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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인도철학과 불교


인도철학과 불교 / 권오민 지음/ 민족사 /2004년 서울 

⫸ 어떠한 재물도, 어떠한 지식도, 어떠한 건강도 인간을 지켜줄 수 없다. 하리바드라는 말한다.; \"현자라면 어떻게 그런 위험과 고통 속에서 쾌락을 원할 수 있을 것인가?\"그것은 분명 한계상황이자 위기의식이다. 실존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위기의식은 특정한 때, 특정한 이에게만 나타나는 특정한 위기의식이 아니라 모든 때, 모든 이에게 노출된 근원적 위기의식이다. 그러한 위기의식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위기의식이며, 또한 그 같은 위기 의식 앞에서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지식체계의 가치는 제로이다.[29p]

⫸ 일찍이 자전거를 보지 못하였거나 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이는 먼저 그것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획득하고 그 이치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다고 해서 바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실제적인 습득이 필요하다. 그런데 습득의 초기에는 자전거의 이치를 떠올리게 될 것이고, 그 순간 넘어지고 만다. 그러나 오랜 시간 반복하여 두 손을 놓고도 탈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제 더 이상 자전거에 관한 인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가 자전거에 대해 무지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제 자전거와 하나가 된 것이다. 자전거에 올라타기만 하면 그것에 관한 인식 없이도 바로 달릴 수 있다.[33p]

⫸ 주지하는 바대로 서양의 경우, 철학과 종교는 각기 희랍과 히브리의 문화전통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그러한 대립관계가 성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말하자면 인도의 조교는 철학적이며,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34p]

⫸ 마누법전에서는 계속하여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이는 다르마와 카마가, 어떤 이는 카마와 아르타가, 어떤 이는 다르마만이, 어떤 이는 아르타만이 훌륭하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다르마, 아르타, 카마 이 세가지가 모두 훌륭한 것이다.[44~45p]

⫸ 무지란 곧 나타난 것(appearance)을 실재하는 것(reality)으로, 허위를 참이라고 믿는 그릇된 성벽, 혹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무지야말로 미혹한 범부의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50p]

⫸ 그렇다고 할 때 절대적 인격신에 대한 믿음이 부재하는 불교를 어떻게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서구화주의의 산물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깊은 종교적 삶에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니다. 종교적 체험은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낳아지는 것이 아니다. 인도사유에 있어 믿음이란 수행 즉 존재본성에 대한 통찰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내적 직관적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그것은 분명 절대적 권위에 의탁하여 어떠한 주체적 노력 없이 종교적 위안을 얻으려는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53p]

⫸ 그러나 도시가 흉기하여 사회공동체로 발전하면서 경험은 더 이상 공통의 것이 되지 않았으며, 가치 또한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전통적인 사고와 실제 생활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게 되었고, 사회적 사상적 갈등이 야기되었다. 이제 바야흐로 인간 삶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다. -중략⫸ 그 결과우파니샤드가 산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가 탄생하였고 자이나교가 일어났으며, 나아가 인간에게 가능한 거의 모든 사유가 모색되었다. 유물론도 생겨났으며 운명론, 결정론, 요소론, 쾌락론, 도덕론, 부정론, 불가지론도 생겨났다. 이 시대 사상유형으로서 불전에서는 62가지를, 자이나 경전에서는 363가지를 전하고 있다.[55p]

⫸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자 즉 단일한 실재는 온갖 차별적인 이름(名)과 형태(色)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말할 수 없다. 즉 언어란 사물들의 관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그 때는 일자 이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언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존재(有)'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가 생겨나기 전의 그것은 아직 현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존재(無)'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일상에서의 비존재란 어떤 존재의 부재(不在)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 때는 어떠한 존재도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도 공간도, 죽음도 초월하였으며, 불사라는 개념조차 초월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이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를 포함한 세계의 근원이다.[80p]

⫸ 사실 브라흐만은 브라흐만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굳이 말로 표현하자니 브라흐만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격적 속성을 지닌 신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내적 통제자(antraya(-)min)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말이 표현될 수 있으며, 마음에 의해 사유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사유할 수 있으며,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눈이 볼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으로,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예배할 대상이 아니다."[101p]

⫸ 그러나 나무의 씨앗에서 나무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여 나무가 그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듯이, 소금물에서 소금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여 소금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듯이, 사트 그것은 만유에 내재하는 보편적 실재이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게 하는 것, 들리지는 않지만 들리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트이며, 아트만으로서, 네가 바로 그것이다.[104p]

⫸ 그렇다면 차르바카는 왜 지각만을 인정하는 것인가"

인도철학 일반에서 추리란 지각에 근거한 것, 지각한 다음의 인식으로 말하자면 이미 알려진 사실로부터 새로운 판단을 획득하는 언어형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전 사람들의 주금으로부터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결론을, 혹은 이미 경험한 불과 연기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통하여 연기가 나는 곳에 불이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며(귀납추리), 또한 그 같은 일반적 사실에 근거하여 아직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사실, 예컨대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죽는다, 저 산에 연기가 나기 때문에 불이 있다는사실을 알게 된다(연역추리)그러나 차르바카에 따르면, 제한적으로 경험된 특수한 사실을 제한 없이 일반화 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며, 따라서 일반적 사실에서 특수한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140~141p]

⫸ 어쩌면 오늘의 우리 역시 차르바카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사랑은 어제의 일이였고, 오늘의 미움은 오늘의 일이다. 양자 사이의 인관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로지 오늘만이 존재할 따름이다."[142~143p]

⫸ 진리란 신탁에 의해, 성전이나 전통, 혹은 이지적 탐구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필경 실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어야 하며, 어떠한 이에게라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왜 선을 행하는가? 그것은 신의 의지도, 존재의 궁극적 본성도 아닌 참으로 애호할 만한 안온한 과보를 초래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불타에게 있어 진리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론적인 것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도의 거의 모든 철학이 신(혹은 궁극적 실재)이나 존재본성에 대해 탐구하였으며, 그것은 대개 우리들 일상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타는 그 같은 형이상학적인 탐구를 배척하였다. 그것은 신탁이나 이지적 탐구에 의해 알려진 것일 뿐, 실제적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176p]

⫸ 독화살을 맞은 이에게 중요한 것은 '독화살을 맞았다'고 자각하는 것이며, 자각한 이상 그것을 지금 바로 빼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쏜자가 누구인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하는 물음은 한갓 호기심에 불과하다. 그것은 알 수도 없으며,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앎에 의해 극심한 고통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 같은 앎에는 어떠한 실제적 이익도 없다.[178p]

⫸ 불타는 사실상 이 같은 실제적인 고통(duhkha)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였으며, 진정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였다. 불타가 진실로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생겨남과,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 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였고, 최초의 설법 또한 이에 관한 것이었다.[180p]

⫸ 어떤 이성과의 만남을 생각해 보자.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에 대한 어떠한 관념도 갖고 있지 않다. 아직 만나지 못한 어떤 이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던 이성들의 온갖 단점들을 갖지 않는, 혹은 모든 장점만을 소유한 이였으면 하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이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어느 시기 현실에서 현실적인 인간유형을 찾게 될 것이다. 만남의 일차적 조건은 감관과 대상이다. 시각기관인 눈을 예로 들면, 눈과 그 대상인 색채나 형태이다. 그를 보는 순간, 눈에 근거하는 의식 즉시의식이 생겨날 것이며, 만남이 아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가 반드시 관계해야 한다. 이를 촉(觸)이라 하자.그 순간 좋다거나 나쁘다 혹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첫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 구체적 내용을 갖지 않는 느낌 즉 필링이다. 이를 수(受)라고 하자. 그리고 자리에 앉아 이름이며, 나이며, 고향, 취미, 기호 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고, 그에 대한 구체적 인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상(想)이라고 하자. 만약 인상이 좋았다면 그가 좋아한다고한 노란 장미만을 보고도, 전화벨 소리만으로도 그를 떠올리고, 보고싶어할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의사작용, 즉 사(思)라고 하자.이로써 이제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가 생겨났다. 그것은 사랑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미움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깊어질 경우, 그의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물질의 한 형태인 감관과 그 대상, 수,상,사, 그리고 의식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6~187p]

⫸ 중도란 양극단의 파기이다. 즉 영속론은 우리들 경험의 범위를 초원한다는 점에서 독단이며, 허무론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계의 연속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역시 독단이다. 곧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일련의 흐름으로, 불변의 실재도 아니지만(非有) 그렇다고 단명의 허무도 아니다(非無).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변화의 영역이다.[197p]

⫸ 우리의 마음은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찰나찰나에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의 일시적 화합물인 세계 역시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다.[198p]

⫸ 피구나가 부처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랑하는 것입니까?"
부처가 피구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랑하는 자에 대해 설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사랑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면, 그대는 마땅히 '누가 사랑하는가?'라고 물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대는 마땅히 '무엇을 조건(因緣)으로 하여 사랑이 있게 된 것인가? 라고 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응당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사랑이 있으며, 사랑을 조건으로 하여 집착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199p]

⫸ 셋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도덕적인 책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것은 불변의 자아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이 인과적 연쇄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부단한 흐름으로 상속하기 때문이다.[201p]

⫸ 열반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 열반이란 바로 그 같은 양자태길적인 이원의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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