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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지식 창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천왕봉 일출을 보시려면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시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시려면 
조급한 마음 내려 놓은 
유장한 바람으로 오시고

피아골 단풍을 만나시려면 
먼저 온몸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시고

벽소령 눈시린 달빛을 받으시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 철쭉 꽃 길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시고

연하봉 벼랑과 고사목을 보시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시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늘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이원규 詩,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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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詩에 등장하는 '천왕일출 (천왕봉 일출), 노고운해 (노고단 운해), 반야낙조 (반야봉 낙조), 직전단풍 (피아골 단풍), 불일현폭 (불일암 폭포), 벽소명월 (벽소령 명월), 세석철쭉 (세석평전 철쭉), 칠선계곡, 연하선경 그리고 섬진청류 (섬진강 청류)'를 지리(智異) 10경이라고 한다.

지리산(智異山)의 지리(智異; 지혜 지, 다를 리)는 다름을 아는 것, 차이를 아는 것, 그리고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리산(智異山)의 뜻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만물과 만인의 그 다름과 차이를 알고 인정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산이라는 뜻이다. 참 멋진 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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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지리산의 봄, 세석철쭉 

지리산 세석평전은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수 십만 그루의 철쭉이 온통 꽃 잔치를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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