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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삶의 나침반

데르수 우잘라 Dersu Uzala 책 읽기

- 목차 -  

아르세니에프에게 보내는 고리키의 편지

지도

1. 출발

2. 지기트 만

3. 탐사의 시작

4. 산간에서

5. 홍수

6. 해변으로 돌아가다

7. 샤오켐 강을 따라서

8. 타케마 강 주변에 사는 타즈들의 삶

9. 중국인 리춘빈

10. 인간의 정복을 허락하지 않는 밀림

11. 뗏목으로 강을 건너다

12. 조선인의 검은담비 사냥

13. 아마고의 폭포

14. 험난한 여정

15. 쿠순 강 하류

16. 솔론 족

17. 우수리 지방의 중심

18. 데르수, 운명의 사격

19. 헤이바투가 돌아오다

20. 시호테 알린을 넘어

21. 한겨울의 축제

22. 호랑이의 습격

23. 여행의 끝

24. 데르수의 죽음

옮긴이의 말


1. 출발

탐사준비

1907년 1 월부터 4월 초까지 나는 그동안 벌인 네 차례의 탐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결국 그 일에서 자유로워진 4월 중순에야 이미 계획했던 다섯 번째 답사에 따른 준비에 착수했다.

가끔 느끼는 일인데, 탐사 자체보다 오히려 탐사준비가 더 즐거울 때가 있다. 탐사계획은 오래전부터 완벽하게 구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부적으로 마무리짓는 일만 남아 있었다.

이번에 조사할 구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대였다. 북위 45 도에서 47도 사이인데, 전년에 탐사를 마친 해안지역을 둘러본 후 테르네이 만에서 북상하여 다시 비킨 강을 따라 우수리 강에 이르는 멀고도 험한 여정이었다. 다행히 탐사할 지역에 제법 길이 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탐사준비는 1906년에 이루어진 탐사와 비슷한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그때 겪었던 체험에 따라 서너 가지 사항을 변경했다. 새롭게 구성된 탐사대는 병사9명과 식물학자 N.A.데슬라비, 키에프 대학의 학생인 P.P.보르다코프, 내 조수인 A.I.메르즈랴코프 등이었다. 이 밖에도 메르즈랴코프와 형제간인 G.I.메르즈랴코프가 표본제작을 위해 고용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말 대신 노새를 선택했다는 점일 것이다. 노새는 험한 산길을 말보다 훨씬 더 편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이는 주로 산지에서 행해지는 탐사의 성격상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더구나 노새는 아무 먹이나 줘도 까탈을 부리지 않아 좋았다. 대신 늪지대를 지날 때 쉽게 기동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노새 외에도 전번 탐사에 동행했던 내쉬와 아르파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가 포함되었다. 두 녀석은 예민한 후각과 함께 어떤 상항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아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노새를 위해 마구도 새롭게 단장하기로 했다. 경험에 비춰보면. 밧줄(말의 다리를 적당한 간격으로 묶어 너무 빨리 걷지 못하도록 한다)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그루터기에 걸리거나 자꾸 덤불에 감겨 말을 지치게 할 뿐이다. 전번에는 밧줄이 나뭇가지에 걸려 말이 넘어진 적도 있었다. 게다가 말도 밧줄을 무척 싫어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래서 밧줄 대신 삼으로 꼰 노끈과 고삐 두 개. 그리고 방울을 준비했다.

배낭에 넣을 휴대품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우선 구리로 된 주전자를 빼놓기로 했다. 무게도 무게지만 수시로 덧칠을 해야 해서 귀찮을 때가 많았다. 주둥이도 너무 자주 벗겨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루기 쉬운 알루미늄 주전자를 준비했다. 알루미늄 주전자는 튼튼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무엇보다 짐을 꾸릴 때 공간을 별로 차지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데 필요한 조그만 그물도 준비했다.

탐사활동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성냥을 습기 없는 데에 보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부주의로 성냥이 몽땅 젖어버리는 일을 숱하게 겪어왔다. 늪지대나 산악지대는 워낙 습도가 높기 때문에 가죽이나 고무로 싸봤자 별 소용이 없다. 특히 비가 쏟아지기 직전에는 아무리 신경 써서 보관한 성냥이라도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 그래서 최선의 방법은 비슷한 크기의 나무상자에 성냥을 보관하는 것이다. 나무는 습기를 빨아들이기 때문에 날씨가 제아무리 흐려도 성냥은 항상 건조하게 보관된다. 만약 누군가 탐사에 가장 필요한 물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성냥을 꼽겠다. 그래서 성냥은 일부러 내가 메고 다니는 배낭에 넣어둔다. 아무래도 병사들은 성냥보다는 담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성냥이 들어갈 만한 공간은 모조리 담배로 채운다. 이번에는 성냥 외에도 예상치 못한 경우를 대비해시 부싯들이나 부싯깃. 그리고 적당히 태운 천 따위도 준비했다.

연장은 전년과 비슷했는데. 다만 목공도구를 추가하기로 했다 지름이 8밀리미터나 되는 큰 송곳과 대패, 끌, 톱, 줄칼, 그리고 칼날을 세우는 도구 등이었다. 사진 건판은 습기를 예방하기 위해 몇 개의 아연상자에 한 다스씩 담고는 아예 납땜을 해버렸다. 그리고 원주민 여자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도 잊지 않았다. 목걸이나 단추, 털실, 명주실, 바늘, 거울, 가위, 귀걸이, 반지, 그리고 여러 가지 구슬장식, 유리 구슬, 쇠로 된 조그만 고리 등이었다. 족장들에게 나눠줄 선물로는 도끼나 톱, 벨단 총과 총탄을 챙겼다.

원정에 나서기 한 달 전. 내 조수 메르즈랴코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어 있었다. 탐사에 필요한 노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메르즈랴코프를 배웅하면서 나는 발굽이 좋은 노새를 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메르즈랴코프는 그렇게 구한 노새와 함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지기트 만에 당도할 예정이었다. 그의 임무는 그곳에 대기중인 병사 3명에게 노새를 맡기고 근처에 식량기지를 마련해두는 일이었다. 식량기지는 적어도 여섯 군데는 필요했다. 지기트 만, 테르네이 만, 타케마 강, 아마고 강, 쿠문 강, 쿠스네초프 곶이 기지를 세우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4월 중순에는 이런저런 준비가 모두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얼마 후 A.I.메르즈랴코프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다. 나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서 2주일 동안 하바로프스크에 남기로 했다. 그 사이 자하로프에게 아누치노에 머물고 있는 데르수를 찾아오라고 부탁했다.


데르수가 오다

오시노브카 마을에서 말을 빌려타고 아누치노로 향한 자하로프는 길가 오두막마다 일일이 들러서 우잘라라는 성을 가진 고리드 족 노인을 본 적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누치노에 조금 못 미쳐 어느 마을에 당도한 자하로프는 배낭에 짐을 챙기던 중인 원주민 사냥꾼을 만났다. 자하로프가 고리드 족 출신의 데르수 우잘라라는 사람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그 사냥꾼은 더듬거리는 러시아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 나다"

아누치노에 당도하기도 전에 데르수를 만난 자하로프는 자신이 그곳까지 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데르수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두 사람은 아누치노에 있는 데르수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이튿날 아침 나와 만나기로 약속한 이포리토프카 역으로 출발했다. 6월 15일.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포리토프카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자하로프에게 내가 탈 기차를 알리는 전보를 보내고는 하바로프스크를 떠났다. 자하로프와 데르수가 이포리토프카 역에서 나흘째 기다리고 있을 때 드디어 하바로프스크에서 보낸 내 전보가 도착했다. 둘은 나를 태운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올라탔다. 데르수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그는 평소처럼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왔고 나는 그를 반갑게 껴안아주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탐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묻자. 고리드(데르수의 별명)는 겨울 내내 산더 바쿠 강 상류에서 검은담비를 잡았다고 했다. 그는 담비가죽을 중국인에게 팔았고. 그 돈으로 모포나 도끼, 주전자, 냄비를 샀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중국산 삼베를 구해서 새 텐트를 만들었다. 또 러시아인 사냥꾼에게 탄창도 샀다. 데르수는 인근의 우데헤 족 여자들을 위해 사냥도 몇 번 해줬는데, 그 보답으로 자신의 신발과 바지, 셔츠를 꿰매주더라고 자랑했다. 그러다가 해빙기가 되면 아누치노의 마을로 내려와 평소 친분이 있던 고리드 족 노인의 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별 소식이 없자 다시 사냥을 나갔고, 막 뿔이 돋기 시작한 수사슴 한 마리를 잡아 그 뿔을 중국인에게 외상으로 건네주었다고도 했다.

그 무렵. 데르수는 아누치노에서 사기를 당했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사업가에게 자신이 바쿠 강에서 검은담비를 잡아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사업가는 데르수를 술집으로 데려가 취하도록 술을 마시게 해놓고는 그 돈을 자신이 대신 보관해주겠노라고 했다. 천성이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이 고리드는 새 친구와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순순히 응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난 데르수는 그 친구가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음을 알았다. 데르수는 새 친구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종족은 어떤 경우에노 친구가 사냥한 모피나 돈을 훔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함을 타다

당시 동해 연안에는 정규항로라는 것이 없었다. 최초로 러시아 이민국이 '엘리드라드' 라는 이름의 기선을 운항하고 있었는데, 이 배의 마지막 행선지가 바로 지기트 만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항로가 없었기 때문에 한 번 출항한 기선이 언제 돌아올지는 이민국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운이 없었다. 엘리드라드 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나서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던 것이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우연히 만난 P.G.티겔슈테트와 A.N.페리가 우리 사정을 듣고는 자기네 수뢰정에 태워주겠다고 했다. 우리에게 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샨타르 섬으로 갈 계획이었는데, 도중에 우리 일행을 지기트 만에 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언제 출발할 예정이냐고 묻자. 적어도 6월 중순은 지나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예상보다 너무 지체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그러나 지기트 만에 당도하자면 이 방법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게다가 군함은 기선보다 요금이 싸고 훨씬 빠르기 때문에 엔리드라드 호를 놓친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6월 22일 오후. 우리는 군함에 승선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선실에서 승조원들과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잠을 푹 자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날이 밝기도 전에 큰 소음이 귀청을 때렸다. 알고 보니 닻을 올리는 소리였다. 잠시 후 닻을 감아 올린 배가 천천히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잠이 깬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갑판으로 나가보았다. 수면 위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춥고 습한 날씨였다. 수병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선실로 내려갔다. 트렁크에서 노트를 꺼내 일기를 썼다. 조금 있다가 온몸에 가벼운 진동이 전해지면서 배가 조금씩 속도를 높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판은 다시 조용해졌다.

1787년 작성된 라펠즈 해도에는 표트르 대제 만이 빅토리아 만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곳은 알리베르토프 반도(현재의 무라비요프 아무르 반도)와 예프게니에프 군도(루스키 섬, 시코트 섬, 포포프 섬, 레이네케섬, 니코르드 섬)에 의해 양분되어 각각 나폴레옹 만(우수리 만)과 게링 만(아무르 만)으로 불린다.

10시 30분경. 수뢰정이 아스코리드 섬 부근에 이르렀다. 북위 42.47도. 동경 131.22도에 위치한 섬이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본토에서 잘려나간 이 바위투성이 섬은 남쪽으로 열린 말굽모양을 하고 있다. 위쪽으보는 푸차칭 섬과 마이돌리 곶이 있다. 아스코리드 섬은 우수리 사슴의 천연번식지로 알려져 있다.

15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4,000마리가 넘는 사슴이 서식하고 있있다. 하지만 밀렵과 폭설. 목초 부족으로 그 수효는 점차 줄어들어 현재는 150마리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슴은 질 좋은 목초만 골라 먹는 습성이 있는데. 그 때문에 먹이로는 부적당한 식물들이 섬 전체를 뒤덮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고립된 섬이라는 여건 탓에 근친교배가 반복되면서 사슴의 번식력은 극도로 약해졌다. 이 또한 개체수가 줄어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만일 본토에 서식하는 사슴들을 이 섬에 옮겨놓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멸종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섬의 관리를 맡는 블라디보스크 수렵협회는 이런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제 아스코리드 사슴의 멸종은 시간문제일뿐이다. 아스코리드 섬이 유명해진 데는 사슴뿐 아니라 금광도 한몫을 했다. 채취는 주로 광석을 분쇄하는 방식과 수은의 홍화를 통해 금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주위의 바다에서는 정어리고래와 범고래를 만났다. 정어리고래는 먹이를 찾느라 우리가 탄 수뢰정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범고래는 수뢰정 근처를 맴돌며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그러자 누군가 범고래를 향해 총을 쐈다.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은 명중했다. 밑에서 검붉은 물결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범고래 무리는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저녁 늦게야 아메리카 만(현재 나홋카 항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에 당도하여. 거기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밤늦게 강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파도가 더욱 거칠어졌다. 새벽 무렵까지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지만 예정대로 닻을 올리고 출발했다. 선실에만 앉아 있기가 너무 답답해서 갑판으로 나가보았다. '그로즈늬이' 호를 선두로 다른 수뢰정들이 일렬로 항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배의 이름은 '베스숨늬이'였는데, 휘몰아치는 파도 사이로 가라앉았다가 이내 허연 물마루와 함께 솟구치는 모습이 거대한 수염고래를 연상시켰다. 파도는 거품을 일으키며 뱃머리부터 갑판을 순식간에 쓸고 내려갔다. 그 순간은 마치 바다가 우리를 삼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성난 물길은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거라는 듯 갑판을 파도로 적셨고, 그때마다 수뢰정 무리는 날카로운 뱃머리로 물살을 가르며 완강하게 버텼다.

올가 만에 들어서자 주변은 이미 어둑했다. 우리는 뭍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고 해변에 모닥불을 피웠다.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데르수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우리가 탄 수뢰정이 거대한 물고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러시아 말로 이렇게 말했다.

"나 안다. (그로즈늬이 호를 의식한 듯) 그거 오늘 힘 들었어.”

우리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밤은 깊어가고. 바닷가를 떠돌던 안개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그리고 비가 되어 어깨 위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모닥불 주위까지 밀려왔다. 먼 곳에서 화가 덜 풀린 파도 소리가 들려왔지만. 너무 어두워 눈으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수병들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푸근했다. 바람은 덤불과 나무들 사이로 헤엄쳤고, 바다는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밤이 더 깊어지자 개들의 외로운 울음소리만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날이 밝았다. 동쪽 하늘이 구름 속에 잠겼다가 다시 환해졌다. 길가에 어지럽게 널린 덤불들. 수천 년을 바다와 싸워온 바위. 뒤집힌 채 놓여 있는 작은 배. 중국인 한 사람이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그를 깨워 수뢰정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근무를 서던 일직수병이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나도 그에게 수고한다고 몇 마디 건네고는 선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왠지 모를 푸근함이 온몸을 기분 좋게 감싸안았다. 노련한 데르수가 이 모험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우리의 모험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자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다. 바람도 잠들고. 안개도 어느새 사라졌다. 기다리던 태양이 드디어 구름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고 해변의 음침한 바위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지기트만에 상륙

30일 저녁. 수뢰정이 지기트 만 인근에 이르렀다. 티겔슈테트가 이렇게 권했다. 배에서 밤을 보내다가 동틀 무렵에 짐을 뭍으로 옮기라고. 그날 밤 수뢰정은 바람에 시달렸다. 파도는 미친 듯이 배 위로 달려들었다. 배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뒷질’ 이라고 한다. 나는 선실에서 무사히 새벽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우리 일행은 다행히 그토록 고대하던 대지 위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우리를 내려준 수뢰정은 다시 닻을 올리고 출항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메가폰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성공을 기원합니다!" 티겔슈테트였다. 나 역시 한동안 정들었던 수뢰정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10분쯤 지나 수뢰정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가 상륙지점을 테르네이 만 대신 지기트 만으로 택한 이유는 테르네이 만이 거의 매일 심한 파도로 몸살을 앓기 때문이다. 파도가 심한 곳에서는 배에서 노새를 내리기가 대단히 번거롭다.

수뢰정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우리는 서둘러 텐트를 치고 땔감을 모았다. 병사 한 명이 식수를 구하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강어귀에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다고 보고했다. 병사들은 즉시 강으로 달려갔고, 몇 시간 지나서는 그물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주로 사할린송어(고르부샤)였다. 그 중에는 옆구리와 등에 거무스름한 반점이 있는 물고기도 들어 있었다.

사할린송어의 특징은 구부러진 턱과 등에 도도록하게 솟은 혹이다. 나는 서너 마리만 남겨두고 모두 놓아주었다. 다들 처음에는 맛있게 먹었지만, 나중에는 사할린송어 특유의 냄새에 질려서 그런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후에는 식물학자인 데슬라비와 함께 부근을 둘러보았다. 그는 식물을 채집했고. 나는 새들을 관찰했다.

린드 만은 북위 44.4도. 동경 136.22도에 위치하고 있다. 두 개의 만. 즉 북쪽의 지기트 만과 남쪽의 플라스툰 만으로 이루어있는데, 양 쪽 모두 대해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날씨가 거칠어지면 배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가장 깊은 곳은 25~28미터이며, 두 만의 경계에는 석영반암(石英斑岩)이 함유된 분암(玢巖)으로 이루어진 산이 솟아 있다. 바다에 가까울수록 분암의 비율이 낮고, 해변에서 보니 높이는 150미터쯤 되었다.

바닷가 덤불을 누비던 데슬라비는 그런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을 채집했다. 그가 내민 손바닥에는 개망초가 놓여 있었다. 홀쭉한 마름모꼴의 잎 가장자리에는 톱니처럼 들쭉날쭉한 홉이 잔잔하게 얽혀있고, 동전만한 진보랏빛 꽃은 흰 관모(冠毛)를 쓰고 있었다. 자주황기(紫朱黃芪)도 보였는데. 중국인들이 뿌리를 약용으로 채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데슬라비는 그 식물이 다년생으로 생명력이 강하다고 귀뜸했다. 하얀 꽃이 줄기와 잎 사이에서 피어난다. 비연초(飛燕草)는 푸른 빛깔의 꽃이 피고. 위쪽으로 가시 돋친 부드러운 겉껍질이 덮여 있다. 용담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꽃도 발견했다. 뿌리와 줄기가 매우 굵고 푸르스름한 진보랏빛 잎이 길게 늘어져 있다. 이 밖에도 국과식물(菊科植物)중 가장 돋보이는 자태를 지닌 엉겅퀴도 눈에 띄었다. 엉겅퀴는 균형 잡힌 줄기, 라일락 모양의 잎, 진보랏빛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해변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새들이 서식했다. 이날 우리는 오랜만에 매를 보있다. 매는 가까운 고목에 앉아 조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쫓아갔다. 다른 곳에서는 까마귀 두 마리가 때까치 한 마리를 사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때까치는 덤불 속으로 잽싸게 숨어들었지만, 까마귀들은 그에 속지 않고 덤불 주위를 빙빙 돌며 기어이 잡으려고 고심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촉새 몇 마리가 근처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당근 빛깔의 깃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 촉새는 때까치의 울부짖음과 까악까악거리는 까마귀 소리에 놀라 나뭇가지와 땅바닥을 정신없이 오갔다. 지기트 만을 에워싸는 에고로프 곶에 특히 많이 살고 있다. 예전만 해도 이 지역은 사슴들로 넘쳐났지만, 폭설이 내린 1904년 이후로는 개체수가 많이 줄었다.



2. 지기트만

구신도를 만나다

사흘 후인 6월 7일. 기선 엘리드라드 호가 마침내 도착했다. 그러나 정작 아무리 기다려도 메르즈랴코프와 노새는 선착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배를 타지 못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엘리드라드 호를 타고 지기트 만에 도착한 장본인은 메르즈랴코프와 노새가 아닌 구 신도로 보이는 한 가족이 있다. 그들은 해변에 있는 우리 텐트 근처에 짐을 풀고 야영했다. 저녁 무렵. 나는 모닥불을 쬐고 있는 그들 곁으로 다가가 인사를 했는데. 데르수가 이미 먼저 가서 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노인과 고리드는 서로 가까운 사이인 듯 정답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서로 잘 아는 타즈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 같군요." 노인에게 말을 건네며 나도 모닥불 곁에 자리를 잡았다.

"잘 알구말구."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데르수와는 각별한 사이였소. 우린 겨울마다 함께 사냥을 했는데. 그땐 데르수도 아주 젊었지. 다우비헤 강 근처에 있는 페트로파블로프카라는 마을에서 만났소. 가끔은 우라헤 강까지 사냥을 나갔지" 

그들은 다시 옛 추억에 잠겨 한참을 두런거렸다. 사슴사냥을 하던 기억이나 곰과 마주친 이야기, '구부러진 이빨' 이라는 별명을 가진 중국인 사냥꾼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푸른 뱀' 이라거나 '도리깨’ 같은 이상한 이름을 가진 원주민들을 떠올렸다. 노인 말로는 푸른뱀이라는 별명의 주인공은 행동이 재빠르고 냉철한 사나이였고, 도리깨라는 사나이는 싸움질로 유명했다고 한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고리드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노인은 준비해온 벌꿀과 빵을 데르수에게 건넸다. 데르수가 낯선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괜시리 흐뭇해졌다. 늙은 구 신도는 내가 모닥불을 쬐기 쉽도록 손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는 자연스레 이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오게 된 사정으로 이어졌다.

"전에 난 아무르 강 근처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호숫가에서 살았지." 노인이 먼저 말했다.

“그 호수를 우리는 그런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유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날에 그곳에 도착했거든. 하지만 거기서 오래 살지는 못했어. 주위가 늪지대여서 파리매에 실컷 물어뜯겼지. 결국 다우비헤 강으로 옮겨 새로운 페트로파블로프카 마을을 만들었다네. 슈거(쫓겨온 자)들이 올 때까지 우린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지"

"슈거라뇨?"

"러시아에서 온 이민자들 말일세." 노인이 대답했다. "우크라이나 인, 사라토프 인, 블라디보스토크의 예비병, 그리고 떠돌이 직공들이지. 우린 녀석들을 슈거라고 불렀어"

"왜 그들을 싫어했죠?"

"놈들은 행실이 고약한데다가 술고래고 도둑질도 예사였어. 길거리에서 아이들에게 욕을 하며 담배를 피워댔지. 더구나 게으름뱅이였어. 놈들이 저희끼리 훔치거나 싸우는 건 상관없지만, 언젠간 우리 아이들을 괴롭힐 게 뻔했어. 마을의 치안판사는 도움이 안 되는 작자였고. 그 사람한테 달려가 저 못된 놈들 좀 족쳐달라고 하소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그래서 나이 지긋한 어른들끼리 회의를 했지. 그리고 저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 스우즈헤 강에서 새 출발을 하기로 결정했다네. 그곳의 높은 지대에 융베이시라는 마을이 있어서 거기서 살기로 했지. 우리 가운데 파추코프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출발했지. 다른 사람들은 그 뒤에 떠났어. 처음에는 다들 새로 정착한 마을을 융 베이시라는 원래 이름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회의를 거쳐 거기에 맨 처음 도착한 파추코프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네. 거기서도 한 5년쯤 평화롭게 살았지. 그런데 슈거들이 또 나타나기 시작한 거야. 게다가 관청에서는 그들을 건드리지 말라며 시도때도 없이 우리를 괴롭혔어. 하지만 우린 그동안 놈들을 항상 도와줬어. 그렇게 녀석들과 한 3년 같이 살았지. 그러다가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거야. 들판에 물건을 놔둘 수 없는 지경이 되었어. 괭이나 가래를 놔두면 10분도 안 돼 없어졌지. 그 정도는 약과였어. 한밤중에 말을 끌고 가질 않나. 소를 죽이질 않나. 건초더미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적도 많았어. 그리고 이상하게 산불이 자주 났지. 산짐승들도 수가 줄더군. 슈거들은 또 강가에 울 짱을 세워놓곤 물고기들이 상류로 올라가지 못하게 했어. 아주 씨를 말려버리려는 속셈 같더군. 진저리가 나서 결국 새 땅을 찾기로 했지. 안내인을 먼저 북쪽으로 보냈는데, 그 사람이 해안을 둘러보다가 지기트 만을 발견하고는 연락을 해왔지.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

"다른 슈거들이 여기까지 찾아오면 그땐 어떻게 할 작정이죠?" 내가 물어보았다.

"다른 곳을 또 찾아봐야겠지. 우린 집을 튼튼하게 짓지 않아. 애초에 한곳에서 5년 이상 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럼 또 헛수고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계속 떠돌다간..."

"헛수고는 아니지. 집과 땅은 나중에 오는 자들에게 팔아버리면 돼"

"그래도 그때마다 경작할 땅을 다시 갈아야 되잖아요? 돈도 돈이지만 힘도 많이 들 것 같고요"

"우리에게는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아요." 옆에 있던 젊은 구 신도가 대꾸했다. 이번에는 노인이 나섰다.

"여름을 버틸 수 있는 빵만 있으면 충분해. 우린 주로 사냥을 하는데. 오두막을 떠나 아주 먼 곳까지 가지. 검은담비에 대해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들도 없고. 물론 사냥말고도 할 일이 많아."

"주로 어떤 일이죠?" 내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 노인이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땅을 갈 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돼. 필요한 만큼 조금씩 갈아야지. 그래야 땅도 많은 것을 주거든. 여긴 그럭저럭 지낼 만할 것 같은데. 그저 다른 무리가 오지만 않으면 좋겠어. 우린 부자가 될 생각도 없어. 금도 싫고 좋은 옷도 필요 없어. 그냥 우리끼리 아이들 키우며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새로운 땅은 돈을 요구하지 않지. 마음 내키는 대로 고르면 되니까. 한번 둘러보라구. 땅은 끝도 없어. 물고기도 얼마든지 있고. 사냥할 짐승도 많고 집 짓는 데 쓸 나무도 충분해. 게으름만 안 피우면 어디서든 살 수 있어. 먹을 만큼 뿌리고 거둘 수 있는 만큼 거두면 어디서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지"

실제로 많은 중국인들이 지기트 만에 살고 있었고. 다들 도회지 사람들보다 행복해 보였다. 이 아름다운 대지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는 러시아에서 온 이민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과 보호를 받는데도 항상 가난하고 무질서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구 신도의 견해는 정확했다. 문제는 환경을 자신에게 및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환경에 맞추는 데 있다.

데르수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노인 곁에 앉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노인이 불쑥 데르수 이야기를 꺼냈다.

"무척 정직하고 착한 친구야." 노인이 말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거지. 여기 원주민들은 다 그래. 그래도 우리와 똑같이 살고 있어. 나는 가끔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네. 저 세상에 가면 데르수와 나는 어떻게 될까? 내가 보기에 데르수는 영혼이 없어. 짐승처럼 단지 숨만 쉴 뿐이야."

"데르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나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영지로 돌아오자 모닥불 곁에 병사들과 함께 있는 데르수의 뒷 모습이 보였다. 데르수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려던 참이었다.

"어디 가려고요?" 내가 물었다.

"사냥." 데르수는 언제나 그렇듯 짧은 러시아 말로 대꾸했다. "사슴 쏜다. 그사람(구신도) 도와줘. 그사람 아이 많아. 하나. 둘.....여섯개야."

나는 구 신도가 데르수를 가리켜 영혼은 없고 숨만 쉴 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데르수에게 사냥하러 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전한다면 그는 분명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목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간신히 삼켰다.


이상한 발자국

이튿날 아침. 데르수는 벌써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커다란 사슴을 잡았다면서 야영지로 운반해오게 말을 빌려달라고 했다. 데르수는 또 야영지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일행의 것도 아니고 구 신도의 흔적도 아닌 새로운 발자국을 발견했다고 알려줬다. 그가 판단하기에 발자국의 주인공은 모두 세 사람인데, 그 중 두 사람은 구입한지 얼마 안된 장화를 신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쇠로 된 징이 박힌 낡은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데르수의 관찰력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모두 사실로 여겼다. 

오전 10시경. 데르수가 사슴을 싣고 왔다. 그는 사슴고기를 세 덩어리로 나눠 한  덩어리는 병사들에게, 또 한 덩어리는 구 신도들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덩어리는 근처  오두막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불만이었다. 하지만 데르수의 태도는 분명했다.

"나 그렇게 안 해……. 중국인도 먹는다. 혼자 먹으면 나빠. 혼자 먹으면 다음에 사슴 못 잡아"

이런 원시적 공산(共産) 관념이 언제나 그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 같았다. 민족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그는 항상 사냥해온 것을 이웃과 똑같이 나눠가졌다. 내가 아는 한. 여태껏 단 한 번도 독차지한 적이 없었다. 데르수는 그렇게 서로 나눠먹어야만 다음 사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틀 후. 나와 데르수 그리고 자하로프는 보트를 타고 맞은편 해안으로 향했다. 해안을 따라 얼마 안 가서 데르수가 발자국을 또 발견했다. 발자국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더니 누군가 야영을 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데르수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잠시 후 데르수는 간밤에 이곳에서 네 명의 러시아 인이 묵었고 모두 도시에서 온 사람들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숲속에 들어와 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데르수는 흩어져 있는 빈 담뱃갑과 뜯지도 않고 버린 통조림,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빵부스러기들을 통해 그들이 러시아 인이며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또 서툴게 텐트를 친 흔적과 모닥불, 특히 땔감을 보고는 그들이 숲에 익숙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간밤의 야영자들은 마르지 않은 나무를 땔감으로 썼고, 더구나 한 사람은 모닥불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모포를 태운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여기저기서 낮선 이방인들의 숨결을 자주 느꼈다. 간혹 먼 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확인한 적도 있고. 해안 덤불에 숨겨놓은 보트나 야영한 자리를 발견한 때도 있었다. 그들이 중국인이라면 도적떼인 홍호즈(紅胡子)일지도 모르지만, 발자국으로 보아 러시아 사람들인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우리는 매일 그들의 흔적과 마주쳤다. 얼마 후 그들은 준비한 식량이 떨어지자 숲에서 나왔고, 우리 일행이 야영하는 곳까지 내려와 건빵을 좀 나눠달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스레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황금을 쫓아 몰려든 사람들

그 해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희한한 소문이 돌았다. 지기트 만 일대에 엄청난 양의 사금과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실업자들이 지기트 만으로 몰려들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 믿고 이 낯선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지기트 만 근처에 상륙한 그들은 배낭 하나만 짊어진 채 황금이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보통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온갖 고생을 하며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금단의 땅을 제집 훑듯이 샅샅이 뒤졌다. 금붙이를 찾아내려는 일념으로 그 험한 산과 숲을 헤맸던 것이다. 그들은 또 같은 목적으로 찾아든 경쟁상대들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마구 퍼뜨렸고, 숲에서 서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주먹질을 해댔다. 누군가 금을 찾았다는 소문을 듣기라도 하면 그 뒤를 밟기도 했다. 그러다가 준비한 식량이 떨어지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금을 찾지 못했다. 그들에게 약간의 상식이라도 있었다면 그토록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을 찾기 위해서는 경험과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은 그들은 우선 지기트 만 근처에 터를 잡고 천천히 준비해 나가려고 했다. 서둘러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실업자들은 이민국에서 보조금을 타낸 후 지기트 만을 다시 찾았다. 또 다른 무리는 테르네이 만을 선택했다. 최근 들어 연해지방의 발전상이 심심찮게 화제에 오르는데, 이는 아무래도 금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페페르가 이런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연해지방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따라서 원주민들에 의해 유포된 소문을 무조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티튜해 만, 지기트 만, 플라스툰 만 등지에 금, 은, 납, 유화동광의 광맥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래전부터 이들 지역에 살아온 원주민들이 베이징에 공물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헛소리 만은 아니었다."

~~~ 나머지는 책에서 만나 보세요 ^^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러시아 극동 탐험가, 지리학자, 인류학자, 작가. 187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복무했다. 그는  하바로프스크 박물관장을 지냈고, 우수리 지방과 시호테 알린 산맥 일대, 캄차카 반도, 코만도르 군도 일대를 탐사했다.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심장 마비로 숨졌다. 아르세니예프 마을에 그의 기념관이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 '니예프 박물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우수리 지방 탐험기>, <데르수 우잘라>, <시호테 알린 산맥에서>, <수리 지방 고대사연구자료> 등이 있다.




莊子가 말하는 畸人은, 莊子가 말하는 聖人은 '데르수우잘라' 같은 사람에 가깝다. - 김용옥

귀하의 친구였던 데르수는 이제 더는 '짐승의 발자국을 뒤쫓는 야만적인 사냥꾼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이룩한 문명에 대한 심판자이며, 또한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예술의 본질'을 일깨워준 선구자입니다.  - 막심 고리키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우리의 선조들은 데르수 처럼 생각하고 데르수처럼 생활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복과 승리 대신 공존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데르수의 진솔한 모습이 그토록 가슴 저미는 까닭도 그저 한 야만인의 신비로운 생태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대인이 상실한 인생의 참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옮긴이

자신의 지팡이부터 야생동물 그리고 불과 물에 이르기까지 사람처럼 말을 건네는  데르수의 모습은 어쩌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사회와 인간에게서 배신을 느끼고 있었을 그에게, 정직하고 장엄한 자연과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모습은 구원의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 인간의 존엄성, 사라져간 시간과 사람에 대한 향수 등이 어우러진 영화의 깊이는 노 감독의 면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 영화 평가 중에서

 

러시아 변방인 극동의 나나이족 사냥꾼인 데르수 우잘라(1850~1908). 그의 삶은 책과 영화로 엮어져 널리 알려졌다.

아르세니예프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시베리아 호랑이

시베리아 시호테 알린 산맥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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