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문으로 다닐지언정, 더러운 꼴은 보지 않겠노라"
사도세자 뒤주에 갇힐 때 유일하게 몸으로 반대한 남인 출신 무사 이석문
곤장 맞고 파직… 낙향한 곳이 고향 성주 한개마을
노론 꼴 보기 싫다며 북쪽으로 작은 문 내고 사도세자 향해 경배… '北扉公'이라 불려
증손 이원조는 17세 급제… 남인 출신으로 한직 전전… 학문에 매진해 독자적 학풍
'조상 들먹이지 않고 염치와 도리 지켜야 양반'
1762년 여름, 창덕궁
실록에 따르면 아비 눈 밖에 난 사도세자는 보름 동안 아버지 영조 부름을 기다렸다. 1762년 음력 5월 23일부터 윤5월 13일까지다. 그동안 밥을 먹었다는 기록도 없고 물을 마셨다는 기록도 없다. 첫날은 밤을 새우고 방으로 돌아갔으나, 이후에는 창덕궁 시민당 뜰에 앉아 영조에게 용서를 빌었다. 두 번 아비에게 뵙기를 청했지만, 영조는 거절했다. 대신 세자를 사칭하며 밤에 부녀자를 겁탈하고 다녔던 사내 둘에 대해 처벌을 명하고, 삼남에 들이닥친 가뭄에 기우제용 향(香)을 내렸을 뿐이다. 보름 만인 윤5월 13일 풍경은 이러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上幸昌德宮 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왕족 지위를 박탈한 뒤 어딘가에 집어넣었다는 뜻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뒤주라고도 하고 작은 방이라고도 했다. 한중록에는 뒤주라고 기록돼 있다. 15일간 식음 전폐한 27세 청년을 한여름 끓어오르는 돌바닥 위 뒤주 속에 가뒀다.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다. 세자는 8일 만에 죽었다. 더위에 쪄 죽었다. 실록 기록은 여기까지다. 영조가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라며 사관을 물리친 탓이다. 뒤주에 가둔 후 영조가 명을 내렸는데, 이 명 내용이 끔찍했던지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史官諱而不敢書).'(영조실록)
8일 뒤 세자가 죽고, 죽음 직후 신분은 왕족으로 회복되고 그 아들이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정조며, 정조가 아비를 잊지 못해 수원에 왕릉을 만들었네, 그런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그런데 더 구체적인 묘사가 다른 기록에 남아 있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이승희(1847~1916) 문집 '한계유고(韓溪遺稿)'에 나온다.
실록에 따르면 아비 눈 밖에 난 사도세자는 보름 동안 아버지 영조 부름을 기다렸다. 1762년 음력 5월 23일부터 윤5월 13일까지다. 그동안 밥을 먹었다는 기록도 없고 물을 마셨다는 기록도 없다. 첫날은 밤을 새우고 방으로 돌아갔으나, 이후에는 창덕궁 시민당 뜰에 앉아 영조에게 용서를 빌었다. 두 번 아비에게 뵙기를 청했지만, 영조는 거절했다. 대신 세자를 사칭하며 밤에 부녀자를 겁탈하고 다녔던 사내 둘에 대해 처벌을 명하고, 삼남에 들이닥친 가뭄에 기우제용 향(香)을 내렸을 뿐이다. 보름 만인 윤5월 13일 풍경은 이러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上幸昌德宮 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왕족 지위를 박탈한 뒤 어딘가에 집어넣었다는 뜻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뒤주라고도 하고 작은 방이라고도 했다. 한중록에는 뒤주라고 기록돼 있다. 15일간 식음 전폐한 27세 청년을 한여름 끓어오르는 돌바닥 위 뒤주 속에 가뒀다.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다. 세자는 8일 만에 죽었다. 더위에 쪄 죽었다. 실록 기록은 여기까지다. 영조가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라며 사관을 물리친 탓이다. 뒤주에 가둔 후 영조가 명을 내렸는데, 이 명 내용이 끔찍했던지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史官諱而不敢書).'(영조실록)
8일 뒤 세자가 죽고, 죽음 직후 신분은 왕족으로 회복되고 그 아들이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정조며, 정조가 아비를 잊지 못해 수원에 왕릉을 만들었네, 그런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그런데 더 구체적인 묘사가 다른 기록에 남아 있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이승희(1847~1916) 문집 '한계유고(韓溪遺稿)'에 나온다.
호위 무사의 항명
그때 세자의 호위 무사가 "부자(父子)가 서로 영결하는데 어찌 군명(君命)을 기다리리오"하고는 세손을 등에 업고 들어갔다. 진노한 영조가 즉시 나가라 명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히 물러나지 않았다. 이윽고 세자가 큰 궤 속에 들어갔다. 이에 영조가 그에게 큰 돌을 위에 올려놓으라 명했다. 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울었다. "죽더라도 감히 못 하겠나이다." 임금이 거듭 다그쳤으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니, 영조가 급히 끌어내리도록 명했다(英廟呼公擧一大石加諸上 公叩頭泣曰 臣死不敢奉命 屢命不前 英廟遽命曳出).
호위 무사 이름은 이석문(1713~1773)이다. 호는 돈재(遯齋)이고 성산 이씨다. 기록에 따르면 이석문은 이튿날 곤장 50대를 맞고 파직됐다. 나이 마흔아홉 먹은 이석문은 관직에 썼던 모든 도구를 버리고(盡散宦具) 벗들과 소리 내 울며 작별한 뒤 낙향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벽에 적어놓고 문을 닫아걸었다(한계유고, '돈재부군 행장').
한계 이승희는 돈재 이석문의 후손이니 기록에 크고 작은 과장은 없을 리 없겠다. 하지만 여러 다른 기록에도 비슷한 일이 적혀 있으니 영조 대에 사도세자를 지키는 무관 가운데 심지 곧고 대나무처럼 강직한 사내가 있었음은 틀림이 없다.
한계 이승희는 돈재 이석문의 후손이니 기록에 크고 작은 과장은 없을 리 없겠다. 하지만 여러 다른 기록에도 비슷한 일이 적혀 있으니 영조 대에 사도세자를 지키는 무관 가운데 심지 곧고 대나무처럼 강직한 사내가 있었음은 틀림이 없다.
정치적 죽음과 남인 이석문
예나 제나 문제는 정치다. 사도세자가 엽기적으로 죽게 된 연유도 정치적이다. 세자가 스무 살인 1755년 전라도 나주에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대자보가 붙었다. 간신은 여당인 노론이요, 대자보를 붙인 이는 소론이었다. 세자는 엄벌을 주장하는 노론을 배척하고, 이후 웬만한 노론 주장은 모조리 반대했다.
여야를 두루 쓰겠다는 영조였지만, 결국 그가 이리 짜증을 낸다. "지금 치우친 논의 때문에 애비 당(父黨), 아들 당(子黨)이 생겼으니 조정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 짜증 보름 만에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버렸고, 이에 노론 소속인 '조정 신하'들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그저 궁궐 문밖에서 울기만 하였다(한계유고).
그때 제2야당쯤 되는 남인 집안에서 태어나 남인 학풍을 익히고 남인 습속대로 살고 남인 철학으로 사유하던 이석문이,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세자를 옹호하다가 곤장을 맞고 낙향해버린 것이다. 신산한 몸을 끌고 돌아간 고향이 경상북도 성주 한개마을이다.
성산 이씨 집성촌 한개마을
영남은 남인 땅이다. 임진왜란 전 기축옥사로 실각한 남인들이 낙향해 권력을 비판하며 날을 세웠던 땅이다. 이석문 또한 남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했으되 한직을 전전하는 그를 노론 측이 설득했다. "시의(時議)를 따르면 출세길을 보장하리라."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영남에 사는 탓에 시의를 알지 못한다." 그 고집이 시의를 이겼다. 고집은 결국 곤장 50대로 이끌고 그를 낙향하게 만들었다.
이석문이 사는 한개마을은 대포리(大浦里)라고도 했다. 큰(한) 나루(개) 마을이라는 뜻이다.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옛 모습이 남아서 돌담길은 등록문화재 261호로, 마을 전체는 중요민속자료 255호로 지정돼 있다. 마을 앞은 들판이 넉넉하다. 뒷산은 그윽하다. 사드(THAAD)가 들어오면서 성주가 시끌시끌하지만 한개마을은 시류와 무관하게 그 가운데 앉아 있다.
북으로 문을 내니, 북비공(北扉公)
그런데 한개마을에는 남인과 노론이 공존했다. 같은 문중이라도 이념이 달랐고, 이념이 다르면 동문이라도 왕래가 없었다. 이석문이 살던 집 앞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촌 이석구가 살았다. 노론이었다. 그런데 그 집을 수시로 찾아오는 노론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대문 앞을 지나치는 것이었다.
하여 이석문은 그쪽 문을 뜯어서 북쪽 담장에 싸리문(扉)을 열었다. "시류에 아첨하는 무리와 접하기 싫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대문을 향해 절하며 사도세자를 기렸으니, '지금까지 그를 이름이나 호로 부르지 않고 모두 북비공(北扉公)이라 부른다(至今人稱公不名且不號而輒曰北扉公北扉公云).'(이남규·1855~1907·〈수당유집·修堂遺集〉) 혈연을 내칠 정도이니 언뜻 보면 냉혹한 정치가로 읽을 수도 있고, 권력 찾아 몰려다니는 정치꾼에 대한 냉소로도 읽을 수 있겠다. 이석문은 귀거래사 옆에 '無愧心(무괴심)'이라 적어놓았다. 부끄러움 없이 살라는 뜻이다.
한개마을 사람들
이석문의 증손에 이원조(1792~1871)가 있다. 호는 응와(凝窩)라 한다. 응와 이원조는 천재였다. 열일곱 살에 서울로 올라가 과거에 붙으니, 영남 시골에서 온 아이의 소년등과를 모두 놀라워했다. 등과 2년 뒤 순조 임금이 묻는다. "네가 스스로 지은 글인가?" 과거 시험장 자리 잡아주는 놈, 글 지어 주는 놈, 글씨 써 주는 놈 모두 따로 부리며 시험 보는 졸렬한 당시 세태를 잘 알고 있기에 묻는 말이었다. 놀라움은 거기까지였다. 시골 촌놈에, 남인이었으니까.
남인이라는 이유로 셀 수 없는 한직을 맡으며 벼슬 생활을 한 이원조는 학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후손에게 남긴 말은 '讀書種子(독서종자)'였다. 글 읽는 씨앗이 되거라. 시류를 좇아 살면 끝없이 방황하니, 진리에서 답을 찾으라는 말이다.
그래도 인간이었는지라, 은퇴 후 만년에 조정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새해 포부를 누가 묻자 이리 말한다. "올해에는 나도 노론이 한번 되어봤으면 좋겠소." 이원조의 학풍은 조카 한주 이진상(1818~1886)으로 이어져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한주학파의 뿌리가 되었다.
2017년 한개마을
이석문이 대문까지 옮기며 쳐다보지도 않았던 앞집에는 이원조의 10촌 이원규가 살았다. 역시 노론이었다. 이원규가 죽던 날, 아내 순천 박씨에게 이리 유언을 했다. "後家三子(후가삼자)." "뒷집 셋째 아들을 양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아내는 남편 염을 하기도 전에 담장을 넘어 응와의 집에 석고대죄를 하며 양자를 청했다. 그리하여 이원조의 셋째 아들 구상이 그 집 양자로 가고, 두 집은 화해를 했다.
이석문이 만든 싸리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증손 이원조가 살던 집도 남아 있다. 이원조가 사랑했던 조카네 한주 종택도 남아 있다.
21세기 한개마을 방문객에 남인과 노론은 없다. 그냥 대한민국 시민이다. 그런데 오는 사람들 저마다 자기네 가문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북비 이석문과 응와 이원조가 살았던 그 집, 응와고택을 지키는 이수학(79)이 이리 말하곤 한다. 북비의 8대손이다. "머리에 든 지식 많다고 양반이 아니고 무식하다고 상놈이 아니다. 할아버지를 들먹이며 자기네가 양반이라고 하는데, 정치를 잘한다고 하여, 권력을 오래 잡았다고 하여 양반이 아니다. 염치와 도리를 지키고 할 바를 하면 그게 바로 양반이다."
입 발린 수사(修辭)를 신념이라 하고, 낡은 족보에 적힌 조상 덕을 자기 것인 양 떠드는 21세기 양반들은 고개 숙여 북쪽으로 난 싸리문을 들어가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