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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김상욱의 물리공부

떨림과 울림

프롤로그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수천 년 동안 한자리에 말없이 서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떨고 있다. 그 떨림이 너무 미약하여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미세한 떨림을 볼 수 있다. 소리는 떨림이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 공기가 떤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의 미세한 떨림이 나의 말을 상대의 귀까지 전달해준다. 빛은 떨림이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시공간상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가시광선밖에 볼 수 없지만, 우리 주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빛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전자기장의 떨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세상은 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


볼 수 있는 떨림. 느낄 수 있는 떨림도 있다. 집 앞의 은행나무는 영국왕실의 근위병같이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것 같지만, 상쾌한 산들바람이 어루만지며 지나갈 때 나뭇잎의 떨림으로 조용히 반응한다. 사랑고백을 하는 사람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린다. 그 고백을 듣는 사람의 심장도 평소보다 빨리 떤다. 우주의 숨겨진 비밀을 이해했을 때, 과학자는 전율을 느낀다. 전율은 두려움에 몸을 떠는 것이지만 감격에 겨울 때에도 몸이 떨린다. 예술은 우리를 떨게 만든다. 음악은 그 자체로 떨림의 예술이지만 그것을 느끼는 나의 몸과 마음도 함께 떤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세상을 떠난 친구의 사진은 마음을 울리고, 영화〈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는 심장을 울리고, 멋진 상대는 머릿속의 사이렌을 울린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떨림과 울림은 이 책에서 진동의 물리를 설명할 때 등장한다. 진동은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현상이다. 공학적으로도 많은 중요한 응용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전자공학의 절반 이상은 진동과 관련된다. 이공계대학에서 배우는 수학의 대부분이 진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동은 떨림이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느낌은 다르다.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진동은 기계적이지만 떨림은 인간적이다. 나는 이 책에서 물리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내가 보는 물리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려고 한다. 사실 물리는 차갑다. 물리는 지구가 돈다는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경험에 어긋나는 사실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구는 돌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주의 본질을 보려면 인간의 모든 상식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물리는 처음부터 인간을 배제한다.


이 책은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인문학의 느낌으로 물리를 이야기해보려고 했다. 나는 물리학자다. 아무리 이런 노력을 했어도 한계는 뚜렷하다. 그래도 진심은 전해지리라 믿는다.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설렘이 다른 이들에게 떨림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울림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김상욱의 물리공부’를 기초로 하고 있다. 다른 매체에 쓴 여러 글을 모아 녹여서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이 탄생했다. 나의 글들이 새 생명을 얻은 것은 순전히 조유나 편집자의 공이다. 고향같이 편안한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되어 듬직한 느낌이다. 한성봉 사장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의 떨림을 가장 먼저 울림으로 받아주는 가족에게 이 책을 바친다.


- 목 차 - 

프롤로그

1부 분주한 존재들 - 138억 년 전 그날 이후,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빛] 138억 년 전, 처음으로 반짝이던 

[시공간] 시간과 공간의 탄생

[우주] 세계의 존재 이유를 안다는 것

[원자] 우리를 이루는 것, 세상을 이루는 것

[전자] 모두 같으면서, 모두 다르다

‣ 생명이 존재하려면 『미토콘트리아』

‣ 물리학자가 바라본 존재의 차이, 차이의 크기

‣ 크기가 말하는 것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존재의 크기에 관하여 ‘위상수학’이란 무엇인가


2부 시간을 산다는 것, 공간을 본다는 것 - 세계를 해석하는 일에 관하여

[최소작용의 원리] 미래를 아는 존재에게 현재를 산다는 것

[카오스] 확실한 예측은 오직

[엔트로피] 어제가 다시 오지 않는 이유

[양자역학] 우리는 믿는 것을 본다

[이중성]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

‣ 지구에서 본 우주, 달에서 본 우주

‣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을 보는가? <인터스텔라>

‣ 물리학자에게 ‘우연’이란 「바빌로니아의 복권」, 『픽션들』


3부 관계에 관하여 - 힘들이 경합하는 세계

[중력] 서로가 서로에게 낙하한다

[전자기력] 존재의 떨림으로 빈 곳은 이어진다 

[맥스웰 방정식] 현대 문명의 모습을 결정한 수식

[환원·창발] 많은 것은 다르다

[응집물리] 우선은 서로 만나야 한다

‣ 인공지능에게 타자란 <엑스 마키나>

‣ 세계의 온도는 표준편차가 결정한다


4부 우주는 떨림과 울림 - 과학의 언어로 세계를 읽는 법

[에너지] 사라지는 것은 없다, 변화할 뿐

[F=ma] 세상은 운동이다

[단진동] 우주는 떨림과 울림

[인간] 우주의 존재와 인간이라는 경이로움 

‣ 상상의 질서, 그것을 믿는 일에 관하여 『사피엔스』

‣ 인간의 힘으로 우주의 진리를 알아가는 것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부록 

지식에서 태도로 - 불투명한 세계에서 이론물리학자로 산다는 것



1부 분주한 존재들

138억 년 전 그날 이후.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138억 년 전, 처음으로 반짝이던

어둠으로 충만한 우주에 빛이라는 존재가 있다

계약직 연구원으로 독일에 도착한 첫날. 숙소가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장에는 형광등이 아니라 전구가 달려 있었는데 그나마도 밝은 흰색이 아니라 다소 옅은 노란색이었다. 우리 집만 그런가 하여 창문 너머 다른 집들을 둘러보니.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다고 해도 불을 밝힌 집이 거의 없었다. 빛이라고 해봐야 촛불 정도의 가녀린 깜박임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을 밝힌 것이 아니라 어둠을 밝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독일생활에 적응해감에 따라, 어둠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조금씩 변해갔다. 식사할 때는 천장에 달린 등만 켜고, 책상에서 일할 때는 스탠드만 켜고, 침대에 앉아 책을 볼 때는 작은 침대 등만 켜게 되었다. 그렇게 어둠이 빛의 영역을 잠식해갔다. 독일인에게는 이 정도가 빛과 어둠의 적절한 비율이겠지만, 어둠을 박멸하려는 듯 불을 밝히는 나라에서 온 나는 시나브로 늘어나는 어둠에 서서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늘어나자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에도 색이 있다. 빛이 거의 도달하지 않는 맞은편 벽의 어둠은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동굴의 색과 같고, 침대 밑의 어둠은 부족한 빛마저 모두 빼앗겨 블랙홀이나 가질 법한 검은색을 띠며, 내 몸 가까이 착 들러붙은 어둠 아닌 어둠은 몸의 일부가 된 듯 내 자신의 색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밝은 빛 아래서 빛을 실체로 느낀 적 없으나, 어둠이 충만한 곳에서 어둠은 무거운 실체가 된다.


우주는 어둠으로 충만하다. 빛은 우주가 탄생한 후 38만 년이 지나서야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빅뱅이 있은 직후, 초기 우주는 너무 뜨거워서 우리가 오늘날 물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온도가 낮아졌고. 물이 얼음이 되듯 '물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빅뱅 이후 38만 년쯤 지났을 때 수소, 헬륨과 같은 원자들이 생겨났고. 이때부터 빛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전에는 빛과 물질이 한데 뒤엉킨 어떤 '것'이 있을 뿐 빛은 홀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이때 탄생한 빛은 지금까지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라 하며, 그 발견에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우주는 38만 살 되던 해, 자신의 모습을 빛에 남겨 놓은 것이다.

빛이 탄생한 건 138억 년 전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과 150년 전 빛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빛을 통해 얻는다. 천문학에서 우주에 대해 얻는 정보는 대부분 빛을 통해서다. 과학은 빛에 빚졌다고 할 수 있다. 물리학도 예외는 아니다. 물리의 실험데이터는 대개 빛으로 얻는다. 빛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중요한 감각은 시각이 아닐까. 뇌의 60% 가까이가 시각 처리에 쓰일 정도다. 인간이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물리학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런 조건에서도 물리학이 존재하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본다는 것

우리가 빛을 통해 사물을 볼 수 있다면, 빛을 이용해 보이지 않게도 할 수 있을까? 2006년 존 펜드리 박사는 빛의 원리를 이용해 투명망토를 구현하고자 했다. 어떤 원리에 착안한 것일까?

빛은 직진한다. 물체를 떠난 빛은 일직선으로 진행하여 눈에 도달한다. 뇌에서는 빛이 일직선으로 진행해 왔다는 가정하에 물체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이 때문에 수많은 착시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돋보기로 보면 물체가 커 보인다. 돋보기의 유리 표면에서 빛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눈은 빛이 꺾이지 않고 직진해 왔다고 생각한다. 결국 물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서 빛이 출발했다고 착각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물체가 커 보이게 된다. 돋보기의 유리 표면에서 빛이 꺾이는 현상을 '굴절’이라고 한다. 존 펜드리 박사는 빛의 굴절 현상에 주목했다.

아이가 방을 어질렀어도 아이가 한 행동을 거꾸로 되짚어가며 정리하면 결국 방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굴절을 잘 디자인하면 빛이 물체를 지나면서 생긴 변화를 상쇄시킬 수도 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빛이 아무 변화 없이 물체를 지나간 셈이 된다. 빛이 물체를 만나지 않은 것처럼 지나갔기 때문에 마치 물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존 펜드리 박사가 구현한 투명망토는 성공했을까? 안타깝지만 존 펜드리 박사의 투명망토는 마이크로파에서만 작동한다. 빛은 주파수에 따라 마이크로파, 전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우리는 이 가운데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 빛의 굴절을 이용해 구현이 가능하더라도. 가시광선에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 투명망토를 써봐야 인간의 눈에는 잘 보인다는 의미다.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자명하지 않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보이는 빛보다 보이지 않는 빛이 더 많다.


뉴턴은 운동법칙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만, 빛을 제대로 연구한 서양의 첫 과학자이기도 하다. 진동수가 다른 빛은 굴절하는 정도가 다르다. 이것을 '분산’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리 표면에서 빨강색 빛은 조금 꺾이고 보라색 빛은 많이 꺾인다. 그래서 빛이 (유리로 만든) 프리즘을 지날 때 색깔별로 분리된다. 뉴턴은 프리즘을 가지고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갯빛으로 분리된다. 분리되어 나온 빨간빛만 다시 프리즘에 통과 시키면 더 이상의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뉴턴은 분리된 무지갯빛 전부를 렌즈로 모아서 프리즘에 반대로 다시 보내보았다. 그러자 흰빛으로 되돌아왔다. 즉, 흰빛은 여러 색의 빛이 모인 것이다. 빛은 그 자신이 이미 모든 색을 가지고 있다. 물체가 색을 갖는 이유는 특정한 색의 빛만 반사시켰기 때문이다. 1800년 월리엄 허셜은 역시 프리즘을 이용하여 재미있는 발견을 한다. 빛을 쬐면 따뜻하다. 빛이 열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빛의 색깔에 따라 열의 크기가 다를까? 허설은 프리즘을 통과하여 분리된 빛에 온도계를 늘어놓고 색에 따른 온도변화를 측정했다. 놀랍게도 빨강색의 바깥쪽, 즉 빛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둔 온도계의 온도가 가장 많이 올라갔다. 그곳에 손을 대보니 따뜻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열을 전달하는 무언가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빛 '적외선'이었다. 빛은 파동이다. 파동은 진동이 공간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목에 손을 대고 소리를 내보면 그 떨림, 진동을 느낄 수 있다. 소리도 파동이다. 즉, 빛은 소리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소리는 진동수에 따라 음이 달라지고, 빛은 진동수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아주 느리거나 빨리 진동하는 소리는 인간이 들을 수 없다. 이런 소리를 초음파라고 한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듯이.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공명하는 빛

거리에 서 있는 가로수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걸까? 정지한 물체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 다. 거리의 가로수는 보이지는 않지만 떨리고 있다. 정지한 물체는 모두 진동한다. 당신이 있는 건물도 진동하고 있다. 진동이 너무 작아서 못 느낄 뿐이다. 모든 물체는 고유한 진동수를 갖는다. 당신 주위에 있는 책상, 자동차, 유리잔 모두 고유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와인 잔을 수저로 치면 잔이 갖는 고유진동수의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체의 고유진동수로 그 물체에 진동을 가하면 진동이 엄청나게 증폭된다. 이것을 '공명' 이라 한다.

TV나 라디오의 채널은 고유진동수를 가진다. 방송사에서는 각 채널에 고유한 진동수의 전파를 내보낸다. 라디오의 채널을 돌리면 라디오 수신기의 고유진동수가 바뀐다. 그러다 특정 채널의 고유진동수와 라디오 수신기의 고유진동수가 일치하면 공명이 일어나서 그 채널의 신호만을 수신하게 된다. 사방에 모든 방송국의 전파가 있지만 라디오 수신기와 공명을 일으킨 채널의 방송만 나오는 이유다.


색을 볼 때, 우리 눈에서도 공명이 일어난다. 사람의 눈은 빨간색, 녹색, 파란색을 볼 수 있다. 눈에는 세 종류의 원추세포가 있으며 각 세포들은 세 가지 색에서 각각 공명을 일으킨다. 공명으로 만들어진 전기신호가 뇌로 이동하고, 뇌에서는 어떤 색의 빛이 망막의 어디에 도달했는지 알게 된다. 비록 뇌는 머리 안에 갇혀 있지만 이렇게 바깥세상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다.

원자에도 공명이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되어 있다. 전자는 양자역학이 정해준 특별한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 특

별한 궤도가 원자의 고유진동수를 만든다. 수소 원자에 진동수를 바꾸어가며 빛을 쪼여주면 특정한 주파수에서만 빛이 흡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종의 공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주파수에 따른 빛의 흡수 정도를 나타낸 것을 '흡수스펙트럼'이라 부른다. 모든 원자는 마치 인간의 지문처럼 그 자신만의 독특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19세기 말 이미 이런 사실이 알려졌지만, 원자가 왜 그런 독특한 스펙트럼을 갖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원자는 물질을 이루는 최소단위라고 생각되었다. 원자가 공명의 특성을 보인다면 그 안에 일종의 진동이 있다는 의미다. 그 진동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자의 흡수스펙트럼은 양자역학이 탄생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해된다. 이해는 못 해도 이용할 수는 있는 법이다. 태양광의 스펙트럼은 수소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태양이 수소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1868년 피에르 장센은 태양광의 스펙트럼에서 지구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명을 발견했다. 결국 장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원자가 태양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헬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헬륨은 태양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헬리오스'에서 온 것이다. 스펙트럼은 별에 가보지 않고도 별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준다.


빛의 속도. 시속 10억 8,000만 킬로미터

빛은 빠르다. 빛의 속도는 시속 10억 8,000만 킬로미터다. 전등을 켰을 때 빛이 전파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갈릴레오는 빛의 속도를 재려고 시도했지만 당시 그가 가진 관측 장비로는 불가능했다. 1676년 올레 뢰머는 최초로 빛의 속도를 제대로 측정했다. 빚이 워낙 빠르다 보니 지구상에서 재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서 뢰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목성의 위성 이오가 목성의 그림자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지구가 목성에 가까이 있을 때와 멀리 있을 때, 이 현상을 관측해 비교하면 빛이 그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의 시간 차이를 잴 수 있다. 이 거리는 지구 크기의 200배 정도 된다. 뢰머가 얻은 결과는 20만 km/s로 실제 값인 30만 km/s와 비슷하다.


1880년대가 되면 간섭계라는 정교한 장치로 빛의 속도를 측정하게 된다. 오늘날 빛의 속도를 정확히 재는 방법은 빛의 파장과 진동수를 각각 측정하여 곱하는 것이다. 이것은 빛의 파동이 한 번 진동하는 동안 이동한 거리(파장)를 한 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진동수의 역수)으로 나누어준 것과 같다. 이제 빛의 속도는 더 이상 측정의 대상이 아니다. 충분히 정확하다고 생각하여 299.792.458km/s로 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과 150년 전 빛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후 50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빛은 물리학을 근본부터 허물기 시작했다. 빛은 보는 사람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일정한 속력을 가지고 있었고, 파동의 떨림이 아니라 단단한 입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빛이 야기한 혁명이 종료되었을 때, 우리 앞에는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이 놓여 있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빛은 언제나 빛나는 존재였다. 지금까지 당신이 읽은 이 글도 당신 눈에 들어간 빛에 불과하다.


어둠으로 가득한 우주와 빛으로 빛나는 작은 별, 지구

138억 년 전, 빛이 처음 생겨난 이후 우주는 팽창을 거듭했다. 빛은 점차 묽어지고 우주를 압도한 건 어둠이다. 어둠은 우주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으며, 어둠이 없는 비좁은 간극으로 가녀린 별빛이 달린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 프록시마-센타우리 조차 지구로부터 1조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우주에서 빛을 내는 별들은 대개 이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큰 스케일로 보면 별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다. 더구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물질이 우주에 가득한데, 아직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암흑물질, 암흑에너지라 불린다. 빈 공간의 어둠은 예외로 두더라도. 이런 암흑의 유산이 우주 전체 물질의 96%를 이룬다. 이렇듯 우주는 그 자체로 거의 어둠이다. 주위에 빛이 충만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단지 태양이라는 보잘것 없는 작은 별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밤조차 밝아서 별을 많이 볼 수 없다. 하지만 밤이 밤다웠던 시절, 사람들은 책이나 TV보다 별을 더 많이 보았을 것이다. 초저녁 밝은 빛을 내는 금성은 인기 연예인이었을 것이고, 여름밤의 은하수는 공짜로 즐기는 블록버스터였으리라. 계약직 연구원으로 독일에 머물던 시절, 나는 그렇게 우주를 어렴풋이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시공간

시간과 공간의 탄생

우리는 '시공간'이라는 틀로 세상을 본다

물리는 말 그대로 사물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리理'는 법칙이라 생각해도 되겠지만, '물物'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 책상, 벽, 전등, 스마트 폰, 손가락, 구름 등과 같이 보이는 '것'도 있고, 공기같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도 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은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하고 있다. 전등은 빛을 내고, 손가락은 움직이고, 나는 숨을 쉬고, 스마트폰은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이런 모든 '현상'들이 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도 물리의 대상이다. 더 나아가 이런 모든 것들은 왜 여기 이렇게 존재할까 하는 것마저 물리에 포함된다. 물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물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없는 걸까? 우리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도 여기에는 여전히 무엇인가 있고, 또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 공간이 있고 시간이 흐른다. 공간과 시간을 인지하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 없어도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이 선험적으로 갖는 인지구조라고 보았다. 우주가 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은 정말 흐르고 있나? 시간은 연속인가? 시간은 우주의 본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의 부산물인가? 공간은 무엇인가? 빈 공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공간은 몇 차원인가? 공간은 편평한가? 공간이 있다고 할때 정확히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시간과 공간도 함께 생겨났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원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생겨났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면 그 시작점 이전의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빅뱅이론은 지금의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관측 결 과에서 추론된 것이다. 낙하하는 사과를 보면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 듯,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돌려보면 한 점에 모이게 된다. 물론 지금은 팽창하지만 과거에는 제멋대로 팽창.수축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을 때는 가급적 단순한 답을 찾 는 것이 과학의 원칙이다. 일정한 속도로 우주가 팽창했다고 보는 것이다.


빅뱅은 단순히 공간만의 탄생이 아닐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어느 순간 공간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칸트라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따위는 애초에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빅뱅의 이론적 기반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빅뱅,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한 점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상대성이론의 방정식을 수학적으로 풀었을 때 가능한 답의 하나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이 이론은 시간과 공간 그 자체를 다룬다.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기술하는 이론이 가능할까? 시간과 공간은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의 기본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물리에 쓰이는 언어는 그것이 일상 언어로서 갖는 의미와 다를 때가 많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시간과 공간의 의미는 상당히 실용적이다. 시간이란 시계로 읽은 두 사건 사이의 간격이다. 공간이란 자로 읽은 두 지점 사이의 거리다. 이 정의에는 시간과 공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들어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시간과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기술하는 물리량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니까.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공간은 측정 결과 얻어진 결과물이다. 여기서 거리란 공간을 점하는 어떤 크기를 말한다. 이것 없이 어떻게 물리적인 공간을 생각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대해 (어떤 이유로든) 움직이는 사람이 잰 시간 간격이 정지한 사람이 잰 시간 간격보다 크다면, 움직이는 사람의 시계는 '실제로' 느리게 가는 거다. 측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시간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따름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관없어 보인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와 상관없지 않은가? (물론 9시라면 회사에 있어야 할 거다.) 마치 반찬으로 단무지를 먹든 햄을 먹든 상관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김밥을 먹는다면 단무지와 햄은 한꺼번에 먹어야 한다. 이제 단무지와 햄이 한데 얽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빛의 속도가 관측자에 상관없이 일정하다. 속도는 1초의 시간 동안 이동한 거리를 말한다. 속도가 일정해야 한다는 제한 조건은 김밥의 단무지와 햄처럼 시간과 공간을 얽히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시간과 공간 대신 ‘시공간'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시간이 길어지고 길이가 짧아진다. 정지한 사람이 움직이는 사람의 시계를 보면 자신의 시계보다 느리게 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4미터 길이의 자동차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면 2미터 길이로 보이게 된다. 한마디로 시간과 공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 시간도 점차 길어지고 공간도 점차 짧아 지게 되는데 이것은 시공간이 휘어진 것과 같다. 병의 둘레길이가 점차 짧아지면서 주둥이로의 곡선이 나오는 거랑 비슷하다. 이제 당신 앞에 시공간이라는 '물체'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상대성이론은 이 물체가 늘어나고 휘어지는 것을 기술한다. 이런 식으로 시공간은 우리의 연구대상이 된다. 실제 아인슈타인의 방방정식은 시공간의 기학적인 모양을 기술한다. 빅뱅의 순간 시공간은 '점'이라는 도형이 된다. 그러니 이 순간 시간도 생겨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측정 한다는 것


물리학자에게 시간과 공간은 측정으로 얻어진 물리량일 뿐이다. 그러니 시공간의 측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측정을 하기 위해서는 기준, 쉽게 말해서 '자'가 필요하다. "고래는 크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 없다. 지구에 비하면 정말 작으니까. 비교할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리도 인간이 하는 거라 척도의 기준은 인간이다. 시간의 기준은 초, 길이의 기준은 미터다. 1초는 '똑딱'이라고 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고, 1미터는 두 손을 적당히 벌렸을 때의 길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원자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100억 분의 1미터 혹은 1옹스트롬이 기준이 된다. 당신의 키 1.7미터는 17,000,000,000옹스트름이다. 0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미터를 쓰고 싶을 거다. 1미터를 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1미터 길이의 막대기를 만드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막대기를 잃어버리면 낭패가 될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은 이런 인공물이 아니었다. 자연에 있는 기준. 누구라도 자연을 측정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으로 기준을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초기에는 지구의 자오선(북극과 남극을 포함하는 둘레)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자오선 길이... 

~~~~ 뒷부분은 책에서 만나 보세요~ 이어서 훨씬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 지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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