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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생활 속의 수행_남상욱님

와요! 소리가 뭐라 캅디까?

인도에서 견디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극심한 소음이다. 귀청이 떨어질 듯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경적, 릭샤, 오토바이 소음 등은 인도를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충분하다.

북인도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그 때 나는 ‘알아차림 수행(위파사나)’을 안지 얼마 되지 않는 초짜였는데, 수행을 아주 오래한 분을 우연히 만나 며칠 동안 같이 동행을 하던 중이었다.

한밤중에 도착하여 숙소를 잡았더니, 바로 큰길 옆이어서 이건 뭐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창문 밖으로는 연신 울려대는 경적과 오토바이 소리에다 옆방에서는 누군지 크게 음악을 켜고 있었고 옥상에서는 몇몇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동행하였던 그 분께 약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제의를 하였다. ‘선생님, 소리가 너무 심해 도저히 잠이 안 오네요. 내일 아침에 방을 옮겨버립시다’ 그 말끝에 건성으로 한 말씀 툭 던지는데, ‘와요, 소리가 뭐라 캅디까?’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소음에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집중적으로 ‘알아차리고’ 그것이 어떻게 번뇌로 작용하는지를 ‘조사’하게 되었다.

과연 그랬다!
소리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는 그냥 소리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우선 내 마음은 이미 시끄러움에 대해 규정해 놓은 것이 있었고, 그것은 괴롭고 불편하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었으며, 또 시끄러움을 일으키는 것은 나쁜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조건 지어진 마음(業)’이 턱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들을 기반으로 마음은 온갖 말들을 지어내고 있었는데 내용은 대체로 이러했다. 우선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을 넘는 소리에 대해 성냄(도사)이 일어났고, 그 성냄의 화살은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들로 향하고 있었고 마음은 그들을 마구 비난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인도의 문화와 정치를 한심하다며 비웃고, 옆방에서 음악을 켜는 메너없는 인간들, 옥상에서 떠드는 중국인들, 특히 평소 감정이 좋지 않은 중국인들에게는 온갖 욕을 다 퍼 부으며 그들의 저속한 문화와 도덕과 규범을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소리는 나에게 절대로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는 소리일 뿐이었고, 소리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 없이 자신들의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내 마음이 소리를 소음으로 만들고 온갖 비난을 퍼붓고 화를 내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로부터 파생된 이런 파괴적인 마음들은 소리라는 대상으로부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며, 그 마음들은 어떤 실체도 없고 알아차리면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마음 또한 실체가 없고 무상한 것이다. 그저 空한 가운데 소리들이 제 멋대로 떠돌아다닌 것일 뿐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시끄럽다고 느끼면 소음을 보지 않고 내 마음이 어떤 조화를 부리는지를 관찰한다. 물론, 그 소음의 힘이 내 ‘알아차림’의 힘보다 크거나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때는 그것을 해결할 현실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실행한다.

괴로움을 소멸하고 행복을 찾는 궁극적 방법은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외면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둘 다 수행 방편이긴 하나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전자는 명상(선, 위파사나 등)이고 후자는 보살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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