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스리랑카의 월뽈라 라훌라 스님(1907~1997)의《What the Buddha taught》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제목을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로 해야 비슷한데, 옮긴이가 의역을 해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다. 또 다른 번역본인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한국빠알리성전협회)는 번역자인 전재성 박사가 자기 글을 월뽈라 라훌라 스님의 것과 합쳐서 '공저(?)'형태를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아닐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의 골간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목차도 고성제→집성제→멸성제→도성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무아와 수행의 장이 추가되는 정도이다. 라훌라 스님은 불교학자이면서도 무척 간결한 해설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실 영어를 조금만 할 줄 알면 인터넷에 올려진 원서를 다운 받아 읽으시라 권하고 싶을 정도로 쉽게 쓰여져 있다. 이렇게 쉬운 불교를 우리는 왜 그토록 어렵게 설명했던 것일까?
과거에는 한문 경전 외에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그랬지다만, 지금은 왜 그럴까? 다행히 세계화ㆍ개방화 덕분에 초기경전이 들어오면서 불자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는 추세이다. 스님들 말을 들어보면, 불과 20년 전만 해도 초기경전을 공부하거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선배들에게 "외도" 소리까지 들었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해외의 불교전통이 수입되면서 티벳 대장경에 진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티벳어를 공부하거나, 아니면 빨리어로 발음해야만 부처님의 원음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꽤 많아진 것 같다. 어학을 잘하면 이해에 도움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길로 생계를 구해야 하는 전문학자가 아니라면 오히려 허송세월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이 책의 다음과 같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말 잘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불교는 염세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어느 편이냐하면 불교는 사실주의이다. 삶과 세계에 대하여 사실주의의 관점에 서 있다. 불교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불교는 당신을 바보의 천국에 살도록 거짓으로 달래지 않으며, 갖은 허구적 공포와 원죄로 겁주고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불교는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을 둘러싼 세계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완전한 해방과 평화, 안정, 행복의 길을 보여준다.
또한 라훌라 스님이 다른 종교나 종파간에 상호 소통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마지노선을 양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조물주를 믿는 경향과 불멸의 주인공을 믿는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뿌리 깊은 두 가지 심리학적 이상(理想)이 있다. 그것은 자기 방어와 자기 보존이다. 자기 방어를 위해 인간은 마치 어린이가 부모에 의지하는 것처럼 자신을 방어하고, 안전하게 하고, 수호하는 의지처로서의 신을 창조했다. 자기 보존을 위해 인간은 영원히 사는 불멸의 영혼, 진아라는 이상을 만들었다.
불교의 요지를 파악하려는 분들에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를 추천하고 싶다. 복잡한 아비담마 논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상좌부의 입장에서 불교를 잘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도 상호 공존하는 입장에서 연결고리를 모색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불교에 대한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