며 비법을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할 때의 비법은 탐욕, 성냄, 시기, 질투, 인색과 같은 해로운 법을 말합니다."

붓다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서 5주째에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 해탈을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존중하고 머물 것인가?"
그래서 의지처를 삼기 위해 세상을 둘러보며 계율, 선정, 지혜, 해탈, 해탈지견에 있어서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것에서도 당신을 능가하는 존재를 찾지 못했다.
"아무도 존중할 사람도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계, 삼매, 통찰지, 해탈, 해탈지견에 있어서 나를 능가한 존재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무리라."[S6.2]

붓다 당신도 자신이 깨달은 법에 의지해서 머물렀는데, 붓다의 가르침을 모두 방편이라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법집이라고,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붓다의 마지막 유언도 듣지 못했는가?
"너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自歸依法歸依)"

강을 건너기도 전에 뗏목부터 버릴 생각하는 금강경 병에 걸린 사람들이여!
마음 속에 여전히 탐욕이 일어나고 성냄이 일어나고 어리석음이 일어나고...
여전히 거친 번뇌의 폭류가 흐르고 있는데 뗏목을 버리면 어쩌겠단 말인가?

- 글: 석무념 스님 / 그림: 이미지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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