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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 월뽈라 라훌라 / 이승훈 옮김 / 경서원 / 여백의 미를 사랑하는 책 표지. 

길고도 알쏭달쏭한 제목의 이 책. 300 페이지도 안되는 얇팍한 이 책. 그런데, 다 읽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나'는 종교가 없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불가지론자에서 무신론자 쪽으로 꽤나 가 있는 참이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한 참 오래전에 어느 원장님의 소개로 목록에 올려뒀던 것을, 작년 가을쯤에 갑자기 내켜서 골라본 것이다. 불교에 대해 종교적 관점보다는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 싶던 차에 번역이 훌륭하다는 평(올바른 평가였다고 생각한다)을 보고 목록에 올려뒀던 것 같다. 아마 이 묘한 제목도 책을 집어 드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무튼, 두께도 얼마안되는 이 책을 다 읽는데 한 참의 시간을 보냈고, 꽤나 의미있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학생때 배웠던(그리고 아마도 시험에도 출제되었던) 사성제, 즉 고집멸도의 네 가지이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인생은 고통이고 - 그것은 집착에 의한 것이고 - 그것을 없애야 하며 - 거기에 도달하는 길이 있다는 정도로 배웠던 것 같다. 하기야, 중고등학생이 뭘 알겠는가.(하지만 모짜르트는 10대에 오페라를 쓰고 있었고, 고타마 싯다르타는 그 나이에 생로병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나의 선생님들께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 교육의 얇팍함에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성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예'를 그대로 내가 구현하고 있다니.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책을 직접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역자가 나중에 읽는 것이 좋다고 추천한 둘째, 셋째, 넷째, 여섯째 가름인데, 이 부분이 바로 사성제(四聖제), 특히 '고苦'성제와 무아(無我-나 없음)에 관한 내용이다. 이 부분이 책을 한 참 읽게 만든 주범으로, 읽다가 다시 앞을 펼펴 읽기를 수 차례 하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나의 이해력이 부족함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교리에 처음 접하는 내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저자와 역자에게 감사와 감탄을 보내야겠다. 재미있는 우화를 하나 옮겨본다.

"거북이가 친구 물고기에게 뭍을 걸어서 못에 돌아온 참이라고 말하였다. 물고기가 말하였다. '물론, 헤엄쳤다는 뜻이겠지.' 거북이는 뭍에서는 헤엄칠 수가 없다, 그것은 굳어서 그 위로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런게 어딨느냐, 자기 연못같이 물이 분명하다, 일렁이며, 거기에 들어가 헤엄칠 수 있을 뿐이라고 우겨댔다."

언어의 한계에 관한 내용이다. 나에게는 또, 인간의 선입견이나 기존 지식에 관한 이야기로도 들린다. '도道'성제에 관한 내용도 조금 옮겨본다.

"'길'에 대한 이 짧은 논의로부터 그 길이 각자가 스스로 따르고 실천하고 발전시켜야 할 생활방식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몸과 말과 마음에서의 자기 수양이며 자기 개발이고, 자기 정화이다. 그것이 신앙, 기도, 예배나 의식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길'은 통념적으로 '종교'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완성을 통하여 '궁극적 실체'를 깨닫도록, 자유와 행복과 평화를 완성시키도록 이끄는 길이다."

종교인보다 더 종교적인 사람, 일반인보다 덜 종교적인 종교인이 실재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아니, 이렇게 본다면 불교 의식들의 대부분은 종교적이지만 오히려 올바른 길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목적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데 있다면, 이 책은 그 목적에 쉽게 이르게 할 수 있는 책이다. 존재하지 않는 나의 아둔함으로 인해 책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내 몸이 그리고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이 늘어난 변화가 있다. 

다시 또 읽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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