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보다도 더 강한 보리의 생명력
글 : 홍익희
보리는 그 생명력이 뛰어나 가을에 파종만 해놓으면 추운 겨울에 강인하게 자라서 초여름에 열매를 맺습니다. 농약도 필요 없어 청정 유기농식품입니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쑥조차도 겨울에는 뿌리만 땅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하는데 보리는 혹한의 추운 땅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걸 보면 보리는 쑥보다도 더 강한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고대 수메르 지역에 소금기가 지하에서 올라와 밀농사를 못 짓게 되었을 때도 이를 보리로 대체해 농사지을 정도로 보리는 염분에도 비교적 강한 내성을 갖고 있습니다. 추운겨울에 불모의 토질에서도 잘 자라는 보리는 현대과학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를 품고 있습니다.
밀과 보리, 이 둘은 특히 겨울에 농사를 짓기에 잡풀도 없고 벌레도 없어 무공해 농사가 가능한 작물입니다. 게다가 겨울에 땅을 놀리지 않고 작물을 심어 흙의 생명을 지켜주는 환경 파수꾼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석기시대의 수렵채취 생활을 마감하고 한 곳에 정착하여 밀과 보리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매우 의미가 큽니다. 경제사를 제도발전 차원에서 다룬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더글러스 노스 교수는 이를 ‘신석기혁명’이라 명명하였으며 이는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큰 변화로 보았습니다. 그만큼 밀과 보리는 인류에게 중요한 양식이자 삶의 큰 변화를 가져다준 식량이었습니다.
보리하면 맥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맥주는 보리의 씨앗을 싹 티운 ‘맥아’로 만듭니다. 신석기시대에 인류는 이미 날곡식의 싹을 틔우면 소화하기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 곡물이 발아하는 과정에서 효소인 디아스타제가 만들어져 곡물의 녹말을 당분으로 바꾸는 작용을 합니다. 게다가 보리는 겨울에 자라서 성질이 차기 때문에 소화기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리를 발아시켜 햇볕에 말린 맥아는 따듯한 성질로 바뀌었기 때문에 위장을 편안하게 하여 소화가 잘됩니다.
보리의 싹을 틔운 맥아가 맥주를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주요 재료입니다. 몰트위스키 할 때의 ‘몰트’(malt)가 바로 맥아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보리 말고도 밀, 호밀, 귀리, 쌀과 같은 다른 곡물의 싹을 틔운 것도 몰트에 들어가지만 보리가 워낙 압도적이라 몰트 하면 그냥 맥아로 통합니다. 명확하게 보리를 싹틔운 맥아를 뜻할 때에는 발리 몰트(barley malt)라고 부릅니다.
보리를 비롯한 곡물은 싹이 틀 때쯤 많은 양의 디아스타제(아밀라아제)를 만들어냅니다. 아직은 광합성도 못하고, 뿌리로 영양을 빨아들이는 것도 힘에 부친 어린 싹은 씨앗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녹말을 당분으로 바꾸어 성장 에너지를 얻어야 하므로 당화효소의 함량이 크게 늘어납니다. 싹이 터서 당화효소의 양은 크게 늘어났지만 녹말은 아직 별로 소비되지 않았을 때 말린 것이 바로 맥아입니다.
맥아의 효소로 녹말은 맥아당(엿당)이라 부르는 당분이 됩니다. 영어로는 말토스(maltose)라 합니다. 밥을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는 것도 맥아당 때문입니다.
엿기름이 바로 맥아?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즐겨 썼던 재료로 식혜와 엿을 만드는 데 쓰이는 엿기름이 바로 맥아입니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보리를 물에 담가 두어 싹을 내서 말린 것이 엿기름입니다. 엿기름은 싹의 길이가 보리알의 2/3∼3/4 가량인 것을 단맥아, 1.5배∼2배가량 자란 것을 장맥아라고 하는데 1.5배가 되었을 때 아밀라아제와 같은 효소의 양이 가장 많아집니다. 단맥아는 맥주용이고 장맥아는 식혜나 엿을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이렇게 해서 말린 보리 싹은 녹말을 당분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엿을 만들기 위해 기른 보리 싹'이라는 의미에서 '엿기름'입니다. 옛날에 설탕과 꿀이 귀해 감미료로 쓰인 게 바로 엿기름을 이용한 엿이나 물엿이었습니다.
엿을 만들려면 먼저 엿기름을 이용하여 식혜를 만들고 그것을 오랫동안 고면 됩니다. 전통적인 엿 제조방법에서는 더운 아랫목에 항아리를 놓고 그 속에 고슬고슬하게 지은 뜨거운 밥을 넣고 찬 엿기름물을 붓습니다. 이것이 7~8시간 정도 지나면 삭아서 밥알이 동동 떠오르고 이를 베자루에 담아 눌러 짜면 뽀얀 당화액이 나옵니다. 이것을 솥에 담고 눌러 붙지 않게 잘 저으면서 고아줍니다. 잘 곤 엿은 붉은 호박 색깔이 납니다. 엿은 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아주 묽어서 음식에 감미료로 사용되는 시럽 형태의 엿은 조청이라고 하고, 오래 졸여서 단단하게 굳힌 것은 갱엿이라고 합니다.
맥주의 기원- 신전에서 맥주를 빚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기원전 4,200년경의 ‘모뉴멘트 블루’ 점토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수메르 사람들이 방아를 찧고 맥주를 빚어 ‘니나 여신’에게 바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점토판을 해독한 결과 수메르인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보리로 만든 빵을 물과 함께 섞어서 자연발효 시켜 맥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무렵 수메르 사람들은 다양한 맥주를 만들었습니다. ‘시카루’라고 하는 보통 맥주 외에도 강한 맥주, 검은 맥주, 붉은 맥주 등 여러 종류의 맥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고대의 맥주 제조) |
점토판에 의하면 그 무렵 수메르 사람들은 맥주를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로 생각하여 사원 안에서 종교의식의 하나로 이 술을 빚었습니다. 당시 맥주를 만드는 일은 여성이 맡아서 했으며, 술 빗는 양조가는 존경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맥주와 관련된 신화에는 어김없이 여신들이 등장합니다.
수메르 사람들은 맥주를 만들어 여신에게 봉양한 후 급료로 지급하거나 선술집에서 이를 마셨습니다. 수메르 사람들은 맥주를 ‘마음에 즐거움을 주고 간장에 행복을 주는 음료’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매일 2~3 주전자의 맥주를 지급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매일 엄청나게 마셔댄 셈입니다.
그 무렵 맥주는 걸쭉한 죽과 같은 형태로 한 끼 식사대용으로 충분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맥주는 알코올 도수도 낮았습니다. 발효가 많이 되어 술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초기에 발효를 중단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리로만 만든 게 아니라 잡곡이나 렌즈 콩, 귀리 등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발효 된 맥주에서 곡물을 거르지 않고 먹었기 때문에 걸쭉한 게 “마시는 빵”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