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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초걈 트룽파의 마음 공부



마음 공부란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미망을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1. 마음 공부로 들어가려는 당신에게
"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버려두어야 합니까?"
"연주할 때 악기의 줄을 어떻게 조율하지요?"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게 합니다."
"명상 수련을 할 때에도 마음을 강제로 어떻게 해서도 안되고 마냥 돌아다니게 내버려두어도 안됩니다."

2. 끊임없는 갈망에서 벗어나려면
당신은 누구 꽁무니를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항해하는 겁니다.
안내자는 당신 앞에서 걷지 않고 당신과 함께 걷습니다.

3. 진정한 굴복이란 마음을 여는 것
우리는 걸어가는 걸음마다 연꽃잎을 밟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추어 해석합니다.
넘어지게 될 경우에도 다치지 않도록 부드러운 착지를 창조합니다.
참된 굴복은 그렇게 부드러운 착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울퉁불퉁하고 돌멩이도 많은 땅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을 일단 열어놓으면, 거기 있는 바닥에 그냥 내려서게 됩니다.

4. 영적인 친구와의 아름답고 평등한 만남
스승에게서 무언가를 얻겠다는 바로 그 의욕이 장애물입니다.
이 의욕이 사라지기 시작할때 우리의 알몸뚱이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하고 거기서 두 마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5. 스승이 나에게 주는 보이지 않는 선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현장에 스승은 자신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로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열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것들을 기꺼이 버리면 거기서 전수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무슨 비밀스런 의식 같은 건 필요없습니다.

6. 자기 기만의 꿈에서 깨어나기
참된 경험이란, 꿈의 세계를 넘어 지금 여기 일상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색깔, 흥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때 우리는 더 나은 무엇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지요.
거기에는 요술이 없습니다.
낙심, 무지, 감정 따위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참된 것이고 그 속에 엄청난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경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고 그래서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 있는 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냥 모래 한 알이 되는 것입니다. 

7.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길 또는 힌두의 길 또는 일본 선불교의 길 같은 것을 모방할 수도 있습니다.
티베트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고 북인도로 갈 수도 있습니다.
탁월한 과학자에게 구원의 역할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를 완전히 그리고 적절하게 내어준 경험, 자신을 다 열어놓고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버린 경험이 있던가요?
모든 탈을 벗고 갑옷과 함께 셔츠와 피부와 살과 핏줄, 마침내 심장까지 벗어버린 경험이 있습니까?

8. 물대접 안에 빛나는 달처럼
자신의 바탕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고, 자신이 본디 풍요로운 존재임을 믿고, 그래서 자기를 활짝 열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배우는 과정, 이게 바로 열린 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비가 당신에게 영감을 주어, 인생을 춤추게 하고 세상의 여러 기운들과 통교하게 합니다.
보살의 행동은 물 대접 백 개에 비치는 달빛과 같습니다.
대접마다 하나씩 해서 달이 백 개 있는 셈이지요.
그것은 달이 그렇게 계획한 바가 아닙니다.

9. 유머, 그 포용하는 기쁨
유머 감각이란 어떤 상황의 양 극단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듯이, 있는 그대로 함께 보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인생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비즈니스로 생각하여 만사를 근엄하고 딱딱하게만 다룬다면, 그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닙니까?
왜 그렇게 거창한 흥정을 하는 걸까요?
유머 감각이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기쁨에서, 이쪽과 저쪽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완전히 개방된 상황에 두루 미치는 기쁨에서 오는 것이랍니다.

10. 에고가 만들어지는 시작과 끝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시작하지 않고 뭔가 나중에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대와 꿈으로 출발점을 삼는 것은,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가지고 놀이를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해탈과 자유에 대해 말하기 전에 그 길의 바탕인 에고와 우리의 혼돈 상태를 먼저 토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11. 벽의 진실과 마주치는 시간
내 앞에 가로선 벽들의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게 되는 순간, 벽들은 불쾌한 것도 완강한 것도 아니며 
그것들을 통과하여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12. 괴로움을 이해한 자 앞에 열리는 또 다른 문
마침내 그 어떤 깨달음을 얻겠다는 희망을 모두 포기할때, 바로 그때에 길이 우리 앞에 열립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과 같지요.
당신은 그를 기다리다가 그가 오리라는 희망을 모두 버리고, 
그가 오리라는 건 어디까지나 내 환상이었다고 생각하고는 자리를 뜨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나는 거에요.

13. 소멸되지 않는 교환과 춤
보시는 기꺼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주는 것입니다. 스모그나 먼지나 사람들의 증오나 욕정 같은 것들이 우리를 덮치지 않을까 겁내지 않고 그냥 자기를 활짝 열어두는 겁니다.
그것이 기쁘고 즐거운 에너지인 까닭은 보살이 인생 자체를 끊임없는 창조 과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에요.
해가 빛을 비추고 식물이 자라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해한테는 식물을 재배하려는 욕망이 조금도 없지요.

14. 이분법이 사라진 후의 흔들림 없는 평화
색은 우리가 그것에 개념을 적용하기 전에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채롭고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고 느낌을 주면서 '여기 있는 무엇'의 근본 상태입니다.
즉 색은 비어 있는 것, 공空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해요.
쓰레기 더미가 거기 있고 단풍잎이 거기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들 위에 공이라는 베일을 씌우지 말고 분명하게 느껴야 합니다.

15. 지혜의 힘과 자비의 힘
지혜는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고 지적인 존재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상황을 뚫고 들어가 그대로 드러내는, 날카롭고 유능한 질을 지니고 있어요.
자비는 지혜의 눈에 의하여 고무된 행동을 촉발시키는, 상황들에 대한 열린 깨달음입니다.
자비는 매우 힘이 있지만, 지성이 자비가 활짝 열린 공간을 필요로 하듯이 지혜에 의하여 제 방향을 잡아야만 합니다. 
지혜와 자비,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거에요.

16. 온전한 경험 세계로의 입장
가면을 벗기고 꿰뚫어보는 맑은 인식의 눈으로 손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보면 돌의 단단함을 느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속에 지니고 있는 정신적 의미까지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에서 대지의 단단함과 위엄이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말이에요.
실제로 그렇게 인식할 수 있을때 우리는 에베레스트산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손바닥에 놓여 있는 작은 돌멩이마다 태산의 단단함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마음 수련을 해서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할때 그 말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대지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마음 공부로 들어가려는 당신에게


이 책은 1970년 가을에서 1971년 봄까지 콜로라도 볼더에서 계속된 강의 내용을 묶은 것입니다. 우리가 볼더에 명상센터인 '카르마 드종’을 막 세웠을 무렵이었어요. 나와 함께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구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은 저마다 간절했지만 한편으로 많은 혼동, 오해, 기대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마음 수련의 길을 한번 조감하게 해 주고 그 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을 미리 경고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책으로 출판되는 이 강의들이 마음 수련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 수련을 제대로 하는 것은 아주 미묘한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그냥 순진하게 뛰어드는 어떤게 아니에요. 일그러지고 뒤틀린 자기 중심적 마음 공부로 빠지게 하는 곁길이 수도 없이 많거든요. 몇 가지 수련 방법을 사용하여 결국은 자기 중심성을 키웠으면서도 스스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내가 ‘영적 유물론-spiritual materialism’ 이라는 말로 표현코자 하는 게 바로 이 근본적인 왜곡이에요. 이 강의에서는 먼저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영적 유물론'에 스스로 빠져들어가는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자기 기만의 여러 모양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곁길들을 살펴본 다음, 진정한 마음 수련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대강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제시되는 접근 방식은 고전적인 불교의 방식입니다. 형식의 면에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마음 수련에 대한 불교적 접근 방식의 중심 내용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방식이 유신론(有神論)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유신론적인 수련방식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방법상의 차이는 무엇을 강조하고 어떤 수단을 쓰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영적 유물론은 모든 종류의 마음 수련에서 발견됩니다. 불교는 우리의 미망과 고통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의 근원을 파헤치는 데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지요. 유신론적인 방식은 하느님의 풍요로움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켜 마침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쁜 성향들이라는 점에서, 유신론적 방식에서도 그것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의 교만함은 불교 수행자에게든 하느님을 믿는 수행자에게든 똑같이 심각한 문제지요.


불교 전통에 따르면 마음 수련이란 자신의 미망을 깨뜨려 무찌르고, 마음의 깨어 있는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에고와 에고에 따라오는 편집증에 의하여 마음의 깨어 있는 상태가 어지럽혀져 있을 때 그것은 밑바닥 본능의 성격을 띠게 되지요. 그러기에 마음 공부란 마음의 깨어 있는 상태를 만들어 세우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지럽히고 있는 미망을 불태워버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온갖 미망을 불사르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밟지 않는다면 깨달음 자체가 우리가 만든 산물이 되어 인과법칙에 따라 때가 되면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조만간에 반드시 없어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만일 깨달음이 그런 식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언제고 에고가 제 주장을 하고 나설 것이며 마침내 미혹된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깨달음이 영원한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발견할 따름이지요. 불교 전통에서는 자주 구름 뒤로 나타나는 태양을, 발견되는 깨달음에 대한 은유로 사용합니다. 명상 수련을 하면서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상태를 훔쳐보기 위해 에고의 미망을 씻어내지요. 편집증에 의하여 어지러워진 무명이 없어지면 인생에 대한 굉장한 시선이 활짝 열립니다. 존재의 다른 방식을 발견하는 거예요.


미망의 핵심은, 지속적이고 단단해 보이는 ‘나’가 따로 있다는 아상(我相)을 지니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감정 또는 사건이 일어날 때 무엇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의식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느끼는 거지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아(自我)에 대한 감각이나 생각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요, 계속되지 않는 사건 입니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지속적이고 단단한 것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착각을 진짜로 여겨서 고정된 자아를 유지, 강화하려고 애쓰지요. 그래서 자아에게 쾌락을 먹이고 괴로움으로부터 지켜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경험은 끊임없이 우리의 덧없음을 드러내 보여주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려는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리려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모습이 깨어 있는 상태라면, 그것을 깨닫지 않으려고 분주하게 애쓰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 이유는, 세계에 대한 착각에 너무 깊숙이 빠져들어서 그것이 유일하고 진정한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정되고 지속되는 자아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에고의 행위지요. 그러나 에고는 겨우 부분적으로만 우리를 고통에서 지켜줄 수 있어요. 에고가 지닌 바로 이런 모자람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하지요. 우리의 자의식에는 언제나 틈들이 있고 그래서 그리로 속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가능한 것입니다.


에고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 티베트 불교는 흥미로운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모양의 군주’와 ‘언어의 군주’ 그리고 '마음의 군주’라는 ‘유물론의 세 군주들’이 그것입니다. 세 군주들은, 육체의 안락 • 안정 • 쾌락에 대한 추구를 암시합니다. 고도로 체계화된 현대기술 문명사회는, 거칠고 낯설고 예측못할 돌발사고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려고 물리적 환경을 조작하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를 반영해주고 있지요. 단추 하나 누르면 작동하는 엘리베이터, 진공 포장된 쇠고기, 에어컨, 수세식 변소, 은퇴 프로그램, 대량생산, 기후관측 위성, 불도저, 형광등, 아홉시에서 다섯시까지 일하는 직장, 텔레비전, 이 모두가 조작할 수 있고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고 즐거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도들의 열매인 것입니다.


모양의 군주'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물질적 풍요와 안전한 생활환경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고 자연을 통제하게 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리킵니다. 자신을 안전하게 하고 즐겁게 하며 짜증나는 일들을 피하려는 에고의 욕망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쾌락과 소유에 매달리고,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변화를 강제하고, 놀이마당 또는 보금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언어의 군주’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관계를 맺음에 지성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현상을 조작하는 데 손잡이 구실을 하는 개념들을 채용합니다. 이 방면에서 가장 발전된 산물이, 우리의 삶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신성시하는 관념들의 체계인 이념(이데올로기) 이지요. 민족주의, 공산주의, 실존주의, 그리스도교, 불교,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체성과,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과, 사물들이 어떻게 왜 지금처럼 발생하는지에 대한 해석을 제공합니다. 이번에도, 지성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군주는 아니에요. 언어의 군주는 자신을 위협하고 짜증나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하거나 에고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쪽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성향을 말합니다. 존재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지각하지 못하게 하는 여과장치로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언어의 군주예요. 개념들을 너무 엄격하게 다루어 세계와 우리 자신을 응고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물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인 ‘나’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거지요. 우리는 위협적인 의심, 불확실성 또는 혼동을 위한 방을 그냥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군주’는 깨어있음 자체를 유지하려는 의식의 노력을 가리킵니다. 마음 수련을 우리의 자의식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아상(我相)을 움켜잡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실은 마음의 군주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거예요. 마약, 요가, 기도, 명상, 입신(入神), 그밖에 여러가지 심령술 따위가 모두 이런 식으로 이용될 수 있지요. 에고는 모든 것을 바꾸어 제 쓸모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마음 공부까지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만일 당신이 무슨 특별한 명상 기술을 배웠다면 에고는 우선 그것을 매혹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실험해봅니다. 그러나 에고는 단단해 보이고 그래서 무엇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시늉하는 것뿐입니다. 에고는 명상 수련을 흉내내고 명상하는 삶을 사는 척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요. 영적 게임의 모든 속임수와 대답들을 배워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영성 생활을 시늉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에고가 철저히 소멸되어야 하겠기에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마지막 작업은 에고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시늉하려고 하는 것을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에고의 한계 안에서 똑같은 것으로 보이는 어떤 영역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에요. 에고는 자신의 질(質)에 맞도록 모든 것을 바꾸어버립니다. 그와 같은 패턴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에고는 대단한 성취감과 흥분을 느끼지요. 마침내 눈에 보이는 유형의 성취를 이루고 자신의 개체성을 확인합니다.


마음 수련 기술을 통해서 우리의 자의식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공부를 많이해서 얻는 게 많을수록 더 고약해집니다. 정신적 습관이 너무나 단단해져서 무엇으로도 뚫고 들어갈 수 없게 되지요. 그리하여 바야흐로 완벽한 ‘에고 정신 egohood’의 온전히 악마적인 상태를 성취하는 거예요. 영성을 망치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마음의 군주이긴 합니다만, 다른 두 군주들도 못지않게 마음 수련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산속에 은거함, 홀로 단순하고 조용하게 지내기, 고상한 사람들과 사귐, 이 모두가 자신을 짜증나는 일로부터 지켜주는 방편일 수 있고 모양의 군주를 드러내는 표현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종교조차도 우리에게 안전한 보금자리, 단순하면서도 안락한 가정의 창조를 합리화 시켜주고 상냥한 배우자, 안정되고 손쉬운 직장을 얻게 해주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언어의 군주도 마음 수련에 마찬가지로 끼어들지요. 영성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새로운 종교 이념으로 낡은 신조들을 대신합니다만, 그것을 역시 낡은 방식으로 계속 사용합니다. 우리의 이념이 아무리 고상하고 탁월해도, 그것을 너무 엄격하게 다루어 자신의 에고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언어의 군주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자신의 행동을 눈여겨본다면 이 세 가지 군주들 가운데 하나나 둘 또는 셋 모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묻겠지요. “그러나,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사람이 산다는 게 그런 것 아닌가? 그래, 우리는 우리의 기술이 전쟁, 범죄, 질병, 경제적 불안, 힘겨운 노동, 늙음, 죽음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며, 우리의 이념들이 의심, 불확실성, 혼동, 분열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고, 우리의 정신 요법들이 잠시 성취했던 높은 수준의 의식상태가 허물어지는 것과 그래서 맛보게 되는 낙담과 분노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무엇을 하란 말인가? 그 세 군주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강해 보이고, 그것들을 무엇으로 대체할는지 우리는 모른다.”


이런 질문을 안고서 부처님은 세 군주가 우리를 다스리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셨습니다. 그분은 왜 우리 마음이 그들을 따르는지, 그들을 따르지 않는 다른 길은 없는지를 물으셨어요. 이윽고 부처님은 그 세 군주가 모든 속임수의 바탕인 신화 하나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를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단단한 개체라는 것이 바로 그 신화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신화는 거짓이며 거대한 속임수, 장난이고 거창한 사기요, 모든 고통의 뿌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세 군주가 그들의 힘의 원천인 근본 속임수를 감추려고 설치해 둔 매우 정교한 방어벽들을 뚫고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세 군주의 정교한 방어벽들을 한 겹 한 겹 뚫고 들어가지 않는 한 세 군주의 통치에서 벗어날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요.


세 군주의 방어벽들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단단한 개체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 군주가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려면 우리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무엇을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경험을 성찰한단 말인가?” 부처님이 발견하신 방법은 명상입니다. 대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이 모두 소용없는 짓임을 그분은 발견하셨어요. 당신의 노력 안에 있는 틈들을 보셨을 때, 비로소 통찰이 그분에게 찾아왔지요. 모든 노력이 비워졌을 때에만 자신을 드러내는, 밝게 깨어있는 상태가 본디 당신 안에 있었음을 그분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상 수련에 ‘그냥 내버려두기’가 포함되는 거예요.


명상에 관하여 잘못된 생각들이 꽤 있더군요. 어떤 이들은 혼수상태 비슷한 것으로 여기고, 또 어떤 이들은 운동선수들이 몸을 단련하듯 마음을 단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상은 그런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태를 다루기는 합니다만, 명상은 혼수상태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단련하는 것도 아니에요. 마음상태는 다루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에너지와 스피드 그리고 일정한 형식이 있지요. 명상 수련에는 그것들을 '내버려두기'가 포함됩니다. 그것들의 형식을 좇아 흐르고 그 에너지와 스피드를 따라서 흐르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그것들을 다루는 방법, 그것들과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는데, 우리가 좋아하는 쪽으로 성숙시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만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들의 형식을 좇아 흐르는 법을 안다는 의미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명상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어느 유명한 시타르 연주가에게 가르침을 베푸신 이야기가 있지요. 연주가가 부처님께 여쭈었어요. “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버려두어야 합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대가 연주가라니 묻습니다. 연주할 때 악기의 줄을 어떻게 조율하지요?” 연주자가 대답하기를,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게 합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시지요. "마찬가지로, 명상 수련을 할 때에도 마음을 강제로 어떻게 해서도 안 되고 마냥 돌아다니게 내버려두어도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활짝 열린 상태에서 마음을 그냥 ‘있게’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억제하려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방치해두지도 않으면서 느끼는, 마음의 에너지 패턴과 함께 가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명상 수련이에요. 보편적으로 이런 수련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의 사고방식이, 이 세상을 살면서 대상을 개념화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조작적이거나 아니면 완전한 방치 상태에서 제멋대로 날뛰게 내버려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명상 수련은 에고의 가장 변두리 층에서부터, 우리 마음속을 끊임없이 치달리는 산만한 잡념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해요. 세 군주는 산만한 잡념 방어벽의 제일 바깥 선으로, 우리를 속이기 위한 앞잡이로 삼습니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마음은 그만큼 바쁘고 그만큼 내가 과연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단단히 품게 되지요.


그래서 주인들은 계속하여 생각을 만들어내고 한 생각의 꼬리를 다른 생각으로 이어줌으로써 그것들 너머를 넘겨다보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바르게 명상하는 사람은 잡념들을 선동하려 하지도 않고 그것들을 억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대로 두되, 그것들로 하여금 우리 모두가 본디 지니고 있는 맑은 마음의 표현이 되게 하지요. 잡념들이 깨어 있는 마음의 청정함과 정확함의 표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꼬리를 무는 잡념의 방어벽이 무너지면 군주들은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우리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흥분되고 다채롭고 드라마틱한 감정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마치 영화 속에 빨려들어가듯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명상 수련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부추기지도 않고 억누르지도 않습니다. 그냥 일어나는 대로 두고 밝게 보기만 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거나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하지요. 그러면 감정들이 에고 없는 행위로 가득 찬 무진장 에너지로 바뀌는 겁니다.


생각도 감정도 없어지면 군주들은 휠씬 더 강한 무기인 개념을 들고 나오지요. 현상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사물들’의 단단한 세계가 존재 한다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단한 세계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또한 단단하고 지속되는 개체임을 재확인 하게 만듭니다.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계를 인식하는 나 또한 존재한다, 이런 식이지요. 명상 수련은 개념들이 임시로 붙여진 것임을 알아보게 하고, 그래서 이름 붙이기가 더이상 세계와 아상을 굳히는 데 기여할 수 없게 되지요. 이름 붙이기가 단순히 분별 행위로 되는 거예요. 그래도 군주들에게는 여전히 방어벽이 남아 있습니다만, 너무 복잡하고 미묘해서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


당신 자신의 생각, 감정, 개념과 다른 마음의 작용들을 면밀히 성찰하신 부처님은 우리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 유물론의 세 군주들에게 지배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수고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수고의 부재, 그것 자체가 자유입니다. 에고 없는 상태, 그것이 곧 불성(佛性)의 성취입니다. 명상 수련을 통해서, 여태껏 에고의 욕망을 표현해오던 마음을 바꾸어 본디의 밝은 깨달음을 표현하도록 이끌어가는 과정, 이것을 참된 마음 공부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끊임없는 갈망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이곳에 영성을 배우러 왔습니다. 나는 이 탐구의 순수한 의도를 신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성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해야 합니다. 문제는 에고가 모든 것을 개조하여 자신의 쓸모로 삼는 데 있습니다. 에고는 영성까지도 제 용도에 맞도록 개조할 수 있습니다. 에고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영적인 가르침을 얻고 그것을 적용코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가르침을. ‘나’의 밖에 있는 어떤 것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어떤 철학으로 다룹니다. 그래서 가르침과 하나되어 가르침 자체가 되기를 실제로 원하지 않습니다. 스승이 에고를 버리라고 하면 우리는 에고를 버리는 시늉을 합니다. 근사한 행동을 하고 적당한 몸짓은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활 양식을 조금도 희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기에 능숙한 배우가 되어 스승의 가르침에는 귀머거리와 벙어리 노릇을 하는 한편, 스승의 길을 따르는 척하는 데서 어떤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자신의 행위와 스승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간격이나 갈등이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우리는 곧장 갈등을 무마하는 쪽으로 상황을 해석 해버립니다. 그때 해석자는 영적 조언자의 역할을 맡은 에고입니다. 그 상황은 교회와 정부가 서로 나뉘어 있는 나라의 그것과 같습니다. 정부의 시책이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을 경우, 왕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영적 자문을 맡은 교회 수장에게 가서 축복을 요청합니다. 교회의 수장은 왕이 신앙의 수호자라는 구실 아래 몇 가지 변명거리를 찾아 낸 다음 그 시책에 축복을 베풉니다. 개인의 마음속에서는 에고가 왕도 되고 교회의 수장도 되어 아주 깔끔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참된 영성이 실현되려면 영적인 길과 자기 행동 사이의 이 합리화를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cut through) 합니다. 그러나 이 합리화는 다루기 쉽지 않은 물건입니다. 모든 것이 에고의 철학과 논리라는 필터(여과기)를 통해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에고의 철학과 논리는 모든 것을 깔끔하고 정교하고 매우 논리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자기를 합리화하는 식으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얼마든지 어지러워질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을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는 도식에 갖다 맞춥니다. 그리고 그러는 우리의 노력이 너무나도 진지하고 성실하고 정직해서 그것을 의심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영적 조언자인 에고의 ‘순결’을 신뢰 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합리화하는 데 무엇을 사용하느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스런 경전의 지혜, 도형이나 도표, 수학적 계산, 비교의 신앙형식, 심층 심리학, 기타 다른 장치들을 사용하여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가치를 평가하기 시작하여 이것을 해야 한다거나 저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할 때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수행이나 지식을 일정 범주(카테고리)에 비끄러매어 이것과 저것을 맞서게 하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의 영적 조언자의 그릇된 영적 유물론인 것입니다. 이원적 관념을 지니고서 “나는 지금 특정 의식 상태에, 특정 존재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할 때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동으로 분리시키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가치를 평가하여 한편에 서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판단을 내려 “이 일은 하고 저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단순성에서 우리를 멀리 떨어지게 하는 복잡화의 차원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명상의 단순성이란, 에고가 지니고 있는 유인원 본능(ape instinct)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유인원) 보다 더한 무엇이 우리의 심리학에 삽입되면, 그것은 매우 무겁고 두터운 가면으로 바뀌고 갑옷으로 바뀝니다.


모든 영성수련의 중점이 에고의 관료정치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더 높고 더 영적이고 더 초월적인 지식, 덕목, 판단, 위안 또는 에고가 추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에고의 끊임없는 갈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마땅히 영적 유물론(물질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만일 영적 유물론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실제로 그것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영성 수련 방법의 거대한 퇴적에 파묻혀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서양 철학도 배웠고 동양 철학도 배웠고 요가 수련도 했고 어쩌면 위대한 스승들을 차례로 만나 그들 문하에서 공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취했고 아는 게 많습니다. 스스로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거쳤는데도 여전히 포기해야 할 무엇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신비스런 일 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 수집해 쌓아둔 지식과 경험이 에고의 과장된 자기 표현의 한 부분이요, 으쓱거리는 에고의 기질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세상에 과시하면서,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자기가 ‘영적인’ 인간으로 안전하고 든든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재확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한 가게를, 골동품 가게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동양 골동품이나 중세 기독교 골동품 또는 다른 어떤 문명의 골동품에 대한 전문가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가게 주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많은 물건으로 가게를 가득 채우기 전에 방은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희고 깨끗한 벽에 매우 단순한 바닥을 천장에 달린 전등이 밝혀주고 방 가운데엔 아름다운 예술품이 한 점 놓여져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모두 그 예술품의 아름다움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족하지 못했고,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이 물건 하나로 방이 이토록 아름다워졌으니, 더 많은 골동품을 모아서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지.' 우리는 수집을 시작했고, 결과는 혼돈(카오스)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물건을 찾아서 인도로 일본으로 그리고 또 다른 나라로, 온 세계를 뒤졌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골동품 한 개씩을 발견 했습니다. 한 번에 한 가지 물건만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게 보았고, 그것이 우리 가게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 방 안에 두고 보니 그것은 그냥 쌓여있는 수집품들에 얹혀진 또 하나의 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물건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습니다. 워낙 많은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방을 가득 채우는 대신 근사한 고물상 가게를 만든 것입니다! 제대로 하는 쇼핑은 많은 정보 또는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물건 하나하나의 가치를 충분히 알아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느 아름다운 물건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보았다면, 그렇다면 그것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자신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관객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재미있는 영화에 빨려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고, 영화의 장면 속에 당신의 전 존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대상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아름다운 물건을, 그 영적 가르침을 맛보고 씹고 제대로 삼켰던가요? 아니면 그냥 수많은 골동품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가요?


내가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원해서, 이렇게 가르침을 듣고 명상 수련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기서 얻는 앎을 한 골동품으로, 수집해둘 만한 ‘고대의 지혜’로 여긴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앎이란 골동품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스승이 가르침의 진리를 경험하고 그것을 제자에게 한 영감으로서 물려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영감이 스승을 깨우쳤듯이 제자를 깨우쳐줍니다. 그러면 그 제자는 가르침을 다른 제자에게 물려주고, 그렇게 해서 앎의 길이 이어집니다. 가르침은 언제나 신형(新型)입니다. 그것은 고대의 지헤도 아니고 오래된 전설도 아닙니다. 가르침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이야기 들려주듯이 그렇게 전해지는 정보가 아닙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그것은 생생한 경험입니다.


티베트 불교의 경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식은 순금처럼 불에 타고 망치로 두드려 맞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장신구로 몸에 착용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분에게서 영적인 가르침을 받았으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몸소 그것을 불에 태우고 망치질하여 밝고 선명한 금빛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해서 장신구로 만들어 몸에 달고 다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르마 dharma'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현재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스승이나 구루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당신은 선생의 복제품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침은 개인의 인격적인 경험이고, 그 내용을 현재 지니고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제 글을 읽은 독자라면 나로파, 틸로파, 마르파, 밀라레파, 감포파 및 카규 종문(宗門)의 다른 선생들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살아있는 경험이었고 현재 그것을 지니고 있는 이들의 살아있는 경험입니다. 다만 삶의 상황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가르침에는 갓 구워낸 빵의 따뜻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 빵은 지금도 따뜻하고 신선합니다. 빵 굽는 사람들은 저마다 빵 굽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독특한 반죽기와 오븐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다음 자기가 구워낸 빵의 신선함을 스스로 경험하고, 그것을 잘라 따뜻하게 먹어야 합니다. 그는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스스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전승(傳承)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식들을 수집하는 식의 속임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혼란에 빠졌을 때 수집한 지식으로 돌아가 거기서 무슨 확신이나 위안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승과 모든 가르침이 내 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영성을 닦는 길은 그런 식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외롭게 홀로 가는 길입니다.





진정한 굴복이란 마음을 여는 것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영적 유물론 게임을 걷어치워야겠다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수호하고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의 수고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음을 눈치 채고는, 자신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싶어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 어느 정도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시간에 우리는 굴복하기(surrendering)에 대하여, 특히 영적인 스승에게 굴복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구루에게 굴복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스승에게와 마찬가지로 삶의 상황에 활짝 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루에게 굴복하기 어려운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그에게서 무엇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만나 어떠어떠한 경험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컨대,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보았으면 한다. 그런 것을 보려면 이분을 만나뵙는 게 가장 좋은 길일 것이다. 나는 그분과 함께 이러이러하게 특별한 상황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네모 난 막대기를 둥근 구멍에 박으려 하고 상황을 우리 기대에 맞추려 하면서 그 기대를 조금도 꺾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승을 찾아나설 때, 그가 성인답고 평화롭고 조용하고 단순하면서도 지혜스러운 사람이기를 기대합니다. 막상 그가 기대에 어긋나면 곧 실망하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참된 스승 - 제자의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그 관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서 자신을 활짝 열고 무조건 굴복해야 합니다. ‘굴복’이란 자신을 활짝 열어놓는 것, 그리하여 스승에 대한 기대나 매력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굴복은 또한 인간 에고의 거칠고 조잡하고 미숙하고 서투르고 엉뚱한 기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조잡하고 거칠고 미숙한 에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마치 무슨 직무인 양 여깁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일을 집어치우지 못합니다. 자기 비판을 그만두면 마치 누군가가 자기 직업을 채가기나 하는 것처럼, 우리의 직무를 잃는 게 아닐까 불안해합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향해 자기를 열고 굴복시킨다면 더 이상 움켜잡을 것도 없고 빼앗길까 봐 걱정할 것도 없겠지요. 자기 평가든 자기 비판이든, 모두가 현재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없는 데서 오는 신경증적 반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칠고 조잡하고 미숙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에 대한 터무니 없는 환상이나 기대나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대를 두려움과 함께 굴복시키고 곧장 실망 속으로 행진해 들어가 실망으로 더불어 일하고 그것을 생활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실망은 기본적인 지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신호입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하고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정확하고 분명하고 직접적입니다. 자신을 열어놓을 수만 있으면, 우리의 기대라는 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 견주어 터무니없는 것임을 이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자동으로 우리에게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실망은 구도(求道)의 길에서 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레입니다. 그것은 에고의 실존과 그 꿈들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일 영적 유물론에 사로잡혀 있다면, 영성이라는 것을 쌓아놓은 배움과 덕목쯤으로 여겨 우리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으로 삼는다면, 굴복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영성을, 우리 자신을 안락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무슨 불쾌한 일이나 실망스러운 일을 겪을 때마다 이렇게 합리화를 시도하겠지요. “물론 이것도 구루께서 베푸신 지혜로운 처사가 분명해. 왜냐하면 구루께서는 절대로 나에게 해로운 일을 하시지 않을 테니까. 구루님은 완벽하신 분이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그 일은 옳은 일이야. 그분은 내 편이시니까 언제나 나를 위해 일하신다. 그래서 나는 나를 열어놓을 수 있고 안전하게 나를 굴복시킬 수 있지. 나는 지금 옳은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런 태도에는 기껏해야 단순한 천진성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구루님’의 두렵고 엄숙하고 다채로운 모습에 사로잡힌 포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경험이 영적인 진화의 한 단계라는 신념을 발전시킵니다. ‘내가 그것을 만들었고, 내가 그것을 경험했다. 나는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인간이요, 거칠게나마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읽는 책들이 내 신념, 내 생각을 확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뒤로 빼돌릴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매우 지체 높은 존재요, 세련되고 위엄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이 더럽고 상스런 현실의 길거리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서 굴복하기를 마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걸어가는 걸음마다 연꽃잎을 밟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추어 해석하는 논리를 발전시킵니다. 넘어지게 될 경우에도 다치지 않도록 부드러운 착지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참된 굴복은 그렇게 부드러운 착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울퉁불퉁하고 돌멩이도 많은 땅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을 일단 열어놓으면, 거기 있는 바닥에 그냥 내려서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굴복은 절하는 수련을 통해 상징화됩니다. 절이란 항복하는 몸짓으로 땅바닥에 이마를 대는 것입니다. 가장 낮고 천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거칠고 조잡한 기질을 그대로 시인함으로써, 우리는 심리적으로 자기를 열면서 동시에 완전히 굴복하게 됩니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존재로 여길 때 무엇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텅 빈 그릇이 되어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이렇게 서원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부처(佛)님께 귀의합니다, 법(法)에 귀의합니다, 승가(僧)에 귀의합니다.” 나는 자신의 보잘것 없음을 시인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철저히 굴복하는 표시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의 상황에 두 눈을 활짝 열어놓겠습니다. 그것들을 신비한 무엇으로 각색시켜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냥 보겠습니다. 나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승가(僧伽)는 구도자들의 모임, 도반(道件)들을 뜻합니다)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나와 함께 길을 걷고있는 벗들과 나누겠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유익을 얻고자 그들 어깨에 기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들과 함께 걷고자 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고 하는 아주 위험한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일 서로서로 어깨를 기대고 걸어간다면, 한 사람이 넘어질 때 모두가 넘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기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함께 걸어가고 함께 일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굴복시키고 삼보에 귀의하는 뜻이 참으로 깊습니다.


귀의에도 그릇된 귀의가 있습니다. 산신이나 태양신이나 다른 신들을, 그들을 우리보다 크게 여겨서 예배하는 것은 도피처를 찾는 잘못된 귀의입니다. 이렇게 도피처를 찾아 귀의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날 때리면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아이는 누구한테 맞으면 곧장, 모든 것을 알고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엄마한테로 달려가겠지요. 그 아이한테는 자기를 구해줄 유일한 사람이 엄마입니다. 엄마가 자기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 거지요. 그러나 어머니나 아버지한테로 도망치는 것은 자기를 파멸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도피처를 찾는 사람에게는 아무 힘도 없고 참된 영감도 없습니다. 자기보다 큰 힘과 자기보다 작은 힘을 분간하느라고 늘 바쁘기만 하지요. 우리가 작으면 더 큰 자가 나타나 우리를 부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도피처를 찾는 이유는 자기가 작은데다가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입니다. 그렇게 도피처를 찾으면서 사람들은 변명합니다. "나는 이렇게 작고 당신은 너무나도 크십니다. 내 기꺼이 당신을 예배하오니 나를 지켜주소서.”


굴복이란 비천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더 높아지고 더 깊어지기를 바라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것은 차원이나 진보 따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굴복하는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통교(commimicate)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배우는 자 또는 무지한 사람으로 규정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굴복하는 몸짓과 자기를 활짝 열어놓는 몸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굴복과 개방의 몸짓은 굴복하는 대상과 연결되고 직접 통교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칠고 조잡하고 아름답고 깨끗함에 대하여 당황하거나 난처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굴복하는 대상에게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굴복하는 행위에는 바깥의 힘을 예배하는 것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감을 받아 일하는 것, 그리하여 지식을 부어 담을 수 있는 텅 빈 그릇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열어놓기와 굴복하기는 영적인 벗과 함께 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준비작업 입니다. 우려는 멋대로 상상하여 만든 자신의 빈곤을 한탄하는 대신 우리의 기본적인 풍요를 알고 있습니다. 지신이 가르침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요, 배움의 풍요한 기회에 자신을 연결시킬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친구와의 아름답고 평등한 만남



마음 공부를 하러 온 우리는 우리에게 영적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스승, 라마, 구루 등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스승을 가리키는 이런 명칭들, 특히 ‘구루’ 라는 명칭은 서양 세계에서 흔히 잘못 해석되어 그런 존재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 자체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 말은, 동양 사람들은 구루와 제대로 관계를 맺는데 서양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집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 공부를 하러 오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 누구와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한 나름대로 이미 굳어진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루한테서 행복, 마음의 평화, 지혜 등을 ‘얻겠다’는 바로 그 생각이 가장 난처한 선입견(예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몇몇 저명한 학생들이 자신의 영적 스승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마음 공부를 했는지,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경우가 우리에게 몇 가지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많이 알려진 티베트의 스승들 가운데 한 분이며 제가 속해 있는 카규 종단의 중심 구루들 가운데 한 분이신 마르파 Marpa는, 인도의 나로파 Naropa 선생의 제자이자 당신의 유명한 영적 아들인 밀라레파 Milarepa의 구루셨습니다. 마르파는 자신의 길에서 성공적으로 입신양명한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한 분이셨지요. 그는 농사짓는 집안에 태어났지만 젊어서 제관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스스로 지방의 군소 종파이긴 하지만 제관의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결단이 필요했겠는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깁니다. 10세기 티베트에서 상인이든 산적이든, 특히 제관의 경우, 출세를 해서 한자리를 맡는다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방의 성직을 맡게되면 박사에 대학교수에 법률가로서의 신분을 한 몸에 지닐 가능성을 거머쥔 것과 같았지요.


마르파는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인도의 상용어까지 두루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3년 간 공부하여 학자로 돈을 벌 수 있게되자, 번 돈을 계속 공부에 투자하여 마침내 불교의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지방에서 충분히 존경받는 유지 노릇을 할 수 있었지만 마르파의 야망은 식을 줄 몰랐지요. 이미 결혼하여 아이들까지 생겼는데도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계속 저축을 했고 그래서 아주 많은 금을 쌓아두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마르파는 인도로 가서 더 많이 배우고 오겠다는 뜻을 친척들에게 밝힙니다. 그 무렵 인도는 세계 불교학의 중심이었고, 날란다 Nalanda 대학과 위대한 불교학자들과 현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마르파의 속셈은 인도에 가서 아직 티베트에 없는 불교 서책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번역하여 위대한 학자-번역자로 출세하는 것이었지요. 티베트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얼마 전까지도 그랬습니다만, 아주 멀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마르파의 가족과 집안 어른들이 말리려고 했지만 그의 결심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르파는 결국 동료 학자인 친구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여러 달에 걸쳐 그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 땅에 들어가 벵골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각각 헤어집니다. 두 사람 모두 언어와 종교에 일가견이 있는지라, 자기한테 맞는 스승을 찾기로 한 것이었지요. 헤어지기 전에 두 사람은 귀국길도 동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네팔 지역을 여행하던 마르파는 우연히 나로파라는 아주 유명한 선생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로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대학이었을 날란다 대학의 수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었지요. 화려한 경력의 정상에 있으면서 그는 문득 자신이 불교의 진수를 참되게 깨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위를 버리고 구루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하여 스승 틸로파 Tilopa 문하에서 가혹한 수련을 받은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지요. 그 무렵에 마르파가, 인도의 가장 위대한 불교 성자들 가운데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그의 이름을 들었던 것입니다. 마르파가 그를 찾아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마르파는 벵골의 숲 속 허름한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살고있는 나로파를 찾아갑니다. 그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큰 스승이라면 꽤 근사한 저택에 살고 있으리라고 기대했던만큼 실망이 컸지만, 인도라는 데는 스승이 이런식으로 사는가 보다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게다가 워낙 나로파의 명성이 높았으므로 그만한 실망쯤 무시하고서 가지고 온 금을 거의 다 내어놓고는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자기는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티베트에서 온 중이며 학자며 농부요, 지금까지 일구어온 삶의 터전을 포기할 생각도 없고 다만 인도에서 불교 관련 서책들을 가져다가 티베트어로 번역해서 돈을 벌고 싶다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밝혔습니다. 나로파는 마르파의 청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그래서 여러가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졌지요.


얼마 뒤 마르파는 충분한 자료를 모았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 도시로 가서 인도에 함께 왔던 동료를 약속한 여관에서 만납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그동안 노력한 결과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파가 수집한 것들을  훑어본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지요. “쓸데없는 짓을 했구먼! 이런 가르침들은 티베트에도 다 있다네. 자네는 좀 더 희귀하고 흥미로운 것을 찾아봐야겠어. 나는 그동안 여러 스승들한테서 참으로 기이한 것들을 많이 배웠지.” 마르파는 그토록 오랜 세월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애썼는데 결과가 시답잖자 실망도 되고 화도 치밀어올랐지요. 그래서 나로파에게 돌아가 한 번 더 시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로파의 오두막에 당도하여 좀 더 신기하고 희귀하고 고급스런 가르침을 달라고 요구하자 놀랍게도 나로파의 대답은 이러했어요. “미안하네. 나는 그런것을 자네한테 가르칠 수 없어. 쿠쿠리파라는 선생을 만나보게. 그분이라면 자네를 가르칠 수 있을걸세. 그런데 쿠쿠리파는 독毒-연못 한복판 섬에 살고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거야. 그래도 자네가 배우고 싶은 것을 가르쳐줄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네.”

마르파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으므로 죽기살기로 한번 가보자고 마음을 먹었지요. 더욱이 쿠쿠리파라는 사람이 위대한 나로파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데다가 독연못 복판에 살고 있다니, 그것만 봐도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파는 천신만고 끝에 독연못을 건너 섬에 들어가 쿠쿠리파를 찾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암캐 백 마리가 에워싸고 있는 한 쓰레기 더미에서 늙은 인도 사람을 발견합니다. 상황이 너무나도 낯선데다가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르파는 쿠쿠리파에게 열심히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쿠쿠리파는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횡설수설 지껄일 따름이었어요. 상황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지요. 쿠쿠리파의 말을 일아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백 마리나 되는 암캐들이 틈만 나면 물어뜯으려고 으르릉거렸거든요. 겨우 한 마리 달래어 좀 사귈 만하면 다른 놈이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을 하는 거예요. 마침내 마르파는 거의 넋을 잃은 상태가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공책에 무엇을 베끼거나 비밀스런 가르침을 얻어보려는 시도를 모두 포기합니다. 그러자 비로소 쿠쿠리파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개들도 짖어대기를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파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지요.


이렇게 쿠쿠리파한테서 배울 것을 다 배운 마르파는 한 번 더 나로파 스승을 만납니다. 나로파가 그에게 말했어요. “이제 자네는 티베트로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가르침을 이론으로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네. 구체적으로 삶에서 경험해야 해. 그런 다음 다시 와서 더 배우게.” 그리하여 마르파는 동료를 만나 둘이 함께 귀국길에 오릅니다. 마르파의 동료도 공부를 많이 하여 두 사람 모두 서책이며 공책이며 등에 한 짐 잔뜩 지고 있었지요. 길을 가면서 두 사람은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마르파는 이내 친구가 불편해졌어요. 시간이 갈수록 마르파가 수집한 내용을 궁금해하는 친구의 호기심이 커졌던 것입니다. 이윽고 마르파의 동료는, 마르파가 자기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많이 배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래서 맹렬한 시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짐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을 때 그는 자리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척하다가 마르파의 보따리를 밀어 강물에 빠트려버리고 맙니다. 마르파가 깜짝 놀라 보따리를 건지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지요. 그토록 고생하면서 모은 자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에 빠져 마르파는 티베트로 돌아옵니다. 그동안 겪은 여행에 대하여 그리고 배운 것에 대하여 말할 것은 많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입증할 만한 자료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그러나 몇 년 동안 그렇게 일하고 가르치다가 마침내 그 자료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 해도 사실은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인도에 있으면서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그저 열심히 베끼기만 했지, 자기가 경험한 내용을 베낀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에 마르파는 그렇게 베꼈던 것들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발견과 함께 마르파는 남을 가르치는 일로 이득을 보겠다는 욕망을 모두 버립니다. 돈 버는 일이나 명성을 얻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그 대신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을 품게 되지요. 그래서 나로파 스승에게 드릴 학비를 마련하여 재차 인도로 갑니다. 이번 여행길은 오직 구루를 뵙고 가르침을 받겠다는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로파를 만나자 상황이 지난번과 너무나도 달랐어요. 나로파는 대단히 냉담하고 무관심한 데다가 역겨워하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지요. “만나서 반갑군. 이번에는 금을 얼마나 가져왔나?" 마르파는 돌아갈 여비를 남겨두고, 가져온 금의 일부를 나로파에게 내놓았습니다. 그것을 본 나로파가 말했어요. “그 정도로는 안 되겠네. 나한테 배우려면 금을 더 내야 해. 가져온 금을 모두 내놓게.” 마르파가 조금 더 내놓자 나로파는 여전히 그걸로는 안 된다면서 있는 것을 모두 내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윽고 나로파가 웃으면서 말했지요. “자네가 속임수로 지불하여 내 가르침을 살 수 있을것 같은가' 이 말에 마르파는 굴복을 하고, 있는 금을 모두 내어놓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로파는 금가루가 가득 들어있는 자루를 허공에 쏟아 모두 날려버리기 시작했지요. 마르파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스승이 하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게 얼마나 힘들여 모았던 학비란 말인가? 나로파는 그 많은 금을 모두 받아야 가르쳐주겠다고 우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것을 날려버리고 있는 겁니다! 이윽고, 나로파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온 세계가 내 금인데, 나한테 금이 무슨 소용이겠나?" 그것은 마르파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자신을 열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뒤로 오랫동안 마르파는 스승과 함께 살면서 엄격한 수련 생활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옛날처럼 귀로 듣고 손으로 베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움켜잡고 있던 것까지 모두 버려야만 했지요. 그의 수련생활은 자기 개방과 굴복의 연속,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밀라레파의 경우에는 상황이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나로파를 만날 무렵의 마르파에 견주면, 밀라레파는 훨씬 배운 것도 없고 세련 되지도 못한 농부였고 게다가 살인을 포함하여 많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어요. 그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갈망하여 마르파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지불할 마음을 먹었지요. 마르파는 밀라레파에게 아주 구체적인 수업료를 내도록 했습니다. 자기가 살 집을 지어달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밀라레파가 집을 지을 때마다 다시 허물어서 돌과 흙을 있던 자리에 갖다놓고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하라고 시키는 것이었어요. 지은 집을 허물라고 시킬 때마다 마르파는 집을 지으라고 했을 때 자기가 취해 있었다는둥, 자기가 요구한대로 지어지지 않았다는둥, 엉터리 핑계를 대곤 했지요. 그러나 그때마다 밀라레파는 오직 배우겠다는 마음 하나로 집을 허물고 짓는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이윽고 마르파는 9층짜리 탑을 한 채 설계했습니다. 밀라레파는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돌을 나르고 흙을 이기어 마침내 탑을 완성한 다음 마르파에게 가서 이제 가르침을 베풀어달라고 청했지요. 그러나 마르파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탑 하나 지어주고서 나한테 배우겠단 말인가? 좋아, 그렇다면 내 가르침을 전수받는 대가로 나에게 무슨 선물을 주겠나?"


그 무렵 밀라레파는 시간과 노력은 물론 가진 것까지 남김없이 탑 짓는데 쏟아넣었으므로 정말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 신세였지요. 마침 마르파의 아내인 다메마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쌓은 이 탑이야말로 당신의 경건과 신앙을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보리 몇 자루와 옷감 한 필을 줄테니 그걸 선생님한테 선물하도록 해요, 그래서 밀라레파는 보리 몇 자루와 옷감 한 필을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마르파에게 가서 선물로 내놓게 됩니다. 그러나 마르파는 밀라레파가 가져온 보리와 옷감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이것들은 우리 집에 있던 것들이다. 네가 감히 나를 속일 참이냐? 이 사기꾼 놈아!” 그러고는 발로 걷어차 교실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밀라레파는 마르파한테서 무엇을 배워보겠다는 희망을 모두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절망 끝에 자살을 결심하지요. 그가 막 자결을 하려고 할 때 마르파가 나타나 말합니다. “이제 비로소 자네가 배울 준비를 다 갖추었네!”


가르침을 받는 과정은 학생이 선생에게 어떤 대가를 치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의 수업료로 쉽게 생각들 합니다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심리적인 굴복입니다. 그것이 선생님께 바칠 '가르침을 전수받는 대가라는 얘깁니다. 우리가 학생과 선생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학생 쪽에서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자기를 굴복시켜 개방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를 괜찮은 자격을 갖춘 학생으로 드러내 보이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활짝 열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스승에게 온전히 굴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수업료를 낼 수 있는지, 얼마나 바르게 처신하는지, 얼마나 영리하게 바른 말을 할 수 있는지, 그런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직장을 구하거나 은행 대출을 받기 위해서 면접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지요. 직장을 얻느냐 못 얻느냐는 당신이 얼마나 신용있고 옷을 잘 입었으며, 구두가 반들거리고 말을 잘하고 매너가 좋으냐에 좌우될 수 있습니다. 대출을 받는 일도 당신이 얼마나 거래에 신용이 있고 지불 능력을 갖추었느냐에 달려 있지요.


그러나 마음 공부를 하기로 한다면 그와 다른 무엇이 요구되는 겁니다. 그것은 취직을 하려고 장래의 고용주에게 잘 보이는 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겉꾸밈은 구루한테 통하지 않지요. 구루는 사람 속을 꿰뚫어보거든요. 만일 우리가 그에게 겉을 꾸미고 다가간다면 그를 농락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환심을 사려는 몸짓은 통하지 않아요. 사실상 그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향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활짝 열고, 지녔던 모든 선입견을 기꺼이 포기해야 합니다. 밀라레파는 마르파가 위대한 학자요, 거룩한 성자요, 요기답게 머리도 기르고 주문을 외며 밤낮으로 명상을 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마르파는 농장에서 일하고 일꾼들을 부리고 땅을 갈아엎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나는 이곳 서양에서 구루라는 단어가 남용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그냥 ‘영적 친구’라고 부르는 게 더 낫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가르침이란 두 마음의 평등한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고도로 진보된 존재와 비천하고 열등한 존재 사이의 상전과 하인 관계라기보다 평등한 상호 통교(通交)의 문제인 것입니다. 상전-하인 관계에서 진보된 존재는 자기 자리에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굽어보면서 공중 높은 곳에 떠다니는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의 음성은 허공을 꿰뚫고 주름잡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 발짓 하나, 기침 소리까지 모두가 지혜의 몸짓이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한 토막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루는, 마르파가 밀라레파에게 그러했고 나로파가 마르파에게 그러했듯이, 자신의 질을 그대로 제자한테 보여주고 말상대가 되어주는 영적 친구여야 하는겁니다. 마르파는 농부이자 요기인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아내와 일곱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지요. 그것이 그의 평범한 일상 생활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는 학생들을 자기 가족처럼 돌봤던 겁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구석구석 자세히 성찰하여, 유능한 아버지면서 농부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유능한 선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르파의 생활에는 영적 유물론도 물질적 유물론도 파고들 틈이 없었지요. 그는 이른바 영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거나, 가족 또는 농사를 무시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만일 영적, 물질적 유물론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그 어느 쪽으로든 극단적인 태도를 강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명성을 날린다거나 많이 팔리는 책을 썼다거나 수천 수만 제자를 배출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당신의 구루로 선택하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과연 그 사람과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따져보고 그 결과에 따라 구루로 모시든지 말든지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자기를 속이는지 모릅니다. 만일 당신이 영적인 친구에게 자신을 활짝 열어주었다면, 두 사람은 일을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당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나요? 그가 당신의 모든 걸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구루가 당신의 가면을 찢고서 진짜로 당신과 통교하고 있습니까? 선생을 찾는 사람은 그의 명성이나 지혜보다 이 점을 먼저 생각하고 그 결과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느 위대한 티베트 선생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 모두 여러 선생들한테서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에 한 스승 문하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모으게 됐던 겁니다. 어떻게든 그 스승한테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마침내 스승을 만나 청을 올렸더니 그 위대한 스승은 뜻밖에도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한 가지 조건만 갖추면 받아주겠네. 한 가지 조건이란, 전에 배운 바 있는 선생들을 모두 기꺼이 배반하는 것일세.” 그들은 자기네가 얼마나 스승님을 존경하고 있는지, 얼마나 간절히 배우고 싶어하는지 입이 마르도록 늘어놓고 간청했지만, 그래도 스승은 자기가 제시한 조건을 채우기 전에는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었습니다. 이윽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가 전에 배웠던 선생들을 배반하기로 마음을 정했지요. 그들의 뜻을 전해 들은 구루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튿날 모두 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나자 스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자네들이 어떤 종자들인지 알았네. 나중에 다른 스승을 찾아갈 때 나를 또 배반하겠지? 물러들 가게!” 그리하여 전의 스승을 배반할 수 없다고 한 제자 하나만 남게 하고 모두 내쫓았다는 얘깁니다. 남게 된 그 제자는 거짓말 놀이에 참여하기를 거절했고, 자기를 속여서 구루를 기쁘게 하는 짓을 하지 않았던 거지요. 만일 당신이 영적 스승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면, 단순 소박하게 자기를 열고 상대를 친구로 여겨 스승이 당신 위에 군림하도록 하기보다 스승과 동등한 교제를 나누어야만 합니다.


구루를 친구로 받아들이려면 당신 자신을 완전히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영적 친구와 삶의 상황에 의한 시험(시련)을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시험은 낙심과 실망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요. 어떤 단계에 이르면 당신은 과연 이 영적 친구가 나에 대하여 무슨 느낌이 있는 건지 감정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때 당신 앞에 있는 것은 영적 친구가 아니라 당신의 위선입니다. 이 에고의 근본적 뒤틀림, 그런 척하기, 위선은 참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지요. 얼마나 낯가죽이 두꺼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겹겹으로 갑옷을 입고 있어요. 이 위선은 너무나도 두텁고 겹이 많아서 갑옷을 한번 벗으면 그 아래 다른 갑옷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갑옷을 몽땅 벗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몇 번만 벗어도 그런대로 꽤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리하여 애교 띤 얼굴로 환심을 사려고 구루 앞에 새로운 갑옷을 입고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친구는 아무 갑옷도 입지 않은 알몸입니다. 그의 벌거벗은 몸에 견줄 때 우리는 시멘트로 몸을 감싼 셈입니다. 우리의 갑옷이 너무 두꺼워서 친구는 우리의 알몸에 손을 댈 수 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얼굴도 바로 보지 못하지요. 스승이 제자를 떠나보내어 그의 매력과 의욕 따위가 모두 없어질 때 까지 긴 여행과 여러가지 고생스런 경험을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를 찾아 얻겠다고 하는 바로 그 의욕이 장애물이라는 데 있는 듯합니다. 이 의욕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우리의 알몸뚱이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하고 거기서 두 마음의 만남이 자리를 잡게되는 것입니다.


영적 친구를 만나는 첫 단계는 슈퍼마켓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지요. 슈퍼마켓에 갈 때 당신은 여러가지 살 물건을 그려보면서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영적 친구가 지니고 있는 풍요로움과 그 인격의 다채로운 질(質)을 마음에 그려 보는 겁니다. 영적 친구와 맺는 관계의 두 번째 단계는 당신이 죄인이 되어 법정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친구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고 그래서 그가 당신에 대하여 당신이 아는 만큼 알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자의식을 느끼게 되지요. 여기가 굉장히 힘든 고비입니다. 영적 친구와 만나게 되는 세 번째 단계는 풀밭에서 행복하게 풀을 뜯고 있는 암소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신은 다만 그 평화스러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스쳐 지나갑니다. 영적 친구와 맺는 관계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길가에 있는 바윗돌을 지나쳐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당신의 길을 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자가 구루에게 구애하는 일종의 연애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저분을 내게로 끌어당길 수 있을까? 진정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 때문에 당신은 어떻게든지 그에게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당신은 그토록 그에게 매력을 느껴 감탄합니다. 그러나 상대는 늘 당신을 경계하여 떼어놓으려 하지요. 상황은 당신이 기대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고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완전하게 나를 열어보일 수 없는가 보다.’ 사랑과 미움이 섞인 묘한 관계, 한편으로는 굴복하면서 한편으로는 도망치는 관계가 시작됩니다. 달리 말하면, 한편으로는 자신을 열고 구루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를 피해 도망치고 싶어하는 놀이를 시작하는 거지요. 영적 친구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그에게 짓눌리는 느낌을 받기 시작합니다. 오랜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구루는 불과 같다. 너무 가까우면 몸을 데고, 너무 멀면 충분한 열을 받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구애는 제자 쪽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스승에게 가까이 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가 불에 데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마 뜨거라 하고 멀리 달아나고 말지요.

마침내 둘의 관계가 매우 실질적이며 견고해지기 시작합니다. 구루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것과 그에게서 도망치려 하는 것이 그냥 당신 자신의 놀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은 실제 상황과 아무 상관이 없고, 당신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루 또는 영적 친구는 그냥 그곳에 불처럼 타오르고 있지요. 당신은 그와 놀이를 벌일 수도 있고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영적 친구와 창조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죠. 당신은 그에게 압도당하기도 하고 또 그에게서 멀어지기도 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가 얼음처럼 차가운 놀이를 하기로 결심하면 당신은 그 결심을 받아들이고, 반대로 불처럼 뜨거운 놀이를 하기로 결심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당신을 흔들지 못하고, 당신은 그와 조화로운 일치를 이루게 되지요. 그 다음 단계는 영적 친구가 하는 것을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완전히 자기를 버리고 완전히 굴복했기 때문에 자신의 영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톨 먼지처럼 작아진 것을 느끼게 되지요. 당신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당신의 구루, 영적 친구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라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마치 흥미로운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하지요.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당신이 그 영화의 한 부분이 되는 거예요. 영화관도 없고 의자도 없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없고 옆에 앉아있는 친구들도 없고 당신 자신도 없습니다. 영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지요. 모든것이 중심 존재인 구루의 한 부분으로 보이는 이 상태를 가리켜 ‘신혼 시절’ 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은 이 위대하고 매력적인 중심 존재에 의하여 끊임없이 양육되는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약해지거나 피곤하거나 무료해질 때 마다 당신은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힘을 얻고 생기를 받고 위로 끌어 올려지는 겁니다. 이 시기에는 구루가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있는 유일한 사람이지요. 당신 인생의 의미도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죽으면 그를 위해서 죽는 것이고 살아도 오직 그를 위해서 살아남는 겁니다.


그러나 영적 친구와 당신 사이의 이런 밀월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조만간에 격렬함은 사라지고 당신은 자신의 실존과 심리 상태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결혼하여 신혼 시절이 끝난 것과 비슷하지요. 당신은 당신의 연인을 당신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중심 존재로 여전히 느끼면서 동시에 그의 생활양식을 잘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그 사람을, 그의 개성이 지니는 한계를 벗어나, 당신의 선생으로 되게 하는지 살펴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구루의 보편성’은 잘 그려진 그림이 됩니다. 이제는 당신이 살면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구루와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구루의 말을 듣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사람은 구루로부터 독립을 하기 시작하지요. 모든 상황이 가르침의 표현이 되기 때문 입니다. 처음에 당신은 영적 친구에게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그 다음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놀이를 했지요. 이제 당신은 완전히 열려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완전히 열어놓은 결과 당신은 모든 상황에서 구루의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겪는 모든 상황이 당신으로 하여금 구루와 함께 자신을 열어놓는 기회를 제공하여, 결국 모든 것이 당신의 구루가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밀라레파는 붉은 바위 계곡에서 엄격한 수련을 쌓을 때, 명상 중에 구루 마르파의 생생한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오랜 굶주림으로 기진맥진한 그는 동굴 밖에 나가 땔감을 줍다가 결국 기절하고 맙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마르파가 살고 있는 동쪽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스승 마르파에게 자기가 얼마나 스승 곁에 있고 싶어하는지를 말하면서 탄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마르파가 사자 모양의 횐 구름 위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무슨 일인가? 정신 질환이라도 생긴 건가? 자네는 다르마를 알고 있지. 그러니 명상을 계속하시게.” 밀라레파는 스승의 말에 위안을 받고 명상을 계속하고자 동굴로 돌아갑니다. 그때 밀라레파가 스승을 의지하고 기댄 것은, 아직 구루를 독립된 인격, 친구로 보는 관념에서 해방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라레파가 동굴로 들어갔을 때 그 안에는 눈알이 손잡이 달린 냄비만 하고 몸집은 엄지손가락만한 마귀들로 가득 차 있었지요. 그는 그 마귀들이 자기를 조롱하고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위선을 인식하면서 자기를 활짝 열어놓자, 비로소 그들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이때부터 밀라레파의 노래에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요. 독립된 인격의 모습을 한 마르파에게만 의존하는 대신, 우주의 모든 것이 자기를 가르치는 구루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영적 친구는 독립된 개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밖에 있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구루는 우리 자신의 거짓됨을 파헤쳐 그것을 노출시키는 일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구루는 거울이 되어 당신의 모습을 비쳐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당신 자신의 밑바닥 지성이 구루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구루가 일을 시작하면 우리는 자기를 열어놓으라는 그의 요청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밑바닥 지성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옵니다. 누구도 자기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지요. “큰형님(Big Brother, 소설《동물농장》에 나오는 감시자一옮긴이 주)이 너를 감시하고 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우리를 감시하는 존재가, 밖에 있는 누가 아니라 해도, 우리가 우리를 추적하는 겁니다.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루를 유령으로, 우리의 거짓됨을 폭로하기 위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조롱하는 유령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깨달아 알게 하는 데 필요한 악마의 역할을 그가 맡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된 영적 친구는 창조적인 역할도 잃지 않고 감당합니다. 우리의 밑바닥 지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의 지적이 너무나도 날카롭고 아파서 그것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로 엄격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때로 감미로운 웃음을 짓기도 하지요. 탄트라 전통에는, 구루의 얼굴은 보지 않더라도 그의 얼굴 표정은 언제나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소를 짓든, 소리내어 웃든, 아니면 성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든, 그것은 우리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모든 경험 속에 밑바닥 지성이, 불성이, 여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해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옛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시작하지 않는게 더 좋다. 일단 시작을 했으면 마치는 게 더 좋다.” 그러므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마음 공부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게 좋습니다. 그러나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면 뒤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도망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기만의 꿈에서 깨어나기

이른바 마음 공부라는 것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자기 기만입니다. 에고는 언제나 영성을 ‘성취’하려고 하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차라리 자기 장례식을 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뭔가 놀라운 것을 얻어보겠다는 마음을 품고 영적 친구인 구루에게 접근합니다. 이런 접근을 가리켜 '구루 사냥'이라고 하지요. 전통적으로 그것은 사향노루를 사냥하는 것에 비교되어 왔습니다. 사냥꾼은 노루를 추적하여 죽이고 사향을 채취합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구루와 영성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만 결국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짓입니다. 진정한 개방이나 굴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우리는 또, 전수란 이식(移植)이라고, 가르침의 영적 능력을 구루의 가슴에서 우리 가슴으로 옮겨 심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는 가르침이 우리에게 낯선 (바깥에 있는)이라는 관념이 들어 있어요. 그것은 심장이나 머리를 옮겨 심겠다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우리 몸 안으로 무엇을 옮겨 심으려면 그것이 우리 몸 '바깥' 에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낡은 머리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차라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좀 더 명석한 뇌를 가진 새롭고 능력 있는 머리를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식 수술 결과로 얻게 될 내용에 너무 관심을 쏟는 바람에 수술할 의사에 대해서는 깜박 잊어버리지요. 과연 우리는 의사와 제대로 한 번 면담이라도 한 적이 있나요? 그 사람 진짜 유능한 의사입니까? 우리가 이식받기로 한 머리는 과연 괜찮은 머리인가요? 우리가 선택한 머리에 대하여 의사의 소견도 있을 것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의 몸이 수술을 거부할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장차 ‘얻게’ 될 것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바람에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사와 우리의 병든 머리와 새로 이식받을 머리의 상관 관계가 어떠한지를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겁니다. 전수의 과정에서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낭만적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전혀 가치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상대해줄 사람, 우리의 거울 노릇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어떤 형태로든 자기 기만을 하지 않으려면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 어떤 집착의 태도도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전수(專修)는 '두 마음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당신과 영적인 친구가 피차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전수가 실현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만 전수는 이루어질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식 수술을 받는다든가 당신 자신을 몽땅 바꾸어보겠다는 생각은 철저히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당신의 인격을 송두리째 바꿀 수 없어요. 절대로 못합니다. 아무도 당신을 뒤집거나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거기에 있는, 실존하는 재료들을 활용해야 하는 거예요. 당신은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속이는 일과 어떻게 됐으면 하고 생각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해요. 자신의 전체 모습과 인격과 성품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어떤 영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 스스로 병원에 입원하여 의사 선생과 함께 일해 보겠다는 뜻을 표명하면, 그러면 의사도 자기 역할을 맡고 필요한 장비들을 마련하겠지요. 그래서 양쪽이 열린 통교의 장을 마련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두 마음의 만남' 이라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비로소 구루의 영적 본질 adhishthana 또는 축복과 당신의 영적 본질이 합해집니다. 밖에 있는 스승이 자기를 활짝 열었고 당신 또한 자신을 활짝 열었기 때문에, 다르게 말해서 당신이 ‘깨어 있기’ 때문에 본디 하나인 두 요소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비셰카( abhiṣeka, 전수(專修) )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무슨 클럽에 가입하거나, 양떼에 섞여 주인의 이니셜을 등판에 새긴 양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비로소 아비셰카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볼 차례가 되었군요. 두 마음의 만남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영적 친구와 진정한 통교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열어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섬광 같은 통찰을 얻거나 가르침의 일부를 곧장 이해하게 되지요. 스승이 상황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거기서 섬광을 경험하며 모든 것이 근사하게 보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매우 흥분되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며칠 동안 아주 고양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벌써 성불이 다 된 듯한 그런 느낌이지요. 속된 관심사가 더 이상 성가시게 못하고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곧장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루와 열린 상태의 통교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지요. 바로 여기서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영적 친구와 함께 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아예 그를 떠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동양에서 나는 그런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어떤 학생은 선생을 만나 즉석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리고 떠납니다. 그들은 그 ‘경험’을 유지하려고 애써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그냥 '기억'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되풀이 들려주는 말이나 생각으로 바뀌고 말지요.

그렇게 깨달음을 경험하고 나서 그것을 일기에 기록하여 일어난 모든 일을 말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기록과 기억의 수단을 빌려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거나 그것에 대하여 토론을 함으로써 어떻게든지 그 경험 속에 닻을 내리려고 하지요.

동양에 가서 특별한 경험을 한 다음 서양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더군요. 친구들이 놀랍게 변한 그의 모습을 봅니다.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인생 문제에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자기네가 경험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경험에 그들의 문제를 결부시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동양에서 겪은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해주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자신도 크게 고무받는 건 물론입니다.

그러나 얼마쯤 지나면 뭔가 일이 잘못되면서 상황에 변화가 오는 거예요. 그토록 찬란했던 깨달음의 섬광이, 그에 대한 기억이 빛을 잃는 겁니다.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 까닭은 그가 그것을 자기 바깥에 있는 무엇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깨달은 상태’를 갑자기 경험했는데, 그것이 신선하고 영적인 경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그 경험을 아주 높게 평가하여 고향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친구와 친척과 부모에게 널리 이야기해주고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잃지 않으려고 움켜 잡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경험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있는 것은 기억뿐이지요. 그런데 이미 사람들에게 자기의 경험과 알고있는 바를 모두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제와서 그 모두가 가짜였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못하지요. 너무나도 창피한 일이니까요. 게다가 그래도 뭔가 심오한 일이 일어났던 건 사실이기에 자신의 경험 자체를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경험은 이순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가 그것을 사용했고 평가했기 때문이에요.

일반적으로 말해서 일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일단 자기 자신을 열어놓아 '섬광'을 경험하면 바로 그 다음 순간 자기가 열려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것을 평가하는 마음이 뒤를 잇는 거예요. “오, 환상적이군! 결국 잡았어. 이건 아주 드물고 값진 경험이니 놓치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그 경험을 움켜잡으려 하고, 자기 개방의 경험을 값진 것으로 평가하는 바로 거기서 문제가 싹트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을 잡으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사슬에 얽매이는 거지요.

우리가 무엇을 가치있고 특별한 것으로 여기면 그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눈이나 몸, 손, 머리를 특별히 값진 것으로 여기지 않지요. 그게 우리 몸의 일부임을 알고 있거든요. 물론 어쩌다가 그것들을 잃게되면 우리는 값진 것을 잃은 사실에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나는 머리를 잃었다, 팔을 잃었다, 무엇으로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값진 것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우리한테서 떠나갔을 때 그것의 가치를 깨달을 기회를 얻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으면, 우리의 일부로 우리 속에 있으면, 그건 그냥 거기 있는 겁니다. 그것을 특별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일부러 가치를 매기는 것은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서 그러는 건데,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이 우리한테서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어떤 갑작스런 영감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서 그것을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바로 거기서, 바로 그 순간, 자기 기만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요.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열어놓은 경험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 경험이 처음부터 자기속에 있는 것이었다는 믿음을 잃는 거예요.

어쨌거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와 자기 개방의 일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개방을 동떨어진 무엇으로 여겨 그걸 가지고 놀이를 시작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개방 자체를 잃었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한때 그것을 가졌으나 지금은 잃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 말이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우리 위상을 무너뜨릴 테니까요. 그래서 자기 경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이 바로 자기 기만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자기를 열어놓기보다 이야기 하는 쪽을 택하지요. 그쪽이 더 생생하고 즐겁거든요. "내가 구루와 함께 있을 때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그분이 이런저런 말을 해주셨고 이렇게 저렇게 나를 열어주셨지..."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현재 순간에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려고 하는 대신, 과거의 경험을 거듭거듭 재생산하려는 시도가 곧 자기 기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섬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나에 대한 평가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평가 또는 기억이 그것을 우리한테서 떨어뜨려 놓으니까요. 만일 우리가 경험을 계속해서 했다면 그것은 일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일상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아, 그 놀라운 체험을 다시 해볼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지금 경험을 하는 대신, 그것을 기억하는 데 바쁘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기만의 게임입니다.

자기 기만은 경험을 평가하고 그것을 오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리는 향수에 젖고 추억 속에서 자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러느라고 바로 이 순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는 겁니다. 우리는 ‘좋았던 시절’, ‘좋았던 그 옛날'을 기억합니다. 침울한 저하 상태가 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인가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기분이 침울해지거나 상실감이 느껴질 것 같은 낌새만 있으면, 에고의 자기 방어 본능이 즉각 발동되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지난날의 좋았던 일을 기억나게 하지요. 그렇게 에고는 지금 여기에 뿌리내리지 않은 영감을 계속 추구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뒤로 달리기지요. 이것은 좀 더 정교한 형태의 자기 기만입니다. 사람들은 침울한 저하 상태가 되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하지요. “내가 그토록 엄청난 복을 받았는데, 그토록 놀라운 체험을 했는데, 어떻게 침울한 낙심 상태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안 될 말이지. 침울한 낙심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마르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파가 스승인 나로파를 처음 만났을 때, 나로파는 제단을 만들고 그것이 특별한 ‘헤루카 heruka’의 화신이라고 말했지요. 그 제단과 나로파는 둘 다 영적인 능력과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로파가 마르파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느 쪽에 절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르파는 학자였으므로, 구루는 보통 사람과 동일한 육신 안에 살고 반면에 제단은 인간의 결함이 조금도 없는 지혜의 순수한 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제단에 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로파가 말했어요. “그대의 영감이 사라질까 두렵다. 그대는 잘못 선택했다. 이 제단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없으면 여기 이렇게 있을 수가 없어. 사람의 몸을 지혜의 몸에 견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만다라의 위대한 진열도 내가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꿈, 희망, 기대가 자기 기만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경험한 바를 ‘꿈의 실현’으로 여기는 한,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 기만은 언제나 꿈의 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맞추어 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꿈의 세계를 창조 또는 재창조하려는 시도 속에서 또는 실현된 꿈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자기 기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러한 자기 기만의 반대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지복이나 즐거움 또는 자기 꿈의 실현을 추구 한다면 마찬가지로 실패와 낙심으로 괴로움을 겪게 되어 있어요. 전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분열에 대한 두려움, 합일에 대한 희망, 이 둘은 단순히 에고의 행위도 자기 기만의 실현도 아닙니다. 에고가 어떤 행위를 실제로 할 수 있는 실물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에고가 바로 행위요, 정신적 사건인 거예요. 열린 것이 다시 닫혀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 에고 없는 상태(무아의 상태)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그게 바로 에고란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자기기만의 의미입니다. 에고가, 에고 없는 상태를 상실했다고, 성취에 대한 꿈을 잃었다고 울어대는 거지요. 두려움, 희망, 상실, 획득, 이것들이 바로 꿈꾸는 에고의 계속되는 행위요, 자기 기만이 아닐 수 없는 자기 영구화, 자기 보존의 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험이란, 꿈의 세계를 넘어 지금 여기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색깔, 흥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무엇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지요. 거기에는 요술이 없습니다. 이 침울한 낙심 상태에서 빠져나가라고 자신에게 말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낙심, 무지, 감정 따위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참된 것이고 그 속에 엄청난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진실을 경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고 그래서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 있는 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냥 모래 한 알이 되는 것, 거기에 문제의 전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1970년 가을에서 1971년 봄까지 콜로라도 볼더의 명상센터에서 있었던 초걈 트룽파의 강의 내용을 묶었다. 구도의 길을 걷고자 하면서도 갖가지 이유로 혼란스러워하는 현대인들에게 마음 수련의 길을 제시한다. 

총 16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마음공부로 나아가는 과정을 쉽게 풀어 썼다. 각 장의 끝에는 ‘질문과 답변’을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아울러 비파샤나, 수냐타, 탄트라 등 일상적이지 않은 불교 용어들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 해설하고, 지혜, 자비 등의 일상적인 용어들도 불교적인 세계관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또한 티베트 카규 종단의 풍부한 일화와 원숭이 등을 주인공으로 한 우화, 인용된 경전 구절들을 담고 있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옮긴이의 말

마음 공부로 들어가려는 당신에게
끊임없는 갈망에서 벗어나려면
진정한 굴복이란 마음을 여는 것
영적인 친구와의 아름답고 평등한 만남
스승이 나에게 주는 보이지 않는 선물
자기 기만의 꿈에서 깨어나기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물대접 안에 빛나는 달처럼
유머, 그 포용하는 기쁨
에고가 만들어지는 시작과 끝
벽의 진실과 마주치는 시간
괴로움을 이해한 자 앞에 열리는 또 다른 문
소멸되지 않는 교환과 춤
이부넙이 사라진 후의 흔들림 없는 평화
지혜의 힘과 자비의 힘
온전한 경험 세계로의 입장
초걈 트룽파에 대하여



 최근작 :

<두려움을 넘어 미소 짓기까지>,<자비심 일깨우기>,<행복해지는 연습> … 총 146종 

 소개 :
 최근작 :

<아가씨 피리를 부셔요>,<We Want to Be Real Christians 2>,<살꽃 이야기> … 총 273종

 소개 :목사이자 작가, 영성가, 번역문학가이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을 쓰고 번역도 하며, 부르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 <지금도 쓸쓸하냐>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등의 저서 외에 여러 편의 동화와 <행복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우주 리듬을 타라> 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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