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신격화
붓다의 신격화神格化는 붓다의 입멸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초기경전인 니까야Nikāya(빠알리어로 기술된 경집)와 아가마Āgama(산스트리트어로 기술된 경집; 한문으로 번역된 장아함의 산스트리트어본에 해당하는 것만 현존하고 대부분은 유실되었음)에 이미 신격화된 붓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초기경전에 붓다의 신장은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되며, 신체는 금빛으로써 32상相을 갖추고 있고,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을 갖추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디가니까야(長部)>의 「대반열반경」에 붓다는 사신족四神足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1겁劫 동안(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우주가 한 번 생기했다 소멸하는 동안)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다고 설해져 있다. 또한 붓다의 본체는 형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법신法身’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 시대에는 비록 붓다가 32상을 갖추었더라도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인간의 육체를 가진 인간 붓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파불교 시대의 경전이나 그 시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에는 32상뿐만 아니라 80종호種好도 설해진다. 32상은 전륜성왕轉輪聖王도 갖추고 있지만, 80종호는 붓다와 대력보살大力菩薩만이 갖추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과거불過去佛 사상도 초기경전에 나타난다. <장아함>의 「대본경大本經」 등에는 과거칠불過去七佛에 대해 자세히 설해져 있다. 그리고 <중아함>의 「설본경說本經」에는 미래불未來佛로서의 미륵彌勒이 설해져 있다.
좀 더 후대에 이르면, 타방세계他方世界의 제불諸佛이 설해지고, 다불사상多佛思想이 나타난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대중부의 ‘본종동의本宗同義’에는 스스로 원해서 악취惡趣에 태어나는 보살, 즉 원생신願生身의 보살이 설해져 있다. 대중부에서는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두가 세간에 출현하고 모든 여래께는 유루법有漏法이 없으며, 모든 여래의 말씀은 모두가 전법륜轉法輪이고, 모든 부처님은 한 음성(一音)으로써 온갖 법을 설명하며 모든 세존께서 하신 말씀은 여여如如하지 않은 뜻(不如義)이 없다. 모든 여래의 색신色身은 실로 끝이 없고 모든 여래의 위력威力도 또한 끝이 없고 모든 부처님의 수명도 끝이 없다.”[異部宗輪論(T49, p.15a)]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히 ‘생신生身’ 이상의 붓다(인간이 아닌 붓다)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부가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불타관佛陀觀을 주장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대승불교는 보살사상을 제시하는 동시에 약속과 구원의 종교를 제공한다. 일상적인 삶의 투쟁에 찌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그의 본질적인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을 때, 그의 나약한 영혼은 실패를 모르는 무조건적인 자비와 도움의 어떤 구원을 갈망한다. 그는 신神에게로 달려간다. 초기불교와 같은 자력의 종교는 그에게 차디찬 위안이 될 뿐이다. 대승불교는 그처럼 나약하고 고독한 대중들에게 ‘대자대비한 붓다의 자비로운 손길이 모든 고통 받는 존재에게 주어진다.’는 달콤한 구원의 희망을 펼쳐 보인다.”[S. C. Chatterjee․D. M. Datta, 학파로 보는 인도 사상, p.170]
또한 붓다와 동시대에 살았던 자이나교의 교주 바르다마나 마하위라Vardhamāna Mahāvīra가 주장했던 것과 유사한 ‘전지성全智性[sabbaññutā]’을 붓다에게 귀속시켰다.[MN. Ⅰ, p.482.] “이와 같은 귀속에서는, 붓다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에 관한 절대적인 앎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가 사람들을 자신이 했던 대로 전향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깨달음이 지닌 보편적인 내용을 선별적으로 과장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 결국 붓다는 전지전능한 최고의 절대자(신神)적 차원으로 격상(?)되고 있었던 것이다.” [D. J. Kalupahana,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 Delhi: Motilal Banarsidass, 1994, p.122]
“대승불교 사상(또는 철학)은 붓다를 초월적 실재와 동일시한다. ‘팔리어로 고타마Gotama 싯닷타Siddhattha, 산스크리트어로는 가우타마Gautama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역사적 붓다는 궁극적 실재 또는 전지전능한 부처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진다. 붓다의 수많은 전생의 화신들 역시 믿어져 붓다의 여러 전생의 삶을 담은 이야기인 유명한 <자따까Jātaka(본생담本生譚)>들이 구성되었다.” [S. C. Chatterjee․D. M. Datta, 학파로 보는 인도 사상, p.170]
“무속성적(Nirguna) 브라흐만Brahman을 주장하는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 철학에서도 궁극적 실재 자체는 모든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실재는 스스로를 현실 속에서 우주의 조정자인 법신法身(dharma-kāya)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법신의 측면에서 궁극적 실재인 붓다는 모든 존재의 해탈을 간절히 바라면서 스스로를 각기 다른 스승들로 화현시켜 중생들이 고통을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렇기 때문에 법신으로서의 붓다는 나약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자비와 구원, 도움, 소원성취 등 모든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목적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신神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면에서 붓다는 또한 아미타불(아미타바Amitābha 붓다Buddha)이라고 불린다. 결국 불교는 붓다를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인 신神과 동일시함으로써 불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킨다.” [S. C. Chatterjee․D. M. Datta, 학파로 보는 인도 사상, pp.170-171]
붓다의 신격화를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화天化, 혹은 범화梵化라고 부른다. [呂凱文, 「對比・詮釋與典範轉移(2): 以兩種 善生經 探究佛敎倫理的詮釋學轉向問題」, 正觀 第35期(2005. 12), pp.19-23 참조]
붓다는 자신이 사후에 신격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붓다는 입멸 직전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DN Ⅱ, p.154, “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 accayena satthā.”]고 말했다. 또한 붓다는 자신은 법法을 만든 자(창조자, 신神)가 아니라 법法을 깨달아 발견한 자일 뿐이고 법法을 깨닫는 길(방법)을 안내하는(알려주는, 가르치는) 안내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붓다가 자신을 신격화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의 뜻과는 달리 초기경전을 편집할 때부터 이미 붓다는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박깔리 숫따Vakkali Sutta」에 의하면, 중병에 걸린 박깔리Vakkali 존자가 붓다께 예배드리기 위해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붓다는 “박깔리여, 그만 두어라. 썩어문드러질 이 몸뚱이에 예배를 해서 무엇 하겠는가? 박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SN Ⅲ, p.120, “alaṃ vakkali kiṃ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고 말했다. 이처럼 붓다는 자신에 대한 신격화(형상의 우상화)에 빌미가 될 수 있는 형식적인 예배조차 거부했다.
한편 이 경에 나오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는 대목은 붓다가 설한 법을 진정眞正으로(진실로 바르게) 봐야만 진정으로 붓다를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를 진실로 바르게 보고 깨달아야만, 그때 비로소 진정으로 붓다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의 ‘법신法身(dhamma-kāya)’이라는 개념이 이 대목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상응부주相應部註에 나오는 “대왕이시여, 여래는 법法을 몸(身)으로 하는 자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법을 몸으로 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出世間法(lokuttara-dhamma)이 여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SA Ⅱ, p.314]라는 대목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니까야에서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주석서에서는 이 대목을 ‘법신法身(dhamma-kāya)’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니까야의 주석서(아비담마, 아비다르마)를 저술할 때 이미 ‘법신’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이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붓다는 “그때 세간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었다.” [Vin Ⅰ, p.14: “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고 선언했다. 이것은 붓다 자신도 아라한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여섯 아라한 속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 입멸 후 붓다는 점차 신격화되어갔다. 제일 먼저 붓다와 아라한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붓다누붓다buddhānubuddha’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른바 ‘붓다를 따라 붓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붓다는 더욱 더 신격화되었다. 비록 붓다의 육신은 소멸하지만, 붓다의 법신은 상주한다는 이른바 ‘법신상주法身常住’라는 불멸의 불신관佛身觀으로 바뀌게 되었다. [李箕永, 「佛身에 관한 硏究」, 佛敎學報 제3․4합집(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66), pp.205-279 참조] 대승불교의 불신관佛身觀, 특히 <법화경>에서 강조된 ‘영원한 붓다’의 개념은 이미 초기경전인 「마하 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sutta(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내용은 일본의 불교학자 奈良康明의 견해이다. 中村元,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p.423-424 참조]
이 경에서 붓다는 생명을 더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생명을 버렸다고 하는 이른바 ‘화연완료化緣完了 잉의사명任意捨命’의 사상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平川彰, 박용길 역, 율장연구(土房, 1995), p.549.] 이러한 사실은 우이 하쿠주(宇井伯壽)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불신관佛身觀의 변천으로 인해 대승불교에서는 붓다를 ‘인간 붓다’가 아닌 ‘초인 붓다’로 주장하고 신격화 하게 되었다. 라다크리슈난(S. Radhakrishnan, 1888-1975)은 붓다의 신격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종교적 본능은 신적인 존재를 요구하며, 따라서 붓다의 실천적인 종교에서 ―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 그 자신은 신격화되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억제되어 잠자코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눈(lokacakṣus)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전형이며, 완전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인 사람이며, 자신은 그 길을 발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만든 현자(지혜로운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붓다는 대중들의 유일한 피난처인 신神이 된다." [라다크리슈난,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Ⅰ)(한길사, 1996), pp.279-280]
이처럼 불교를 창시한 붓다의 신격화는 ― 그의 우려와 당부에도 불구하고 ― 붓다의 입멸 직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필연적으로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칼루파하나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과거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붓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온갖 형태의 신화와 전설들로 점철되어 왔다.” [D. J. Kalupahana,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 Del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1994, p.22]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붓다는 점차 신격화되었다. 최종적으로 대승경전의 왕이라 불리는 <법화경(묘법연화경)>에서 석가모니불은 ‘인간 붓다’가 아닌 영겁에 걸쳐 존재하는 초월적인 신적 존재인 구원실성불久遠實成佛로 신격화되었다.
<법화경>에 묘사된 구원실성불은 유일신의 개념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법화경에서 무신론의 종교가 유신론의 종교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이처럼 붓다를 신격화시킴으로써 불교의 정체성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308)]
/ 마성 스님
아무리 초기경전인 니까야Nikāya, 아가마Āgama, 아함경집이라도 붓다의 초인화ㆍ신격화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이것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접근’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해가 추가로 요구된다. 그런 접근은 팔리어(빠알리Pāḷi어; 붓다가 활동했던 갠지스강 유역의 고대 인도 민중어)가 부분적으로 해소해준다. 팔리어 전공의 저자(마성 스님)는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로 있으며 팔리문헌연구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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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에 대한 우상화(형상의 우상화; 붓다의 신격화)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우상화(관념의 우상화; 가르침의 절대화)가 붓다 사후에 2500년 동안, 여러 가지 형태(변질, 변형된 경전, 위작된 경전, 왜곡된 논장, 아비담마, 아비달마, 불상, 탱화, 왜곡된 전설 등)로 계속되어 왔고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붓다의 생애 속에는 신화적, 전설적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기록했다는 경전들 속에도 후세 사람들의 가필加筆, 윤색潤色, 각색脚色과 위작僞作이 매우 많다. 후대에 변질, 변형된 이러한 요소들을 되도록 배제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깨달음의 언덕(해탈의 언덕;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을 향해 가는데 매우 필요하고 중요하다.
다행스러운 점은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은 매우 경험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당신이 '깨달은 내용'(법法)과 '깨닫는 방법'(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설(설명)하시는 붓다의 언어는 매우 소박하면서도 적확(적절+명확)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변질, 변형된 부분을 걷어내고 보면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하기가 가능하며 또한 바르게 실천(수행)한 결과(성과, 성취)를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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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세기~ 2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간다라 불상(Buddha of Gandhara). 이 간다라 불상은 고타마 붓다를 표현한 최초의 불상들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