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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김상욱의 물리공부

다정한 물리학자 김상욱과의 대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냐
물리는 사물의 이치 탐구, 삶의 가치는 다룰 수 없어
과학자는 예술가 기질, 신학이나 인문학과도 동업 가능
생명은 DNA 운반체, 죽음은 원자의 흩어짐에 불과

‘우주는 어둠으로 충만하다. 빛은 우주가 탄생한 후 38만년이 지나서야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온도가 낮아졌고 물이 얼음이 되듯 물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빅뱅 이후 38만 년 되던 해 수소 헬륨 등 원자가 생겨났고 빛도 생겨났다.’

‘인간의 사유도 원자로 만들어진 몸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자론의 입장에서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너무 슬플 때 우리 존재가 원자로 구성되었음을 떠올려 보라.’-김상욱의 ‘떨림과 울림' 중에서


2008년부터 양자 열역학 연구를 하고 있는 김상욱 박사. 물리 이론으로 쓴 책을 철학책으로 알만큼, 철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전방위적 저술 능력이 탁월하다./사진=이태경 기자
전형적인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준말)’ 기자가 양자물리학 박사 김상욱을 만날 용기를 냈다. tvN 예능 ‘알쓸신잡3’에 나온 스타 물리학자라서가 아니다. 그가 최근 쓴 물리학 대중서 ‘떨림과 울림'에 반해서다. 

예컨데 그는 ‘우주를 시공간이라는 무대 위에 자연법칙이라는 대본에 따라 물질이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연극’이라고 설명한다. 전문용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지성을 존중했던 칼 세이건처럼, 우리에게 평이한 말로 우주와 인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김상욱이다.

‘떨림과 울림'의 프롤로그는 ‘우주는 떨림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첫 챕터의 문장 또한 기가 막히다. ‘어둠으로 충만한 우주에 빛이라는 존재가 있다.' 

우주, 떨림, 어둠, 충만, 존재… 물리학 책에서 반짝이는 시의 언어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흘러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전화기를 집어 들어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몇 단락만 읽어봐도 ‘문송'인 유시민이 그에게 했다는 말이 수긍이 됐다. ‘김상욱에게 배웠다면 물리를 다정하게 대했을 텐데.'

상수동의 아담한 서점 ‘당인리 책 발전소'에서 김상욱을 만났다. 그는 카이스트에서 ‘상대론적 혼돈 및 혼돈계의 양자 국소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양자역학의 고향인 독일 막스-플랑크 복잡계 연구소에서 2년 6개월 동안 연구원으로 있었다. 

상대, 혼돈계, 양자, 국소, 복잡계…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어질거리지만. 어쨌든 그는 'f=ma'(힘=질량×가속도)라는 뉴턴의 법칙을 ‘우주의 시'로 가르치는 양자물리학자다. 부산대학교에서 14년을 가르치고 올 초 경희대로 옮겼다.

-우주는 어둠으로 충만하다, 는 문장을 읽고 뇌가 크게 진동했습니다(웃음). 과학은 빛에 빚졌다는 첨언까지. 문득 저는 성경의 창세기가 떠오르더군요.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실제로 빅뱅 이론이 나왔을 때 교황청이 환영 성명을 냈습니다. 현대 물리학이 성서의 창조론을 입증했다는 거지요. 물리학자들은 허블의 관측 증거를 바탕으로 빅뱅의 메아리를 이야기했는데, 특정 종교의 이론을 지지하는 인상을 준 것에 당황했습니다(웃음). 우리는 통상 빛이 없으면 어둠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우주는 원래 어둠이고 빛이 있는 게 특별한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태양계 행성에 속한 지구인이니까요.

"태양이 가까이 있기에 우리가 밝음을 인지하는 것뿐이죠.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어둠이 빛의 부재가 아니라, 빛이 어둠의 부재예요. 암흑의 유산이 우주 전체 물질의 96%를 이루거든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빛이 탄생한 건 138억 년 전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과 150년 전 빛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암흑물질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로 하죠. ‘우주는 떨림이다'라는 정의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겠어요?

"정지한 모든 것들은 떨고 있어요. 사람이 숨 쉬는 것도, 뇌의 전기 신호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원운동도 모두 진동이지요.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도, 사랑을 고백하는 심장의 두근거림도, 딱딱한 책상이나 건물도 각자의 진동으로 떨고 있습니다. 소리나 빛도 떨림이라는 측면에서 같아요.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고, 빛은 전기장 자기장이 진동하는 형태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떨고 있다?

"그렇죠. 모든 것은 진동으로 환원됩니다. 그 진동에 반응하는 것이 울림이에요. 우주가 떨림이라면 인간은 울림이에요. 엉엉 우는 것도 울림이지요. 울림은 공명입니다. 라디오도, 스마트폰도 주파수가 맞아야 울리죠. 무수한 떨림이 있지만, 그 떨림에 공명을 맞추지 못하면 울림은 없어요."

-인간관계도 그렇더군요. 주파수가 맞아야 관계가 이어지죠.

"맞습니다. 사람 관계도 떨림과 울림의 물리 현상이에요."

-물리학자이자 재즈 음악가인 스테판 알렉산더는 ‘뮤지컬 코스모스'에서 음악과 소리는 우주의 핵심요소라고 했어요. 어떤 블랙홀은 수벌처럼 윙윙 노래를 부른다더군요. 현대 음악가인 진은숙은 수학적인 운율과 기하학적인 웅장함으로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떨림을 바탕으로 볼 때 빛보다 사운드가 더 우월한 게 아닐까, 생각해봤어요(웃음).

"음악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대단히 수학적이지만, 사실 다가올 때는 감정적이고 직접적이죠. 시각은 눈을 감으면 안 볼 수 있지만, 청각은 완전히 닫을 수 없어요. 그래서 더 원초적으로 느껴지죠(웃음). 개인적으로 저는 시각 예술을 더 좋아합니다."

-문득 물리학자는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 궁금하군요.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좋아해요. 달리나 마그리트 같은. 현대 미술가로는 올라퍼 엘리아슨이나 이반 나바로의 작품을 대형 사이즈로 보는 걸 좋아합니다. 이반 나바로의 행성 작품을 미술관에서 보면 매우 스펙터클하지요. 극장에서 SF 영화를 보며 우주를 느끼는 것처럼요."


이반 나바로의 설치 작품.
-물리학자의 시선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대개 진리는 아름답다고 합니다(웃음).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는 원근법에 기반한 이데아적 아름다움을 중시했지만, 근대는 훨씬 주관적이에요. 현대에 이르면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유는 사뭇 더 복잡해지죠. 추악한 괴물도 이상한 사물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어요. 물리학적 시선은 단순 비례의 극치인 몬드리안이나 복잡함의 극치인 잭슨 폴락의 추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요. 궁극적으로 우주의 아름다움의 원형은 수학이에요. 아마 그건 제가 외계인과 만나도 통할 거예요(웃음)."

책에서 그는 ‘수학은 자연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효율적으로 기술한다.’고 썼다. 우주가 정말로 수학으로 쓰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수학이 없다면 물리도 없다고. "마찰이 없으면 깃털과 볼링공이 4.9m를 1초 만에 똑같이 낙하해요. 마찰이 없다면 물체는 영원히 움직였겠죠. 놀라운 건 수식을 풀면 어떤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우주선이 도킹하는 것, 일식이 정해져 있는 것… 그 모든 위치를 한 줄의 수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저는, 참 신기하고 아름다워요."

영화 ‘퍼스트맨’을 보면 우주선이 궤도를 벗어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닐 암스트롱은 수첩에 침착하게 수학 공식을 풀고 있었다. 당시엔 어이가 없었는데, 이해가 됐다.

-최근 마블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를 보면 마이클 더글러스와 미셸 파이퍼가 양자물리학계 거장으로 나와 활약을 벌이더군요. 어떻게 봤습니까?

"양자역학이 객지에 가서 고생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웃음). 원자의 텅 빈 공간을 짜부라트리면 물체가 작아진다는 상상에 기초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에요. SF에서 과학적 엄밀성을 따지는 게 어찌 보면 난센스죠."

-시간과 우주를 다룬 영화 ‘인터스텔라'는 어땠나요?

"덕분에 상대성이론이 입에 오르내렸죠. SF는 과학적으론 오류가 있어도 늘 감동적입니다. 우주선이 거대한 블랙홀에 떨어지는 과정, 그 근처에서 중력이 센 곳에서 조석력으로 행성에 파도가 치는 상황 등을 구현했더군요. 전율이 일었던 건 과학보다는 어떤 인간 때문이었습니다. 살 수 없는 행성을 살 수 있는 곳이라 거짓말을 해서 헛걸음을 시키죠. 오직 자기가 탈출하기 위한 이기심으로.

기상이변 때문에 지구가 망가져 결국 살만한 다른 행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일반상대성이론을 사용해서 우주선을 만들어나가지만, 결국 알게 된 건 인간은 지구의 세입자일 뿐이라는 사실이었어요. 이산화탄소가 가득 차면 인류는 공룡처럼 순식간에 멸종해요. 이 행성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요."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물리학자이면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류가 많더군요. 개인의 취향인가요? 아니면 대중과의 연결지점이 필요해서인가요?

"과학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컸어요. 정재승 교수와 뜻이 맞아서 처음엔 의무감으로 교류를 시작했어요. 2008년 즈음, 예술가와 PD, 작가 등과 함께 소백산 천문대에서 별을 보여주며 워크숍을 했는데, 그때 느꼈죠. 아! 예술가와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구나."

-과학자와 예술가가 대체 어떤 점이 닮았던가요?

"사실 인문학자와는 텐션이 있어요. ‘통섭’은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통합하려는 시도예요. 리처드 도킨스도 다소 공격적인 태도로 진화생물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끌어들였죠. 그럴수록 인문학의 저항이 생겨요. 과학 기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요. 반면 예술가와 과학자는 그런 텐션이 없어요. 오히려 기질 면에서 비슷하죠. 달팽이가 좋아서 달팽이만 해부하는 것처럼 그림이 좋아서 붓질만 하는 식이니까요(웃음)."

-단순한 몰입이군요. 물리 말고는 관심이 없습니까?

"모든 걸 연구에 바치니까요. 24시간을 그것만 생각해요. 저도 최근 원자 연구에서 수학으로 물리적 해명을 못 해서 암초에 부딪혔어요. 그런데 364일 머리를 쥐어뜯다가도 한순간에 훅하고 풀려요. 그 순간엔 온몸에 전율이 일어요. 저는 A급 물리학자도 아니고 B급 물리학자인데도 그래요(웃음)."

-그런 전율의 일환으로, 양자물리학자라면 한 번쯤 노벨상을 꿈꾸지 않나요(웃음)?

"이론물리학자는 나이 들면 힘들어요(웃음). 대개 20대에 노벨상의 업적을 다 내요. 상은 그 사람이 이론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닦는 걸 보고 50~60대에 주지만, 늦어도 30대 초반에는 이론의 최전선에 나온다고 봐야죠."


부산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김상욱. 칠판 가득 복잡한 수식을 풀면서도 표정이 환하다./사진=김종호 기자
-유물론자이면서 동시에 무신론자이지요?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예요. 저는 절대적 신은 믿지 않아요. 하지만 종교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제도보다 깊고 오랜 것이라고 존중합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가축을 기르고 도축할 때 자신과 동물을 분리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을 거라고 추측해요. 윤리와 지위를 종교에서부터 가져왔다는 거죠."

-칼 세이건은 리처드 도킨스보다는 종교에 대해 좀 더 품위 있는 태도를 보이더군요. ‘죽음을 꿈 없는 잠’에 비유한다거나 평생을 외계생명체를 찾아다니면서도, ‘만약 이 우주의 설계자, 조정자가 있다면 굉장히 우아한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 세이건의 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지구를 대표해서 우주로 보낼 사람을 뽑는 심사에서 마지막 질문이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였어요. 조디 포스터는 갈등하다 정직하게 "노"라고 답하고 탈락을 해요. 칼 세이건은 무신론자였어요. 하지만 신을 믿는 사람, 유신론자가 더 인간을 대표할 수 있다고 봤어요."

-한편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소설 ‘신'에서 ‘누가 나에게 신을 믿는다고 하면 그건 한낱 전자인 내가 장담하건대, 나는 분자가 뭔지 짐작하고 있다, 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신은 우주의 무한한 복잡성에 현기증을 느껴서 인간이 고안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거죠.

"글쎄요. 저는 신이 없다는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는 증거가 있는 것에 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증거가 없는 건 모른다고 하죠. 없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으니까요. 다만 인간의 가치체계는 상상의 산물이니 유익한 건 받아들이죠.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수용하지만, 지구가 돌지 않는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웃음). 지구가 돌아도 진화론이 나와도,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거죠."

-과학적 팩트는 종교를 압박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과학은 신이 만든 우주의 참모습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습니다. 물론 난 거기서 신을 느끼지 않아요. 지구가 24시간에 한 바퀴 도는 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죠. 중력장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것도 아니예요. 우주에 의도 따위는 없습니다.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 뿐이죠."


그는 오래전부터 포항공대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TCP)에 정재승 교수와 참여해 과학을 교양으로 대중에게 알리는 데 힘썼다./사진=이태경 기자
-죽음이나 슬픔에 대해서도 매우 차갑게 얘기하더군요. 탄생과 죽음은 원자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뿐이라거나 슬픔도 뇌의 특이한 진동에 불과하다거나. ‘다정한 물리학자'가 맞습니까(웃음)?

"하하. 과학은 인간적이지 않아요. 인간의 상상체계를 과학이 입증할 수는 없어요. 인간이 만든 상상의 틀, 그 가치는 인문학에 있지요. 인간의 종교와 감정, 관습은 따로 공부할 부분이지만, 인간도 물질인 이상 팩트를 안 따를 수는 없어요. 그래서 과학자로서 저는 불멸하는 건 영혼이 아니라 원자라고 정의해요. 이어서 누가 영혼은 없는 거냐? 물으면 모른다고 하죠. 몰라요. 없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모르는 게 많으시군요!

"그게 과학자의 태도지요. 모르는 걸 인정하는 것. 과학은 증거가 있는 것, 아는 것만 이야기하는 학문이에요. 과거의 철학자들은 자기만의 가설로 도덕과 우주의 자연법칙을 단정내렸어요.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그랬죠. 갈릴레이 이후에야 과학자들도 증거를 갖고 아는 것만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간혹 이공계와 문과가 서로를 욕하는 데, 그것도 잘 모르는 걸 아는 것처럼 얘기해서예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도 생물학적 관점에서 흡수하니 편견이 많아요. 자연과학이 떨림이라면 인문학은 울림이에요. 모르면 함께 공부해야죠."


김상욱은 ‘떨림과 울림'에서 물리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썼다. 우주 만물의 시원이 궁금하면 양자역학을 공부해보라고.
-공부해서 무엇을 알았지요?

"예컨대 행복과 정의 같은 가치 체계는 자연과학과는 상관이 없다는 거죠."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기쁘던가요?

"네. 전 기뻤어요."

-무엇이 기쁘던가요? 인간이 유전자를 옮기는 분자 기계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게 저는 매우 당황스럽더군요. 마치 사랑에 빠지는 AI가 이런 기분일까 싶었어요.

"내가 무엇인지 아는 게 기뻤어요."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인지를 아는 게 기뻤다고요?

"인간이 ‘유전자 딜리버리’라는 팩트를 알면서도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잖아요. 인간은 사물이지만, 인간이 만든 추상 명사는 사물이 아니에요. 이를테면 인간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고민하는 새로운 ‘입자 덩어리'예요.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살아가죠. 우주라는 수학의 신비를 풀면서요."

-모순적이지만 경이롭군요.

"경이롭지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저는 생각해요. 빅뱅 이후 38만 년이 되어서야 생긴 빛, 저 별들만큼이나 무수한 태양이 이 우주에 있다, 지구는 아무것도 아니다. 연약한 지구에서조차 인간은 중심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생물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강아지도 침팬지도 나와 다르지 않다. 더 많이 알면 더 많이 존중하게 돼요. 과학이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하지만 오히려 존재의 공평성을 설득해준다고 생각해요."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물리적 측면에서는 원자가 흩어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는 일이니 슬퍼할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특정한 원자 집단인 아버지, 친구, 자식… 나는 그 원자 집단과 공유한 의미를 사랑한 것이니, 슬픔을 느낍니다.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니 아프죠."

-언제 기쁜가요?

"망원경의 렌즈를 닦고 현미경의 렌즈를 새로 끼울 때 기뻐요. 공부를 시작할 때죠. 그리고 문제가 풀린 날. B급 물리학자라 큰 문제는 못 풀지만, 또 그 순간도 잠시지만 지구에서 이 답은 나밖에 모른다는 흥분이 있어요.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달의 분화구를 처음 본 날, 이런 느낌이었을까요(웃음)? ‘칸트도 플라톤도 못 봤는데 나는 봤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그런 순간은 자주 안 와요. 보통은 틀리거든요(웃음)."


얼마 전 막을 내린 ‘알쓸신잡3’ 출연 이후, 오른쪽보다 왼쪽 얼굴이 더 낫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사진=이태경 기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별하고 적절한 텐션을 유지하는 사람이 좋은 학자겠지요. 어찌 보면 과학자와 철학자, 신학자와 예술가는 우주라는 동일한 소재를 나눠 갖는 동업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죠. 한 사람이 다 소유할 수 없고 서로 나눠서 보는 것 같아요. 신학과 인문학은 호모 사피엔스를 중심으로 보고 과학은 우주의 일부로 외계생명체까지도 포함해서 보지요. 물리는 말 그대로 사물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에요."

-당신과 우주의 지분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최적의 동업자는 누구죠?

"예술가와는 동질감이 강하고요(웃음). 신학자와도 경계를 잘 맞추면 동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갈등이 생기고 이익이 상충할 때는 증거와 팩트만 넘겨주면 되죠(웃음). 빅히스토리로 인문학자와도 즐겁게 동업할 수 있어요."

-엉뚱한 질문을 해보지요. AI가 사랑할 수 있나요? 인공지능이 만든 것도 예술품이 될 수 있나요?

"자연과학은 ‘사랑한다’는 정의를 할 수 없어요. 인공지능이 ‘사랑한다'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로 질문을 바꿔야죠. 그렇다 해도 그 행위를 사랑으로 인정할지는 자연과학의 범주가 아닙니다.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이 예술인가, 라는 질문도 정치적인 영역이에요. 나중에 인공지능 소유자가 예술권력자가 되어 천명한다면, 그날부터 예술품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 합의의 문제는 여전히 인문학의 영역이에요."

-어쩌면 과학은 불확실한 것을 견디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예요. 인공지능이 직업을 대체할는지, 저는 몰라요. 이거냐? 저거냐? 충분한 물질적 증거가 없을 때는 불확실한 전망을 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어요. 물증에 입각해서 결론을 내리는 과학의 태도를 배우면, 우리 사회가 좀 더 합리적이고 행복하게 나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요."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책을 내밀었더니 일필휘지로 사인을 해주었다. 나중에 펼쳐보니 이렇게 쓰여있었다. ‘물리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세요!' 대학 때 소개팅에 나가 "기하학이 취미"라고 말했다가 딱지를 맞았다던 김상욱. 문득, 물리는 차갑지만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는 책의 서문이 생각났다. 하여 물리학은 무정하지만, 물리학자는 다정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물증'에 입각해서. ‘물리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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