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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1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1


부처의 가르침, 그 핵심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Cattari Ariya-saccani;四聖諦)에 드리워져 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바라나시 근교의 이시빠따나(오늘날의 사르나트)에서 옛 동료인 다섯 고행자에게 해준 처음 설법(初轉法輪)에서 설명되었다.  

 

우리가 원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설법에서는 네 가지  진리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초기 불교 문헌의 수없이 많은 곳에 등장하고 있다. 거기에서 엄청난 양의 세부  항목과 함께 여러 다른 형태로 자꾸자꾸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 문헌들과  해설서들의 도움을 받아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연구한다면 부처의  기본 가르침의 진정한 장점과 정확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둑카Dukkha(苦)[각주1]
2. 생겨남(Samudaya;集), 둑카의 발생 또는 근원
3. 적멸(Nirodha;滅), 둑카가 그침
4. 길(Magga;道), 둑카가 그치도록 인도하는 길


[각주1] 지은이는 아래에 기술한  이유로 이 용어의 영어 상당어를 제시하고 싶지 않다. 
<역주> 옮긴이 역시  지은이의 뜻을 존중하여 '苦'라는 한역어를 직접적으로 사용치 않을 것이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苦)


"첫 번째 거룩한 진리"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으레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Dukkha-ariyasacca;苦聖諦)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 의한다면 삶이 괴로움과 고통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된다고들 한다. 그 번역과  해석 모두가 아주 불충분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가 염세주의라고 여기도록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수식어와 멋대로 쉽게 번역하고 피상적으로 해석하는 것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불교는  염세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어느 편이냐하면 불교는 사실주의이다. 삶과 세계에 대하여 사실주의의 관점에 서있다. 불교는 대상을 객관적[각주2]으로 바라본다. 불교는 당신을 바보의 천국에 살도록 거짓으로 달래지 않으며 갖은 허구적 공포와 원죄로 겁주고 괴롭히고  하지 않는다. 

 

불교는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을 둘러싼 세계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완전한 해방과 평화, 안정, 행복의 길을 보여준다.

 

[각주2] <역주> 여기서 '객관적'이란 말을 뜻하는 'yathabhutam'의 한역은 '如實'이다.  그 뜻은 '있는 그대로',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그 자체로서'이다. 우리말  가운데 '제대로'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 들어맞는다. 앞으로 자주 등장  할 '객관적'이란 말 모두가 이런 뜻을 가진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느껴지는 대로를 뜻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라고 한다. 그것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어디까지나 자기 틀로 왜곡해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표현으로 "해가 떠오른다"고한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가 돌아 해가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뱀을 징그럽다고 느끼고,  악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뱀은 그저 뱀일 뿐이며, 생태계에서 없어서는  않되는 생물이다.  '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서', '여실히'  보는 것은 이와 같은 자기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가진 편견이나, 인간이라는 종種의 인식 특성이 가진 편견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의사는 병을 중대하게 과장하여 모두의 희망을 꺽어 버리기도 한다. 다른 의사는 병이  없으며 치료도 필요치 않다고 어리석게 단언하여 환자를 거짓 위안으로 속인다. 당신은 첫 번째 의사를 비관론자 두 번째 의사를 낙관론자라고 부를 것이다. 둘다 똑같이 위험하다. 그러나 세 번째 의사는 증상을 정확히 진단하여 병의  원인과 특성을 알아내고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아 일련의 치료 과정을 용기있게 실행한다. 그렇게 해서 환자를  구한다. 부처는 마지막 의사와 같다. 그는 인간세의 병에 대한 현명하고 과학적인 의사(Bhisakka 또는 Bhaisajya-guru)이다.

 

빨리어 단어  둑카dukkha(또는 산.du kha)가  '행복'이나 '안락', '편안'을 뜻하는 수카sukha(樂)라는  단어에 반대되며, 그 일상적인 용법이 '괴로움'이나 '고통', '슬픔', '비참함'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첫 번째 거룩한  진리"로서의 둑카라는 용어는 삶과 세상에 대한 부처의 견해를  대표하는데, 보다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녔으며 엄청나게 넓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에서의 둑카라는 용어가 '괴로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히 인정된다. 그러나  거기에다 '불완전', '일시적임', '헛됨', '견고치 않음' 같은 더 깊은 관념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둑카라는 용어의 전반적인 개념을 수용하는 단어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편하게 번역하여 불충분하고  틀린 관념을 갖게 하는  것보다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

 

부처는 고통이 있다고 말하면서  삶의 행복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승려들뿐만 아니라 평신도에  대해서도 물질, 정신 두 가지 모두에 걸친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부처의 설법을 담고 있는 다섯 빨리원전 "모음집"(니까야)의  하나인 《앙굿따라-니까야Anguttara-nikaya》(增支部)에 보면 행복(sukhani)의  목록이 있다. 

 

가정생활에서의 행복과 출가자(沙門)의 행복, 감각적 쾌락의 행복과 자제의 행복, 집착하는 행복과 집착을 여의는 행복, 육체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둑카에 속한다. 심지어 고도의 명상수행을 해서 도달하는 선정禪定(무아경;dhyana)이라는 아주 순수한 정신적 경지마저 둑카에 속한다. 

 

선정은 그  단어가 수용하는 의미상 고통이 드리운 어떤 그늘에서도 헤어난 것이며  잡스럽지 않은 행복으로 기술되기도 하는 경지이다. 뿐만 아니라 유쾌한 것(sukha)과 불쾌한 것(dukkha)의 두 감각 모두에서 벗어나, 오로지 순수한 평온함과 각성이 있는 선정의 경지, 이런 아주 높은  경지까지도 둑카에 속한다. 

 

《마지마-니까야》(역시 다섯 원전의 하나)의 한 경전에서 부처는 이 선정의 정신적 행복을 찬양한 다음에 그것들이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고, 둑카이며, 변화하는 것'(anicca dukkha viparinamadhamma)이라 말한다. 분명히 둑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주의하자. 일반적인 말뜻대로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둑카가 아니고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둑카'(yad aniccam tam dukkham)이기 때문에 둑카인 것이다.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2


부처는 사실주의적이고 객관적이었다.  그는 삶과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데 있어서 세 가지를  명확히 이해해야 된다고 말한다. ⑴매력이나 즐거움(assada;樂味), ⑵바라지 않는 결과나 위험 또는 불만족(adinava;過患), ⑶자유나 해방(nissarana;出離)이 그것이다. 

 

당신이 쾌활하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 자꾸자꾸 그 사람보는 것을 즐기게 되어, 그 사람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얻어내게  된다. 이것은 즐거운 것이다.(樂味) 그것은 경험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 자신과 그 사람의 매력 자체가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듯, 이 즐거움은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다.[각주1] 

 

시절이 바뀌어 그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그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되면 슬퍼진다. 이성理性을 잃게 되고 평정을 잃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리석게 행동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해로운 것이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환상의 위험한  측면이다.(過患) 이 또한 경험적 사실이다. 이제 당신이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자. 당신이 완전히 초연하다고 하자. 그것은 자유이며 해방이다.(出離) 이들 세 가지는 삶의 모든 즐거움에 있어서 진실이다. 

 

[각주1] <역주> 여기서 '늘  그러하지 않다' 대신에 '영원하지 않다' 라고 옮긴다면 '영원한' 어떤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불변의 영원한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둑카의 한 원인이다. 앞으로 '영원한' 이란 말은 되도록 피해 갈 것이다.

 

이로써 둑카라는 것이 염세주의나 낙관주의적인 문제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그와 달리 둑카는 고통과 슬픔뿐만 아니라 삶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것들에서  벗어나는 것까지도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만족을 완전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해방이 가능하다. 이 문제에 대해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 즐거움이라고, 그것의 불만족이 불만족이라고, 그것들에서 해방되는 것이 해방이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이해치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저들 스스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치 않다. 또  그렇게 하도록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능치 않다. 또 그들의 교육에 따르는 사람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치 않다.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은 즐거움이다, 그것의 불만족은 불만족이다. 그런 것들에서 해방되는 것이 해방이라고 있는 그대로 이해했다고 하자. 그런다면 저들  스스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교육에 따르는 사람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둑카의 개념은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된다. 즉, 


⑴일반적인 괴로움으로서의 둑카(dukkha-dukkha;苦苦), 
⑵변화가 만들어 내는 둑카(viparinama-dukkha;壞苦), 
⑶조건에 따른 상태로서의 둑카(samkhara-dukkha;行苦)가 있다.


태어남·늙음·병·죽음(生老病死), 싫은 사람 그리고 싫은 상태와 관계를 맺는  것(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좋은 상태와 헤어지는 것(愛別離苦),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苦), 통한, 비애, 고통,―이렇게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의 온갖 형태가 일반적인 괴로움으로서의 둑카(苦苦)에 속한다.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상태는 영원치 않다.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곧 변화하거나 나중에라도 변화한다.  그것이 변할 때 고통, 괴로움, 불행을 만들어낸다.  이 흥망성쇠는 변화가 만들어 내는 고통으로서의 둑카(壞苦)에 속한다.


위에서 언급한 둑카의 두  가지 형태는 이해하기 쉽다. 아무도 그것을 논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의 이런 측면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늘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에 따른 상태,  즉 둑카의 세 번째 측면(行苦)은 "첫 번째 거룩한 진리"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being)니 '개인'이니 '나'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분석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니  '개인'이니 '나'니하고 부르는 것은 늘 변화하는  육체적, 정신적 힘이나 에너지의 결합체일 따름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 무리", "다섯 가지 모임"(pancak-khandha;五蘊)으로 분류될 수 있다. 부처는 '간단히 말해서 이들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取蘊)이 둑카이다'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서 부처는 둑카를 다섯 가지 모임으로서 뚜렷하게 정의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둑카란 무엇인가?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이 둑카라고 말해야겠다.' 
여기서 둑카와  다섯 가지 모임은 다른  것이 아님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다섯 가지 모임 그 자체가 둑카이다. 우리는 이른바 '존재'라고 하는 것을 구성해내는 다섯 가지 모임에 대한 개념을 좀 가지고 있을 때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3


다섯 가지 모임(오온五蘊)[각주1]


그 첫째는 "물질의  모임"(Rupakkhandha;色蘊)이다. 이 "물질의 모임"이란 용어에는 전통적인 "사대 원소"(cattari mahabhutani;四大), 즉 고체의 성질(地), 액체의 성질(水), 열(火), 운동성(風)이 포함되며 "사대 원소에서 유래한 것"(upadaya-rupa;所造色)도  역시 포함된다. 

 

"사대 원소에서 유래한  것"이란 용어에는 우리의 다섯  가지 물질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그리고 신체와 거기에 대응하는 외부세계의 대상들, 즉 시각적 형상, 소리, 냄세, 맛, 그리고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포함되며 그리고 또한  마음대상의 영역(處)인 어떤 생각이나 관념이나 개념들(dharmayatana;法處)이 포함된다. 그래서  안팎을 막론하고 모든 물질 영역은 "물질의 모임"에 속한다.

 

[각주1] <역주>  흔히들 오온五蘊이라고 하면 '색수상행식色受受想行識' 이라고 연달아 말하면서, '色에  의하여 受가 있고, 受에 의하며 想이 있고, ....., 行에  의하여 識이 있다', 이렇게 차례차례 생겨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각각의 "모임"(蘊)들은 차례로 연기緣起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일어난다.

 

이어질 내용에서 보게 되겠지만  受想行識 모두가 여섯  가지 외부현상(六境)의 하나와 대응되는 여섯 가지 감각능력(六根)중의 하나가 접촉해서 제각기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행위가 나뉘어져 있다고 느끼지 않듯이  "다섯 가지  모임", 즉 오온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오취온五取蘊)이다.

 

오취온(pancu-upadana-kkhandha)은 오온에 욕탐이  있는 것으로서, 오온과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 '취온取蘊''라는 술어는 원어의 문법적  의미상 "取에 속한 蘊'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오취온은 '취에 속한 온이 다섯 개'라는 뜻으로서 각각 별개의 오온이 집착(upadana;取)에 의해서 한  몸으로 통합된다는 의미이다. [고익진, 같은 책, 88~91쪽]

 

둘째는 "감각들의 모임"(Vedanakkhandha;受蘊)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들이 이 무리에 속한다.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또는 그도 저도 아니거나 간에 육체적, 정신적 기관들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경험하는 것이 이것에 속한다. 그것들은 여섯 가지다. 눈이 시각적 형상에 접촉하여 경험되는 감각, 귀가 소리에,  코가 냄새에, 혀가 맛에, 몸이 만져서 느낄 수 있는 대상에, 마음(불교철학에서 여섯 번째 능력)이 마음의 대상이나 사상이나 관념에 접촉하여 경험되는 감각이 그것이다.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이 이 무리에 속한다. 


불교철학에서 "마음"(manas;意)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한마디하는 것이 여기서 유용할  것 같다. 마음은 물질에 반대되는 류의 정신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거의 모든 다른 체계의 철학과 종교는 정신이 물질에 반대된다고 받아들이는데, 불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각주2] 마음은 단지 눈이나 귀 같은 감각능력이나 감각기관(indria;根)의 하나일 따름이다. 

 

마음은 다른 어떤 능력과 마찬가지로 조절하고 발달시킬  수 있으며, 부처는 이 여섯 능력들을 조절하고 발달시키는 가치를  아주 여러 차례 이야기한다. 능력들 가운데 눈과 마음 간의 차이점은 전자가 색깔과 시각적 형상의 세계를 감각하고 후자가 관념과  사상과 정신적 대상들의 세계를 감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영역들을 각기 다른 감각으로 경험한다. 우리는 색깔을 들을 수 없지만 볼 수는 있다. 또한 소리는 볼 수 없지만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을 가지고 시각적 형상, 소리, 냄세, 맛, 만져서 느낄 수 있는 대상들의 세계를 각기 경험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의 한 부분씩만을 대표하는 것이지 전체적인 세계가 아니다

 

사상과 관념은 어떠한가? 그것들 역시 세계의 일부분이다. 사상과 관념은 눈이나 귀, 코, 혀, 몸의 능력으로 감각, 즉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능력으로 수용된다.  그것이 마음이다. 그런데 사상과  관념은 이들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능력이 경험하는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사상과 관념은 육체적 경험에 의존하며, 그 조건에 따른다. 그래서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른 감각능력으로 소리나 다른 능력으로 경험한 어떤 다른 것들로 유추하지 않고서는  색깔에 대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세계의 한부분을 형성하는 사상과 관념은 육체적 경험에 의하여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 조건을 따르고,  그리고 마음이 수용한다.  그러므로 마음(意)은 눈이나 귀같이 감각능력이나 감각기관(根)으로 여겨진다. 

 

[각주2] <역주>  여기서 '거의 모든'이란  말은 서쪽 세계에서나 그러하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물질과 정신을 둘로 나누는 경우가  전혀 없다.  佛家건, 道家건, 儒家건, 아니면 東學이건 간에. 종교 건, 철학이건, 과학이건 간에.

 

세  번째는 "지각知覺의  모임"(Sannakkhandha;想蘊)이다. '감각'같이 '지각'도 여섯 가지다. 여섯 가지 내적 능력과 거기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 대상에 관련된 것이다. 감각과 같이, 우리의 여섯 감각능력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만들어진다.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간에 대상을 식별하는 것이 '지각'이다.
  

네 번째는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Samkharakkhandha;行蘊)이다.[각주3]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마음먹은 행위 모두가 이 무리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업業(산.karma,빨.kamma)이라고 알려진 것이 이 무리에 속한다. 업에 대한  부처자신의 정의를 여기서 되새겨 보아야겠다. 

 

'오!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마음먹기"(cetana;思)이다. 의도가 있어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를 한다.' "마음먹기"는 '정신이 구성한 것, 정신이 활동하는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좋은 행동이나 나쁜 행동,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행동의 영역들 안에 있도록 마음에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감각'과 '지각'같이 "마음먹기"도 여섯 가지다. 여섯 가지 내적 능력과 거기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세계의 대상(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과 관련된다. '감각'과 '지각'은 마음먹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들은 업의 효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정신차리기(manasikara;作意), 의도(chanda;志欲),  결심(adhimokkha;信解), 확신(saddha;信),  정신통일(samadhi;三昧),  지혜(panna;般若), 추진력(viriya;精進), 욕구(raga;貪), 혐오나 증오(patigha;瞋 엘), 무명無明(avijja), 거드름(mana;慢), 자아관념(sakkaya-ditthi;有身見,  薩迦耶見) 등등의 업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만이 마음먹은 행위이다.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을 구성하는 쉰 두 가지의 그런 정신 작용이 있다.

 

[각주3] 여기서 "정신이 형성한  것"이란 "다섯 가지 모임" 목록에서 상카라samkhara(行)라는 단어의 광범위한 의미를 대표해서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이다. 다른 문맥상에서는 상카라가 조건에 따라서 있는 어떤 것, 세상의 어떤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섯 가지 모임"이 모두 다 상카라이다.

 

다섯 번째는  "식識의 모임"(Vinnanakkhandha;識蘊)이다. '식'은 "여섯 가지  능력"(六根:눈,귀,코,혀,몸,마음)중의 하나를 근거로 하고,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현상"(六境:시각적 형상, 소리, 냄세, 맛,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 마음의 대상, 즉 사상과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작용이나 반응이다.  

 

예를 들자면 "시각적인 식" (cakkhu-vinnana;眼識)은 눈을 근거로 하고 시각적 형상을 대상으로 한다. "정신적인 식"(mano-vinnana;意識)은 마음(意)을 근거로 하고 정신적인 대상, 즉 사상과 관념(法)을 대상으로 한다. '식'은 다른 능력들에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감각'과 '지각', "마음먹기"와 마찬가지로 '식' 역시 여섯 종류로서 여섯 가지 내적 능력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대상에 관련되어 있다.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4


'식'이 대상을 식별하지 않음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단지 일종의 알아차림, 즉  대상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푸른색으로 예를 들자면 눈이 빛깔과 접촉할 때 "시각적인 식"이 일어나서, 다만 빛깔이 있음을 알아차리지만 그것이 푸르다고는 식별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는 식별 활동이  없다. 그것이 푸르다고 식별하는 것은 '지각'(위에서 논한 세 번째 모임, 상온想蘊)이다. "시각적인 식"이라는 용어는 일상적인 말 '보임'[눈에 띔]이 전달하는 것과 같은 관념으로 정의되는 철학적 표현이다. '보임'은 식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형태의 식도 그러하다.[각주1]

 

[각주1] <역주> 이  짧은 설명으로 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의미체계로 식의 개념을 파악하려는 데에는 엄청난 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우리의 '氣'를 이해시키려는 시도와도 같다. 더군다나  원시불교에서의 식의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식학唯識學에서의 식의 개념과도  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간단히 감각능력과  그 대상간의 작용·반작용에  불과한 것을 사람들이 경험과 대상을 파악하는  주체인 영혼이나 자아로 혼동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식이라고 알아 두기로 하자.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서 보게 되겠지만, 識은 자아를 철저하게 부정키 위하여 마련된 의미 범주이다.

 

여기서 불교철학에 의하면 물질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자아'나 '영혼'이나 '자기'로  여겨질 수 있는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정신이 없다는 것과, 식識을 물질에 반대되는 '정신'으로 여겨서는 아니 됨을 되풀이해야겠다. 이 점이 특별히 강조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식'이 일생 동안 늘 그러한 실체로서 지속되는, 일종의 '자아'나 '영혼'이라는 그릇된 개념이 초기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 자신의 제자의 한 사람인 사띠Sati는 '[이대상에서 저 대상으로]옮겨가고 돌아다니는 것은 [언제나]같은 식이다'라고 스승이 가르쳤다고 생각했다.[각주2] 부처는 그에게 식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사띠의 대답은 전형적인 것이었다.[각주3] '그것은 의사표현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좋고 싫은  행위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경험과 행위의 주체이다.]

 

[각주2] <역주>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과 더불어,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Abhidharma-kosa)의 제4장을  참조하면 이 견해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계된 구절을 인용해보면,


문: 빛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답: 램프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끊임없이 생성되어 연속적으로 타오르는 불꽃에 대한 비유적인 명칭이다. 이러한 생성이 그 장소를 바꿀 때 우리는 빛이 움직인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다른 불꽃에 대한 비유적인 명칭이다.) 마찬가지로 식識도 연쇄적인 식의 순간에 대한 관습적인 명칭일 뿐이다. 식이 그 장소를 바꿀 때(즉, 다른 대상의 요소와 상응하여 나타날  때) 우리는 식이 대상을 지각한다 라고 말한다. [체르바츠키 지음, 권오민 옮김, 《小乘佛敎槪論》(서울  :경서원,1986), 126쪽에서 인용. 부분적으로 표현을 바꿈]


[각주3] <역주> 불교이전부터 있어온 전형적인 견해를 말한다. 즉, 사띠는 識을 영원한  실제로서의 자아인 브라만교의 아뜨만과 같은 것이라고 잘못 안 것이다.

 

'누가보더라도 너는 어리석다'라고 스승은 꾸짖었다. '너는 내가 교리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있느냐? 내가 식은 조건들에서 일어나며, 조건들이 없으면 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았더냐?' [즉,  식은 원래부터 스스로 존재해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는 식을 조목조목 설명해 나간다. '식은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이 어떤 가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눈과  시각적 형상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보는 식"(眼識)이라 불려진다. 귀와 소리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듣는 식"(耳識)이라 불려진다. 코와 냄세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냄새맡는 식"(鼻識)이라 불려진다. 혀와 맛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맛보는 식"(舌識)이라 불려진다. 몸과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더듬는 식"(身識)이라 불려진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사상과  관념)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생각하는 식"(意識)이라 불려진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비유를 들어 계속 설명해 나간다. 불은 물질이 타는 것이기에 그 물질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장작 때문에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 불려진다. 섶 때문에 불이 타면 섶불이라 불려진다. 그렇게 의식은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위대한 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佛音)는 이  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 나무 때문에  타는 불은 오로지 나무가 공급될 때만 탄다. 그러나 더 이상 나무가 없으면(공급되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불이 꺼진다.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나무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게 될 때〕 불이 장작개비 등등으로 건너뛰어서 계속타는 것이 아니다. 나무조각 불이 일게 되면 역시 그러하다. 

 

그와 같이 의식은 눈과 시각적 형상  때문에 감각기관의 문에서(즉, 눈에서) 일어나고, 눈과 시각 형상, 빛 그리고  주의하는 조건이 있을 때만 생겨난다. 그러나 그 상태가 더 이상 없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친다. 조건이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더 이상 없다고 해서 그 의식이 귀 등으로 건너뛰어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듣는 식"이 있게 되면 그 역시 그러하다. .....'


부처는 식이 물질과 감각과 지각과 정신이 구성한 것들에 의존하며 그것들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선언하였다. 그는 말한다.


'식은 물질을  수단으로 삼아서(rupupayam;色手段),  물질을 대상으로 하여서(ruparammanam;色所緣), 물질의  지원을 받아서(rupapatittham;色依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쁨을 찾으면 자라나고 증가하고 발전하게 된다.'


'누가 "나는 물질과 감각, 지각 그리고 정신이 형성한 것과 따로 있는 의식이 오거나,  가거나, 지나가거나,  생겨나거나, 자라거나, 증가하거나, 발전하는  것을 보여주리라"고 말한다면 그  자는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5


이상에서 아주 간략히  "다섯 가지 모임"을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존재'니, '개인'이니, '나'니 하고  부르는 것은 다만 이들 다섯 무리들의 결합에 주어진 편리한 이름 또는 라벨일 뿐이다. '늘 그러하지 않은 그 어느 것도 둑카이다.'(Yad  aniccam tam dukkham;一切皆苦) 이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부처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서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이 둑카이다.' 모든 것은 잇다은 두 순간에 있어서도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A는 〔앞으로의〕A와 같지 않다. 그것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스러지는 하나의 흐름으로서 있다. 


'오! 바라문이여, 그것은  마치 산골의 시내와도 같다. 멀리멀리 빠르게 흐른다. 모든  것을 싣고서 흐른다. 단  한 순간도, 찰나도, 촌각도,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끊임없이 흐른다. 바라문이여, 인간의 삶도 그런 것이다. 산골의 시내와 같다.'[각주1] 부처가 랏타빨라Ratthapala에게 말했듯이  '세상은 끊임없는  흐름으로서 있고,  늘 그러하지 않다.'

 

[각주1] 이 말은  부처가, 욕망에서는 자유로와 졌지만 희미한 과거속에 사는 아라까Araka라는 교사(Sattha)에게  해준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기원전  500년경)의 말과 그의 유명한 표현  '너는 두번 다시 같은  강에 발을 담글 수 없다. 새로운 물이 항상 네게  흘러들 것이니까'를 상기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역주>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는 철학자'라고 일컬어졌다. 어쩌면 석가모니와 동시대인인 그가 석가모니와는 달리 당시의 사상적 조류에서 고립되어 버린 좌절감 때문일까?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은 '생성'과 '존재'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자를,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후자를 대표한다. '생성'의 세계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나고 죽고 하면서 흐르고, 변화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다. 세계란 정도에 따라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었으며,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단편30)[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서양철학사(上)》(대구:이문출판사,1988) 65쪽에서 인용] 이는 마치 "불의 설법"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존재'의  세계관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움직임과 변화는 이성적인 인식이 아니고, 감각적인 인식이며 이런 모습들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참된 실체는 변화하지 않으며  정지해 있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경험하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세계를 단순한 로고스logos로 추상화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영원하고 변치 않으며 절대적인 기하학적 이데아 idea는 그래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의 주류로서 계속되고 있다.  반면에 서양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가 없었다.


그러면 불교의 세계관은  동動인가 정靜인가? 이것은 너무도 엄청난 주제이기에 여기에서 제대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系圖》의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같은 구절등에서 말하는 부동不動  또는 정靜이 단순히 정지해 있으며 변화하지 않는 '실체'를  그리고자 함이 아님을 강조해야 겠다. '제법부동본래적'에 대하여 주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음'은 앞의 '성품'을 가리킨다. '성품'이란 머무름이 없는 법의 성품이다.'

(不動者, 指前性也. 性者無住法性也) 《華嚴一 乘法界圖記叢髓錄》[大正藏45.721c]
      

불교뿐만이 아니고  모든 동양적 세계관에  변화하지 않는 우주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관에서의 정靜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그  간단한 답을 조선말의 대학자 최한기崔漢綺(1803~1877)에게서 들을 수 있다.


만물을 깊이 궁구해보면 운행하여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두 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을 편안케 하는 것은 곧 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동을 불안하게 하는 것을 不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정의 이름은 상대적인 짝이 아니어서 크게 움직이는 가운데 있다 말하며, 편안함과 편안하지 않음을 들어서 靜·不靜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潛究萬物, 無不運化則,  皆可謂動. 而安其動者, 卽可謂靜; 不安其動者, 亦可謂不靜.  然卽, 

動靜之名非對偶, 而言大動之中. 擧其安與不安,  而言靜不靜.(《氣學》卷二,  三十一張)

[《明南樓全集》제1권 (서울:여강출판사,1986), 240쪽]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즉  시간 밖에 있는 실재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관념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약속체계일 따름이고,  부단히 변화되어 온것을 과학사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실재가 있다고 가정하면 한정적인 범위에서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발전된 과학이 평화와 생명을 조화롭게 기르는  과학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일련의 원인과 결과로서 하나가  사라지며, 다음에 올 것의 조건을 만든다. 그것들에는 불변의 실체가 없다. 그들 배후에는 영원한 '자아'(아뜨만Atman)나, 개별성이나, 진정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누구라도 어떤 물질이 진정한  '나'라고 부를 수 없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아니면 어떤 감각이나, 지각나,  정신적 활동들 중의 어떤 것이나, 어떤 의식을 진정 '나'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 의존하는 이들 다섯 가지 육체적, 정신적 모임들이 심리적, 생리적 기계 같이 결합되어

[각주2]  함께 작업하면 우리는  '나'라는 관념을 얻는다. 그러나 이는 거짓된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정신이 형성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조금 전에 논한 "네 번째 모임"의 쉰두 가지 "정신이 형성한 것"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아관념(sakkaya-ditthi;有身見, 薩迦耶見)이다

 

[각주2] 붓다고사Buddhaghosa는 실재로 '존재'를 나무로 만든 기계(나무 인형: daruyanta)에 비유하였다. Vism. (PTS), p.594~595.

 

이 "다섯 가지  모임"들이 어우러진 것을 우리는 통속적으로 '존재'라 부르는데, 그것은 둑카 그 자체(行苦)이다. 이들 "다섯 가지 모임" 배후에 서서 둑카를 경험하는  다른 '존재'또는 '나'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 여기에 대해 붓다고사가 말하길 


'고통이 존재하더라도, 고통받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네.
행위가 있지만, 행위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네.'


움직임 배후에서, [자신은〕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움직이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그저 움직임일 뿐이다.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생명은 움직임 그 자체이다. 생명과 움직임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사고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없다. 사고 그 자체가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고를 제거하고 나면 생각하는 어떤 것을 찾아 볼 수 없게된다. 

 

여기서 불교의 이런 견해가 데까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 얼마나 상반되는가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과연 삶에 태초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날지 모른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의 흐름, 그 시작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신神이 생명을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대답에 경악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에게 '신의 처음은 어떠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주저없이  '신께 있어서는 최초란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자기 대답에는 경악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이 계속되는  순환(samsara;윤회輪廻)에 가시적인 종말이란 없다. 헤메이고, 맴돌며,  무명無明으로 덮혀 있고, 목마름(tanha;욕망-갈애渴愛)의 족쇄가 채워진, 존재하는 것들의 태초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부처는 더 나아가, 삶을 계속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인 무명에 대해 언급하여 이렇게 말했다. '어떤 지점을 너머서부터는 무명이 없다고 가정하는 그런 방법으로 무명의 첫 시작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극단 너머에 삶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것이 간추린 "둑카에  대한 거룩한 진리"(苦聖諦)에 대한 의미이다. 이 "첫 번째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각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처가 말하듯, '둑카를 보는  이는 둑카가 생겨나는 것도 보며, 둑카가 그치는 것도  보며, 그리고 역시 둑카가  그치도록 인도하는 길도 보기' 때문이다.[각주3]

 

[각주3] 정말로 부처는 어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하나라도 보는 이는 다른 세 가지  또한 본다고 말하였다.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 는 상호연관된 것이다.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6

 

어떤 사람들이 그릇 인상 지우듯 "둑카에 대한 거룩한 진리"가 불제자의 삶을 우울하거나 슬픔에 가득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불제자는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에게는 공포와 번민이 없다. 항상 고요하고 청아하여서 변화나 재난에 불안해하거나 좌절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는 결코 우울하거나 어둡지 않았다.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언제나 미소짓는 이"(mihita-pubbamgama)로  기술되었다. 불교회화나 조각에서 부처는 항상 행복하고,  청아하고, 만족스럽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표현된다. 괴로움이나 번민이나 고통의 자욱은 결코 찾아 볼 수 없다.[각주1] 


불교예술과 불교건축, 불교사원은 결코 우울하거나 슬픈 인상을 주지 않는다. 대신에 고요하고 청아한 기쁨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각주1] 고따마가 고행자였을 때 갈비뼈 전부가 드러나도록 야윈 모습을 묘사 간다라Gandhara의 불상과 중국의  포우-키엔Fou-Kien[漢字 불명]에 또 하나의 불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깨닫기 전에, 그가 부처가 되고난 뒤 비판한 가혹한 고행 수련에 순종할 때의 모습이다.

 

비록 삶에는 괴로움이 있지만 불제자는 삶을 어둡게 덮어 버리거나 괴로움에 화를 내거나 못 견뎌해서는 안 된다. 불교에 의하면 삶에서의 주요한 해악의 하나가 '혐오' 또는 증오이다. 혐오(pratigha;瞋 엘)는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괴로움에 대한, 그리고 괴로움에 관계된 것들에 대한 악의. 그 기능은 불행한 상태와 해로운 행위의 토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에 못 견뎌하는 것은 잘못이다. 괴로움에 못 견뎌하거나 화를 내어서는 그것을 제거치 못한다. 오히려 근심을 조금씩 더하며,  이미 불쾌한 형편을 악화시키고 더욱 화나게 한다. 필요한 것은 화를 내거나 못 견뎌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괴로움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하는가  이해하고 나서 인내와 지성과 결단과 기력으로 기꺼이 실천하는 것이다.


《테라가타Theragatha》(장로게長老偈)와  《테리가타Therigatha》(장로니게長老尼偈)라 불리는 두 개의  고대 불경이 있다. 거기에는 남녀 부처 제자들의 즐거운 말이 가득하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통하여 삶의 평화와 행복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꼬살라Kosala의 왕이 부처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척하고, 천박하고, 창백하며, 야위었거, 호감이 없어 보이는 여러 다른 종교의 제자와는 달리, 부처의 제자는 '즐거움이 가득하여 고취되어 있으며(hattha-pahattha), 기쁨에  넘쳐 의기양양하며(udaggudagga), 정신적인 생활을 즐기며(abhiratarupa), 감각이 쾌활하고(pinitindriya), 번민에서 벗어났으며(appossukka), 청아하고(pannaloma), 평화롭고(paradavutta), 가젤영양[각주2]의 마음으로(migabhutena cetasa), 즉 가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였다. 왕은 이런 건강한 기질이 '이 존경스런 분들은 세존의 가르침의 위대한 의미를 깨달았으며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달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각주2] <역주> 가젤gazelle영양은  소과 가젤라속의 영양羚羊으로서 아프리카, 이란, 인도, 몽골등지의 건조한 지역에서 서식하는 동물이다. TV의 동물 다큐멘타리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므로 기회가 있으면 잘 관찰하기 바란다. 이런 비유가 뜻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

 

불교는 우울함과  슬픔, 후회와 어두운  마음자세를 완전히 반대한다. 그런 것들은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장애로 여겨진다. 그 반면에 즐거움(piti;喜)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Bojjhamgas;覺分)의 하나이며, 열반을 깨닫는 수행을 하는데 필수적인 성품임을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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