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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불이일언연설법 중생수류각득해


佛以一言演設法 衆生隨類各得解 (불이일언연설법 중생수류각득해)

붓다는 언제나 같은 말로 설법을 하시지만, 

듣는 중생쪽에서는 자기 능력에 따라 각자가 다르게 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흔히 붓다의 설법은 상대에 따라 바뀐다 하여 이를 對機說法(대기설법)이니 

또는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한다는 應病與藥(응병여약)이니 하고 부른다. 

이는 [법] 즉 진실이 가지는 보편성과 機(기) 즉 진실을 받아 들이는 특수성과 상관관계를 나타낸 

가장 대표적인 말이라고 해서 많은 분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과연 [법]이 [기]에 의해 변화 되는 일이 있을수 있는가. 그렇게 변형되는 것을 [법]이라고
부를수 있겠는가. 
 
"유마경" 에 나오는 제목의 말은 [기]를 우선시킨 [법]의 파악에 대해서 반성을 촉구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된다. 

 

붓다가 설하신 [법] 자체는 일찌기 한번도 때와 장소를 따라 또는 대중의 수준 여하에 따라 변용된 
일이 없었음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항상 일정한 것이었으며 변화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법]은 붓다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므로 붓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변용시킬
이유와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법]은 붓다의 출현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 곳에 붓다의 위대성이
있지만, 그것을 붓다의 의사에 따라 내용을 바꿀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붓다의 설법은
항상 一音(일음) 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들이는 중생들의 능력.상황.열의등은 일정치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열가지의 
집중력과 이해력을 보일 것이나, 어떤 사람들은 다섯가지나 셋의 집중력이나 이해력밖에는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붓다의 입에서 나온 가르침에도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 
이해에 차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水隨方圓之器(수수방원지기)라는 말이 있다. 같은 물도 그릇의 형태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세상의 理法(이법)은 일정해 있어도 받아들이는 쪽에 대소.다소의 조건이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리인 [법]을 각자의 능력껏 받아 들이게 한다는 견해는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측면도 있다.

 

우리는 몇천 아니 몇만권에 달하는 불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후세의 불교인들이 자기 역량대로
붓다의 법을 밝히고자 한 노력의 결정체이다. 정토신앙/법화신앙/화엄신앙등등은 같은 붓다의 법이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받아 들여진 좋은 본보기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이 깨달은 연기의 법이 너무나 깊고 묘한 것이어서 탐진치 삼독심과
무명에 가린 중생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느끼고 설교를 단념하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법에 나서게 된 이유는 붓다의 대자비심과 중생들에 대한 연민의 정 그리고 눈 밝고 
지혜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깨달은 법을 똑같이 깨달을 수 있을리라는 확신 때문 이었다.

 

위에서도 언급 하였지만 중생의 근기는 연못에 무수한 청·홍·백련이 떠 있거나 또는 잠겨 있듯이 

가지가지 양상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를 배려하여 그에 알맞는 다양한 점진적 체계적인 법문을 설하셨다. 

 

붓다는 처음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실 때에는 으례 베품의 덕(보시)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먼저 

가르치셨다. 그들이 보시의 진가를 이해를 한 다음에라야 계행. 인과법. 출가의 공덕등의 불교의 

기본적인 면을 말씀 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이런 원리들이 깊이 새겨진 다음에야 

사성제등의 보다 높은 단계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법해 주셨던 것이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행해졌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은 이후 대승불교에서

붓다 교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홍보, 인식되어졌다. 대승경전에서 자주 언급되는 근기론에 

기반을 둔 "응병여약 대기설법"은 붓다의 설법 방법이었던 점진적 설법의 원리를 응용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점진적이고도 체계적인 교설을 근기나 상황에만 따른 

대기설법으로 규정한 좁고 한정된 이해는 부처님 교설의 체계성(次第性 ; 차례성) 정립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이 되어 왔으며, 동시에 보편성 있는 신행 생활의 체계 확립을 약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부처님의 위대성을 도덕적 삶과 감화력의 측면에서만 찾고, 해탈·열반의 경지를 단순한 심적 평화의 

상태로 이해하며, 심지어 경전을 경시하거나 깨달음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난무하는 등의 부정적 현상들도 

기실 부처님 교설의 성격을 대기설법의 측면에서만 이해한 귀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연기의 진리인 부처님의 깨달음은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부처님 자신의 고백은 
물론 제자들과의 문답 속에서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전에 설해진 다양한 법문은 그렇듯 
어려운 깨달음을 중생에게 열어 보이기 위해 마련된 ‘방편 시설’이다. 방편은 ‘가까이 가 알아내게 
하다’ '가까이 다가간다' 는 뜻이므로, 그 속에는 초보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심심 미묘한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법과 율에서도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을 설정할 수 있다.”

거나, “나는 단번에 완성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에 의해 완성된 지혜은 획득되는 것이다.” 하면서, 

그것을 불법의 첫 번째 특징으로 꼽는 부처님의 말씀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 경전(아함경) 속에는 6근·12처 등 범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5온·4제·
12연기 등 성인이 깨달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설이 정교한 짜임새로 조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교설(법문)이 선·후 관계를 이루며 점차 깊어져 가는 이러한 점진적 설법의 구조야말로 무명에 쌓이고 
미혹한 중생에게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불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주목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뛰어난 몇몇 중생은 단박에 모든것을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중생들은 초등학교-중학교... 

빼기 더하기를 배우고 곱셈을 배우고 그리고 수학을 배우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설법이 아니라면 

심오하고도 어려운 불교의 최상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붓다의 점진적 설법과 그리고 불법의 체계적인 성취의 단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 [기] 에 
의해서 [법]을 해석하고 받아 들일려고 하는 경향이나 또는 모든 교설이 해탈과 직결된 한가지 
맛(一味.일미)으로서의 위상을 부여 받을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우리가 붓다의 설법 태도였던 점진적 
단계적 설법의 의도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대기설법의 뜻을 새롭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대기설법이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법문의 수준에 맞춰 법을 설하는, 그리하여 그의 수준을 점차 
향상시켜 끝내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점진적이고도 단계적인 방식을 표현한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다면 점진적 설법과 대기설법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상호보완작용을 하여 우리가 불법의 진리에 좀더 쉽게 다가갈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붓다는 처음 불교를 접하는 중생들에게는 늘 이러한 점진적 설법으로 교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교의 근본적인 점진적 설법이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요한 몇가지를 들어 본다면,  1)근본 가르침인 아함의 교설이 부파불교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난해하게 된 데다가 사변 철학적 주석이 부가된 점 2)대승불교의 사상이 [아함경]의 교설을 

소승이라 비하하며 배척한 점 3)그리고 불교가 중국화의 과정을 거치며 불립문자를 앞세운 돈오적인 

선종 가풍이 지배적인 불교 사상으로 정착된 점 등을 주된 불교 내적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그 역사성과 본래의 체계성을 대부분 상실, 초기 불교(아함경)를 배제한 
대승 중심의 불교로 정착 된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초기 불교 사상에 근거하여 발전·
완성된 것이므로, 그에 대한 몰이해는 불교를 지나치게 신격화.직관화.신비화.형상화 하여 불교 본연의 
모습을 가려 버린 결과를 초래 하였다는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근본 가르침인 [아함경]을 소승이라 폄훼하고 무시한 결과 대중적 신행 
체계를 정립할 수 있는 바탕마저 상실케 되었다. 설사 [아함경]을 익힌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한 
금언집의 일종으로 여겨 설법의 자료 정도로 활용할 뿐, 그 속에 설해진 법문을 실제로 닦아 가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처럼 붓다가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인 경험과  중생들의 현실에 입각하여 논리적 계성을 정립하고 있는
[아함경]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는 일반 불자들이 각자의 수준에서 깨달음을 추구해가는 신행 생활의 
길을 애초에 차단하는 폐해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 전래한 불교는 처음에는 교 와 선이 상호 갈등과 조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완적인 관계
였으나 선불교가 널리 세력을 얻게 되고 또한 한국으로 건너온 불교는 초기에는 교와 선이 상호
갈등하며 보완적이었으나 훗날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간화선(看話禪)이 널리 알려 지고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듯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교와 선을 마치 
상호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고 더욱이 불립문자를 뛰어 넘어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
(捨敎入禪)' 식으로까지 교에 대한 선의 우위성이 강조되는게 오늘의 불교의 현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교의 대립적 양상과 교에 대한 선의 우월성 주장이 이미 보조 국사가 지적했듯이 

‘문자만 따르는 미친 지혜(尋文之狂慧)’와 ‘고요만 지키는 어리석음(守默之癡禪)’을 오늘날에도 
노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의 폐해가 모두 불교의 근본 정신과 사상을 크게 훼손시킴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교를 경전적 지식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함에 따라, 불교의 근본일 수

밖에 없는 경전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부정적으로 취급당하는 자기 모순적인 행태가 일반화되어 

버렸다.

 

경전은 깨달음에로의 길을 제시해 주는 근본적이고 유일한 표지이다. 

그러하기에 역대의 조사치고 경전에 무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에는 

경전의 내용을 그저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 입문자가 익혀야 할 기초교리 정도로 비하시켜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경전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화두 지상 주의' '염불 지상주의' '기도 지상주의'등은 

교리에 대한 단순한 접근과 왜곡된 불교의 인식을 굳히는 부작용까지 초래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함경]의 중심 교설인 3법인·4성제·12연기 등은, 그것을 통하여 범부들이 성현으로 탈바꿈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는 깊은 이치의 법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가 직접 깨달은 내용으로 제시되는 교설들을, 제자들이 그것을 통해 깨달음의 눈을 열고 

해탈 열반을 성취한 법문들을 단순한 암기 대상쯤으로 치부하게 된 연유 역시, 교를 경전 사상이나 

학문으로 이해하고 선에 비해 열등한 가르침으로 격하하고 있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함 경전]은 중국적인 선·교 분립 이전의 인도에서 불교를 창시하시고 열반에 든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다. 

그 속에는 정(定)과 혜(慧)가 애초 하나의 체계로 통일을 이룬 붓다의 근본 교설이 온전히 담겨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반 불자들에게 신행 생활의 지침을 제시 하고자 할 때, 방대하고 복잡하여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적 
교설이나, 또는 화두참구만을 구가하는 선은 결코 적당 하지도, 용이 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그러한 교와 선에 다가서기 어려운 일반 불자의 신앙 생활은 끝내 기복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점진적이고 체계적이고 체험적인 아함 경전에 담겨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더욱더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근래에 들어 《아함경》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폭이 넓어져 가고는 있지만, 승단(강원, 선방)의 교육 
체계 속에 반영되어 있듯이 아직도 승려 사회에서는 뿌리깊은 대·소승의 차별 의식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그런 교육 체계를 익힌 승려가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어떠한 가르침을 베풀 것인가는 명약관화
한 일이며, 일반 신자는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아함경》을 익힌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한 금언집의 일종으로 여겨 설법의 자료 정도로 활용

할 뿐, 그 속에 설해진 법문을 실제로 닦아 가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처럼 경험적인 현실에 입각하여 점진적이고 논리적 체계성을 정립하고 있는 [아함경]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는 일반 불자들이 각자의 수준에서 깨달음을 추구해가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신앙 생활의 

길을 애초에 차단하는 폐해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불교는 초전기(初傳期)부터 기존 토착 신앙의 현세 구복적 성향을 포섭하는 양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조선조의 억불 기간에는 
산중 총림 불교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는 데 역량이 집중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조선 시대의 상류층의 생활 원리는 유교에 의해 대체되었고, 유교적 윤리 관념이 충족 시켜주지 못한 
중생들의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종교심은 불교에 의해 추구 되고 충족 되었지만, 교학의 침체와 전법 
교육 활동의 결핍 그리고 불교의 사상을 널리 펼칠 수 없었던 사회현실은 결국 토속적인 신앙과 결합

하여 기복화로 매볼되어 버렸으며 이는 결국 불교의 왜곡 및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불교는 사회를 정화, 계도하는 가치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내세와 개인적 안위를 기원하는 

비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종교로 변질된 것이었다.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불교의 기복화는 필연적으로 수행자·교화자 또는 스승으로서의 
승려의 성스럽고 거룩한 지위를 타종교의 사제와 같은 즉 신과 인간의 중계자나 또는 초자연적 힘들 
매개하거나 희생제를 주관하는 신관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불교 신자의 저조한 법회 참석율과 수행력의 약화, 그리고 대사회적 활동에 대한 미약한 관심은 

모두 불교의 기복화가 가져온 폐해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일어날 당시 브라만교의 기복적인 제사만능주의와 그로 기인한 사제 제일주의는 부처님의 
비판 대상 중의 하나였건만, 오늘날 우리 불교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행해지는 각종 제사 의례와 
그것을 진행하는 승려의 모습은 당시의 브라만교를 방불케 할뿐만 아니라 더욱이 승려는 앞에 서서 
자신들만의 언어로 복잡한 의례를 행해 나가고, 일반 불자는 뒤에 서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목탁만 
울리면 부리나케 절만 하는 모습은 더 이상 붓다가 온갖 어려움을 헤쳐가며 연민의 정으로 45년간 
중생들에게 말씀하신 불교의 참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신행의 기복화는 승.속의 괴리를 초래하고, 승.속의 괴리는 다시 신행의 기복화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지적한 경전의 폄하와 선종 중심의 수행 풍토, 합리적인 체계성을 갖춘 

[아함경]을 소승이라 비하 또는 외면하며 대승 경전을 우선시하는 대소승 분별의 오랜 전통 또한 
일반 불자들의 신행을 기복적인 차원에 머물게 한 요소로 작용 하였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교를 무시하다보니 경전의 내용을 중생들에게 가르치며 체계적으로 단계적으로 그들을 해탈의 
길로 끌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뛰어난 선수행을 쌓아 큰 스님 소리도 듣지 못하는 어중간한 많은 
승려들이 걸어가고 기댈곳은 결국 이기적인 중생들과 결합하는 지점인 기복불교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복불교’는 한국불교의 제반 문제점이 집약적으로 돌출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불교를 보고 당장 근본불교를 받아 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한국적인 상황에 억지로 갖다 맞춘다는 것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도 없다. 
아함보다 대승경전의 가르침이 보다 중생들에게 가깝게 다가오고 수승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한국 불교의 현실을 걱정하는 불자라면 기복불교에서 공덕불교. 작복불교로의 

전환과 나아가 아함경의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교설로부터 초기대승불교의 실천 법문에 이르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불자들의 신행과 어떻게 연결 시키느냐를 고민하는 곳에 

미래 한국불교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 행복 하십시요.
실론섬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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