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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붓다의 옛길-성스러운 고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 (道聖諦. 도성제)

붓다의 옛길-성서러운 고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 (道聖諦. 도성제. Dukkha Norodha Gamini  Patipada  Airya Sacca)


 

팔정도(八正道)의 세 가지 측면  

 

열반에 즈음하여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설하고 정해 놓은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장부 16. Mahaparinibbana-sutta)


이것으로 볼 때 붓다의 생활 방식과 종교 체계는 법과 계율로 구성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계율은 말과 육체적인 행위를 잘 길들여 도적적으로 뛰어나게 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규범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선행의 훈련 또는 도덕적인 훈련을 의미하는 계(戒)라고 알려져 있다.
 

법은 마음을 길들이는 인간의 정신적 훈련을 다룬다. 이것은 명상 즉 선정(定. 三昧)과 지혜의 수행이다. 


이 세가지 즉 계율, 선정, 지혜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 세 가지를 닦은 사람은 더 높은 정신 생활로, 어둠에서 빛으로, 격정에서 침착으로. 혼란에서 평정으로 갈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시대 붓다들의 분명한 가르침 속에 구체화되어 있다.


"어떤 악도 짓지 말고, 선을 닦아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 (법구경 183)


자주 인용되지만 볼 때 마다 새로운 이 구절은 청정과 해탈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붓다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달해 준다. 이 길은 일반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 


팔정도는 크게 계율, 선정, 지혜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을 삼학(三學)이라고 한다. 이 팔정도는 불교에만 있는 고유한 것으로서 불교와 다른 종교,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팔정도를 삼학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지혜 부분]
1. 올바른 견해 (正見. 정견)
2. 올바른 생각 (正思惟.정사유)


[계율 부분]
3. 올바른 말 (正語. 정어)
4. 올바른 행위 (正業.정업)
5. 올바른 생활 (正命. 정명)

 

[선정 부분]
6. 올바른 노력 (正精進. 정정진)
7. 올바른 주시 (正念. 정념)
8. 올바른 집중 (正定. 정정)


첫 설법에서 붓다는 팔정도를 언급하면서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했다. 그것은 두 극단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천하고 세속적인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해를 가져오니 한 극단이요, 고통스럽고 비천한 극단적 고행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해를 가져오니 또 다른 극단이다.


노래와 춤, 사치와 쾌락에 빠진 생활을 해 본 보살(깨닫기 전의 붓다)은 경험을 통해 감각적 쾌락이 인류를 진정한 행복과 해탈로 이글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고행자로서 그는 엄격한 고행을 하고 6년 동안 청정과 궁극적인 해탈을 쫓아 열심히 수행했지만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그것은 헛되고 무익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두 극단을 피해 도덕적.정신적 수행의 길을 따라갔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삼학으로 구성된 중도를 발견했다.


길이라는 말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관습적으로 길을 밟는다고 말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팔정도는 여덟 가지 정신적인 요소들을 말한다. 팔정도는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높은 단계에서는 동시에 기능을 하며, 순차적으로 차례 차례 따라가거나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낮은 단계에서조차도 각각의 모든 요소들에는 어느 정도 올바른 견해(정견)가 가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견해'는 불교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먼저 붓다의 말을 들어 보자.


"비구들아, 바로 네 가지(법)를 이해하지 못했고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와 나는 윤회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달려왔고,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해 왔다. 그러면 네 가지란 무엇인가? 계율과 선정, 지혜, 해탈이 그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아, 이 네 가지를 이해하고 통찰하여, 존재하려는 욕망을 근절 시키고, 새로운 생존으로 인도하는 것을 파괴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생존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부 16)


붓다는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계율이 뒷받침된 (계율을 두루 닦은) 선정은 많은 과보와 이익을 가져온다. 지혜가 뒷받침된 마음은 감각적 욕망의 도취로부터, 생종으로부터, 잘못된 견해와 무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장부 16)


붓다의 이러한 언급은 삼학을 닦는 기능과 목적을 설명해 준다. 해탈이란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악의 세 가지 근원적인 원인들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嗔痴. 탐진치)이 사라지는 생생한 경험을 의미한다. 이 근원적인 원인들은 삼학을 닦음으로써 제거된다.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최상의 청정, 완전한 정신적 건강, 모든 오염된 충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정신적 번뇌로부터의 해탈, 병으로부터의 자유는 다른 인간이나 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인간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붓다조차도 존재의 족쇄로부터 사람들을 풀어 줄 수 없다. 그도 단지 그들에게 풀려날 수 있는 길을 보여 줄 뿐이다.


설법들 속에서 세 가지 수행으로 언급되고 있는 계율, 선정, 지혜는 어느것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들 각각은 목표로 가기 위한 수단들이다. 하나가 다른 것에 독립해서 기능할 수 없다. 삼각대에 다리 하나가 없으면 넘어지듯이 삼학에서도 다른 두 가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하나마저도 기능을 할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서로를 지탱해 주며 함께 간다. 


계율 즉 절제된 행위는 선정을 강화시켜 주고 또한 선정은 지혜를 촉진 시킨다. 지혜는 사물에 대한 흐릿한 시야를 밝게 하여 있는 그대로 삶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혜는 삶과, 삶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교리와 계율 또는 앎과 행위 상호 작용 속에서 그 두 가지는 서로 성장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구성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손으로 손을 씻고 발로 발을 씻듯이, 행위는 지혜를 깨끗하게 해 주고, 지혜는 행위를 깨끗하게 해 준다." (장부 9)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단순한 사색이나, 실용적인 가치나 중요성이 없는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교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도들에게 삶의 여정이란 말과 행위, 사고를 깨끗이 하는 강력한 과정이다. 그것은 스스로 계발하고 스스로 정화한다. 그것은 실용적인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지 단순한 철학적 사색, 논리적인 추상 또는 단순한 생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그저 경전만 배우는 제자들에게 강한 어조로 경고 하였다.


"비록 신성한 경전들을 많이 암송한다 할지라도, 그것에 따라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경솔한 그는 다른 사람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다. 그는 수행장의 결실을 나누어 갖지 못한다."


"비록 경전을 조금밖에 암송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마음이 완전히 해탈되어 이후로는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는 수행자의 결실을 이룬다. " (법구경 19,20)


이러한 사실들은 무지로부터 완전한 지혜를 일깨우는 불교도들의 생활방식과 최상의 진리를 파악하는 방법은, 단순히 학술적인 지적 계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깨달음과 궁극적인 해탈로 인도해 주는 실용적인 가르침에 의존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준다.


붓다는 무정물보다 유정물에 더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존재의 비밀을 풀어 생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생의 영원한 진리인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그 목표를 성취했다.


그느 사성제를 찾는 사람들에게 사성제의 지식을 알리려 했으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강요와 위압은 그의 교수법과 거리가 멀었기 대문에 그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거나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이 맹목적으로 그를 믿도록 부추키지도 않았다. 그는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검토해 보기를 원했다. 그의 가르침은 또한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 고 권유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보고 이해하는 것이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었다.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기능 즉 마음을 닦아야 한다. 붓다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라."  (장부 11),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을 길들인다." (법구경 80) 고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모든 면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지칠 줄 모르는 활기와 결단력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 실험을 한다. 현대의 발견물들과 교통과 통신 수단은 놀랄 만한 결과를 낳았다. 이 모든 진보가 유익함을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전적으로 물질적이고 외부적인 것들이었다. 반면에 인간이라는 육체적.정신적 합일체 안에는 오랫동안 과학자들을 사로잡아 온 탐험되지 않은 놀라움들이 들어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실 과학자들이 개선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이 세계는 모든 점에서 변하기 쉬워서 존재는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의 인생은 늙음으로 우울해지고, 죽음으로 질식할 것 같고, 변화에 묶여 있다. 게다가 이러한 성질들은 마치 풀은 푸르고 키니네는 쓴 것처럼 고유한 것들이어서 모든 마법이나 과학의 힘으로는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변화하는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들은 그 변화를 알지만 그것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지 않고 무관심하게 이야기한다. 그 변화는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만, 그들은 윤회의 수레바퀴를 전속력으로 쫓아 번뇌의 바퀴살 사이에서 비틀리고 갈가리 찢어진다.


결국 과학자나 보통 사람들이, 행위가 매우 중요하고, 한시라도 빨리 성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지식을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불교에 관한 한 그들은 인생의 경주에서 열반이라는 불멸의 상을 받기 전에 아직도 더 많은 장애물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 미숙한 사람 들이다.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과학은 그다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과학에서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는 없다. 과학자에게  지식이란 점점 더 그를 중생으로 묶어 두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지식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지식이 아니다. 세상을 관조하고 모든 것을 바른 시각으로 수용하는 사람에게 인생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사는, 고도의 상상력으로 상상의 세계를 그저 그려 보거나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부터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는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진정한 지식을 판단한다. 이 지식은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이 지식은 정신적인 평화와 평정,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 데 유용한 것인가?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내인 즉 유능하고 성실한 선각자의 가르침이 필요 하다. 그의 명료한 시각과 깊은 통찰력은 인생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꿰뚫어서 모든 현상 밑에 놓여 있는 진정한 본성을 인식한다. 참으로 그는 진정한 철학자이며, 변화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한 진정한 과학자이다. 그는 그 의미를 사람들이 헤아릴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로 바꾸어 준다. 가장 심오한 진리란 진리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괴로움, 무아를 말한다. 


그는 더 이상 공포에 떨거나 무상한 사물의 매력에 강한 충동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더 이상 현상에 대해 뒤바뀐 시야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통찰력만이 가져다 주는 완전한 면역으로 그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붓다는 그러한 선각자이며, 해탈로 인도하는 그의 가르침은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그의 가르침은 구원을 가르치는 다른 가르침들과 다르다. 붓다는 신사이건 승려이건 자신의 해탈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외적인 혼란뿐만 아니라 내적인 혼란에도 빠져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붓다의 확실한 치료법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열심히 노력하고 계율을 잘 지키는 신중한 사람은 선정과 지혜를 닦아 혼란을 훌륭히 해결 할 수 있다. " (상응부 13)


아라한이 된 60명의 제자들에게 붓다는 맨 먼저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법을 설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보편적인 자비라는 탁월한 자질로 가득 차 있다. 


수행의 첫 단계인 계율은 이 자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나 약탈을 경계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겠는가? 왜 사람들은 가난하고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비 때문이 아니겠는가? 


불교가 가르치는 행위 규범인 계율은 나쁜 일을 경계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자비가 없어서는 안된다. 계율은 그 속에 사랑, 겸손, 관용, 연민, 자비, 다른 사람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포함된다. 선정과 지혜는 마음의 훈련과 관계가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팔정도 가운데 세 가지 요소가 불교도들의 행위 규범인 계율을 형성한다. 세 가지 요소란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을 말한다.


올바른 말이란 1) 거짓말을 경계하고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것, 2) 불일치와 부조화를 가져오는 이간하는 말을 경계하고 화합과 조화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 3) 거친 말과 욕설을 경계하고 상냥하고 고상한 말을 하는 것, 4) 잡담, 무익한 이야기를 경계하고 대신에 의미 있고 비난받지 않을 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란 1) 살생, 2) 도둑질, 3) 부정한 성적인 탐닉을 경계해서, 자비심을 닦아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가지고, 순수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올바른 생활이란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괴로움을 주는 잘못된 생활 수단을 버리는 것이다. 즉 1) 무기와 흉기 거래, 2) 도살을 위한 동물의 거래. 3) 사람 거래 (노예 제도), 4) 주류의 거래, 5) 독약의 거래를 경계하고, 비난빋지 않으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직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불교 윤리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붓다가 설한 행위 규범은 부정적인 금지 조항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다는 선한 의도로 선을 행하는 긍정적인 것이다. 이 도덕적 원리는 사람들 사이의 단합과 조화, 올바른 관계를 촉진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 행위 규범(계율)은 불교도들의 생활 방식에서의 첫 디딤돌이다. 이것은 정신 계발을 위한 토대이다. 선정 즉 마음의 집중을 닦으려는 사람은 계율을 잘 닦아야 한다. 계율은 정신적인 생활의 영양분이고, 정신적인 생활을 안정되고 고요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해탈로 가는 길의 다음 단계는 마음의 수련 즉 집중이다. 이것을 보통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팔정도 가운데서 올바른 노력, 올바른 주시, 올바른 집중이 여기에 속한다.


올바른 노력이란 1) 마음속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2)이미 일어난 악한 생각들을 버리고,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생각들을 닦고. 4) 이미 존재하는 선한 생각들을 촉진하고 유지하려는 끈기 있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노력'은 모든 악한 생각들을 빈틈없이 검토하고,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선하고 순수한 생각들을 닦아, 촉진시키고 유지하는 것이다.


계율을 닦아 언어와 육체적인 행위를 잘 다스리는 현명한 사람은 이제 그의 생각들 즉 정신적인 요소들을 잘 조사해서 생각들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올바른 주시란 1) 육체적인 활동, 2) 감각, 3) 마음의 활동, 4) 마음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이 네가지를 사념처(四念處)라고 한다).


팔정도의 여러 요소들이 서로 의존적이고 협동적이듯이, '올바른 주시'는 '올바른 노력'을 돕는다. 그래서 이 두가지가 함께 협동했을 때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이미 가지고 있는 선하고 유익한 생각을 닦을 수 있다. 자신의 언어, 육체, 정신적인 행위에 대해 방심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정신적 진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피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게으르거나 태만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는 [사티팟타나 숫타(Satipatthana-sutta)]의 설법에서 사념처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올바른 집중은 바람이 없는 곳에서 등불이 깜빡거리지 않듯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게 고정시켜 움직이거나 동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선정(집중 또는 정신적 수행)의 바른 수행은 마음과 정신적인 특성들이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많은 정신적인 장애물들을 만나지만 완전히 집중된 마음이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주시'의 도움을 받아 그 장애물들 즉 수행자를 방해하는 격정들을 떨쳐 버릴 수 있다. 완전히 집중된 마음은 올바른 시각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감각 대상들에 의해 미혹되지 않는다.


마음을 정복하여 더 이상 마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수행자는 진정한 지혜를 닦는다. 이것은 팔정도의 첫번째와 두 번째 요소이면서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바른 생각'은 평등심, 선한 의지, 자비 즉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을 포함한다. 이러한 생각은 종족, 계급, 씨족이나 신조(信條)에 관계없이 모든 중생들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타협적인 제한이란 없다. 이와 같은 고상한 생각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적이고 박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생각이 부족하다면, 그는 이해력과 통찰력을 갖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다. 냉정한 통찰력을 가지고 사물을 본다면 이기적인 욕망과 증오와 폭력은 진정한 지혜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올바른 견해'즉 진저한 지혜는 '올바른 생각'으로 가득차 있고 올바른 생각을 결코 잃어 버리지 않는다.


'올바른 견해'는 엄격하게 말해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 논의되었던 사성제 즉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올바른 견해' 즉 통찰력 있는 지혜는 지속적으로 명상에 잠기거나 조심스럽게 마음을 닦아 온 결과로 생긴다. '올바른 견해'를 갖춘 사람이 현상을 잘못 보는 일은 없다. 그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다.


주의 깊은 독자들은 이제 어떻게 계율, 선정, 지혜가 '마음의 해탈'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얻기 위해 함께 작용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떻게 마음의 진정한 수행을 통해, 생각과 말과 행동의 통제를 통해, 청정함을 얻게 되는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노력과 계발을 통해서이지 외적인 존재에게 빌거나 간청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붓다가 발견했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가 사용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던 법이 이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율과 선정과 지혜, 최상의 자유
뛰어나신 붓다는 이것들을 실현하였네
이렇게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하신
붓다, 악을 그치신 분, 스승, 눈뜨신 분은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시네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과학적인 지식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만족으로 불안해 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들은 명성, 부, 권력을 얻으려는 욕망과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으로 흥분되어 있다. 증오, 불신, 이기적 욕망, 폭력이 난무하는 이 고통스러운 세계에, 자비와 이해를 설하는 붓다의 가르침 즉 팔정도는 시의적절한 것이다. 붓다는 이렇게 설한다.


이것만이 길이다.
어느 길도
지견(知見)을 맑게 해 주지 못한다.
만약 그대가 이 길을 따라가 
마왕을 혼란에 빠뜨리면
모든 괴로움은 끝나 버린다.
나는 그 화살(탐욕 따위의 화살을 말한다)을 제거하는 법을 깨달아
그 길을 전하고 있으니
그대 스스로 항상 노력해야 한다.
여래는 오직 길을 가르칠 뿐
명상(집중과 통찰 둘 다를 말한다) 속을 거니는 사람은
마왕의 속박에서 스스로 벗어난다 

(법구경 274,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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