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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붓다의 옛길 - 올바른 견해(正見)

붓다의 옛길 - 올바른 견해(正見) 

 

"이 대양(大洋)이 오직 한 가지 맛, 짠맛만 지니듯이 이 법도 오직 한가지 맛, 자유의 맛만 가지고 있다. (Udana p.56)


붓다의 가르침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다시는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것(중부 26)을 분명하게 전해 준다. 붓다는 바로 이 자유를 향한 길을 가르쳐 준다.


갈림길에서 나그네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그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 주위를 돌아보다가 반갑게도 방향을 알려 주는 이정표를 찾아 낸다. 이 제 목적에 도달하려면 그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조심조심 열심히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윤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한 당황하게 된다. 붓다는 이정표처럼 이해와 자유로 가는 최상의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더 깊은 괴로움의 혼란 속으로 인도하는 엉뚱한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윤회하는 삶의 정글 속을 방황하는 동안 이전에 갖고 있던 습관으로 존재의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습관화된 행위나 사고 방식을 버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세속적인 생활의 번거로운 근심 걱정을 정복하고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얻으려면, 우리는 겉보기에 그럴 듯한 것들을 점차 멀리하고 모든 시대의 붓다들이 밝으셨고, 그분들이 가르쳐 주신 길 즉 옛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 옛길을 따라 한 발자국씩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마지막 목표인 자유에 이르게 된다. 자유를 단숨에 얻을 수는 없다. 바다가 점차적으로 깊어 지듯이 붓다의 교의와 계율 속에도 점진적인 훈련, 점진적인 행함, 점진적인 수행이 있다(증지부 200,Udaya p.54). 삶에서 생기는 불만족으로 인한 정신적인 번뇌를 제거해서 최상의 평화와 행복을 얻게 해 주는 붓다의 모든 실용적인 가르침과 교훈들은 팔정도 속에서 발견된다.


냉정한 통찰력으로 현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올바른 견해'는 인간 생활에 매우 필요한 것 같다. 아니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 같다. 현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사람들은 점점 더 물질적으로 변했고, 내면 세계인 정신적인 영역은 거의 무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균형을 잃은 것 같고, 심지어 근성이 나쁜 것처럼 보인다. 선전문구나 정치 선전은 인간의 마음과 삶을 기계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조정되는 꼭두각시가 되어 왔다. 

현대인은 현명한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갖가지 형태의 생각, 견해, 의견, 이념에 빠져있다. 그들은 영화, 텔레비젼, 라디오에 빠져 있다. 오늘날 신문, 라디오, TV, 몇몇 소설과 그림, 섹스 심리를 다루고 있는 문학, 섹스가 난무하는 영화들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정직과 이해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다.


말다툼, 증오, 사소한 싸움, 심지어 전쟁 조차도 탐욕과 미움에 의한 잘못된 사고 방식과 잘못된 견해의 결과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오늘날에는 인류가 삶의 혼란에서 벗어 나도록 안내 해 줄 '올바른 견해'가 요구된다.  또한 궁사가 자신의 화살을 똑바르게 하듯이 들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의와 정직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도 올바른 견해가 필요하다.


초기 경전을 보면 붓다는 한 쪽으로 치우친 스승이 아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의 길은 똑바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방종과 자기 고행, 상주(常住)와 단멸(斷滅), 우연론과 숙명론 또는 극단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 어떤 '주의'이든 모든 극단을 피했다. 그의 생활 방식은 첫 설법에서 그가 설했듯이 중도(中道)이다. 그의 가르침은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나 감정 없이 인류의 생활에 바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모든 가르침이 갖고 있는 능동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팔정도의 각각을, 그리고 팔정도 전체를 진지하게 인생에 적용 하도록 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번뇌로부터의 자유라는 유일한 목적을 얻기 위해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데 몰두 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사색, 철학적 연구, 합리화가 아니다. 


팔정도의 첫번째 요소인 '올바른 견해(正見)'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올바른 견해'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견해'는 오온에 대한 집착에 통찰력을 적용해서 오온의 참된 속성을 이해하는 것 즉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반성이며 자기 관찰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곧 거론하게 될 것이다.


'올바른 견해'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팔정도의 다른 일곱 가지 요소들은 이 올바른 견해에 의해서 인도되기 때문이다 (중부 117). 이것은 올바른 생각들이 유지 되도록 해주고, 사고들을 정리해 준다. 생각과 사고들이 분명하고 건전해져서 인간의 말과 행위 또한 적절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된다 . 또한 해롭거나 무익한 노력을 포기하고 '올바른 주시(正念)'을 하도록 '올바른 노력(正精進)'을 닦는 것도 이 '올바른 견해'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올바른 견해에 의해서 인도된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주시는 '올바른 집중(正定)'을 가져온다. 이와 같이 불교의 핵심인 '올바른 견해'는 조화를 이루는 팔정도의 다른 부분들이 서로 적절한 관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준다 (중부 117).


그런데 '올바른 견해'에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다른 사람들로 부터 정법을 듣는 것과 (예를 든다면 우파팃사(사리풋타)가 앗사지로부터 법을 들은 경우가 그 예이다) 이치에 맞는(지혜로운) 사유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중부 43). 첫번째 조건은 외부적인 것 즉 우리가 외부로 부터 얻는 것인 반면에, 두 번째 조건은 내적인 것으로 우리가 계발하는 즉 마음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듣는 것(옛날 사람들은 듣고 배워서 박식한 사람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주로 읽고 배워서 박식한 사람이 된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우리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므로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올바른 견해에 도움이 되는 것만 듣고, 바른 생각을 가로 막는 해롭고 악한 말들은 듣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조건인 이치에 맞는 사유는 계발하기가 더 어렵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법에서 종종 쓰이는 이치에 맞는 사유라는 말은 사물을 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꿰뚫어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근본적인, 또는 이성적인 사유'이다. 현명하지 못한 즉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는 연기를 생각하고 오온을 분석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항상 붓다는 그것들을 경계했다. 그러므로 이치에 맞는 사유를 계발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를 경계하는 일이 중요하다. '배움과 이치에 맞는 사유', 이 두 조건들이 함께 '올바른 견해'를 계발 하도록 돕는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단지 사물의 외적인 모습만 보는 피상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깊이 탐구해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고자 한다. 이것이 불교가 바라는 탐구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올바른 견해'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분석가는 사물을 여러 가지 성질로 분석한 뒤 그것에 대해 진술한다. 그는 그것을 적절한 순서대로 늘어놓아 모든 것이 분명해지도록 한다. 그는 사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해서, 그것을 단일한 것이라고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두드러진 특징에 따라 분류 한다. 그래서 관습적인 것과 최상의 진리가 섞이지 않고 이해될 수 있도록 한다.  


붓다는 최상의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고 분석적이었다. 과학자가 손발을 조직들로 분해하고 조직을 다시 세포들로 분해하듯이, 붓다도 합성되고 조건지어져 있는 사물들을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근원적인 요소들로 분해해서 얕은 생각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를 경계했다. 얕은 생각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서 사물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사물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인과(因果)를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올바른 견해'

를 통해서이다. 법에 대한 진리도 이러한 방법으로 파악되는 것이지 맹목적인 믿음이나 잘못된 견해, 사색 또는 추상적인 철학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이 법은 현명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증지부 232)라고 말한다. 그리고 단계적으로 지혜를 얻고 잘못된 견해를 경계하는 방법과 수단을 설명해 준다. '올바른 견해'는 가르침 전체에 스며 있다. 그것은 법의 전반에 퍼져 있으며 불교의 핵심 기능을 한다.

 
그러면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의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해하는 것이다.(장부 22, 중부 141)


인생의 본질에 대한 무지는 근본적으로 사성제에 대한 무지이다. 이러한 무지들은 중생들이 윤회에 얽매여 거듭 태어 난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너희들이나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윤회하고, 그 안에서 방황해 온 것은 바로 사성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성제를 이해하고 통찰 했을 때 존재 하려는 욕망은 뿌리 뽑히고 새로운 생존으로 인도하는 것은 파괴되어 더 이상의 생존은 없게 된다."  (장부 16, 상응부 431, 율장 231)


다섯 수행자들에게 했던 첫 설법 즉 초전법륜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성제에 관한 나의 진실한 지혜와 통찰이 명백하지 않은 한 나는 비할 바 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성제에 관한 나의 지혜와 통찰이 분명해졌을 때 나는 비할 바
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 말은 '올바른 견해'가 사성제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성제를 파악하는 것은 자연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직관적인 지혜를 지녔다.'는 말을 듣는다." (중부 43)


'올바른 견해'에는 세속적인 것과 세속을 초월한 것 두 가지가 있다. 도덕적인 인과 관계나 행위의 효력을 아는 일반 세속인들(깨달음의 네단계 중 아직 어떤 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지식이 사성제와 일치하는 경우에 그것을 세속적인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 이것은 그 이해가 아직 번뇌로 부터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므로 세속적이다. 이것은 '따라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네 단계중 어떤 한 단계를 얻는 순간에 경험되는 '올바른 견해'는 세속을 초월한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 이것을 통찰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올바른 견해와 성인(聖人)의 올바른 견해가 있다. 올바른 견해가 팔정도의 나머지 일곱 요소들과 더불어 완성에 도달하는 것은 세속을 초월한 높은 단계에서이다.


'올바른 견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인생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보편적 진리인 괴로움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성급하게 붓다의 가르침을 염세적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 즉 점점 더 감각의 만족을 갈망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괴로움이라는 관념'을 불쾌하게 여기고, 등을 돌려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괴로움이란 관념'을 싫어하고 사물에 대한 자신들의 편리하고 낙천적인 견해에 집착할 때조차도 자신들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인생의 불만족스러운 성질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종종 자신들의 본성을 드러내기를 꺼리고 그들의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털어놓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반면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분명히 원기왕성하고 걱정과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이라는 보편적인 질병에 대해 말하거나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사실과 똑같은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즐거움을 사랑하고, 자신들은 안전하며 마음이 만들어 낸 천국 속에 살고 있다고 상상한다.

 

사람들이 변화를 존재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알고 받아 들인다 하더라도 그들은 변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져 주는 매혹과 짜릿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이 바로 이 변화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잇고, 무상한 이 순환속에서 안전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비록 이 세계가 불확실하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만 들 수 있고, 그것에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무상을 몰아내기 위한 무자비한 투쟁이 끈기 있는 노력과 무익한 열정 속에서 계속된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 자신과 세상을 개선하고 인간 생활의 모든 면에서 더 좋은 상태를 확보하며, 위험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에는 진정한 행복도 진정한 휴식도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세상이 불만족스러운 성질 즉 고통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우리들의 마음의 눈 앞에 이른바 인생의 참모습을 가져다 주는 것도 바로 '올반른 견해'이다 . 이것은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낙천주의나 염세주의라는 문제가 기어들 틈 없이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aya)에 있는 9번째 경인 [삼마딧티 숫타(Sammaditthi-sutta)]를 살펴보면 '올바른 견해'를 얻는 방법을 설명하는 데는 16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줄일 수 있다.


1) 도덕적인 인과의 방법에 의한 설명
2) 사성제에 의한 설명
3) 음식에 의한 설명
4) 연기에 의한 설명


이 그것이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설명 방식은 거의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둘 다 일어나는 작용과 사라지는 작용, 다시 말하면 생존과 생존의 소멸이라는 똑같은 특지적 모습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물에는 네 가지가 있다. 1)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물, 2)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의) 접촉 (觸食. 촉식), 3) 의식(識食. 식식), 4) 정신적 의지 작용 (意思食. 의사식)이 그것이다. 여기서 경전에서 언급된 모든 방법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낮은 단계의 '올바른 견해'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인과 관계를 이해 하도록 촉구한다. 그것은 '십선업(十善業'과 '십악업(十惡業)'을 의미한다. 선한 행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가치가 있으며, 인간을 현재와 미래의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십선업은 '선한 행위의 길'이라고 불린다. 악한 행위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가치가 없고, 인간을 현재와 미래에 괴로움과 고통스러운 사건들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십악업은 '악한 행위의 길'이라고 불린다.


붓다는 여러 곳에서 다음과 같이 행위의 심리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비구들아, 내가 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의지 작용이다. 사람들은 의지를 가지고 몸과 말과 마음을 통해 행위한다." (증지부 415)


생각 있는 사람들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인과 관계의 이해'이다. 도덕적인 인과 관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그 반대의 것도 바로 자신의 행위(업.業)라는 것을 잘 안다. 그는 사람들이 이 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은 전생이나 이 생에서 개인이 선하고 악한 행위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자신의 성격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미리 결정된다. 자신이 선택한 생각과 행위 즉 습관이 자신을 형성한다. 그래서 그는 이 신비스러운 우주 속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진보를 촉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세속적인 수준의 '올바른 이해'는 이러한 형태를 통해 연기와 사성제로 가는 길을 열어 준다. 

 

이제 사성제를 통해서 '올바른 견해'를 얻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앞에서 사성제가 오온과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성제는 오온밖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다. 오온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사성제를 깨닫는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 되었던 오온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른바 존재를 늘 변하는 오온으로 나눈 붓다의 분석은 온(蘊)의 집합속에는 영속적인 것 즉 영원히 보존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 준다.


변화 즉 무상은 현상적인 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이다. 우리는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이것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오온은 결합되어 있고 조건지어져 있다. 그러므로 늘 원인과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의식 또는 마음과 마음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하듯이 비록 속도가 느리긴 해도 육체도 순간순간 변한다. 무상한 오온을 무상하다고 바르게 보는 사람은 '올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상응부 51)


붓다는 오온의 변화하는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 탁월한 비유법을 사용했다. 그 육체(色.색)를 물결에 비유했고, 감각(受.수)를 물거품에, 지각(想.상)을 아지랑이에 , 의지적 형성력(行.행)을 파초(芭焦)에, 의식을 허깨비에 비유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비구들아, 어떤 실체가 물결,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허깨비 속에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비구는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낮은 것이든 높은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어떠한 물질적 형상도, 올바른 사유로 보고 명상하며 조사한다. 이와 같이 보고 명상하고 조사한다면, 그는 이 물질적 형상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실체가 없고 본질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구들아, 어떤 실체가 물질적 형상 속에  존재할 수 있겠느냐?"


붓다는 나머지 오온의 네 가지 요소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비구들아, 어떤 실체가 감각, 지각, 의지적 형성력, 의식 속에 있을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우리는 오온을 분석함으로써 좀더 심오한 사고를 하게 된다. 통찰로 알려져 있는 '올바른 견해'가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단계에서이다. 오온의 본성이 무상, 괴로움, 무아라는 세 가지 특성으로 파악되고 보이는 것도 이 통찰을 통해서이다. 이것을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구들아, 오온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이다. 괴로움인 것은 무엇이든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아니다. 이와 같이 완전한 지혜(正慧.정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완전한 지혜로 있는 그대로를 보고, 마음에 집착이 없어 번뇌로부터 초연한 사람, 그는 해탈한 사람이다." (상응부 44)


나가르주타(Nagarjuna)는 이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다.


"아트만(我), 자아 또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을 때, '나의 것'이라는 개념 또한 사라진다.
그러면 나의 것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Madhyamika-karika)


오온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인 것은 아니라 오온을 만들어 낸 원인과 조건 또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이다. 붓다느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비구들아, 물질적 형상, 감각, 지각, 의지적 형성력, 의식은 무상하다. 이 온들을 일어나게 한 원인과 조건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 또한 무상하다.
비구들아, 무상한 것으로부터 일어난 온들이 어떻게 영원하겠느냐?
물질적 형상... ... 의식은 괴로움이다. 이 온들을 일어나게 한 원인과 조건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 또한 괴로움이다.
비구들아, 괴로움에서 일어난 온들이 어떻게 즐겁고 유쾌하겠느냐?
비구들아, 물질적 형상... ... 의식은 무아이다. 이 온들을 일어나게 한 원인과 조건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 또한 무아이다.
비구들아, 무아에서 일어 난 온들에 어떻게 자아가 있겠느냐?
비구들아, 이와 같이 보는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적 형상, 감각, 지각, 의지적 형성력, 의식에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는 그런 마음을 통해 그는 초연해 지고, 초연해짐을 통해서 해탈한다.
해탈 속에서 자신은 해탈했다는 인식이 떠 오른다. 그리고 그는 '탄생은 소멸되었고, 청정한 삶은 이루었고,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며, 더 이상 와야 할 것이 없다(온들의 지속성이 더 이상 없다. 즉 더 이상의 탄생은 없다는 뜻이다)'는 것을 안다." 

(상응부 23)


무지의 소멸에 의해서, 지혜에 의해서, 욕망의 소멸에 의해서, 더 이상의 생존 즉 더 이상의 윤회는 없다. (중부 43)


우리는 시야가 흐려져서 항상 사물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입견과 탐욕, 혐오, 좋아함과 싫어함 때문에 우리는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들이 가진 각각의 객관적인 성질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기루와 허깨비를 쫓아 다닌다. 감각 기관들은 우리들을 기만하고 잘못 인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고, 사물을 보는 우리들의 방식도 왜곡된다.


붓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 가지 전도(顚倒. 상전도想顚到, 심전도心顚到, 견전도見顚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지각의 전도, 사고의 전도, 시각의 전도이다. 이 전도에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은 엉뚱하게 지각하고, 생각하고, 보게 된다.


1) 그는 무상함 속에서 영원함을 지각하고, 2) 불만족 속에서 만족을(괴로움 속에서 편안함과 행복을), 3) 무아 속에서 자아를(영혼이 없는 곳에서 영혼을), 4) 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지각한다.


그는 지각에서처럼, 생각하고 보는데서도 전도에 빠진다. 이와 같이 각각의 전도는 네 가지 방식으로 작용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고 시야를 흐리게 해서 혼란에 빠뜨린다. 이것은 현명하지 못한 숙고 즉 이치에 맞지 않은 사유에서 기인한다. '올바른 견해'만이 이 전도를 제거하고, 사람들이 모든 현상을 뒷받침하는 본성을 인식하도록 도와 준다. 사람들이 먹구름 뒤에서 환하게 나타나는 보름달처럼 진정한 지혜로 빛나게 되는 것은 전도와 곡해의 안개 속에서 벗어날 때이다.


붓다는 회의론자들에게 의심스럽거나 질문할 만한 것은 자유롭게 의심하고 질문하라고 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밀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비구들아, 여래에 의해 공포되고 제정된 교의와 계율은 숨겨져 있을 때가 아니라 밝은 곳으로 가져왔을 때 빛난다".(증지부 283)


그리하여 제자들은 교리 문제에 대해서 붓다에게 질문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예를 들면 캇차야나(Kaccayana)는 붓다에게 다가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올바른 견해'는 얼마나 먼 곳에 있습니까?"
"캇차야나야, 이 세계(존재)는 대부분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견해와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세상(오온)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
캇차야나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생각을 쫓아서 습관적으로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집착
한다. 성자(아라한)는 탐욕스러운 생각을 쫓지도 않고, 감각적인 욕망의 대상에 습관적으로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자아(영혼)이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성스러운 제자는 분명히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의도움 없이 스스로 그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캇챠야나야, 올바른 견해는 멀리 있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한 극단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도 또 다른 극단이다.
캇차야나야, 여래는 이 두 극단을 피해 중도에서 법을 가르친다. 무지에 의해서 의지적인 형성력이
일어나고, 의지적인 형성력에 의해서 의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이 일어난다.
무지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서 의지적인 형성력이 소멸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상응부 17)


이제 실용적인 목적에서 우리가 남자, 여자 또는 개인이라 부르는 이 존재는 정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변하는 상태에 있는, 운동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확실해 졋다. 인생과 인생에 관계된 모든 것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나라는 존재를 육체적.정신적 집합체의 단순한 연속이라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 즉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게 된다. 


우리는 '올바른 견해'를 통해서 모든 현상적인 존재가 인과 관계로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 즉 각 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고 그 존재는 그 조건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나, 영속적인 영혼의 실재, 자아의 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아(小我)나 대아(大我)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사성제에 대한 이해는 오온을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히 통찰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오온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라고 봄으로써 점점 더 분명해 진다. 그래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존재란 오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라고 거듭해서 말한다. 제자들이 어떻게 오온의 본질을 깨달아 마음의 해탈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많은 예들이 [장로게. 테라 가타(Thera-gatha)]와 [장로니게. 테리 가타(Theri-gatha)]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밋타 칼리(Mitta Kali)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그녀의 경험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숙고함으로써
나는(번뇌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었네
그리하여 붓다의 말씀은 완성 되었네 (Theri -gatha 96)


위에서 보았듯이, 육체적. 정신적 존재를 구성하는 이 온들은 끊임없이 원인과 결과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이 온들은 끊임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파도처럼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지속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거친다. 인생이란 참으로 끊임없이 변하면서 흘러가는 시냇물에 비유될 수 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변화에 대한 교리의 요지는, 존재를 조건짓고 있는 모든 구성 요소들은 하나의 흐름이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대단히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불변하는 실체로 여긴다. 그들은 그것들이 일어나고 부서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단일한 것으로 간주해서 그것을 덩어리나 전체로 본다.


"비구들아, 다양한 방식으로 자아를 생각하는 고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나 오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자아로 생각한다. 법을 듣지 못한 중생은 육체를 자아라고 생각하고, 자아는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 육체는 자아에 포함된다, 자아는 육체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감각, 지각, 의지적 형성력, 의식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자아가 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몸과 마음, 그리고 마음이 투영된 외부 세계를 전체적인 것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결합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전체'라는 것에 대해나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물을 흐름이나 운동으로 보지 못하면, 그들은 결코 붓다가 설한 무아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성급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이유이다.

 

자아 또는 영혼과 같은 영속하는 실체, 불변하는 본체가 없다면, 무엇이 현재나 미래에 행위의 결과를 경험하게 되는가?"


서로 다른 두 경에서 (중부 19, 상응부 103)에서 이 심각한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상세히 오온의 무상함을 설명하여 어떻게 오온에는 자아가 없고, 어떻게 '나'와 '나의 것'이라는 착상이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자 한 비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을 했다.


'물질적인 육체도 내(자아)가 아니다. 감각도 내가 아니다. 지각도 내가 아니다. 의지적 형성력도
내가 아니다. 의식도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없이 지은 행위(業)의 결과는 무엇이 받게 되는가?'


붓다는 그 비구의 마음을 읽고서, 그 질문은 요점을 벗어났다고 말한뒤 비구들이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인 것을 이해하도록 했다.


"행위를 한 자가 그 행위의 결과를 경험하는 자와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한 자와 그 행위를 경험하는 자는 서로 다른 둘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증지부 70)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인생이란 육체적.정신적 작용의 흐름 또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에너지의 흐름이어서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행위의 결과를 행위자 자신이 경험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생의 연속성 즉 사건의 연속인 경험의 지속성이 상실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아기는 청년과 같지 않고, 청년은 어른과 같지 않다. 그들은 같지도 않고 전혀 다른 사람도 아니다. 단지 정신적.츅체적 작용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행위를 하는 자는 없고
그 결과를 경험하는 사람도 없네
그저 현상만이 흘러갈 뿐
이것만이 '올바른 견해'일세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해답은 이 육체적. 정신적 작용 속에 '자아'나 '영혼'의 형태를 띈 '나'와 '나의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시각, 지각, 경험 따위는 있지만, 그것들 너머에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나 영혼은 없다는. 그것이 전부이다.


이 장을 마무리 짓기 전에 '무아의 교리'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제기한 도전적인 질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의 무아라는 말은 이른바 자아에 정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만약 자아가 없다면 어떻게 무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들은 자아와 무아를 상대적인 말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붓다가 말하는 무아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붓다는 자아에 상반되는 어떤 것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붓다는 이 두 단어를 나란히 놓고 "이것이 자아레 반대되는, 내가 말한 무아이다."라고 밀하지 않았다. 무아(anattan)라는 말에서 접두어 an 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는 단순히 자아가 없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자아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붓다는 그 자아에 접두사 an 을 붙임으로서 그것을 간단히 부정했다. 붓다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내부에는 자아나 영혼이라는 개념이 깊이 뿌리 내려 있었기 때문에, 그 는 학식 있는 사람들, 변증론자들, 쓸데없이 따지는 논쟁자들의 자아에 대한 심각한 질문에 상세히 설해야 했다. 붓다의 수천 가지 설법이 기록되어 있는 경장은 주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 때문에 대단히 방대해졌다. 독자들이 그 설법들을 주의 깊게 읽으면, 자아에 대한 난처한 질문과 관게된 붓다의 대답과 설명이 왜 긴 설법으로 전개되어 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붓다의 설법에서 볼 때 가장 높은 단계의 '올바르 견해'는 단순히 모든 잘못된 견해 즉 환상과 전도를 피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아의 개념이나 개체가 상주한다는 믿음 때문에 그러한 환상과 전도가 일어난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온의 이해를 통해, 즉 존재의 본성을 이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사성제에 대한 이해가 점점  분명해 진다.


붓다가 설한 무상과 괴로움의 교의는 인도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찬도가야(chandogava]와 같은 초기 우파니샤드(Upaisad)에서 우리는 "자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사람들은 슬픔(의 세계)을 건너간다."와 같은 표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인도의 사상가들을 당혹케 했던 것은 불교의 '무아론'이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믿음에 너무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붓다가 자아를 부정하고 그에 반대하는 설법을 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종교와 철학 속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중심 개념인 자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아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슴없이 붓다를 허무주의자라고 불렀다. 자아 또는 영혼이 환상이라는 인식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을 그렇게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다. 무아론은 세계의 종교와 철학사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새로운 선에서 출발했고, 인간이 풀어야 하는 가장 심오한 문제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다르었다는 점이다. 불교는 줄곧 미신에 사로잡힌 정신과 심오한 정신 둘 다를 그렇게 완전히 장악하고 지배해 온 위대한 영혼론(자아론) 전체를 쓸어 내 버렸다. 불교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이나 크고 작은 신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 생애에서 혼자 힘으로 각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우파니샤드처럼 불교도 지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신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에 대한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교는 거기에다 광범위하고 어마어마하고 측정할 길이 없는 지혜와 청정, 예의, 정직, 평화 그리고 보편적인 사랑(자비)의 필요성을 추가했다." (T.W. Rhys Davids, Hibbert Lectures,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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