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생활 속의 수행_남상욱님

진정한 스승


한 때 진정한 의지처와 영적 스승을 찾아 방황한 적이 있다. 진리에 목말라하던 때 인도의 영적스승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을 읽고 마치 구원의 샘물로 목을 축인 듯 했다.

그 분의 책은 나의 바이블이 되었고 수행의 지침서가 되었으며 마하리쉬는 존경하는 스승이 되었다. 그 때 나의 꿈은 그 분이 영감을 받았고 쉬바신의 현신이라 칭송하는 아루나찰라와 그 분의 아쉬람에 가보는 게 꿈이었다.

꿈은 꿈이었을 때가 좋은 법이던가? 이름도 생소한 남인도의 '띠루반나말라이'라는 곳에 어렵게 찾아가 본 아루나찰라는 모기가 들끓는 그냥 고향 동네 앞 산 정도 되는 곳으로 그 어떤 신령함이나 영험함도 느낄 수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그의 아쉬람 역시 전 세계에서 모인 수행자들에게 걸맞는 수행체계는 찾아보기 어렵고 상당부분 신격화되고 성지화되어 그 분의 가르침으로 수행하기보다는 그를 추종하는 종교집단같은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다.

물론, 그 분과 가르침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그 곳 분위기에 대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인도의 또 다른 유명 아쉬람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십대부터 그토록 동경하던 오쇼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비롯한 수많은 영적스승을 배출한 인도의 맨 얼굴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경하던 어떤 것이 현실로 될 때 실망으로 바뀌는 경우가 흔히 있다. 현실과는 다른 환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에 대한 환상이 실망으로 바뀌는 경우는 흔히다.

늘 자각과 통찰을 주는 글을 쓰는 어느 이름난 작가를 직접 만나보고 글과 그의 언행이 많이 다름을 보고 크게 실망한 적도 있고, 심지어 이름난 영적스승이라 불리는 분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는 내가 그들의 단편적인 모습을 짧은 시간에 나의 시각과 편견으로 본 탓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명성과 글이 그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뭔가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눈밝은 스승을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 외양과 명성이 번듯한 사람이 전혀 아니올시다인 경우도 있고, 설사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촌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기 자기만의 안경을 끼고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것도 자신의 기존 관념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도인의 모습을 꼬부라진 지팡이를 든 수염이 허연 노인쯤으로 생각하는 매우 동화적인 환상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기준은 사실 간단하고 명확하다. 먼저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와 가급적 오래 지내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계율을 잘 지키는가를 보면 되는 것이다. 최소한 예류자만 되어도 의도적으로 오계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이쯤되면 지키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다.

수행의 높낮이를 떠나 계를 잘 지킨다는 것은 그가 청정한 수행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니 능히 칭송하고 가까이 할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류자 이상의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은 스스로 본인이 무엇이라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의 성품이 그러하고 부처님께서도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자는 제자가 아니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 외에 얼마나 자주 어느 정도로 화를 내는지와 이성에 대한 태도 등은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수행이 높다는 것은 얼마나 번뇌를 끊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오하분결 오상분결'은 성인의 지표가 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미 성인에 반열에 오른 분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의심하고 폄하하다가 큰 과보를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스승 찾기에 대한 방황이 끝난 훗날 인도북단 히말라야 자락에서 오랜 고행과 철저한 금욕생활을 해왔다는 긴 수염의 눈빛이 깊은 구루를 만난적이 있다. 

그는 물위에 앉아서 했다는 좌선과 각종 신비체험과 달라이라마 큰 스님과 했다는 황당한 법거량에 대한 무용담을 장황하게 말하며 은근히 제자되기를 권했지만, 코웃음을 치면서 한 방에 거절할 수 있었다.

운좋게도 나는 미얀마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는 한 스승을 만나 단 한순간도 그 분을 의심해 본적이 없으며, 이미 열반에 드셨지만 아직까지 절대적 신뢰와 존경을 보낸다.

꽤 오랫 동안 스승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한번도 그 분이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고 계를 어기는 것 역시 본적이 없다. 

더구나 그 분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어느누구에게도 그 분의 수행 과위가 무엇이다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며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이미 부처님 법은 잘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