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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젊은 스님이 처음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는 2002년 2월 초순이었다.
시원했던 날씨가 이제 뜨거운 열대기후로 막 바뀌려던 때였다.
거리에는 2차대전때 생산되었을법한 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세상에 출현한 모든 종류의 차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혹시 산업혁명 시대에 생산한 골동품 차를 하나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을텐데."
그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택시를 탔다.

택시는 굴러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내장은 거의 뜯겨나가고 계기판의 속도계는 눈금이 움직이지 않는데다 
차 문은 내피가 없어서 창문의 작동원리를 쉽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나마 운전대와 클러치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이 차가 움직일 수 있다고 증명하고 있었다.
도로는 군데군데 움푹 파여서 그것을 얼마만큼 잘 피해 달리는가에 따라 베테랑과 초보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가 머물 명상선원은 건물은 그럴듯했지만 지붕은 오직 함석뿐이었다.
함석지붕과 방의 천장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외부의 뜨거운 열기를 바로 방으로 전달해주는 난방시스템이었다.
화장실의 재래식 변기 위에는 샤워시설이 돼 있었는데, 용무와 샤워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한 생활시설에 놀랐다.
"원 세상에! 어느 누구도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 곳에서 용변보고 바로 샤워할 수 있다는 걸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사원의 주위는 온통 논밭이었다.
건기임에도 논에는 물웅덩이가 있었고, 물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물소가 누워있었다.
물웅덩이가 많아서인지 모기도 많았다.
한국의 모기는 영리했지만, 미얀마 모기는 매우 우둔했다.
한국 모기는 때려잡으려는 손 그림자만 보아도 잽싸게 달아나버리는데, 거기 모기는 맞아죽을 때까지 제 할 일만 했다.
"여기는 사람이나 모기나 느긋하고 여유가 있네."
방에 있을 때나 선방에서 정진할 때에는 언제나 모기장은 필수품이었다.
"깨달음을 추구하려면 37조도품( 도를 닦는 데 필요한 37가지 필수품 )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모기장도 추가해서 38조도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벽에는 도마뱀이 기어 다니면서 벌레들을 제거해주고 있었다.
"야! 여기 도마뱀은 애완용이 아니고 해충박멸용이구나!"
어떨 때는 카멜레온이 나타나 눈을 360도 굴리면서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 여기는 굳이 동물원에 갈 필요도 없이 침대에 누워서 동물들을 관찰할 수 있구나!"

환경이 바뀌어 잠시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지만, 그것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불교 교리였다.
그는 한국에서 항상 중도적 사유를 하도록 세뇌되어 있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번뇌즉보리 煩惱卽菩提 )"
"생사윤회가 곧 열반이다( 생사즉열반 生死卽涅槃 )"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번뇌를 제거해야 열반에 들 수 있다. 아라한과를 성취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너무 다른 교리가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는 한 미얀마 스님을 만나 이 문제를 꺼냈다.
그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승가고시 5단계를 모두 통과하여 영광스런 담마짜리야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 그 나라 승려의 5%만이 담마짜리야(法師)에 합격 한다고 함. )

"우리나라에서는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마음이 번뇌로 복잡한데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번뇌가 소멸되고 마음이 고요하고 정신은 맑게 깨어있을 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번뇌로 오염된 마음으로는 결코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아我’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무엇이 윤회를 한단 말입니까?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은 아마도 힌두교 교리를 차용한 것일 겁니다.
결코 붓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선불교에서도
‘惺惺寂寂 -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어야 한다.’ ( 성성적적 : 惺惺깨어있어, 寂寂마음이 고요함 )
‘心行處滅 - 마음 가는 길이 끊어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심행처멸 : 마음으로 사유思惟하는 것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것 )

이것은 번뇌가 거의 없는 아주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깨달음에 필수 요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번뇌즉보리’라는 말은 결코 번뇌스러운 마음에서 한 생각만 돌리면 깨달음이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럼 ‘번뇌즉보리’는 무슨 뜻일까?

초기불교는 온통 번뇌의 소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괴로움이다(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다(원인의 진리)
갈애의 소멸이 열반이다(소멸의 진리)
갈애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팔정도(방법의 진리)를 수행해야 한다."<사성제>

"과거 미래 현재의 붓다들은 마음을 오염시키고 지혜를 약화시키는 5장애를 버리고, 4가지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7각지를 있는 그대로 계발하여 무상정등정각을 깨닫는다."<상윳따 니까야>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다."<상윳따 니까야>

"비구들이여, 유위법, 무위법 가운데 탐욕의 소멸이 최상이다. 곧, 자만의 분쇄, 갈증의 제거, 집착의 근절, 윤회의 단절, 갈애의 제거, 탐욕의 사라짐, 소멸 즉 열반이다."<앙굿따라 니까야>

"사람들은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을 보기 어렵다."<맛지마 니까야>

미얀마의 스승들도 번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제거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지도했다.
그래서 젊은 스님은 번뇌의 제거를 지상 목표로 정하고 수행을 시작했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거하고, 알아차리고 제거하고, 알아차리고 제거하고.......
그러나 번뇌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끝없는 번뇌와의 싸움에 번뇌는 조금씩 소멸되어 갔다.
그러다가 다르게 이야기 한다는 스승을 만났다.
그는 스승에게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번뇌즉보리’라고 하는데 사야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스승은 권태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번뇌는 적이 아니다. 없애려고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번뇌는 그대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번뇌는 연기(원인과 결과)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그대와 하등에 상관이 없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번뇌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원인을 관찰하라.
번뇌에 개입하지 말고 오직 주시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이치를 관찰하라."

젊은 스님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을 관찰하라는 말로 이해했다.
"왜 이런 번뇌가 일어날까?"
그는 내면으로 들어가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응어리, 결핍감 등이 보였다.
그런 응어리와 결핍감을 이해하자 번뇌는 많이 줄어들었다.
가끔씩 고요가 찾아와 머물다 가곤 했다.
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하면, 두 시간 정도 평온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번뇌를 어느 정도 *조복 했다는 증거였다. ( 調伏 : 신구의 (身口意 삼업三業을 다스려 모든 악행을 굴복시키는 것 )
그렇게 미얀마에서 6년을 머무르며 수행했다.
"오! 붓다도 6년 고행을 했다고 하는데, 나도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선방이나 토굴에서 정진했다.
그러다가 한 스승을 만났다.
그는 다시 이 문제를 꺼냈다.
"‘번뇌즉보리’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스승은 흥미로운 눈길로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수행했는가?"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번뇌가 일어난 원인을 관찰합니다. 원인을 관찰하면 번뇌는 소멸합니다.
번뇌가 없고 마음이 고요할 때는 그 고요한 상태를 아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대는 여전히 번뇌와 싸우고 있군. 번뇌는 적이 아니다."

그 말은 미얀마에서 만났던 스승이 했던 말하고 똑 같았다.
"그 말은 저도 이해합니다. 모든 것에는 ‘아我’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그런 이원적인 사고로는 깨달을 수 없다."

"쉽게 설명해주십시오."

"수행은 두 가지로 할 수 있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계속 제거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엄청난 세월을 요구한다. 그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번뇌(탐욕, 갈애, 집착)를 제거하는 것은 일시적인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지어진 것이다. 그것은 심해탈心解脫일 뿐이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탐욕을 제거하는 쪽과 탐욕 그 자체가 비어있음을 깨닫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이 쉬울까?"

"탐욕 자체가 비어있다는 이치를 깨닫는 쪽이 훨씬 쉽겠습니다."

"그렇다. 이 공부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지 뭔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탐욕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실상을 깨닫기 위한 수행방편이다.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보면 탐진치 그대로 보리다."

"아!"
젊은 스님은 뭔가 이해가 왔다.
그는 밖으로 나가 행선을 하면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비어있음을 보았다.
그 순간 각성이 왔다.
삼일 동안 가슴이 시원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것 자체는 텅 비어 있었다.
생각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깨달음은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성, 인식의 전환, 지혜의 일어남이었다.

그는 스승에게 와서 이 놀라운 사건을 이야기했다.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 이원적 사고로는 전혀 깨달을 수 없다. 진리는 비이원성 非二元性 이다. 그래 지금 상태는 어떤가?"
"번뇌의 회로가 고장 났습니다. 모든 의미부여가 정지되었습니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본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겠지?"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저는 이제까지 상(相)이라는 단어를 ‘상상속의 모양이나 관념’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이제 보니 그것은 ‘의미부여’라는 말이었습니다. 대상을 보면 항상 의미부여를 하곤 했었는데 그것이 정지되었습니다. 의미부여가 정지되니 뒤따라 일어나던 번뇌들이 소멸되었습니다. 생각이 여전히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것 자체가 비어있음이 훤히 보이니 일부러 생각을 비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번뇌즉보리’다."
"깨달음이 이렇게 쉬운 것입니까?"
"그렇다. 준비된 자에게는 아주 쉽다. 혜명이 혜능 대사로부터 '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라는 말에 깨닫고 '이것 뿐입니까? 다른 것은 없습니까?'라고 반문한 이유를 그대는 알겠는가?"
"너무 쉬워서 혹시 더 높은 깨달음이 존재하는지 물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대는 항상 비어있음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온 몸과 마음이 항상 텅 비어있습니다. ‘물질은 내가 아니다. 느낌은 내가 아니다. 인식은 내가 아니다. 모든 사고 작용은 내가 아니다. 의식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완전히 이해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바히야 경 Bāhiyasutta 에 나오는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 보기만 하고 듣기만 할 때, 그 때 거기에 그대는 없다.’라는 말도 완전히 이해됩니다. 저에는 오직 봄만이 있고, 들음만이 있습니다.거기에 보는 자와 듣는 자가 없습니다. 몸은 오고가지만 마음은 항상 비어있어서 오고감이 없이 그 자리가 본래의 마음자리입니다."

"훌륭하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탐욕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탐욕 그 자체가 비어있음을 봄으로써 탐욕이 제거된다. 에고를 소멸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에고 그 자체가 비어있음을 봄으로써 에고가 소멸된다. 모든 것이 연기되어 존재할뿐, 그 실체가 없는 무아다. 이것이 지혜에 의한 깨달음이다."
스승은 말을 덧붙였다.

"그대의 깨달음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노력이 필요없다.
수행은 스스로 굴러갈 것이다. 스스로 깨달음을 완성할 것이다."

 

- 무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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