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사랑하며 죽는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삶을 삶-사랑-죽음 ... 등으로 분리해 버린다면 우리의 마음도 분리-분열되어 공포가 생기게 되고, 태어나서 사랑하고 죽어간다는 삶의 전체상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불가피한 죽음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다. 생명의 종식과 육체의 종식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거를 포기하기를 두려워 한다. 우리 자신이 과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시간에 속박되어 있다.
슬픔과 절망에 속박되어 있다. 때로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약간의 선량함과 친절함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 한다. 우리는 이별을 무서워 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 자신을 가구나 그림, 집이나 회사와 일체화 시켜 버렸기 때문에 이별은 우리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을 두려워 한다. 이별 중에서도 죽음이란 이별을 가장 두려워 한다.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의 일부이다. 죽는다는 것을 수반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때, 자신의 이기심의 투영과 같은 모든 이념으로부터 떠날 때, 과거의 축적(경험)으로부터도 떠날 때, 당신은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따라서 산다는 것의 의미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사는 것, 사랑하는 것, 죽는 것은 모두 같은 것으로서 지금을 완전하고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실현되면 모순이 없는 생활, 고통도 슬픔도 없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사는 것,사랑하는 것,죽는 것 이 삼자가 합치하는 데서 행위가 생긴다. 그 행위에는 질서가 있다.
인간이 매일매일 그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사회가 회복될 수 있으며 인간의 유대도 형성될 수 있다.
명상은 삶을 이해하는 것이며, 생활과 결부된 일상생활의 양식(樣式)이기도 하다.
비참-비탄-고독-절망-출세욕-성공욕-공포-선망 등이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매일매일의 생활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명상으로 무아경(황홀경)을 이룰 때 불멸의 시공을 <초월>한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무아경이란 자아(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 노력, 경쟁심 등의 정신작용 전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참된 실재(신)를 찾아 끊임없이 기도하고 명상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혼란-비참-혼돈-비탄-투쟁-학대-사랑의 결여 등을 남(神)의 손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며, 즉 남이 광명이나 행복을 갖다 주기를 기원하면서 기도하거나 명상한다.
추측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신(참된 실재)은 우리가 만들어 낸 사소한 걱정이나 불행 또는 혼란에 관여할 수 없으며
응답할 수도 없다. 또 혼란하고 무지하고, 끊임없이 갈망하고 요구하며 탄원하는 정신은 <참된 실재>를 이해할 수 없다.
정신이 절대로 정적하고 욕망이 종식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실재>가 도래한다.
삶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는 참된 마음으로부터의 명상은 자유와 명석과 통합을 가져온다.
여기서 이해란 모든 것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무지할 때는 잘못된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음은 바로 정당한 가치의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당한 가치가 확립되었을 때에만 이해가 생긴다.
소유물이나 자타의 관계나 관념 등의 정당한 가치는 <사고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서 확립된다.
그러므로 <사고하는 사람>인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선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자기인식>이다. 따라서 자기인식이 바로 명상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자기인식이며 자기인식이 없으면 명상은 없는 것이다.
자기인식은 우리가 자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관찰할 때 생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을 관찰하고 배워야 하며 또 배우고 있는 대상 자체를 사랑해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아무 것도 축적하지 않는 움직임을 실제로 관찰하며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인식을 발견하려면 자기를 이해하려는 의욕과 탐구심이 있어야 한다.
자기인식은 타인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가 발견해야 하는 자기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결론을 얻는다든가, 목적지에 도달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라는 거울을 통해서 거기에 비친 <나>의 자세를 시시각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지식이나 경험의 축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순간에 관한 것이다.
어떤 방식이나 수단을 따르면 그 형태에 맞춰서 나의 사고나 행동을 형성해 나갈 뿐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자기인식을 위한 방법이나 수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정신적 지도자-책-성전도 우리에게 자기인식을 갖다주지 못한다. 자기인식을 위해서는 정신이 정적(靜寂)해 있어야 한다.
자기인식이 없으면 정당한 사고가 있을 수 없으며, 정당한 사고(思考)가 없다면 그 의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당신이 하는 일은
전혀 의미가 없다. 자기인식이 있을 때는 정당한 사고가 가능해져서, 그 결과 정당한 행위가 생겨난다.
정당한 행위가 존재할 때는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신을 혼란 밖으로 끌어 내어 줄 타인을 찾거나 원망(願望)할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가 삶에 대하여 말할 때 산다는 것은 하나의 계속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동일시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나와 나의 집, 나와 아내, 나와 나의 재산, 나와 나의 과거 경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인간은 고립해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서로 관계
--- 나와 소유물과의 관계, 나와 타인과의 관계, 나와 관념과의 관계 ---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대립이나 비참, 투쟁 등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정당한 인간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삶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죽음이 있다. 죽음은 이런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종식시킨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삶과 정반대의 것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이 두려워 우리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추구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삶을 알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지속되고 끝나지 않는 삶의 방법을 알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끝나는 일 없이 지속되는 삶의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완전히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욱체는 자연적으로 죽는다. 모든 유기체는 종말이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죽음은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앎의 정지>와 <앎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여기서 앎이란 기억을 말한다. 또 기억은 어떤 사실에 대한 기억이나 집으로 가는 길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한 심리적 안전에 대한 집착이나 지금까지 축적한 기억으로 그 속에서 안전이나 행복을 찾고 있는 그런 종류의 기억을 말한다.
우리가 하루하루 낡아버린 모든 것에 대하여 죽어갈 때에만 새로운 것이 생겨날 수 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그 심리적인 계속성이 끝날 때 생긴다.
창조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존재했던 것>의 연속이 아니라 그것이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란 창조이고 미지의 것이며, 영원한 것이고 <신>인 것이다.
따라서 지속 속에 살면서 미지의 것이나 진라나 영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 속에 투영된 것밖에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끝나는 일 가운데서, 또한 죽는 일 가운데서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관계를 발견하려고 한다든가, 지속되는 것과 미지의 것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공적이며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살고 있으면서 죽어가는 일 -- 이것은 내일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 매일 죽어간다는 의미이다.
그 때야 비로소 우리는 살고 있으면서 죽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죽음과 지속의 종말 안에서만 신생과 영원한 창조가 생겨난다.
사는 것, 사랑하는 것, 죽는 것은 모두 같은 것으로서 지금을 완전하고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혼돈과 무질서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는 데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생활을 해보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역시 오늘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냐 하는 것이다.
오늘 뿌린 씨가 꽃을 피우는 것이므로 아름다운 씨, 슬픈 씨를 뿌리게 되면 그와 같은 것이 자라게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열심히 믿고 있는 사람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면 곤란하다.
오늘을 열심히 고려하는 가운데 인간의 선한 본성이 가로놓여 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며 죽는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랑할 때 행복하다.
행복은 어제의 것이 아니며 또한 시간의 산물도 아니다.
행복은 언제나 <바로 지금> 속에 있으며, 시간을 초월한 상태 속에 있다.
이렇게 행복을 주는 사랑(참된 실재)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다.
-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