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 /살며 사랑하며

'워낭소리'와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

우리 사회에서 농부들은 어느 사이엔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다. 날씨가 변덕을 부려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는 경우를 빼놓고는 그들의 굴곡진 삶을 느낄 기회가 없다. 트랙터를 앞세우고 쌀가마를 불태우면서 우리 농산물을 보호해 달라고 시위하던 장면마저 요즘은 보기 어려워졌다. 이런 분노조차 소용 없을 만큼 그들의 존재는 미약해진 것인가.

여든 살의 노인과 마흔 살의 소가 나누는 교감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


여든 살 할아버지 ‘영혼의 친구’
지난해 초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감독 이충렬)는 농촌과 농부의 삶에 대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300만 관객이라는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미국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고, 지난해 말에는 일본 극장에서도 개봉했다. 소박하고 단순하기까지 한 이 영화는 노인과 늙은 소의 동행을 통해 소멸해 가는 농촌사회와 소농계급을 증언한다. 소를 데리고 살아가는 농부의 삶은 보잘 것 없고 애잔하다. 그러나 그 삶이 외부자의 연민을 끌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자족적인 세계와 그 세계가 지닌 품격을 보여 준다는 데 <워낭소리>가 지닌 감동의 핵심이 있다.

경북 봉화의 한 산골에서 여든 살의 최원균 할아버지가 마흔 살이 된 소와 더불어 살아간다. 보통 소의 수명은 15년인데 할아버지의 소는 두 배를 훨씬 넘겨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더불어 끊임없이 노동을 한다. 어렸을 때 침을 잘못 맞아서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는 역시나 행동이 굼뜬 소와 함께 엉금엉금 기면서 밭을 간다. 부인인 이삼순 할머니가 질투 반 걱정 반으로 “소처럼 일만 한다”며 지청구를 놓는데도 할아버지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아홉 남매를 낳고 키운 할아버지의 작은 땅은 여전히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으며, 할아버지의 농사기술도 녹슬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영혼의 친구’다.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이지만 소의 목에 걸린 워낭이 ‘딸랑딸랑’ 울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보려고 마구간으로 달려간다. 행여나 소꼴에 농약이 들어갈까 봐 잡초가 멋대로 자라는데도 논밭에 농약을 치지 않는다. 늘 각오한 일이면서도 수의사로부터 자신의 소가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할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운다. 농사일을 계속하기 어려운 늙은 소를 대신할 젊은 소를 사 오지만 젊은 소를 길들이고 정을 붙이는 데 실패한다.

이 영화의 주조는 흘러간 시간에 대한 향수다. 소와 더불어 농사 짓고 늙어가는 할아버지는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삶을 지탱해 주던 농촌과 아버지의 모습이다. 할아버지와 소, 그리고 이들이 뿌리 내린 땅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의지와 애정이 작용한다. “평생 일만 한다” “남들이 다 치는 농약도 안 친다” “소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면서 불만을 털어놓는 할머니조차 할아버지와 소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 늙은 소를 팔러 장터에 가서 턱없이 높은 값을 부르는 할아버지의 태도는 자신의 소우주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자본주의 세계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워낭소리>가 그런 것처럼 소멸해 가는 농부들의 세계에 깊은 애정을 품고 그들의 삶을 증언한 작품이 존 버거(74)의 3부작 장편소설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Triology: Into Their Labours)>다. 영국 출신의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사회비평가인 버거는 프랑스 국경 알프스 산맥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커상 수상작인 장편소설 <G>를 비롯해 장 모르의 사진과 함께 아랍계 불법 이민자의 현실을 그린 논픽션 <제7의 인간>, 미술·사진 비평서인 <보기의 방법> <말하기의 다른 방법>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저작을 내놓고 있다. 그는 건초를 말리는 계절이면 들에서 일을 하느라고 전화조차 받지 못할 만큼 진지한(단순히 전원풍이 아닌!) 농부 작가다.


농촌 공동체를 자본주의 대안으로

그의 대표작인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는 <기름진 흙>(1979년), <옛날옛적 유럽에선>(1989년), <라일락과 깃발>(1991년) 등 시차를 두고 발표한 세 권의 연작소설로 구성돼 있다. 1부가 농촌생활의 묘사에 주력했다면 2부는 실향의 과정, 3부는 상징적인 귀향을 그리고 있다. 그는 농부의 삶에 참여한 사회주의자 작가로서 오늘날 유럽 농촌을 생산력의 변화라는 거시적 역사의 단계에 비춰 조명하고, 농부들이 겪는 미시적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냉철하게 보여 주면서도 농촌의 공동체적 삶을 현재의 자본주의 삶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 문화이며, 그 중심에는 그들이 공유해 온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3부작의 첫 권인 <기름진 흙>에서 20세기로 오면서 사라진 19세기 소설의 전통을 따라 ‘역사적 결언’이란 제목의 작가 서문을 붙여 자신이 쓰려는 소설의 의미를 직접 설명한다. 또 본문에 ‘해명의 말 한마디’란 장을 넣어 농민들 속에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이방인, 관찰자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자신의 작가적 위치를 탐구한다. 버거에 따르면 농민은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잔존자의 계급이다. 이들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잔존하지 못할지도 모를 위기에 놓여 있다. 농업이 기계화, 화학화, 대형화, 기업화하면서 소농의 경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농부의 삶은 순전히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해 왔다. 이는 그들이 계급 피라미드에서 맨 밑바닥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농부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갖가지 위험 요소와 싸우면서 자신의 생산물이 자기 가족의 수요조차 충당시키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항상 잉여생산을 해야 하는 조건에 놓여 있었다. 소작농이든 자영농이든 그들은 농부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스스로의 식량을 줄여가면서 지대를 내놓고 그 다음 농사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

<사진 : 알프스 산록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쓰는 작가 존 버거.>


농부가 처한 생존 조건은 이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과는 다른 시간관과 문화를 갖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단한 변형과 증대 및 진보라는 자본주의적 시간관에 자신들을 내맡긴 계층이라면 농부에게 과거·현재·미래는 변화가 없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즉 도시의 산업에서는 더 발전한 기술과 더 큰 생산성을 통해 더욱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면 더 잘살 수 있다.
 
그러나 농촌의 삶은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 별다른 자연재해가 없이 여름을 지내야 가을에 예상한 만큼의 수확을 거두고 최소한의 식량 마련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순환의 반복이다. 이렇게 다른 삶의 조건은 전통에 대한 농민들의 존중과 그들의 보수성을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농부가 전통을 지키는 이유는 그것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의 창의성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들은 삶의 연속성을 갈망하면서도 농사를 지으면서 맞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 창의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체득한다. 반면에 도시인의 욕망은 늘 가질 수 없는 것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변화에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삶에서 그들은 극단적인 분업으로 인해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가 없이 늘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한다. 버거는 농촌의 삶에 깃든 의미의 저장소로서의 전통과 역동성, 창의성을 들어 농부의 경험이 인간의 문명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다.

소멸해 가는 소농의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그가 작가로서 자신에게 부과한 책무다. 그는 농부이기에 그들의 삶의 정수를 공유하고 이방인이자 작가이기에 그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수집한다. 그의 일상과 글쓰기를 보여 주는 ‘해명의 말 한마디’는 삶과 일을 대하는 그의 남다른 생각을 담고 있다.

“그 무덥고 간교하고 말벌이 들끓는 오후에 건초를 긁어내리는 일은 마치 짜개진 자루를 메고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볕은 어떤 하나의 기후 사정이기를 그치고 인간에 대한 징벌이 되어버렸다. … 나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생각한 일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은 아무리 오래 해봤자 그 연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작업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글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경험에 접근하는 행위일 뿐이다.”


농촌문화의 전통과 품격 느껴져

그는 농부의 삶에 대한 상대적 무지와 이방인 신분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만 그곳에서의 무지가 다른 어떤 곳에서의 지식과 연결된다는 마을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자유로운 관찰자로서의 특권을 누린다. 작가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가십이나 구술사의 형태로 이웃 간에, 대를 물려 가면서 유통되는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가 “누구나가 초상화의 주제가 되며 동시에 초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가 되는 거대한 공공초상화”라고 이름 붙인 마을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빚지지 않고도 삶 자체가 갖는 넓이와 깊이, 이웃에 대해 신만큼 잘 알고 있는 마을생활의 신비로 인해 무척이나 풍요롭다.

존 버거의 마을에 실제 살고 있는 농부 마르셀의 모습을 찍은 장 모르의 1987년 사진.

(<말하기의 다른 방법> 수록) 사진제공/눈빛출판사


버거가 소설이란 형태로 옮겨 놓은 마을의 이야기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와 소처럼 소박하고도 깊은 감동을 주며, 인간성의 깊이와 그들이 처한 삶의 조건을 숙고하도록 만든다. 1권 <기름진 흙> 속의 단편 ‘생존자들을 위한 말’과 ‘돈의 가치’에는 젖소인 루자를 자식처럼 아끼는 마르틴느와 왜 (일부러) 힘들게 일을 하는가에 대해 멋진 철학적 설명을 들려 주는 농부 마르셀이 나온다.

여섯 마리의 젖소를 키우는 50대 여자 마르틴느는 집안일을 도와 주는 70대 노인 조제프와 함께 산록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침실은 널빤지 한 장으로 외양간과 맞닿아 있는데 어느날 가장 아끼는 젖소 루자가 광란을 시작한다. 풀을 뜯던 루자는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밤 늦게 풀밭에서 발견된다. 마르틴느와 조제프는 루자를 끌어오려고 하지만 역부족이자 루자의 곁에서 밤을 샌다. 이튿날 아침에도 일어서지 못하는 루자가 도살장으로 끌려가기 위해 트럭에 실릴 때 마르틴느는 트럭의 쇠붙이가 루자의 살갗을 벗겨내지 않도록 짚을 한아름 깔아 준다.

‘철학자’ 마르셀이 예순이 넘어서 공무집행 방해로 감옥살이를 한 사연도 재미있다. 두 아들은 농사 대신 공장에 다니거나 장사를 하는데도 그는 마치 아들에게 물려줄 것처럼 새 사과나무를 심는다. “하루 종일 물건을 팔고 공장에서 1주일에 마흔 다섯 시간씩 일한다는 것은 사나이가 할 만한 일이 못된다. 그런 직업은 사람을 무지로 이끌 수밖에 없으니까. … 일을 한다는 것은 내 아들들이 잃어가고 있는 지식을 보존하는 한 방법이다. 나는 이 일을 함으로써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그들이 물려준 지식이 아직은 버림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그 지식이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마르셀은 예년에 비해 풍년인 사과로 사이다를 만든 뒤 술찌꺼기로 뇰을 빚기 위해 증류주 제조상 마티외를 찾아갔다가 거기서 만난 재무부 부정행위조사부 특수반 검사관 두 명이 송아지 반 마리 값의 세금을 물리자 그들을 총으로 위협해 창고에 이틀 동안 가두고 양들을 처넣는다.

버거의 소설에는 암소를 도살하는 위베르, 추운 밤에 염소를 끌고 나가 교미시키는 엘렌느, 물 긷기가 힘들어 남동생과 이웃을 동원해 50년 전에 오빠가 만든 물탱크를 찾는 카트린느 등이 나온다. 또 증조할아버지의 부츠를 훔쳐 신고 도시에 나가 막노동을 한 뒤 땅을 사서 정착한 할아버지, 건초를 옮기다가 썰매에 깔려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돼지를 잡던 날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손자의 이야기도 있다. 모두 생생하고 정곡을 찌른다.

<워낭소리>의 소는 “좋은데 가그래이”하는 할아버지의 이별사를 들으면서 죽었고, 할아버지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 버거의 소설 속 노인들도 이미 30년 전 사람들이다. 농촌과 농민의 도태라는 현실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 품격과 이야기는 영화와 소설 속에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https://goo.gl/zJRKKu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