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은 있지만 욕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6-1
“눈물로 인생을 끝내고 또 눈물로 시작하고, 그것이 윤회이고 12연기”
6. 12연기와 위빳사나
오늘은 12연기와 위빳사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때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업과 12연기가 같고, 사성제와 팔정도, 사념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부처님의 법에 대한 공부가 잘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경전의 내용이 각기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내용이 사성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부할 12연기 또한 그와 같은데 이 12연기를 위빳사나와 어떻게 연결 지어 이해할 것인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다음 12연기법 도표를 보십시오.
이 도표를 보시면 12연기가 1-2-3-4로 나뉘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과거, 이것은 과거에 했던 선악이라는 원인, 즉 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이어지는 2-과보, 이것은 과거에 행한 것에 의한 결과가 지금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도 악도 아닌 단지 과보일 뿐입니다.
1번이 선악인 업이고 2번이 그에 따른 과보입니다. 다시 3번이 선악 업이고 4번은 과보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보-선악-과보로 되어 있습니다.
또 1번이 과거의 원인이고 2번은 현재의 과보이며, 3번이 현재의 원인이고 4번이 미래의 과보입니다.
이 12연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크게는 전생, 금생, 후생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지금의 이 순간순간도 윤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큰 의미에서의 윤회입니다. 그래서 1번인 과거의 업은 전생에 했던 원인을 의미합니다. 전생에서 행했던 선과 악이라는 원인, 그것에 의해서 이번 생에 만들어지는 것이 2번인 현재의 과보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지금 이 순간 다시 선악의 업을 짓고 있는 상태가 3번이고 이것은 다음 생의 원인이 됩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3번에 해당됩니다. 그 3번에서 우리가 짓고 있는 선과 악의 행이 원인이 되어 미래인 다음 생, 그리고 다음다음 생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먼저 표에서 오른쪽 상단의 네 번째 선을 보겠습니다. 1번은 과거 안에 있는 두 가지로, 무명으로 인하여 행, 즉 업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전생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전생에 했던 선업도 밑바탕에는 무명, 어리석음을 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업이라고 하더라도 잠재 상태의 번뇌는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어나는 상태로의 번뇌’는 아니지만 번뇌의 세 가지 단계를 가지로 말하자면 ‘잠재 상태의 번뇌’이고, 그 번뇌인 무명으로 인하여 행, 즉 업을 지었고 그 선업을 원인으로 하여 이번 생에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으로 인해서 식이 생긴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식에는 89가지의 마음이 있는데, 재생연결식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음은 19가지가 있습니다. 즉 태어나는 순간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이 19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논장을 공부해 보면 이 식을 그냥 마음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악처에 태어나는 마음이 한 가지이고, 사람과 신으로 태어날 수 있는 마음이 8가지예요. 그 다음에 사람 중에도 조금 모자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마음이 한 가지, 이렇게 하면 태어나는 마음이 10가지가 됩니다. 또 색계 범천으로 태어나는 마음이 5가지, 무색계 범천으로 태어나는 마음 4가지, 그래서 19개의 마음이 이 식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식을 모든 마음이라고 하면 맞지 않습니다. 모든 마음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재생연결식 역할을 하는 세간 과보의 마음만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식으로 인해서 명색이 생긴다고 풀면 됩니다. 어떤 생애든지 재생연결식이 생기고 그 재생연결식으로 인해서 명색이라는 물질과 정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이 명색으로 인하여 육입(六入)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육입으로 인하여 촉이 생기고, 다음은 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원인 결과의 의미를 이어서 풀어 보면, 전생에 행했던 선악의 행이 원인이 되어 식, 즉 중생이 태어나는데,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의 명색이 생기고, 사람이라도 남자라면 남자의 명색, 여자라면 여자의 명색이 생기며, 만약에 지옥에 태어나면 지옥생의 명색이 생깁니다. 그 명색으로 인해서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육입이 생기고, 그 육입으로 인해서 대상과 접촉하게 되니, 그로 인하여 온갖 느낌이 일어납니다. 육입이 대상에 접촉하자마자 느낌(feelings)이 생겨납니다.
보면 그 보는 것에 느낌이 있어서 보면서 즐겁게 느낄 수 있고 괴롭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소리면 안 좋다고 느끼고 아름답게 여겨지면 좋다고 느낍니다. 느낌까지는 과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업에 따라 현재의 과보가 생기기 때문에 이 과보는 아라한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도 넘어서지 못합니다.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35세가 되어서야 붓다가 되었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붓다가 아니었고, 따라서 선이건 악이건 업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붓다가 되어 모든 번뇌가 사라져 다시 업을 짓지는 않았지만 깨닫기 전에 지은 업의 과보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난 식 자체도 과보이고, 그 식으로 인해서 명색, 즉 이 몸과 마음을 갖고, 명색으로 인해서 육입이 생기고, 그 육입으로 인해서 촉하고, 그 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생기는 것은 부처님도 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좋은 것을 볼 수도 있고 안 좋은 것을 볼 수도 있고, 좋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나쁜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과보의 힘이 원인이 되어 붓다가 되신 이후의 45년 생 동안에도 예전 업의 결과인 과보는 그대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느 때는 부처님도 말에게 먹이는 사료를 3개월이나 드신 적이 있습니다. 심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말이나 소를 방목하여 키우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근처에서 부처님과 제자 승가가 안거에 들었습니다. 그 장사하는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서 말에게 주는 먹이를 줄이면서 자기들이 나눠먹는 중에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그것을 조금씩 보시한 것입니다.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거친 그것을 아난 존자가 잘게 부수어서 죽처럼 끓여 부처님께 올렸고, 3개월 내내 부처님이 그 음식을 드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어느 때는 왕실에서 보시하는 음식이 부처님께 올 때도 있었는데 그 음식과 마소의 사료로 만든 음식 맛이 똑같을 수 없고 그것은 부처님도 똑같이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보라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 아라한과 범부가 여기에서 갈라집니다.
아라한과 부처님께서는 느낌은 있지만 그 느낌에서 욕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라한과 부처님께서는 느낌이 좋건 나쁘건 그것에서 갈애를 만들지 않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좋은 느낌이면 그것을 계속 갖고 싶은 갈애를 일으키고, 안 좋은 느낌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인 성냄을 일으킵니다. 좋은 느낌을 계속 원하고 안 좋은 느낌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는, 이 둘이 모두 갈애입니다.
그 갈애로 인해서 집착이 생깁니다. 집착은 ‘아, 그렇게 안 되면 안 돼…….’ 하는 느낌이 아주 강해지는 것으로 갈애가 강해져서 집착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갈애는 소리가 매우 시끄러울 때 ‘아, 이 소리가 없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라면, ‘이 소리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강력한 마음이 생기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소리를 없애려고 귀를 막든가 그 소리의 근원지를 없애버리든가 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또 소리가 좋아서 계속 듣고 싶어 하면 갈애인데, ‘이 소리를 꼭 들어야 돼, 안 들으면 안 돼.’ 하고 강력하게 마음이 작동하면 집착으로 넘어간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이 집착이니 갈애로 인해 집착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집착하기 때문에 또 업을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계속 생각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되게 하려고 강하게 원함으로써 또 다른 업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성 업으로 인하여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생이라는 것이 영어로 말하면 life이니 3번에서 4번으로 넘어가서 업에 따라 또 태어난다는 말이 됩니다. 신이나 범천은 태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생겨납니다.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들은 뱃속이건 알이건 습한 곳에서건 태어나서 생기는 것이니 그 생겨남이 신과는 다르지요.
그 다음은 태어남으로 인하여 늙어 죽는다는 말인데 그냥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걱정 근심, 눈물 흐름, 몸의 고통, 마음의 괴로움, 속이 타는 것 등으로 계속 불에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 없는 사람이 되려면 아나함 정도는 돼야 가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물로 시작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계속 눈물을 흘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눈물로 마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눈물로 마친 인생이 또 다음 생으로 이어지면서 눈물로 시작하고, 눈물로 인생을 끝내고 또 눈물로 시작하고……, 그것이 윤회이고 12연기의 내용입니다.
그 12개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무명이 1번이라면 행이 2, 식이 3, 명색은 4, 육입이 5, 접촉이 6, 느낌이 7, 갈애가 8, 집착은 9, 생성 업이 10, 태어남이 11, 그 다음에 늙음부터 죽음까지를 하나로 붙여서 마지막 12번이 되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음으로 바로 가야 되는데 늙음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고통을 다 합쳐서 하나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12가지 조건이기 때문에 이것을 12조건, 즉 12연기라고 하는 것이지요. <계속>
“오직 봄, 봄을 관찰하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6-2
“느낌에서 지혜로 가면 위빳사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윤회”
그러면 여기에서 12연기를 조금 더 확대해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12연기를 윤회라고 볼 때 그 연기의 가장 근본적인 뿌리가 무엇인지를 볼까요? 12연기를 표로 그린 앞 그림의 가운데에 있는 무명, 갈애가 가장 큰 뿌리입니다. 이 무명, 갈애라는 아주 큰 뿌리로 인해서 12연기가 이렇게 계속 돌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두 가지 뿌리에 덧붙여, 윤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굴레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세 가지가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입니다. 이 12연기를 보면 뿌리는 두 가지, 굴레가 세 가지예요. 번뇌의 굴레로 업의 굴레가 생기고, 업의 굴레로 과보의 굴레가 생깁니다.
굴레 세 가지를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림의 1번을 보면, 맨 바깥 라인에 세 가지 번뇌의 굴레가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화살표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면 무명이고 끝까지 내려가면 갈애와 취착, 업의 굴레에서 따라 내려오면 행, 12연기의 구조 그 선의 끝에까지 가면 생성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집착, 갈애에서 시작해서 그 화살이 무명을 통과하며 가니까 무명, 갈애, 집착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세 가지가 번뇌의 굴레입니다. 그러니 무명도 번뇌이고, 갈애, 집착도 번뇌인 것이지요. 그 번뇌의 굴레를 통해서 업의 굴레가 생깁니다. 그림을 보면 옆에 행이 보이지요? 행의 밑으로 내려가면 생성업, 그것은 행과 똑같습니다. 업이 행이고 행이 업이어서 이 두 가지가 업의 굴레입니다. 생성업에서 올라가니까 행, 행을 통해서 바깥으로 화살표가 가니까 두 가지 업의 굴레가 됩니다. 순서대로 보면 세 가지 번뇌의 굴레로 인해서 두 가지 업의 굴레가 생긴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업이 생긴다는 것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번뇌가 없으면 업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은 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아라한은 번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명, 어리석음도 없고 갈애, 집착도 없습니다. 갈애, 집착, 무명이 없으니 업이 안 생기고, 업이 없으니 과보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이 윤회가 끝났다는 것은 곧 과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업을 짓게 되고, 업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과보가 무엇인가요? 느낌, 접촉, 육입, 명색, 식 이런 것들이 과보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있고 업이 있다면 틀림없이 식, 태어나야 합니다. 19가지 재생연결식 중에 어떤 식을 갖고 태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식으로 인해서 명색, 명색으로 인해서 육입, 그 육입으로 인해서 촉, 다시 촉으로 인해서 수, 바로 여기까지가 과보의 굴레입니다.
그러면 1번과 2번만 봐도 세 가지 굴레에 의한 윤회가 분명한데 3번과 4번이 왜 또 필요한가. 1번 안에 세 가지 번뇌의 굴레와 두 가지 업의 굴레가 있습니다. 그 번뇌의 굴레로 인해서 업을 짓고, 그 업에 따른 것이 과보의 굴레입니다. 두 번째가 과보의 굴레인데 현재의 삶은 그 과보의 굴레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 번째를 다시 말하는가.
지금 우리가 태어난 것은 과보의 굴레이지만, 태어난 이후 우리는 다시 선 혹은 악의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3번과 1번은 업이라는 면에서 일치합니다. 다만 1번은 과거의 업이고 3번은 현재의 업이라는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저는 번뇌를 가진 채 강의를 하면서 선업을 짓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들 또한 번뇌를 가진 상태에서 강의를 들으며 선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선업이긴 하지만 어쨌든 업을 짓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생성업입니다.
이 생성업에 따라 미래의 우리가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합니다. 그러면 4번과 2번이 똑같지요. 2번은 과거 업에 의한 현재의 과보이고, 4번은 현재의 업에 의한 미래의 과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1번이 과거 번뇌의 굴레이고 업의 굴레, 3번이 현재 번뇌의 굴레이며 업의 굴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 세 가지를 우리가 빙빙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이란 한 사람을 예로 들자면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몸과 마음을 명색이라고 합니다. 육입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말하고 접촉은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여러 가지 대상을 촉하는 것을 말하고, 그 촉할 때마다 생기는 느낌, 즉 형상의 느낌, 소리의 느낌, 냄새나 향기의 느낌, 맛의 느낌, 몸의 감촉의 느낌, 마음에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느낌에 따라서 갈애로 넘어갑니다.
갈애로 넘어가면 그것에 의해 다시 집착으로 넘어가고 그것이 번뇌의 굴레입니다. 갈애와 집착이 번뇌의 굴레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서 ‘아, 보는 것이 좋다.’ 하면 느낌(受)에서 갈애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더 강해지면 집착이 되는데 그게 바로 번뇌의 굴레인 것입니다. 번뇌의 굴레에서 생성업이 생깁니다. 즉 좋은 것을 또 보려고 하는 의도, ‛또 보고 싶다.’ 하는 말, 또 보려고 하는 행동, 그런 모든 것이 몸으로 지은 업, 입으로 지은 업, 마음으로 지은 업이 되어 우리는 세 가지 업을 짓게 됩니다. ‘보는 것이 싫다, 느낌이 안 좋다’ 이렇게 보기를 싫어하여 피하고자 하는 것도 갈애입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과 ‘그 보기 싫은 형상을 어떻게 없애야 될까?’ 하는 말, 행동, 생각 모두가 번뇌에 따른 업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잠재적 상태의 번뇌든 일어나는 번뇌 또는 이미 일어나서 파괴한 번뇌든 모두 번뇌인 것은 분명한데 이것은 아라한이 되어야만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번뇌가 있는 한 계속 다음 생을 받아야만 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탄생과 죽음은 똑같은 것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윤회를 12연기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12연기와 위빳사나의 관련성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볼 때 오직 볼 뿐임을 깨닫게 하고자 위빳사나를 가르치셨습니다.
위빳사나는 육입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보고 있을 때 봄, 봄, 봄을 관찰해야 하는데 관찰하지 않으면 느낌(受)에서 갈애로 바뀝니다. 그런데 놓치지 않고 그 느낌을 관찰하는 사람은 수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지혜로 넘어갑니다. 위빳사나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느낌에서 지혜로 가면 위빳사나이고,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빙빙 도는 윤회입니다. 그래서 도표에 보면 화살표들이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느낌과 갈애 사이에서 빠져나가면 지혜이고 빠져나가지 못하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다시 한 바퀴 돌고, 그 다음에도 빠져나가지 못하면 또 돌고, 그렇게 계속 빙빙 돕니다. 윤회는 돌고 도는 것이어서 뒤로 갈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길을 계속 빙빙 돌고 싶지 않으면 갈애가 아닌 지혜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위빳사나라는 말입니다.
느낌의 순간 거기에서 무상을 보든가, 무아를 보든가, 고를 보든가 하면 갈애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상을 아는 사람은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무상을 알고, 그 상태에서 대상을 보니 어떤 욕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욕심이 생길 리 없고 오히려 무서움이 일어납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깁니다. 탐이 아니고 불탐, 무탐입니다. 고(苦)를 보고 있으면서 고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대상이 고라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욕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무상·고·무아를 아는 순간 갈애, 집착이 떨어져 나갑니다.
나(我)라고 착각하면 틀림없이 집착이 생깁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항상 나, 내 것을 고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 있느냐 이런 말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아는 순간 욕심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상·고·무아를 제대로 아는 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 그 순간 그것을 놓아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좋은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대상을 볼 때마다 오직 볼 뿐, 그렇게 계속 관찰만 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들음, 들음, 들음을 관찰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소리를 들을 때 좋다, 좋지 않다 하는 느낌 자체는 어쩔 수 없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도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일지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고 느끼지는 않는 것이지요. 다만 거기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좋다, 안 좋다’는 이미 선과 악 중 하나로 넘어선 것입니다.
여기에서 느낌(受)은 ‘좋다, 아니다’가 아니라 성품 그대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맛을 예로 들면 단맛, 쓴맛 등은 맛의 성품입니다. 고추를 생각해 볼까요. 아주 매운 고추가 있는데 매운 고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그 고추가 매운 것이 아니고,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매운 것도 아니며 그 고추 자체의 맛이 매운 것, 이것이 수受의 의미입니다. 이때 매운 것을 좋아하는 것도 욕심이고 싫어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지만 원래의 맛은 그대로 아십니다.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가 주는 느낌은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이 받아들이십니다. 매우 시끄러운 소리가 있으면 부처님께도 안 좋은 느낌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 시끄러운 소리로 인한 느낌 자체는 당연히 좋은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괴로운 느낌인데, 부처님께서는 그 소리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 갖고 있는 그대로의 맛을 부처님도 아시지만 그 맛에 따라 좋아함 또는 싫어함이 생기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맛이 안 좋다면 싫어함이 생길 수 있고, 맛이 좋으면 계속 원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관찰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느낌에서 바로 갈애로 넘어가는데,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날 때는 우리도 아라한과 부처님처럼 맛, 즉 느낌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아는 데서 그냥 끝냅니다. 즉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제대로 알기는 하지만 그 맛에 대해 탐심이 안 생기고 성냄도 안 생깁니다. 그렇다고 어리석게 먹는 것도 아닙니다. 맛을 모르고 먹는다면 그건 어리석음 속에서 먹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확실하게 알면서 먹기 때문에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관찰력이 매우 빨라지면서 하나하나 계속 변하는 것만 알기 때문에 거의 맛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맛을 모르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을 두고 갈애가 아니라 지혜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계속>
“느낌에서 지혜로 넘어서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6-3
“위빳사나는 12연기의 역방향…순간적인 윤회가 끊기는 것이 위빳사나”
12연기에서 위빳사나를 보면 식에서 명색, 명색에서 육입, 육입에서 접촉, 접촉에서 느낌, 바로 이 단계에서 갈애로 넘어가는데 그것을 위빳사나로 막으면 느낌(受)이 소멸함으로 인해서 갈애가 소멸됩니다. 윤회가 거기서 끊겨버리는 것입니다. 갈애의 소멸로 집착이 소멸되고, 집착이 소멸되니 생성업이 소멸하고, 생성업이 소멸되니 태어나지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으니 늙고 병들어 죽는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윤회가 끝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경험을 말씀하실 때마다 위빳사나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사성제와도 똑같습니다.
느낌에서 고성제를 봅니다. 왜냐하면 도성제를 하고 있기 때문인데 위빳사나가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를 실천하기 때문에 고성제를 알고, 고성제를 아니까 집성제를 버리고, 집성제를 버리니까 멸성제에 도착합니다.
사성제든, 12연기든, 팔정도든, 사념처든 딱 한 가지를 확실하게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수행자들의 공부가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팔정도, 사성제, 12연기, 사념처를 따로따로 보고 있다면 아직 더 열심히,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걷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 때도 항상 느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느낌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논장을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마음이라는 것은 단독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면 동시에 마음부수 몇 개도 같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일어나는 마음이 하나라면 마음부수는 아무리 적어도 7가지가 그 마음과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에는 89가지가 있는데 이 마음들은 동시에 두 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번에 마음이 하나밖에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그 마음이 사라져야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마음이 생기는데 그 마음과 마음 사이에 틈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불을 끄면 어둡지요. 다시 불을 켜면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밝아집니다. 그 밝음과 어둠 사이에 빈틈없는 것이 앞의 마음과 뒤에 따라오는 마음 사이에 빈틈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하나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처음 그대로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을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류가 중단 없이 계속 흐르고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으니 전류가 선처럼 이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발전소에서 계속 전기를 보내주고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밝음이 있기 때문에 전기가 계속 있는 걸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기가 계속 들어오면서 중간에 불이 계속 켜지고, 또 켜지고, 꺼졌다가 켜지기를 반복하는데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꺼지는 순간의 어둠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는 속도가 그만큼 느리다는 말이지요. 전기의 속도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힘이 워낙 느려서 전기의 끊어짐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도 이와 같아 빈틈없이 하나가 죽는 것과 동시에 하나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컵 안에 있는 물을 다 부어버리면 컵에 아무것도 없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고 컵에 공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컵 속에 공기가 들어오는 것과 안에 있는 물이 나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 것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사이에 있는 틈을 알아차릴 수가 없을 뿐입니다. 모든 마음과 함께하는 마음부수는 7개가 있고 그 7개 마음부수 안에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마다 느낌이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다고 하여 엄연한 사실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는 항상 느낌이 있는데 느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 뿐 사실은 그 느낌에 우리가 계속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반응하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지칩니다. 느낌이 항상 있고, 느낌에 따라 우리는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끊임없이 반응을 합니다. 날씨가 더우면 “아, 덥다.” 하고 말은 안 할 수도 있지만 몸으로 덥다고 부채질하고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기도 하고, 몸은 가만히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짜증을 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거의 항상 우리 마음은 보고 반응하고, 듣고 반응하고, 냄새 맡고 반응하고, 생각하고 반응합니다. 사람들이 “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파.”라고 하지요. 정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우리가 마음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 반응이 바로 느낌에서 갈애, 갈애에서 집착, 집착에서 업으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인데 이 생각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응하고 입으로도 반응하고 마음으로도 반응하니, 그 업의 무게가 얼마가 클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업으로 인해서 또 태어나는데 화를 낸 업으로 태어나면 사악처가 확실합니다. 그래서 다음의 식이 지옥생의 식이나 축생의 식이나 귀신의 식이나 아수라의 식입니다. 그 업으로 인해서 태어난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겠지요. 그러니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일이 많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는 12연기의 역방향입니다. 12연기의 순방향으로 가면 인해서, 인해서, 인해서로 계속 도는 것인데 12연기의 역방향으로 가면 소멸해서, 소멸해서, 소멸해서 순간에 끊겨 버립니다. 그래서 이 위빳사나를 이야기할 때는 전생, 금생, 후생 그런 의미가 아니라 순간적인 윤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적인 윤회가 끊기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순간적인 윤회를 끊는다는 것이 형상을 보고 그 형상을 보는 순간 무상을 알고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그 형상으로 인해서 다시 생기는 것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면서 꿈을 꾸는데 이때 애착, 집착을 다 가지고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확실하게 보고, 확실하게 관찰하여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났다면 그것으로 인해서는 꿈을 꾸는 것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위빳사나의 힘이 애착, 집착, 갈애를 끊어 없애는 것입니다.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에 대해 위빳사나 지혜가 있었다면 그 순간적인 소리에 대해 내 마음에서 화가 나거나 밤에 자면서 그것에 대해 꿈을 꾸는 일은 없습니다. 어릴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데 집착했던 것이 바로 바로 꿈에 나타납니다. 지금도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으면 계속 꿈을 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꿈을 제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그 꿈의 뿌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무서움 속에서 잠이 들면 무서운 꿈을 꾸고, 걱정이 있으면 그 걱정 때문에 꿈속에서도 내가 갖고 있는 걱정에 대해 계속 꿈을 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좋은 것에도 집착하고 싫어하는 것에도 집착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텐데 우리는 항상 그 미운 존재를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안 좋아하는 것도 집착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너무나 미워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어도 오지 마라. 다음 생에서 나를 만났을 때 아는 척도 하지 마라.” 하지만 바로 그런 마음 때문에 다음 생에서 또 만납니다. 그러니 “죽어도 오지 마라.”라는 말은 “다음 생에 보자.” 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진짜 싫으면 마음속에서 완전히 놔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완전히 놓을 수 있으면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겠지만, 인연이 끝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마다 확실하게 맺어진다고 생각하십시오. 미움으로 확실하게 맺어지는데 그것은 안 좋게 맺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연이 끝이다.’라는 것이 내가 성냄으로 쥐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어서 성냄으로 움켜 쥔 인연으로 다시 태어나면 부모와 아들딸로 태어나도 원수 같은 관계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갈애와 집착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요! 이 집착에서 우리가 가지는 것이 업인데, 입으로 안 하고 몸으로 안 해도 마음으로 생기는 업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기는 업도 아주 무섭습니다.
위빳사나는 우리가 매 순간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수행이 매우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 순간을 제대로 챙기면 지혜가 생기고 제대로 못 챙기면 바로 갈애와 집착에 빠져서 업이 생기고, 그 업 때문에 또 윤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윤회가 무서워서 출가하는 자가 수행을 제대로 못하면 다시 윤회하게 되어있고, 수행하는 것의 의미를 바로 알고 관찰하면 느낌에서 지혜라는 바른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IC를 놓쳐 한 번 더 돌 때는 어느 정도 돈만 더 내면 되지만, 윤회를 한 번 더 하는 것은 한 번 죽어서 다시 와야 하는 것이니 한 생을 희생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윤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업장 소멸이라는 것은 그냥 상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도가 일어나야 업장 소멸이 됩니다. 우리가 나무를 없애버리려고 할 때 그 뿌리를 뽑아 없애버리지 않고 나무의 가지만 자르면 때가 되었을 때 언제든지 다시 싹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윤회도 뿌리를 잘라야 끝이 납니다. 그 뿌리를 자를 수 있는 힘이 도인데 그 도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수에서 갈애가 아니라 지혜로 갈 수 있도록 닦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닦고, 닦고, 닦아서 청정해지면 어느 순간 그 수에서 위빳사나 지혜가 익어서 힘이 찬 도지혜가 생겨 업장이 소멸됩니다.
수다원의 도라면 다시 태어났을 때 사악처로 가는 업장이 완전히 소멸되고, 사다함은 다시 태어나긴 하는데 욕계에 두 번은 오지 않습니다. 수다원 때부터 사악처가 없어지기 때문에 욕계에 사람과 신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사다함은 사람으로 태어나도 딱 한 번, 신으로 태어나도 딱 한 번이지 두 번째에는 욕계에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색계나 무색계로 갈 수 있겠지요. 범천으로 태어날 수는 있지만 욕계에는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나함은 욕계로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에 여러분이 수행하다가 아나함이 되고 아라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면 윤회는 끊지 못해 다시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나함은 인간이나 신이 아니라 범천으로 태어납니다. 사다함만 돼도 욕계에서 태어나는 업장이 한 번밖에 안 남고, 욕계에 태어날 수 있는 나머지 모든 업장이 소멸되며, 아나함이 되면 욕계에 태어날 업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욕계·색계·무색계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의 모든 업장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라한과 부처님입니다.
무상·고·무아를 아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제 아실 것입니다. 무상·고·무아를 모르면 틀림없이 갈애가 되고, 집착이 되고, 업이 생기고, 그래서 빙빙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상·고·무아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고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여 느낌에서 지혜로 넘어서서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a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