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말에 매혹되어 불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깨달음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깨달음이 찾아오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의 육성이 담긴 초기경전에서 ‘열반은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정의한 것을 보았습니다. 탐욕과 성냄이 없으면 행복하겠지만, 어떻게 탐욕과 성냄을 제어하며 어리석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열반을 성취할 수 있을까? 그런 수행법은 무엇일까? 막연히 그런 법을 만나기를 기다리며 절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시절 인연이 닿아서 위빠사나 수행을 만났고, 스승의 가르침 대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알아차림을 하면서 몸과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했고, 또 욕심이 나거나 화가 날 때, 빨리 알아차리면 어느새 그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의 이익을 경험하면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이 바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 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는 알아 차릴 때마다 조금씩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힘이 줄어들어 그만큼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수행자는 단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금 경험하는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거기에서 그것의 괴로움과 실체 없음을 봅니다. 그러면 세간의 그 무엇도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아 자신과 세상을 관용과 자애로 받아들이며 지혜롭게 삽니다.
이 책은 우선 불교의 초기 경전인 대념처경에 근거하여 사념처 수행의 이론을 제시하면서, 실제로 어떻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것인가에 대한 실천 방법들을 소개하였습니다.
그간 한국명상원의 묘원 법사님께서 오랫동안 사념처 수행을 염처별로 나누어 지도하셨습니다. 이 책은 제가 묘원 법사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며 이해한 것과, 또 초보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점을 보완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는 분에게는 수행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고, 이미 수행을 하고 계신분에게는 수행의 바른 길잡이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댁이 음식을 처음 만들때는 요리책의 도움을 받지만, 여러번 만들다 보면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요리책 없이도 맛있는 음식을 만듭니다. 그러면새댁은 그 음식의 맛을 직접 경험하고 또 이웃과 맛있는 음식을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새댁의 요리책처럼 이용하여 실제로 여러분의 번뇌가 소멸하는 지혜의 맛을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맛을 여러분의 이웃과 나누기를 바랍니다.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다루는 책을 낼 수 있도록 그동안 수행을 지도해 주신 묘원 법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원고를 꼼꼼하게 교정을 보아주신 황영채 선생님과 황영희 선생님, 출판을 도와주신 여러분, 그리고 저와 함께 수행을 하면서 많은 영감을 주고 지혜를 주신 한국명상원의 수행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알아차림으로 몸과 마음이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10월 이 종 숙 올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과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불교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무명과 갈애라고 정의합니 다.1)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무명은 이것을 영원히 존재하는 것, 행복한 것, 나의 것이라는 환상으로 집착하게 합니다. 바로 몸과 마음의 실상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몸과 마음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고 생사윤회의 모든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나’라는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하여, 직접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을 합니다.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몸과 마음이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실체 없음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 괴로움의 원인이 될 갈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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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빠사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위빠사나라는 용어는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빨리pāli어입니다. 위빠사나 vipassanā 에서 위vi는 ‘분리’라는 뜻이며, 빠사나passanā는 직관, 통찰이란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대상을 분리해놓고 있는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위vi는 우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라는 관념으로부 터 분리하여 단지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빠사나passanā는 알아차릴 대상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 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상을 볼 때, 있는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경험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을 놓고 100명이 보면 100개의 견해가 나옵니다. 정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제 대상을 위vi 빠사나 passanā하는 알아차림을 통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이란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 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하여 어떤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있는 그 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던 몸과 마음이 실제로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은 오온 중 행온行蘊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지금 양손을 모아서 합장을 하고 손을 느껴보십시오. 마음이 손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려 보십시오. 지금 손에는 따뜻하거나 촉촉한 느낌들이 있고 그것을 마음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손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아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알아차림을 하고 있는 순간 다른 근심걱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근심걱정이 없는 고요한 마음은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좀더 '있는그대로' 볼 수 있게하며, 무상, 고, 무아를 보게 합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알고 있던 근본 무명을 깨고, 몸과 마음이 집착할 것이 없는 단지 정신과 물질임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무상, 고, 무아를 글이나 말을 통해서 아는것이 아니고, 직접수행을 통해서 분명하게 이해하면, 점차 ‘나’라는 잘못된 견해로 인한 갈애와 집착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이 줄어들면 그만큼 탐진치가 줄어들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2.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가 되는 경전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디가니까야』의 22번째 경 전인 「대념처경」을 근거로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꾸루스 지방의 깜마사 담마라는 마을에 머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습니다. 비구들은 ‘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중생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 게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네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身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 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受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心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法 그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행위를 해서 자신을 정화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마지막에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념처 수행을 하면 괴로움이 모두 소멸한 열반을 얻어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열반입니다.
3. 알아차리는 순간 번뇌가 없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론과 더불어 직접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수행자의 계발된 알아차림의 힘은 실제 생활에서 괴로움이 있을때 빨리 그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괴로움을 키우지 않으며, 다시 알아차림을 지속하여 괴로움 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경험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믿음을 키우며, 알아차림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이런 노력이 알아차림을 지속하게 하며, 그 결과 마음이 집중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일어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는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갈애와 집착을 줄이기 때문에, 먼저 자신이 편안해지고, 그다음 가족과 이웃에게도 그 평온의 파장이 전해져 모두 함께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리自利 이타利他의 行입니다.
4.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을 어떻게 할까요?
알아차림은 몸, 느낌, 마음, 법의 네 가지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현재의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붙잡거나 없애려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알아 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편안하고 바른 마음가짐일 때만 바른 알아차림이 가능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좋은 현상을 바라거나, 싫은 현상을 없애려고 하면 바른 알아차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수행자를 들뜨게 하고 불안하게 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없게 합니다.
이제 실제로 알아차림을 한 번 해봅시다. 먼저 양손을 합장하고. 눈은 살며시 감고, 마음을 손바닥으로 기울입니다. 그리고 계속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지금 어떤 느낌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따뜻함, 축축함, 단단함, 부드러움, 점차 더워지는 열기, 그 열기의 변화 등등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몸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음이 저절로 알게 되는 느낌을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경험하는 느낌에 대하여 좋거나 싫다는 분별을 하고 있으면그순간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알기만 할 뿐, 시비 분별을 하지 않습니다. 자! 다시한 번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고 지금 알고있는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 봅시다. 지금 경험하는 느낌이 그대로 있는지, 또는 변하고 있는지 얼마동안 그냥 지켜보십시오.
자, 이제 합장을 푸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손바닥에 나타나는 여러 가 지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리는 동안 마음속에 어떤 욕망이나, 괴로움, 불만족이 있었습니까? 무엇을 바라거나 근심 걱정을 했습니까?
마음을 손에 두고 느낌을 알아차리는 동안 그런 생각들이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현재 자신의 몸에 두고 알아차리는 순간만은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순간이 지속됩니다. 바로 마음에 번뇌가 끼어들지 않는 깨끗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계율이 지켜지며 마음은 고요해지고 집중력은 좋아집니다. 그러면 더욱 대상을 '있는 그대 로' 보는 지혜가 일어납니다.
지금 대상을 알아차리는 동안 일단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 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수행은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을 만들고,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이어지는 동안 번뇌가 없기 때문에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여 자신의 업을 청정하게 합니다. 또 바른말과 행동은 좋은 과보를 예약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그리고 궁극에는 완전한 행복을 얻어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 번뇌를 완전하게 소멸하는 붓다의 수행법을 만난 이 인연을 잘 가꾸어서,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하고 평온하며, 궁극에는 열반을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알아차림
1. 알아차림, 사띠sati의 정의
알아차림은 마음이 일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매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팔정도를 닦아갑니다. 바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가장 선한 의업意業입니다.
빨리Pāli어로 사띠sati는 기억과 알아차림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 합니다. 기억이라고 하면 보통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띠의 기억은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입니다. 마음이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현재를 기억하는 각성覺醒된 마음이 일어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띠sati를 알아차림, 마음챙김, 새김, 주시, 수동적 주의집중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알아차림’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 사띠sati는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 현재를 놓치지 않는 것,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는 것, 현재를 이어서 지켜보는 것, 현재를 있는그대로기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알아차림은 ‘할 때 하는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하고있는 일에 마음을 두고 지켜보며, 또 현재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않고 기억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축약하면 37조도품이지만, 이것을 다시 축약하면 팔정도이며, 팔정도는 다시 계‧정‧혜로 축약됩니다. 이 계‧정‧혜는 또다시 알아차림 하나로 귀결됩니다. 수행자가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어떤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번뇌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이며, 바로 팔정도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 사띠sati라고 말합니다.
2. 알아차릴 대상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은 현재 자신의 정신과 물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자신의 감각기관이 감각 대상과 부딪쳐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 실재實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식할 수 없는 과거나 미래의 것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알아차릴 대상이 아닙니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을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존재 그 자체는 실재가 아니고, 존재를 인식할 때만 실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존재하더라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또 지금 인식하는 것도 그것을 모양, 이름, 개념과 같은 관념을 통해 인식하는 관념적실재가 있고, 지금 인식하는 것을 단지 느껴서 관념없이 마음으로 인식하는 궁극적 실재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바로 이 궁극적 실재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합니다. 궁극적 실재는 모두 조건에 의해 생멸하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대상을 알아차리는 방법
위빠사나는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분리한다는 것은 대상을 자 신의 느낌이나 생각, ‘나’라는 고정관념, 어떤 선입견으로 색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상을 자기 입장에서 보고 탐진치로 반응하던 것을 이제는 알아차림으로 잠깐 멈추고, 대상을 단지 대상으로 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렌즈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 오듯이, 수행자도 대상을 사실대로 알아차려 기억[念]하는 것입니다.
실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스크린에 마음을 두고 지금 나타나는 장면을 그냥 봅니다. 그래도 영화가 끝나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영화보듯이, 자기의 생각을 섞지않고, 나타나는 현상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나중에 몸과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몸과 마음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그 성품이란 무상 ‧고 ‧무아입니다.
4. 수행자의 마음가짐
알아차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수행자가 아 무것도 바라지 않고, 또 억제하지 않고, 무엇이든 나타나는대로 다 받아들여, 차분하게 지켜볼 때 알아차림을 잘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만일 수행자에게 바라는 마음, 성냄, 근심, 슬픔, 걱정이 있다면 그런 마음에 휩쓸려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대상을 법으로 분리하지 못하고 내것으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알아차려 마음의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그 다음 몸의 느낌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알아차려 내려가면서 몸의 긴장을 풉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다 이완되면서 편안해집니다.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지금 나타난 대상을 가볍게, 부드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알아차립니다. 이런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몸과 마음은 더욱 안정되면서 계속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보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수행을 잘하려는 마음으로 수행 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내 안에 잠재해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줄이려고 하는 것인데, 수행자가 수행이 잘 되길 바라거나, 수행이 안될때 실망하거나, 또한 수행이 조금 잘 될 때 아만심을 낸다면, 이것은 수행을 하면서 오히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까지는 매 순간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에 따라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없애려는 욕망으로 살았지만, 알아차림은 이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알아차려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을 반복하여 닦음으로서 알아차리는 새로운 습관을 몸 에 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의 습관 때문에 수행이 잘 안됩니다. 이때는 이상황이 바로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수행자가 만일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나는 수행을 못한다.’고 실망하면 다시 자신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이 잘 되기를 바라지 말고, 수행 중에 경험하는 망상, 통증, 졸음, 게으름, 의심 등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지금 나타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대상으로 알아차리며, 그 변화를 지켜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의무입니다.
수행이란 나쁜 현상을 좋은 현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 현상을지켜보는 것입니다. 지금 나타난 대상은 그것이 좋은것이나 싫은것이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비록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음이 나타나도 이것은 호흡처럼 하나의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모두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리면 이 과정에서 인내하는 힘과 알아차리는 힘이 쌓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하지 않는 현상들이 바로 수행을 도와주는 재료가 됩니다. 사실 이세상은 옳고그른것, 좋고나쁜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시비분별하는 자신의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이 생각은 관념일뿐 실재가 아닙니다.
5. 알아차림의 역할
첫째, 알아차림은 ‘안·이·비·설·신·의’ 여섯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 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부딪칠 때 좋은 것은 탐심으로, 싫은 것은 성냄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있으면 대상은 단지 대상일뿐 내것이 아니므로, 대상에 대한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알아차림이라는 문지기가 없다면 그 순간 '탐진치'라는 도둑이 들어와 계율과 마음의 평온을 훔쳐갈 것입니다.
둘째, 알아차림은 불선업을 막아서 선업으로 바꿉니다. 탐진치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관용.자애.지혜가 나타납니다. 이런 마음은 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바로 선업을 행하는 순간이며, 이 선업의 힘은 괴로움을 소멸하는 지혜의 씨앗이 됩니다.
셋째, 알아차림은 계율을 지키게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잘 집중되면 대상의 성품을 보는 힘이생기고, 이런 힘이 모여서 번뇌를 소멸하고 집착을 끊어 궁극에는 열반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계‧정‧혜를 다 포함합니다.
넷째, 알아차림은 몸과 마음의 성품을 보게 합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 과 마음을 계속 알아차리면 정신과 물질의 성품을 통찰하게 됩니다. 오온은 매순간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고, 생멸하는 것은 괴로움이며, 오온에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통찰하게 됩니다. 이렇게 무상‧고‧무아를 통찰한 지혜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소멸합니다.
6. 알아차림이 잘 안되는 이유
누구나 알아차림을 잘 하고 싶지만 알아차림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감각적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서, 그동안 즐거운 것을 찾아다니던 마음이 알아차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또 "알아차리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라는 의심이 있어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아차림을 해보면, 알아차림을 할 때는 괴로움이 없는데, 알아차림을 놓치고 행위를 하면 반드시 괴로움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일이 결코 시시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지금까지 우리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없어서 알아차리려 는 마음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평소의 습관대로 행위를 합니다.
또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내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항상 대상에 휘둘려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러나 이때라도 알아차림을 놓친 것을 다시 알아차리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서 다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아직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탐진치를 일으키는 힘은 강해서 알아차림을 하다가도 대상에 휩쓸려서 알아차림을 놓쳐버립니다. 이때 놓친것을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노력입니다. 그래서 좌선 한시간 동안에 한 호흡만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리면 그것이 두 호흡, 세 호흡으로 늘어나면서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갑니다.
7. 알아차림을 잘하려면
첫째,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지금 자세는 바른가?’ ‘지금 몸은 무엇을 하는가?’ 라고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둘째,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몸에 마음을 붙이고, 지금 하고있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잘 때까지 여러가지일들을 합니다. 그때마다 지금 일하고있는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이렇게 몸을 알아차리는 중에 불쑥 어떤 마음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현재 하는 일에 마음을 둡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닦으면 알아차리는 힘이 길러지며, 점차 알아차리는 것이 능숙해지고 나중에는 알아차림이 저절로 따라 다니게 됩니다.
셋째, 알아차림을 한 뒤에는 알아차린 대상에 대해서는 ‘그랬구나!’라고 알고 놓아야 합니다. 알아차린 것에 대한 자기 나름의 시비나 판단분별을 하면 바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알아차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등등을 생각하면 이미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현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단순하게 사실대로 알아차려서 ‘그랬구나!’하고 놓아버리 고, 바로 지금 새롭게 나타난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은 계속 새로운 조건에 의해 생멸하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항상 알아차려야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것은 놓아버리고 지금 경험하는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셋째, 알아차림에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현재라는 시제 속에는 항상 알아차릴 대상이 있기 때문에 항상 현재의 대상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일 마음이 이미 경험한 대상에 머물러 있으면 알아차림에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표를 찍었더라도 다시 알아차림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은 과거이고, 지금은 놓친 것을 아는 현재가 있습니다. 아무리 늦은 알아차림이라도 한번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알아차림을 시작하면 다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과 노력과 집중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발전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력이란 힘을 주어 대상에 강하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림이란 티켓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이 티켓은 지고의 행복인 열반, 깨달음, 윤회의 종식, 불사不死에 도착하는 티켓입니다.
관념과 실재
1. 관념觀念과 실재實在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우리는 모든 대상을 느낌을 통해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 느낌과 경험은 바로 사라지고 의식에 기억으로 저장됩니다. 이 기억은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나 마치 지금 경험하는 것처럼 자신을 지배합니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생각들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것들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때 ‘지금 있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고 있네!’라고 그 생각을 알아차린 뒤 몸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어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현재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수행은 항상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실재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합니다. 이러한 실재를 법,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이 법도 관념의 법과 실재의 법이 있습니다.
관념의 법은 지금 경험하는 것을 문자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관념적 진리, 빤냐띠 담마paññatti-dhamma라고 합니다. 실재의 법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을 문자나 언어로 관념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물질입니다. 이것을 궁극적 진리,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dhamma라고 합니다.
수행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 때 지금 경험하는 대상의 모양이나 관념을 알아차리는 사마타수행이 있고, 대상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습니다.
처음 수행을 할 때는 우선 보기 쉬운 대상의 모양이나 명칭에 마음을 기울여서 알아차립니다. 점차 마음이 대상에 잘 집중되면서 모양이 사라지고 느낌이 나타납니다. 이때는 그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관념을 통해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고, 이어서 느낌을 통해 대상의 성품을 보는 순수 위빠사나3) 수행입니다.
3) 순수 위빠사나 수행은 선정 수행을 거치지 않고, 사념처 수행을 해서 오개를 제거하 고, 찰나 삼매를 얻어,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모양인 관념과 느낌인 실재의 구분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면 관념에 빠져 대상의 성품을 볼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관념과 실재는 직접 사념처 수행을 할때 경험을 통해서 구분할 수 있을 뿐, 생각으로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생각은 오히려 실재를 보지 못하게 막습니다. 수행자는 생각을 단지 생각이라고 알아차려야 생각을 벗어난 실재를 볼 수 있습니다.
2. 관념, 빤냐띠 담마paññatti-dhamma
관념은 빨리어로 빤냐띠 담마paññatti-dhamma라고 합니다. 관념은 명칭, 상想. 상相, 모양 등으로 어떤 실재實在를 표현하기 위해 붙여진 개념 concept이며, 한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즉 관념, 빤냐띠는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이름, 명칭, 숫자, 나이, 여성, 남성, 사람, 동물, 아름다움, 추함, 옳고 그름 등, 모든 인습적인 개념들입니다.
관념은 세간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세속의 진리, 속제俗 諦입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어떤 한사람을 말할때 그의 이름과 성性, 아름답다, 멋있다, 옳다, 그르다는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관념은 실재實在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관념 속에서 그 관념이 의미하는 실재reality를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실재를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실재는 사라지고 다시 관념화된 언어만 남습니다.
3. 실재,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dhamma
실재實在를 빨리어로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dhamma라고 합니다. 이 는 자연적인 것, 근본법, 최승의법最勝義法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궁극적 진리, 진제眞諦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실재는 일어나면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성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실재의 수명은 한 찰나입니다.
궁극적 진리인 빠라마타 담마는 바로 마음[識], 마음의 작용[受, 想, 行], 물질[色], 열반으로, 모두 네 가지입니다. 이중에서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은 조건에 의한 유위법으로 세간의 실재이며, 열반은 조건이 소멸한 무위법으로 출세간의 실재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인식하는 것이 실재인데, 이것은 근根, 경境, 식識이 촉하 여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결국 빠라마타 담마는 물질과 정신, 즉 오온입니다. 이 법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으며, 이 고유한 특성은 매 순간 조건에 의해 찰나 생멸하는 조건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빠라마타 담마는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무상의 특성과 더불어 괴로움과 무아라는 보편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사마타 수행은 대상의 모양을 수행 주제로 삼고,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의 실재인 느낌을 수행 주제로 삼습니다. 모양은 관념이며, 느낌은 실재 입니다. 모양은 겉으로 드러나며, 실재는 모양안에 숨어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우선 모양을 통해서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을 알게 됩니다.
1) 사마타 수행
사마타 수행은 대상의 이미지, 상想, 모양, 관념을 수행 주제로 합니다. 이 것은 변하지 않으며.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고정하기가 쉽고 몰입이 가능합니다. 대상의 모양에 마음을 집중하면 다섯 가지 장애가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근접삼매를 얻고 더욱 집중이 되면 대상과 하나가 되는 본삼매를 얻습니다. 이것이 색계선정을 얻는 사마타 수행입니다. 청정도론4)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40가지 명상주제5)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4) 청정도론은 5세기 붓다고사의 저술로, 경장인 4부 니까야에 대한 주석서다. 아비담마 적 방법론으로 불교의 기본 주제인 계‧정‧혜를 칠청정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다. 5) 대림스님, 각묵스님『아비담마 길라잡이』p761. 40가지 명상주제는 열 가지 까시나. 열가지 부정.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네 가지 무량. 한 가지 인식. 한 가지 분석. 네 가지 무색이 있다.
2) 위빠사나 수행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수행 대상으로 삼습니다. 실재는 모양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수행자는 먼저 대상의 모양을 알아차리다가 차츰 모양 안의 실재인 느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몸, 느낌, 마음, 법을 알아차리는 사념처 수행은 먼저 관념을 대상으로 알아차린 뒤 관념 속의 실재가 느낌으로 나타나면 그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느낌을 통해서 인식합니다. 이 느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고유한 특성이 조건에 따라 찰나마다 생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생멸하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찰나를 집중하는 힘이 생깁니다. 이러한 찰나집중은 대상이 가진 성품을 통찰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찰나마다 변하는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들은 함께 일어났다 함께 사라지면서 법의 무상한 성품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생멸하는 것은 괴로움이며, 이것을 조절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성품도 직접 경험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을 통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모든 수행자가 처음부터 무상, 고, 무아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마음을 몸에 붙여서, 몸의 움직이는 모양을 계속 알아차리다가, 마음이 안정되면 그때부터 몸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계속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구별하는 힘이 생기고, 다시 이들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 생멸한다는 조건적 특성을 파악하고, 그 다음 생멸하는 법의 무상함으로 생기는 괴로움과 무아의 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무상, 고, 무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유思惟입니다. 생각으로 무상, 고, 무아를 잘 이해해도 이것은 지식이지 지혜가 아닙니다. 지식은 알음알이일 뿐, 탐진치를 끊는 힘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직접 통찰하여 생긴 지혜가 탐진치를 끊습니다.
5. 순수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에서 실재로
관념과 실재는 항상 함께 있지만 관념은 겉으로 드러나고 실재는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마음을 대상에 붙이기 위해 먼저 대상의 모양에 마음을 기울이다가 마음이 잘 집중되면 점차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자가 대상의 모양을 계속 알아차리다 보면 모양은 사라지고 느낌이 인식됩니다. 예를 들어, 손을 합장하고 손에 마음을 집중하면 대상의 모양을 알아차리는 사마타 수행이지만, 점차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여러가지 감각을 알아차리면 실재를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호흡을 볼 때도 우선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보다가 마음이 호흡에 잘 집중되면 배에서 수축 팽창하는 느낌이 인식됩니다. 이때 그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경행을 할 때도 발이 움직이는 모양을 대상으로 잡고 알아차림을 이어 가면 마음이 안정되면서 발의 움직임에서 무겁고 가벼운 느낌이 나타납니다. 이때 자연스럽게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매운 고추를 먹을 때 지금 고추가 맵다고 말하면 실재를 표현한 관념이 지만, 지금 혀에서 느껴지는 매운맛과 그 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실재인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좌선 중에 통증이 나타나면 ‘아픔’이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은 관념이며, 지금 경험하는 찌르고, 땅기고, 화끈거리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통증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경전을 읽을때, 기도를 할때, 염불이나 절을 할때, 마음을 대상의 모양에 집중하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사마타 수행이지만, 이때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 마음, 마음의 작용들을 알아차리면 실재를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이와 같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같은 대상에서 대상의 모양에 마음을 집중을 하는가, 아니면 대상의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는가에 따라 구별됩니다. 실제 수행에서는 사마타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따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안정시켜 위빠사나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위빠사나는 지혜를 성숙시켜 번뇌를 소멸하기 때문에 이 둘은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6. 생활 속에서의 관념과 실재
세속은 명분과 실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관념의 지배를 받습니다. 세속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실재를 알기보다 모양을 우선시하여, 대상을 선악, 옳고그름, 좋고싫음으로 판단분별을 하고, 자기의 견해를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관념을 벗어난 실재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출세간을 지향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모양, 명칭, 명분, 생각을 관 념이라고 알아차리며, 그 관념이 의미하는 실재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모양, 명칭, 명분, 실리라는 관념의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모든 관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관념은 오온을 ‘나’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한 개체의 정신과 물질을 표현하는 이름인데, 이 이름에 속아서 매순간 생멸하는 오온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인 ‘나’를 실체로 만들어 항상 ‘나’를 내세우며 ‘나’를 집착합니다.
예를 들어, 여름에 모기에 물렸을 때, 우리는 모기가 해충이라는 정보와 함께 이 해충이 ‘나’를 물었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바로 모기에 대한 악의惡意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실재는 따끔한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관념보다 실재를 알아차리면 자기 생각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알아차림으로 적절한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관념과 실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대상과 부딪친 순간 자기 생각에 빠져 말이나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때라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몸의 느낌으로 돌아오면, 관념에서 벗어나 실재를 보는 알아차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면서 바른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 그것을 다시 알아차리는 노력을 수없이 반복해야하는 어려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고 점차 관념과 실재를 구별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지금 경험하는 대상에서 관념보다는 그 이면에 숨어있는 실재를 보고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실재를 대상으로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냥 몸과 마음을 열심히 알 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알아차림을 놓치고 관념이나 모양에 빠질 때마다 ‘그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현재의 몸으로 돌아와서 지금 실재하는 분명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수행자 자신이 세워놓은 관념의 그물에 걸리면, 바로 자기 견해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실재를 모르고 관념에 빠져 사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세속은 무지로 인해 항상 자기 생각에 걸려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으로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고, 자신이 경험하는 대상 에서 실재를 알아차리면, 법의 특성인 무상‧고‧무아를 통찰하게 됩니다. 이런 통찰은 무명과 갈애를 소멸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소멸하는 원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