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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분별론자


이 이야기는 제3차 경전결집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소까 대왕이 인도를 통일했다. 사실 인도를 거의 통일한 것은 그 윗대 왕들, 찬드라굽타와 빈두사라의 작품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차나끼야 대신의 작품이다. 워쨌든 아소까 왕은 인도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남인도의 촐라 왕조는 아소까가 정복전쟁을 그만둔 덕에 살아남았다. 제국을 통일하고 아소까는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를 믿었고, 빈두사라는 브라만교를 믿었는데 아소까는 불교를 믿었다. 


절대왕정에서는 통치자가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종교도 따라가게 되어있다. 특히 아소까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했으므로 인도 전역이 불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인도 전역이 불교도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다른 종교인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다. 음식이 불교 사원으로 집중된다. 다른 종교 사원은 쫄쫄 굶는다. 그러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이동하듯이 이교도들이 불교 사원에 들어와 가사를 걸치고 가짜 스님 노릇을 한다. 불교 사원에서 가사를 걸치고 스님처럼 살기는 하는데 종교 행위는 자기들 종교의 것으로 한다. 이렇게 해서 불교가 오염된다. 


그래서 진짜 스님들이 포살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포살은 보름마다 대중이 전부 모여 계율을 외우며 허물을 참회하는 행사이다. 가짜와는 포살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진짜 스님들이 포살을 거부하자 아소까 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하에게 조사를 명했다. 그리고 유명한 고승 목갈리뿟따 띳사 스님을 초청해서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지 물었다. 목갈리뿟따 띳사 스님이 대답했다.


"붓다께서는 분별론자( 分別論者, vibhajjavadin )입니다."


이렇게 해서 왕은 띳사 스님의 조언대로 분별론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했다. 불교는 힌두교의 아트만(아상, 인상), 자이나교의 영혼(수자상)과 같은 교리를 부정한다. 그외에도 오온, 육근, 12처, 18계, 12연기 등으로 분별한다. 이것에 대해 질문해서 다른 얘기를 한다면 이교도이다. 그렇게 이교도를 골라내서 쫓아냈다. 그리고 고승들을 모아 다시 경전과 교리 확인작업을 한 것이 제3차 경전결집이다. 


인도에 성지순례를 가면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파트나를 들리게 된다. 거기에 제국의 왕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꿈라하르가 있다. 나는 거기에 가면 항상 신도들에게 제3차 경전결집에 대해 설명한다. 작년에 그곳에서 한 보살님이 나의 설명을 듣다가 분별론자라는 단어에 대해 질문했다.


"선불교에서는 '분별하지 마라.'라고 하면서 무분별을 강조하는데, 부처님은 왜 분별론자 입니까?"

그때는 시간이 없어서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그 생각이 떠올라 여기에 대답을 올려본다.


분별하지 마라. 

진리(道)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불완전하고 이원성을 지닌 언어로는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벌써 도가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 

입을 여는 즉시 어긋난다( 開口卽錯 ) 

선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내지 마라( 入此門來 莫存知解 )

이런 말들에 익숙하면 '분별론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사실 진리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진리는 도와 과, 즉 열반을 의미한다. 초기경전에도 열반에 대한 설명이 원론적인 수준이다. "열반이란 탐진치의 소멸이다." 여기에서 설명이 끝이다. 혹자는 유여열반, 무여열반으로 설명을 하는데, 그러면 더 골치가 아파진다. 무여열반으로 가면 이제 단멸론으로 흐른다. 그러면 '존재의 소멸이냐?'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그럼 또 단상중도가 어떻다느니 라는 말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열반을 설명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 이건 깨달음의 문제, 경험의 문제로 남겨 놓아야 한다. 


분별론이라는 말은 '진리의 정의'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깨달음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번뇌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것을 설명하려면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자. 여기 '여자'라는 단어가 있다. '여자'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오는 순간 인식 시스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의 인식 시스템은 그것이 무엇인지 과거에 저장해두었던 정보를 뒤져가면서 분석하기 시작한다. 부드러움, 예쁨, 귀여움, 자궁, 사랑, 연애 더 나아가서 성욕이라는 욕망까지 일어날 수 있다. 


즉 여자라는 단어를 인식하는 순간 번뇌가 일어난다. 그래서 붓다는 여자를 여자로 보지 말고 지수화풍으로 분별해서 보라고 한 것이다. 여자를 여자로 인식하는 순간 마음에서 왜곡이 일어난다. 전도망상이 일어난다. 사실 여자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지수화풍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궁극적 실재이다.


몸은 무엇인가? 지수화풍이다. 

마음은 무엇인가? 수상행식이다. 


색수상행식을 '나'라고 인식하는 순간 에고( 자아 )가 일어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럼 삶은 무엇인가? 삶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왜 일어나는가?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럼 존재란 무엇인가? 연기의 흐름이다. 

그럼 누가 행위하는가? 행위하는 자는 없다. 

다만 육근과 육경과 육식의 접촉을 원인으로 행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분별해서 설명해도 중생은 어차피 머리가 아프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항상 '나'를 상정해놓고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대로 분별지로 수행을 하든지, 선불교의 가르침대로 직관지로 수행하든지 그건 선택의 문제이다. 다만 붓다께서 설명하는 분별론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분별망상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리는 어차피 이론에 불과합니다. 수행은 별개의 것입니다.

아픔이 일어나면 마음이 거기에 반응하지요. 몸의 아픔이 마음까지 전달되지요.

몸의 아픔이 단지 아픔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수행은 거의 막바지에 이릅니다.

마음이 몸의 아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관찰하는 거죠.

몸의 아픔을 바라보지 말고 몸의 아픔에 반응하는 마음을 관찰하면 위빠사나입니다.

몸의 아픔을 직시하면 아픔이 정지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마타 수행이 됩니다.


- 석무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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