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그대에게.. '나도 어느 생에서는 그러했다'
Q : 제가 마음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 : (부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볼 때, '나도 어느 생에서는 그러했다'라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질문을 보고 '나도 한 때는 그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마음공부'가 부처님(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마음공부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리자면..
부처님(佛) 가르침(法, 敎)을 불법(佛法) 또는 불교(佛敎)라고 합니다.
불법(佛法)이라는 표현은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의 뉘앙스가 강하고, 불교(佛敎)라는 표현은 신앙이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물론 불교는 'religion, re(다시)+lig(신과 잇는)+ion(것)'이라는 의미의 신을 믿는 종교(religion)는 아닙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은 모두 ‘완전한 행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천국이라고, 노자-장자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道) 또는 법(法)의 깨달음'이라고, 공자님은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己)를 극복(克)하여 예(禮)의 경지로 다시 돌아감(復)’이라고,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이데아'가 자신들과 같은 철인(철학자)들에 의해서 실현된 '이상국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禮)’는 공자님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이데아'라는 이상세계처럼) 완전한 행복인 지선(至善)의 경지입니다. 노자-장자님의 도(道)와 부처님의 법(法)은 그 내용이 매우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노자-장자님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경지,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실천법)이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 담마, 다르마)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중생; 생명의 무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괴로움, 불만족 따위를 근원(근본 원인)적으로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진리(진실한 이치, 근본이치; 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른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지혜(빤냐/반야; 반야는 고대인도어 빤냐의 한문 음사)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존재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이자,
'우리가 괴로움의 굴레에 어떻게 빠져드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근원적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진실한 이치)를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상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자비(멧따-까루나; 자비는 고대인도어 멧따-까루나의 한문 번역)는 사랑이라는 표현에 익숙한 요즘 시대의 표현으로, '나와 너를 초월한 큰 사랑' 또는 '나(我, 에고)를 초월하여 모든 존재를 분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랑하는 바른 사랑' 또는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합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수행경험과 제자들에게 수행을 지도하신 경험에 비추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지혜(빤냐, 반야; 바른 지혜)와 자비(바른 사랑)가 함께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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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말씀(가르침, 설법; 법을 설명함)이 기록된 글을 불경(佛經; 불교 경전)이라고 하는데, (예수님도 그러하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직접 글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 부처님과 같은 경지(완전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지혜와 자비의 경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신 분들이 1200분(또는 1250분) 정도 계셨다고 하는데, 이 분들이 처음에는 단체 암송(합창과도 같이 한 사람이 틀리면 알 수 있습니다)을 하여 부처님의 말씀(가르침, 설법)을 전달하다가, 훗날 빠알리어(갠지스강 유역의 고대인도 민중어 중 하나)로 기록한 경전모음을 니까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아함경은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경전모음인 아가마를 다시 중국어(한문)로 번역한 경전모음입니다.
니까야와 아함경은 생각보다 꽤 차이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첫째, 옛날에는 요즘처럼 정보의 전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하고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보다 번역 시 오류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둘째, 산스크리트어로 번역 또는 편찬한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하던 시대의 중국인들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과 같은 주요 대승경전에 비해서 아함경을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함경의 번역에 상대적으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고 번역이 상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합니다.
좀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경전에는 기록 과정의 오류와 (산스크리트어, 한문, 티벳어, 한글, 일본어, 태국어, 미얀마어, 영어 등으로) 번역 시의 오류와 언어의 시대적인 변천과 신조어 사용에 따른 변질 오류, 그리고 개인적 집단적 욕망(사리사욕과 어리석음 또는 탐진치)이 개입된 변질 변형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삼특상 또는 삼법인(三法印), 세 가지 법(法, 부처님 가르침)의 인장’이라는 판단 기준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삼법인(삼특상)도 오류 없이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삼법인과 (삼법인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한) 연기 또는 연기법, 사성제(이지연기二支緣起이기도 함),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 혹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또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실천인 '팔정도(八正道; 정각으로 가는 가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해서 바르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수행의 중간 단계에서도 무명(무지), 전도된 생각, 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의 착각과 집착, 특히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의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정도 만큼, 그리고 탐(갈망, 욕망, 탐욕), 진(혐오, 미움, 성냄, 증오, 분노, 두려움), 치(갈망과 혐오, 탐과 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가 줄어드는 정도 만큼 (나름대로의) 자유와 평화,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여 완성하면, 부처님께서 도달하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고,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지혜롭고 자비로운(사랑이 넘치는) 어떤 위대한 존재(신, 하늘님, 브라만, 여호와, 신격화된 부처, 아미타불 ..)에게 복(행복)과 지혜와 사랑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고 자비로운(사랑이 넘치는) 사람(붓다, 보살)이 되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바른 실천(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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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시고, 설법(법을 설명)하실 때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명칭하셨습니다.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는 실라. (정혜쌍수, 지법-관법, 계정혜 삼학 등은 후대 중국의 불교인들이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우선 '삼법인, (삼법인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한) 연기 또는 연기법, 사성제,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 5계' 등과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실라-사마타-위빠사나)'에 대한 변질되지 않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지식(교학) 차원에서 바르게 보고 읽고 바르게 사유하여 바르게 학습(배우고 익힘)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자발적으로) 5계 등의 실천을 포함한 실라[계戒; 정어(바른 말)·정업(바른 행동)·정명(바른 삶/생활)]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여 청정한 생활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합니다.
이렇게 계발된 실라를 바탕으로 사마타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가 계발됩니다. 발전향상된 사마타는 실라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키고, 발전향상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키며, 발전향상된 실라는 다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킵니다.
위빠사나 또는 사마타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펄정도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참고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바른 실천은 바른 도반(바른 실천 경험을 가진 바른 스승; 부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스승도 도반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설법)을 지식(교학)으로만 공부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직접 바르게 실천하여 스스로 지혜롭고 자비로운(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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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지혜(빤냐;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자비(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속에서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