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의 나라 필리핀이 사랑하고 필리피노들이 즐겨 마시는 국민 맥주 산미구엘(San Miguel). 필리핀에 첫발을 디디면 그곳이 마닐라든 세부든, 보라카이든, 그 어딘가의 작은 섬이든 가게마다-심지어 노천에서도- 생수보다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산미구엘일 정도로 흔한 맥주다. 가격도 우리나라에서만 기본 6천원대부터 시작하던 그것이 필리핀 바닥에서는 우리돈 천 원도 안하니...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쇼킹하면서도 괘씸하고, 한편으로는 주당들을 보람차게 만들기도 했다.
산미구엘을 제대로 맛보기 전에 먼저 주지해야 할 사실이 ‘이들의 고향은 진정 어디인가?’라는 물음이다. 생산공장이 필리핀에 있고, 대부분의 검색결과와 포스팅들이 산미구엘의 원산지를 필리핀으로 가리키고 있다. 한데 맥주의 라벨이 심히 필리핀스럽지(?) 않다. 필리핀스러움이라는 것을 딱히 정의할 순 없지만 이런 디자인은 뭔가 ‘남미스러운’ 분위기가 다분하기 때문.
다른 맥주보다 유독 설왕설래가 많은 산미구엘의 고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 맥주는 스페인 Mahou-San Miguel 그룹의 맥주 상품이다. 하여 본사 역시 바르셀로나에 위치해 있지만, 1890년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마닐라에 공장을 두고 생산을 시작했다. 한데 뜻밖에 인기가 좋아지자 동남아를 중심으로 점차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35개 이상의 국가에 수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현재를 기점을 보자면 산미구엘은 그 역사만 해도 123년에 다다른 정통파 맥주인 셈.
현재 스페인 역시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산미구엘을 수입해와 먹고 있는 실정이다. 쉽게 정리하자면 헤더는 스페인에 있고 주몸체, 즉 바디 전체가 필리핀에 있는 셈. 회사의 경영권으로 놓고 보자면 주주는 스페인이고 실제 경영자는 필리핀인... 뭐 그런 스타일이다. 따라서 필리핀이 원산지인 점은 맞지만, 처음으로 백퍼센트 필리핀에서 나고 자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상당한 무리가 있다. 어찌됐든 아이디어와 레시피는 스페인에서 왔으니까, 산미구엘의 정확한 원산지는 '스페인과 필리핀 둘 다'라고 보는 것이 맞다.
맛은 깊은 맥주의 맛이라기보다는 어딘가 한 구석이 모자란 듯한, 다소 옅은 맛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오비보다는 화이트, 일본으로 치자면 기린이나 산토리보다는 아사히에 가까운 맛이랄까. 탄산 함량이 다소 낮아 톡 쏘는 느낌이 적어 목넘김이 부드럽거나 밍밍할 수도 있다. 하여 호불호가 나뉘는 맛. 젊은이보다는 중장년층에게 인기가 좋을 맛이다. 허나 이런 밍밍함 속에서도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독특한 맛이 돋보이는데 이는 보리 외에도 옥수수와 설탕이 첨가된 산미구엘만의 매력이 아닐까.
산미구엘은 국내에 잘 알려진 페일필젠 외에도 라이트, 슈퍼드라이, 레드홀스, 스트롱아이스, 다크 등 맛의 디테일을 살려 세계 맥주의 명성을 잇고 있다. 페일필젠은 구수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전통 산미구엘의 느낌이고 라이트와 다크는 각각 가볍고 무거운 바디감이 특징이다. 일각에서는 산미구엘 전용잔에 얼음을 가득 채워 마셔야한다는 잘못된 설을 숭배하고 있는데 이는 엄청난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너무 차가운 맛은 맥주의 맛을 반감시키곤 하는데, 다른 맥주에 비해 산뜻한 맛을 지닌 산미구엘은 얼음이 섞일 경우 맛이 더욱 옅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