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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핵심

젊은 스님이 노스승에게 물었다.


“스님,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자네는 지금 엉덩이가 바닥에 닿고 있는 느낌을 아는가?”

“압니다.”

“그 앎을 유지하라. 아주 쉽지? 이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이 그렇게 쉬운 것입니까?”

“수행은 별 거 아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자네와 하등에 관계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앎’을 유지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스님.”


젊은 스님은 돌아가서 가부좌를 하고 관찰을 시작했다.
그런데 수행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고 앉아있으면 온갖 번뇌들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아무리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을 하려고 해도 어느새 번뇌에 휩쓸려 번뇌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젊은 스님은 다시 스승에게 가서 물었다.


“스님,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객관적 입장에서 관찰하려고 해도 어느새 주관적 입장이 되어버립니다. 스님, 차라리 ‘무상, 무아를 계속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요? 어차피 무상, 무아를 깨닫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무상, 무아를 계속 사유하는 것이죠. 그렇게 무아를 계속 생각하고 있으니까 번뇌가 전혀 안 일어나던데요.”


“그것은 관념 수행이다. 결코 관념으로 수행하면 안 된다. 일어나는 것을 막으면 안 된다. 어떤 것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고 관찰하고 이해해야 한다. 왜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이치를 관찰하라.”


“이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번뇌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거기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 번뇌를 일으키는 주체가 없다.”


젊은 스님은 다시 돌아가서 수행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번뇌 속에서 헤매다가 문득, 이건 스승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했다.그래서 스스로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었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을 관찰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응어리, 결핍감, 욕구불만 등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관찰하자 응어리가 풀리면서 번뇌가 확 줄어들었다.
그는 그것에 재미를 붙여서 번뇌 줄이는 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공부하다가 어느 새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했다.
마음이 드디어 정지된 것이다.
텅 빈 상태에 있으니 편안하고 고요하고 때로는 행복했다.
그는 ‘이런 맛에 수행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은 좋은데, 거기서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스승에게 찾아갔다.


“스님, 눈을 감고 앉아있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좋은데 거기서 진퇴가 없습니다. 여기가 끝입니까?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안 들죠? 이것이 혹시 '삼매'라고 하는 것입니까?”

“눈만 감으면 고요한 상태에 들어가 꼼짝달싹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경지라고 할 것도 없는 ‘마음이 죽은 상태’이다. 선종에서 '승묘경계'라고 부르지.”

“그럼 공부가 잘못된 것입니까?”

“그것은 견해가 잘못되었다. 수행은 결코 느낌이 아니고 ‘앎’이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추구하면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심해탈을 이루었으니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는 없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지 않는가? 수행은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결코 고요함, 편안함, 황홀한 느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물론 그런 부수적인 현상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 절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네.”

“스님, 그 이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붓다께서 그렇게 간곡히 설명했는데 아직도 모르겠단 말인가? 무상, 고, 무아 라고 붓다께서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더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직 진짜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지. 자아의 죽음 말이야. 공부는 때가 무르익어야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야. 계속 아는 마음(앎)을 유지하면서 지혜를 키워야 해. 그러면 가슴이 받아들일 때가 올 거야. 생각을 정지시키고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수행이 아니라는 말이야."


노스승은 노파심에서 몇 마디 덧붙였다.

“이 공부는 말 그대로 깨달음이지. 인식의 전환, 각성, 의식의 질적 변화 같은 것이지. 어떤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네. 깨달음은 행복한 상태에 들어있는 것보다 훨씬 큰 해탈감이 있지. 고요함, 편안함, 번뇌로부터의 해방감, 평온, 행복감 등을 깨달음으로 착각하지 말게. 요즘은 착각 도인들이 너무 많아.”


- 석무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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