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혜해탈경, 양면해탈경, 앙굿따라니까야 A9:44, A9:45>, [색계 삼매(선정) 4단계, 무색계 삼매 4단계, 그리고 상수멸(멸진)의 성취], <웨다나 쌍윳따(느낌/감각 상응품, 受相應品), 쌍윳따 니까야(상응부) Ⅳ권>
.
1. “도반이여, ‘양면(兩面)으로 해탈한 자’라고 말들 합니다. 도반이여, 어떤 것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까?”
2.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멀리 따나 … 초선정에 들어 머뭅니다. … 이선정에 들어 머뭅니다. … 삼선정에 들어 머뭅니다. … 사선정에 들어 머뭅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가 있든지 간에,
그 방법대로 그 경지를 체험하여 머물고,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라고 붓다께서는 '방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3.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여 … 공무변처정에 들어 머뭅니다. … 식무변처정에 들어 머뭅니다. … 무소유처정에 들어 머뭅니다.… 비상비비상처정에 들어 머뭅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가 있든지 간에,
그 방법대로 그 경지를 체험하여 머물고,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라고 붓다께서는 '방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멸진)에 들어 머뭅니다.(이른바 아라한과의 심心 해탈)
그리고 그는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봅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가 있든지 간에,
그 방법대로 그 경지를 체험하여 머물고,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이른바 아라한과의 혜慧 해탈)
도반이여, 이것이 '양면(兩面)으로 해탈한 자'라고 붓다께서는 '방편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혜해탈경(Pannavimytta-sutta), 양면해탈경(Ubhatabhāgavimutta-sutta), 앙굿따라니까야 A9:44, A9:45>
--
사마타(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 사마디/삼매 계발 수행; 사띠 초점확립 계발 수행)를 바르게 실천하여 사띠(알아차림)의 범위를 점점 줄여가서 마침내 사띠의 초점이 하나로 모여져 고요히 집중되면 삼매(사마디; 정定)의 첫 단계인 색계(물질세계) 초선정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들어간다.
초선정 삼매에 들어가면 외부의 오감각에 대한 인식(전오식)이 사라지고(오감각으로부터의 해탈?) '나(我) 또는 내 몸'이 사라진 듯이 느껴진다. 무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 자아의식,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想적 분별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몰아(沒我)의 '가라앉을, 잠길 몰(沒)'은 그런 의미다.
.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몸(물질작용; 사대작용, '지수화풍' 작용 무더기)과 마음(정신작용; 인식작용, '수상행식' 작용 무더기)이 '연기(인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매 순간 생멸 변화하는 인과 연기적 현상(연기현상이자 생명현상이자 자연현상)이다.
마음은 인연조건(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서 몸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매 순간 인과 연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화하는(생멸 변화하는) '수상행식' 작용 무더기를 통칭한 것이다. 수(受; 감각 받음受) 작용에서부터 식(識; 앎) 작용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정신작용인 '수상행식' 작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명체의 인식작용이다.
인식작용('수상행식' 작용)은 인식정보(여섯 감각)를 육근(여섯 감각기관)에 의존한다. 이렇게 육근(여섯 감각기관)에 여섯 감각의 인식정보를 의존하여 인식작용('수상행식' 작용)이 진행되면 인식작용 중에 신체와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심소(감정, 기억, 업 등의 마음의 내용 성분)’가 작용한다.
.
사띠(알아차림)의 초점확립 계발 수행인 사마타를 통해서 ‘사띠 대상(여섯 감각)의 범위’를 단계적으로 점점 줄여서 인식정보를 육근에 의존하는 것을 멈춰 가면 마침내 ‘사띠의 초점’이 완전히 하나로 고요히 맞춰지는 '삼매, 몰아(沒我) 고요집중’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인식정보의 육근 의존이 멈춰지면 몸(사대작용)과 마음(인식작용) 간의 상호 의존 작용과 상호 영향도 멈춰진다. 초선정 삼매에 들어가면 인식정보를 신체에 의존하는 것이 멈춰지고 외부의 오감각에 대한 인식(전오식)은 물론 생각, 판단, 분별 따위의 모든 ‘조작심(doer), 행(行)하는 마음, 상카라(saṅkhāra)’도 사라지고 신체(오감각)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모든 심소(감정, 기억, 업 등)의 작용 따위의 출렁임도 고요해 진다. 물론 삼매 상태에 있는 동안에만 한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신체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요동치던 마음('수상행식' 작용)의 물결이 고요해 지면서 신체 활동도 고요해지고 물질-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최소화된다. 삼매(정定)의 단계가 깊어질수록 더욱 최소화 된다.
삼매(정定)의 마지막 단계인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면 마음 작용('수상행식' 작용)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는 지경까지 마음의 물결이 고요해 진다.
.
한편 사마타(삼매 계발 수행)을 통해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해서 존재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사유)하여 통찰지(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계발하는 위빠사나를 통해서 이른바 아라한도의 혜(慧) 해탈을 성취한다.
이렇게 성취한 아라한도의 혜(慧) 해탈과 함께 궁극의 삼매(定, 여기서는 삼매라고 표현함도 적합하지 않지만), 상수멸정(想受滅定 또는 멸진정滅盡定)을 이루면 마침내 마음의 모든 번뇌가 멸진(완전히 소멸)되고 '마음(心; '수상행식' 작용), 마음작용(心行)'의 생멸 흐름이 멈춘다.(이른바 아라한과의 심心 해탈).
경전에 의하면 최대 7일 동안 ’상수멸(멸진) 상태’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마음(매 순간 생멸 변화하는 '수상행식' 작용)의 인과 연기적 흐름이 완전히 멈추고, 아직 육신의 인연조건이 남아 있는 유여열반의 경우에, 다시 작용할 때까지 최대 7일까지 ’상수멸(멸진)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모든 여섯 가지 감각과 심소(감정, 기억, 업 따위의 마음의 내용성분)의 작용뿐만이 아니라 비상비비상처의 인식작용마저도 소멸하는 ‘상수멸(想受滅) 또는 멸진(滅盡; 모든 번뇌의 완전한 소멸)’은 모든 '수상행식' 작용의 멈춤, 윤회의 멈춤, 완전한 해탈, 열반이다.
이 상수멸(멸진)의 성취를 이루면 재생연결식을 포함하여 모든 심행(心行; 마음작용, '수상행식' 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 흐름이 멈춘다, 즉 윤회를 멈춘다. 그리고 아직 육신(물질작용)과의 인연조건이 남아 있어서 마음(정신작용; '수상행식' 작용)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수행자는 유여열반의 아라한과를 성취한 자가 되어,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완전히 꿰뚫어 보는 완성된 지혜와 함께 완성된 자비심('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된다.
멸진(상수멸)의 성취는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부처가 되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팔정도의 완성’이다.
참고로, 상수멸(멸진)의 성취와 함께 육신(물질작용)과의 인연조건이 다하는 경우(상수멸 상태에서 소에 받혀 입멸한 바히야 따루찌리야의 경우)나, 중생(衆生, 생명의 무리) 중에 물질현상(물질작용)과의 연기작용이 없는 무색계 범천생명(정신현상의 유정)의 경우에는 상수멸(멸진)의 성취가 곧 무여열반이다.
“모든 행(行; 작용)은 무상하니 그것이 생멸의 법이다. ...
모든 행(行; 작용)의 생멸이 적멸(寂擴; 고요히 소멸)한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잡아함(雜阿含; 상윳따니까야Saṃyutta-Nikāya) 권12>
.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를 바르게 실천하여 예류과를 성취하면 (자신과 세상의 사물에 대해) 보는 것마다 '인과 연기적인 매 순간 생멸 변화'(무상)를 보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 나 또는 내 몸(身)과 사물이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로서 있다(有)라는 견해(見)'가 완전히 사라지고, 법(法;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서 더 이상 도(道; 깨달음의 길)의 흐름에서 퇴보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상태)를 '예류 또는 입류'라고 한다.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는 '성인(아라한, 부처) 또는 도(道)의 흐름에 들었다, 합류했다'는 뜻이다.
예류 이상의 경지에 일래, 불환, 아라한의 경지가 있다. 마지막 남은 아(我; atta)에 대한 미세한 집착(또는 갈애)의 장애인 이른바 오상분결(五上分結), 즉 미세한 '색탐(色貪: 색계에 대한 탐)·무색탐(無色貪: 무색계에 대한 탐)·도거(掉舉: 들뜸)·만(慢: 아만)·무명(無明)'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멸진(상수멸)을 성취하여 궁극의 경지, 완전한 깨달음, 열반(완전한 해탈)을 성취한 사람을 아라한(부처;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라한이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이라고 한다.
멸진(상수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네 단계의 색계(물질세계) 선정 삼매와 네 단계의 무색계(비물질세계) 삼매의 성취와 더불어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계-정-혜 계발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를 통해서 다져진 지혜(바와나빤냐, 수행지혜/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통찰지혜; 통찰지)와 그런 통찰지에 의한 혜해탈(지혜해탈), 이른바 아라한도의 혜해탈이 함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생(生)을 거치면서 형성된 나(我)에 대한 집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뿌리 깊은 것이다.
.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설해진다. 혜해탈(paññā-vimutti)은 오온(몸과 마음) 그리고 (십이)연기에 실체(我; atta)가 없는 것을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앎으로써 해탈하는 것을 뜻한다.
아라한도의 혜해탈로 마지막 남은 아(我)의 존재에 대한 미세한 집착(존재하고자하는 욕망과 집착; 갈애 또는 무명)의 끈을 놓아버리고, 심행(心行, 마음작용, '수상행식' 작용)의 완전한 소멸과 함께 모든 번뇌가 완전한 소멸하는 상수멸(멸진)을 성취하는 해탈을 이른바 아라한과의 심해탈(ceto-vimutti)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수멸(멸진 또는 누진)을 성취하여 갖게 되는 통찰지인 누진(멸진)명으로 사성제를 완전히 바르게 깨달아 지혜를 완성하면 정각을 증득한 자(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 아라한, 부처)가 된다. 이것을 이른바 아라한과의 혜해탈이라고 한다.
이른바 숙명명으로 숙세의 연기적 인과관계(업)를 꿰뚫어 보고 천안명으로 자신과 중생(모든 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을 꿰뚫어 보게 되면[고성제],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상;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완전히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과 중생의 실존 양상과 왜 그런 실존 양상을 갖게 되는지 그 근본 원인을 완전히 꿰뚫어 보게 된다[집성제].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알기 때문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게 된다[멸성제].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괴로움(고통, 번뇌)을 근원적으로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중생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그 길(팔정도)을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완전히 바르게 아시게 되었던 것이다[도성제].
.
열반(완전한 해탈)은 이렇게 두 가지 해탈(혜해탈과 심해탈)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실현(완성)된다. 이를 양면해탈(兩面解脫, ubhatobhāga-vimutti; 증일아함增一阿含, 앙굿따라니까야 A9:44/9:45; 장아함長阿含, 디가니까야, D15; 중아함中阿含, 맛지마니까야, M65/M70 & I.437/I.439/I.477)이라고 하는데, 비유하자면 혜해탈과 심해탈은 열반으로 들어가는 문의 양면(앞-뒷면)과 같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열반은 실현되지 않는다.
.
__________
[Appendix I] 색계 삼매(선정) 4단계, 무색계 삼매 4단계, 그리고 상수멸(멸진)의 성취
부처님께서는 삼매를 색계 삼매(물질을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 와 무색계 삼매(비물질을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로 구분하셨는데, 특히 색계 삼매를 자나(jhāna, 선禪; 선禪은 자나..선나..선으로 변천된 자나의 한문 음사)라고 칭하셨다. 한문 경전에서는 대개 자나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정(定)은 사마디(삼매)를 한문으로 뜻 번역한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선정(禪定)은 '자나사마디'(선삼매禪三昧)다. (이하 '색계 삼매, 자나'를 '선정 또는 선정 삼매'로 표기).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바른 삼매(삼마 사마디; 정정正定)에는 육신 의존도와 마음('수상행식' 작용)의 상태에 따라 아래와 같이 '색계 삼매'(선정)와 '무색계 삼매' 각각 네 단계가 있다.
• 색계 삼매(jhāna, 선정) : 초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 무색계 삼매 : 공무변처(空無邊處) 삼매, 식무변처(識無邊處) 삼매, 무소유처(無所有處) 삼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삼매
색(色)은 물질을 뜻하는 고대 인도어 루빠(Rupa)를 한역한 것이다. '루빠(Rupa; 물질, 물체)는 색깔과 형상을 가진 것이 그 특징'이라는 부처님의 설명에 따라 표의문자의 특성상 한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색(色)이라고 한역했다. 색계(色界)는 ‘물질(色) 세계(界)’라는 뜻이다.
무색계(無色界)는 ‘물질(色) 없음(無)의 세계(界) 또는 비물질 세계’라는 뜻이다. 무색계 삼매는 허공(空)이나 식(識) 같은 비물질 세계에 속하는 것을 집중 대상으로 삼매에 드는(심일경성을 이루는) 것이다.
.
자나(색계 삼매; 선정) 바와나(계발 수행)를 위한 집중 대상을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 인도어로 ‘까시나(kasina; 집중을 돕는 데 사용되는 특질을 표상하는 물질적인 것)'라고 하는데 니밋따(nimitta; 초선정 삼매 상태에 진입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마음 상태에 대한 물질적 표상, 바른 초선정 삼매 상태에서는 니밋따가 사라짐)를 만들어 내는 물질적인 것들이다. 지, 수, 화, 풍, 청, 황, 적, 백, 제한된 허공, 빛, 사대(四大; '지수화풍' 작용), 호흡(아나빠나; 안반安般) 등이 까시나에 속한다.
부처님께서는 선정(禪定, 선정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의 집중 대상(까시나)은 반드시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당신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집중 대상 중에서 호흡(아나빠나)이 가장 수승(훌륭)하다고 추천하셨다. 즉 부처님께서는 '아나빠나(들숨날숨, 호흡) 사띠'를 통해서 바른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방법을 가장 추천하셨다. (<아나빠나 사띠 숫따, 안반수의경> 참조)
왜냐하면 호흡은 탐(갈망, 탐욕)•진(혐오, 성냄)•치(탐과 진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를 일으키지 않으며, 우리 몸에 있는 수 많은 신체 작용(물질 작용) 중에서 '무의식적인 작용이면서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또한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작용이면서도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작용(또는 현상)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 몸에 항상 있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마타(선정 삼매 계발 수행; 사띠 초점확립 계발 수행)에서 호흡은 사띠를 거친 수준(거친 감각,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수준)에서 미세한(또는 깊은) 수준(미세한 감각,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수준)으로 건너가게 하는 아치형태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
색계 삼매(선정) 4단계
(1) 초선정 삼매
초선정 삼매인지 아닌지는 마음 상태(또는 마음 작용)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요소만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인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진정 무엇인가(어떤 것인가)는 초선정에서 나온 직후에 초선정 상태를 반조(返照;되돌아 비추어 봄)해서 스스로 확인하고 알아내야 한다.
초선정 삼매 상태에 진입하기 직전에 니밋따(nimitta; 마음의 표상, 마음 상태에 대한 물질적 표상)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니밋따가 나타나면 집중대상(까시나; 호흡 등)은 니밋따로 옮겨진다. 초선정 삼매에 들면서 니밋따는 사라지고 집중대상은 지복(至福; 삐띠와 수카)으로 옮겨진다.
• 위딱까(vitakka) : 위딱까는 지복(至福; 삐띠와 수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여 움켜쥐는 '탐색(찾음, 추구)적인 작용'이다. 위딱까는 일종의 집착 작용이기도 하다.
• 위짜라(vicara) : 위짜라는 일종의 집착 작용인 위딱까에 의해 (오히려) 멀어지는 초선정의 지복을 다시 무의식적으로 (집착을 반성하고) 놓아버림으로써 지복으로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회귀반성적인 작용'이다.
위딱까-위짜라 반복 과정은 '초선정 상태의 미세한 흔들림(마음 작용의 미세한 진동, 동요)'이다.
• 삐띠(piti) : 고요한 희열. (수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다소 거친 기쁨)
• 수카(sukha) : 깊고 고요한 기쁨, 평온하고 아늑하고 지극한 행복감.
•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 심일경성心一境性, 마음의 전일성) : 마음이 완전히 한 곳으로 고요히 모여 있는 상태, 순수 고요집중. 고요한 멈춤, 시간의 멈춤, 시공(時空) 초월, 영원함, 비이원성(非二元性; 무분별) 등으로 느껴지기도(경험되기도) 한다.
.
"수행자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모든 불선한 것(不善法)을 멀리 떠나서 첫 번째 선정(초선정, 初禪)에 들어가 머문다. 초선정은 (세속 또는 감각적 욕망 또는 신체 감각을) 멀리 벗어남에서 생긴 고요한 희열[삐띠]과 행복[수카]이 충만한 상태로서, 지복[至福; 삐띠와 수카]에 대한 탐색적인 작용[위딱까]과 회귀반성적인 작용[위짜라]의 반복 과정(마음의 미세한 진동 혹은 동요)가 (아직) 있는 상태에서, 지복에 대한 미묘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의 심일경성[心一境性, 찟따-에깍가따; 마음의 전일성]이 갖춰진 상태다."
<디가니까야(장아함), DN I, 182>
초선정에서는 '지복(至福; 지극한 행복), 삐띠(고요한 희열; 다소 거친 기쁨)와 수카(고요한 기쁨, 행복감)'에 대한 '미묘하고도 확실한 자각(알아차림; 사띠)의 심일경성(찟따에깍가따)'을 이루며 삐띠와 수카는 구분되지 않는다. 세 번째 선정(3선정, 三禪)에 도달해서야 이 둘(삐띠와 수카)이 분리되고 수행자는 3선정에서 나온 후에 반조를 통해 삐띠와 수카를 구분하게 된다.
‘삐띠와 수카’는 물질세계(오감각의 세계, 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欲界)의 어떤 것도 능가(초월)하는 ‘지복(至福, 지극한 행복, 더 없는 행복)’으로 경험된다. 마음 상태에 이 다섯 요소만 존재하고, 오감각(물질적인 감각, 신체 감각)에 대한 인식(전오식前五識)을 포함하여 그 외의 어떤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때가 (색계) 초선정 삼매 상태다.
초선정 삼매는 일상의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지극한 행복(至福), 신성한 황홀경, 마음의 청정함, 청정한 성스러움, 고요한 멈춤, 자아(自我; 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 사라짐, 비이원성(무분별), 궁극성, 시간의 멈춤, 시공(시간-공간) 초월 등의 느낌이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체험이므로, 그 체험(느낌)은 수행자를 압도한다
이러한 (초선정 또는 유사) 삼매의 체험(느낌)에 압도되어 미혹한(현혹된) 사람은 이 체험(느낌)을 자신이 믿는 어떤 '신(절대자,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브라만신,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의 거룩한 불의 신 .. 등)과의 합일 또는 접신, 신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신비체험)이나 축복' 따위로 오해하기도 한다.
(2) 2선정 삼매
초선정 삼매를 이루는 마음 상태(또는 마음 작용)의 다섯 요소인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심일경성[찟따에깍가따]’ 중에서 ‘마음 작용의 미세한 요동(동요, 진동)인 위딱까와 위짜라’를 가라앉히고, 더 깊고 고요한 ‘삐띠, 수카, 심일경성’, 이 세 요소만 남게 되면 그때가 2선정 삼매다.
"수행자는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앉혀서 마음이 안으로 더욱 고요[평온, 평정; 우빽카]하고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위짜라가 없는 삼매에서 생긴 고요하고 정결한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그 삐띠와 수카에 대한 더욱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의 심일경성[心一境性, 찟따-에깍가따]을 갖춘 두 번째 선정(2선정, 二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디가니까야(장아함), 대념처경[Maha Sati-Patthana Sutta], D22>
(3) 3선정 삼매
2선정 삼매에서의 상대적으로 거친 삐띠(희열)를 가라앉히고, 더 깊고 고요한 집중이 이루진 가운데 더욱 더 깊고 고요한 수카(행복감)와 그 수카에 대한 심일경성(고요집중의 사띠)만 남게 되면 그때가 3선정 삼매다.
"수행자는 (상대적으로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앉혀서 마음이 안으로 더욱 더 고요[평온, 평정; 우빽카]하고 집중된 상태가 되어 성인(예류~아라한)들이 말하는 '우빽카(고요함, 평정심)에서 사띠를 지니고 지극한 행복[수카]에 머문다'고 하는, 더욱 더 고요한 평정심[우빽카]에서 오는 지극한 행복감[수카]에 대한 더욱 더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갖춘 세 번째 선정(3선정, 三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디가니까야(장아함), 대념처경[Maha Sati-Patthana Sutta], D22>
(4) 4선정 삼매
3선정 삼매에서의 ‘수카’마저 가라앉히고, 더욱 더 깊고 고요한 상태에서 온전히 청정해진 평정심[우빽카]과 그 평정심에 대한 극도로 고요히 집중된 심일경성(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만 남게 되면 그때가 4선정 삼매다.
"수행자에게 이미 기쁨과 슬픔의 느낌은 완전히 끊어졌고, 이제 수행자는 괴로움[둑카]도 즐거움[행복; 수카]도 떠나서(벗어나서, 뛰어넘어서), (둑카와 수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온전한 평정심[온전히 고요한 마음상태; 우빽카]에 의한 사띠의 청정함이 있는[또는, 우빽카와 사띠가 청정하게 된; upekkha-sati-parisuddhi], 그리고 온전히 청정해진 우빽카(평정심)에 대한 온전히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의 심일경성을 갖춘 네 번째 선정(4선정, 四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디가니까야(장아함), 대념처경[Maha Sati-Patthana Sutta], D22>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바와나, 즉 사념처에 대한 깊은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사유)를 통해서 통찰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인 위빠사나에 필요한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 평정한 마음 상태), 즉 탐(갈망, 탐욕)·진(혐오, 성냄)·치(갈망과 혐오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평정한 마음 상태가 4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된다.
4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도 삼매에서 나온 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잦아들어 사라지고 다시 탐진치와 번뇌가 되살아난다. 삼매에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는, 수행자가 들었던 삼매의 깊이와 수행자가 처한 주변환경(경계)에 따라 다르지만, 4선정 삼매에 들었다 나온 경우 길게는 수 일 동안 '한시적'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삼매에서 나온 후 법열(法悅; 삼매 체험으로 생기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취해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빽카(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이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실상과 진리를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뚷어 아는 통찰지(통찰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을 해야만 한다.
--
무색계 삼매 4단계
무색계(無色界)는 '물질(色) 없음(無)의 세계(界) 또는 비물질의 세계'다. 무색계 삼매는 비물질세계에 속하는 ‘허공(空), 식(識), 무(無),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이 네 가지를 집중 대상으로 삼매에 드는(심일경성을 이루는) 것이다. 무색계(無色界; 비물질세계) 삼매의 성취는 물질세계(색계色界)로부터 벗어난다.
(1) 공무변처(空無邊處) 삼매
아나빠나(호흡) 또는 니밋따(마음 상태의 물질적 표상)로 향하던 마음을 비물질세계의 ‘허공(空), 텅빔’으로 돌려 허공(空)을 대상으로 심일경성(찟따에깍가따)을 이룬다.
이것이 무색계 첫 단계 삼매인 공무변처 삼매의 성취인 ’허공(空)에 대한 심일경성’이다. 이러한 심일경성에서 ‘공무변(空無邊), 공간(空)은 경계(邊) 없이(無)’ 무한하면서도(太) 텅 비게(虛) 인식된다. 공무변(空無邊)의 태허(太虛) 경지(상태; 處)다.
"수행자는 색(色; 물질)에 대한 산냐(想; 지각)를 초월한다. (물질)감각적 반응에 의존한 산냐(想)는 사라진다. 수행자는 '공간은 무한하다.'는 것만 산냐(想; 지각 또는 심일경성)한다. 이렇게 그는 공무변처정(공무변처 삼매)의 단계에 진입해서 머문다."
<디가니까야(장아함), DN I, 183>
사대작용('지수화풍' 작용)이 '인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연기 or 인연화합) 작용하여 물질(물체)이 생기하면 물질(물체)이 차지하는 공간도 동시에 생기한다(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빅뱅). 생기한 물질(물체)과 공간은 서로가 서로를, 즉 물질(물체)은 공간을 공간은 물질(물체)을 ‘제한하고 구분’한다.
‘공무변처(空無邊處), 공무변(空無邊; 공간의 경계 없음)의 경지(상태; 處)‘에서는 평소에 공간(空)을 ‘제한하고 구분’하던 ‘물질(물체; 色)이 없다(無)'고 인식된다. 이것이 무색계(비물질세계) 삼매의 성취로 들어가는 입구(첫 단계)다.
(2) 식무변처(識無邊處) 삼매
‘공무변(空無邊), 공간(空)의 경계(邊) 없음(無)'에 대한 인식(識)에서 식(識)에 주의집중을 기울이면, 공간의 경계 없음을 인식하고 있던 ‘식(識)’ 자체를 대상으로 심일경성을 이룬다.
이것이 무색계 2단계 삼매인 식(識)무변처 삼매의 성취다. 간혹, 여러 가지 수행을 하다보면 ’인식, 식(識)’이 끝없이 확장되면서 우주를 보았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체험 후에 "내 안에 우주가 있다"라든지, 혹은 “신을 보았다” 혹은 "내가 신이다"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또는 ‘내가 우주에 편재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 느낌으로 "무아(無我)를 깨달았다" 혹은 "완전히 해탈했다"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그냥 ‘인식, 식(識)’의 ‘경계 없는(無邊)' 무한확장의 경지(상태; 處)인 식무변처(識無邊處) 삼매의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수행자는 공무변처의 경지를 초월하고, 이렇게 산냐(想; 지각)한다, '식(識; 인식)은 끝이 없다.' 이렇게 그는 식무변처정(식무변처 삼매)에 진입해서 머문다."
<디가니까야(장아함), DN I, 183>
식무변처(識無邊處) 삼매는 식(識)을 대상으로 한 심일경성이다. 이러한 심일경성에서 식(識)은 ‘식(識)의 경계(邊) 없이(無)’ 무한하면서도(太) 텅 비게(虛) 지각된다. 식무변(識無邊)의 태허(太虛) 경지(상태; 處)다.
(3) 무소유처(無所有處) 삼매
식(識)의 경계(邊) 없음(無)에 대한 지각에서 ‘없음(無)’에 주의집중을 기울이면, 식(識)마저 놓아버리고 ‘없음(無)’을 대상으로 심일경성을 이룬다.
이것이 무색계 3단계 삼매인 무소유처 삼매의 성취다. ‘물질과 공간(또는 시간을 포함한 시공간)에 대한 지각’은 이미 사라졌고, ‘물질과 (시)공간을 구분하던 지각’도, ‘물질과 (시)공간이 없다는 지각’도 사라지고, 식(識)에 대한 모든 지각들도 사라진다. 이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지각’을 제외한 모든 지각이 사라진다. 오직 ‘없음(無)’에 대한 심일경성만이 남는다.
"수행자는 식무변처의 경지를 초월하고, 이렇게 산냐(sannā 想; 지각)한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무소유처정(무소유처 삼매)에 들어가 머문다."
<디가니까야(장아함), DN I, 183>
만약 어떤 수행자(혹은 비구, 스님) 중에서 무엇을 물어봐도 "無!, 오직 무(無)일뿐!"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분이 있다면 무소유처의 집착, ‘없음(無)이라는 관념’에 대한 집착에 빠져있는 것이다.
수행자는 사마타(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 定수행)를 통해서 계발된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를 사용하여 신수심법(身受心法;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깊이 관찰(觀)하고 사유하는 위빠사나(사마타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 慧수행)로 '나와 세상'이 현재 순간(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여, 나와 세상이 '있다(有)는 관념'에 대한 집착에서도 '없다(無)는 관념'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4)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삼매
‘없음(無)에 대한 지각’에서, ’없음(無)이라는 관념‘에 대한 집착도 놓아버리고, ’없음(無)도 아닌 것에 대한 지각’에 주의집중을 기울이면, 없음(無)에 대한 산냐(想; 지각)도 사라지고 ‘산냐(想; 지각)도 아니(非)고, 산냐(想) 아닌(非) 것도 아닌(非), 즉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의 지각’으로 대체된 심일경성 상태에 들어선다.
비상비비상(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에 대한 심일경성이다. 이것이 무색계 4단계 삼매인 비상비비상처 삼매의 성취다. 이 성취에 대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이것도 지각작용이라는 것’이다<앙굿따라니까야(증일아함), AN IX, 42>.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산냐(想, 표상작용, 지각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모든 ‘수상행식(受想行識) 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상태)다.
--
"가장 높은 단계의 삼매(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매에서 나온 후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번뇌는 되살아나고 생사의 의문도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니, 이는 완전한 해탈과 열반이 아니다. 이 법은 완전한 빤냐(반야;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완전한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못 된다.”
<성구경(聖求經; 성스러운 참구의 경), Ariyapariyesanaa Sutta, M26>, 《중부(中部; 맛지마 니까야 Majjhima Nikāya)》26경
사문 고타마 싯달타는,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숲 속의 코끼리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암중모색하며 수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완성하고 무상정등각(줄임말로 정각; 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함으로써 완전한 해탈(모든 번뇌, 괴로움, 苦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과 우빽카(완전한 평정, 평온, 평화), 멧따-까루나(자비;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와 닙바나(니르바나, 열반; 완전한 행복)의 경지(상태)에 도달한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었다.
.
🌳 '상수멸(想受滅) 또는 멸진(滅盡)'의 성취
상수멸(멸진)의 성취는 ‘비상비비상처 삼매의 성취’와 더불어,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팔정도의 상호 의존 계발 수행'을 통해서 계발되는 ‘아나함과(불환과) 이상으로 다져진 수행경험의 지혜(통찰지혜, 통찰지)‘가 함께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지고(至高)의 성취다. 아나함과를 증득한 후에 열반(닙바나, 니르바나)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마지막 단계의 팔정도 계발 수행이다.
상수멸(멸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네 단계의 색계(물질세계) 선정 삼매와 네 단계의 무색계(비물질세계) 삼매의 성취와 더불어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계-정-혜 계발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를 통해서 다져진 지혜(바와나빤냐, 수행지혜/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통찰지혜; 통찰지)와 그런 통찰지에 의한 혜해탈(지혜해탈), 이른바 아라한도의 혜해탈이 함께 있어야 한다.
상수멸(멸진)의 성취는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부처가 되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팔정도의 완성’이자 ’지혜(빤냐; 반야)의 완성’이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후 나는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해서 산냐(想)와 웨다나(受)가 소멸한 상수멸(想受滅)의 성취를 이루어 머물렀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통찰과 지혜를 완성했을 때 번뇌는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이러한 여덟 단계의 삼매와 상수멸에 들고 성취를 이룬 후, 또 그로부터 벗어났을 때 나는 내가 '완전한 지고(至高)의 지혜(빤냐; 반야)'를 얻었음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인간이나 범천 중에서도 능가할 자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와 통찰이 생겨났다, 내 마음(心)의 해방(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삶이다. 다시는 돌아오는 일(윤회)은 없다."
<앙굿따라니까야(증일아함), AN Ⅳ, 448>
.
<쌍윳따니까야>에는 부처님의 하루 일과가 이렇게 묘사돼 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한 시간 정도 멸진(상수멸)에 드신 후…. 하루 두 번씩 세상을 살피시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시거나 찾아온 사람들과 제자들을 만나 종일 법을 전하시고…. 잠은 사띠(마음챙김)하시며 아라한의 경지에서 한시간 정도 주무시고….”
<대반열반경>에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실 때에도 상수멸(멸진)에 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전에는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손가락 튕길 사이에 입정(入定)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자재한 삼매(定)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네 단계의 색계 삼매와 네 단계의 무색계 삼매 그리고 상수멸(멸진) 상태의 경험은 어쩌다 한 번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신비체험)이 아니라, 언제 하든 어디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과학적 경험처럼, 언제 하든(2500년 전에 하든 지금 하든) 어디서 하든(인도에서 하든 한국에서 하든 미국에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험이므로 일종의 과학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은 아니다.
.
구차제정(九次第定)
색계 삼매 4단계(색계사선色界四禪)와 무색계 삼매 4단계(사무색정四無色定) 그리고 상수멸정(想受滅定 또는 멸진정滅盡定)의 아홉 단계를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소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상수멸(멸진)의 성취’는 마음('수상행식' 작용)이 심일경성(삼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수상행식' 작용) 자체가 멈추는(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수멸(멸진)에 대한 심일경성이나 상수멸(멸진) 삼매(定), 상수멸정(想受滅定) 또는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상수멸(멸진)의 성취’라는 표현이 적확(적절+명확)하다.
차제정(次第定)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차제정은 순차적인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수행의 단계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건너뛸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구차제정의 경우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구차제정의 각 단계의 구분과 명칭을 부처님께서 하셨든 다른 누군가가 하였든 (모든 것이 그렇듯이)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며,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정에 대한 설명일 뿐이니 집착하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집착을 점점 더 놓아버리고 마침내 완전히 해탈한(깨달은) 자가 되는 스스로의 수행에 대한 훌륭한 이정표(안내문)일 뿐이다. 그것이 진정 어떤 것인가는 스스로의(자신의) 경험으로 확인하고 알아내야 한다.
.
__________
[Appendix II] 《쌍윳따니까야(상응부)》 Ⅳ권, <웨다나 쌍윳따(Vedanā Saṁyutta); 느낌(감각) 상응품, 수상응품(受相應品)>
이 경전은 웨다나(Vedanā; 느낌, 감각)와 상응(쌍윳따Saṁyutta)하는 법(法)과 관련된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기록한 경전이다. 아래는 이 경전에서 발췌한 것이다.
2. 아난다여, 이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것을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phassa)[1]에 연하여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1] [역주] phassa : 촉(觸)으로 한역한다. 6근(여섯 감각기관; '안.이.비.설.신.의' 근)과 6경(여섯 감각기관의 대상; 색.성.향.미.촉.법)과 6식(여섯 가지 식; '안.이.비.설.신.의' 식)의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적인 접촉(contact)을 말한다.
6근과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6경)과 6식의 촉(phassa; contact)에 연하여 웨다나(vedanā; 느낌, 감각)가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육근(六根; 여섯 감각기관)을 육입(六入) 또는 육처(六處)라 하기도 한다. 육근(6근)에 상응하는 대상(6경)은 눈은 색(과 형체), 귀는 소리, 코는 냄새, 혀는 맛, 몸은 감촉, 의근(意根)은 정신감각(생각, 기억, 감정 등; 또는 의근의 대상인 일체 모든 현상; 법法)이 그 대상이다 .
3. 아난다여,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바른 길(八聖道, 八正道)’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정견(正見; 바른 봄/관찰/통찰, 이해, 견해),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바른 행위), 정명(正命; 바른 삶/생활/생계)],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정진), 정념(正念; 바른 사띠), 정정(正定; 바른 삼매)이 그것이다.
.
11. 한적한 곳
4. 잘 말했다, 비구여. 잘 말했다! 나는 세 가지 느낌을 가르쳤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 셋을 나는 가르쳤다.
또 한편으로 비구여, 나는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뒤에 한 이 말은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sabbe saṅkhārā; 제행諸行)[34]의 무상(a·nicca)함을 두고 한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제행(諸行; sabbe saṅkhāra)이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그라지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이며,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니라.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니라.
[34] [역주] 삽베(sabbe) 상카라(saṅkhārā)를 영어번역자는 'all conditioned phenomena'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글로는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으로 옮겼는데,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제행(諸行)’도 병기했다.
5. 비구여, 나는 더 나아가서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nirodha)[35]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정에 들면 말(vācā)[36]이 그치며,
이선정에 들면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37]가 그치며,
삼선정에 들면 희열(pīti)이 그치며,
사선정에 들면 입출식(入出息; 호흡)이 그치며,
공무변처정에 들면 물질에 대한 지각(色想; rūpa-saññā)이 그치며,
식무변처정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지각이 그치며,
무소유처정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지각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정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지각이 그친다.
상수멸(想受滅)에 들면 지각(想; saññā)과 느낌(受; vedanā)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貪; 갈망, 탐욕)이 그치고, 진(瞋; 혐오, 성냄)이 그치고, 치(癡; 탐과 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 미망, 무명)가 그친다.
[35] [역주] nirodha : 보통 멸(滅)로 한역하는데, 영어에서는 cease(그침)로 옮김.
[36] [역주] vācā : 보통 어(語), 언(言), 언어(言語) 등으로 옮기고 영어로는 word, speech 등으로 번역한다. 인간의 말(언어)은 인류가 지구 상에 존재한 이래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인식 경험을 기호화(개념화)한 것이다. vācā가 그친다는 것은 마음의 개념화 작용, 달리 표현하면 생각, 판단, 분별 등의 작용이 그친다는 것이다.
[37] [역주] 위딱까(vitakka)는 지복(至福; 삐띠와 수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여 움켜쥐는 탐색(찾음, 추구)적인 작용이다. 위딱까는 일종의 집착 작용이기도 하다. 위짜라(vicara)는 일종의 집착 작용인 위딱까에 의해 (오히려) 멀어지는 초선정의 지복을 다시 무의식적으로 (집착을 반성하고) 놓아버림으로써 지복으로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회귀반성적인 작용이다. 위딱까-위짜라 반복 과정은 '초선정 상태의 미세한 흔들림(마음 작용의 미세한 진동, 동요)'이다.
영역자는 위딱까와 위짜라를 thought-conception과 discursive thinking로 번역했다, 한글로는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 또는 생각(thought)과 숙고(contemplation)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6. 비구여, 다시 더 나아가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vūpasama)[38]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정에 든 자에게서는 말(vācā)이 가라앉으며,
이선정에 들면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가 가라앉으며,
삼선정에 들면 희열(pīti)이 가라앉으며,
사선정에 들면 입출식(호흡)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정에 들면 물질에 대한 지각(色想; rūpa-saññā)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정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지각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정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지각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정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지각이 가라앉는다.
상수멸(想受滅)에 들면 지각(想; saññā)과 느낌(受; vedanā)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貪; 갈망, 탐욕)이 가라앉고, 진(瞋; 혐오, 성냄)이 가라앉고, 치(癡; 갈망과 혐오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 미망, 무명)이 가라앉는다.
[38] [역주] vūpasama : 앞에서 말한 nirodha(그침)가 억지(抑止; 억눌려 정지됨)의 단계라면, 이제 억눌려 정지된 것이 그 타성을 잃고 가라앉아 진정되는 것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영역자는 이를 stilling(가라앉음)으로 옮긴 것 같다. 보통 allaying, relief, mastery, clamness, cessation 등으로 영역함. 보통 적정(寂靜) 정지(靜止) 등으로 한역함.
7. 비구여, 무릇 여섯 가지 고요함(passaddhi)[39]이 있나니,
초선정을 이룬 자에게서는 말(vācā)이 고요해지며,
이선정에 들면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가 고요해지며,
삼선정에 들면 희열(pīti)이 고요해지며,
사선정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지각(saññā)과 느낌(vedanā)이
고요해진다(paṭippassaddha)[40].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貪; 갈망, 탐욕)이 고요해지고, 진(瞋; 혐오, 성냄)이 고요해지고, 치(癡; 탐과 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 미망, 무명)이 고요해진다.
[39] [역주] passaddhi : 보통 경안(輕安), 안식(安息), 지(止), 평정(平静) 또는 제(除) 등으로 한역함. 보통 tranquillity(평안), repose(휴식), calmness(고요, 평온, 평안), serenity(평온) 등으로 영역함. 진정된(가라앉은) 다음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뿐하고 평안함을 말한다. 영역자는 quietening(고요함)으로 옮기고 있는데 일단 고요함이라 변역하기로 한다.
[40] [역주] 여기서 paṭip-passaddha(고요해짐)이 깊어지는 단계인 삼매(定)의 단계에 네 가지 무색정(無色定)이 언급되지 않는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네 가지 정(定; 삼매)은 ‘상수멸’에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상수멸을 성취하는 데 이 네 가지 정定은 조건이 되니까)
.
19. 목수 빤짜깡가
2. 어느 때 목수 빤짜깡가가 우다이 장로를 뵈러 갔다. 가서 공손히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여쭈었다.
우다이 존자시여, 붓다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오, 목수여, 붓다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들이 붓다께서 가르치신 세 가지 느낌입니다.
4. 이말을 듣고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붓다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寂靜)하고도 오묘한 유(類)의 즐거움이라고 붓다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우다이 장로는 목수 빤짜깡가를 설복시킬 수 없었고, 목수 빤짜깡가도 우다이 장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7. 아난다 장로가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8. 그러고 아난다 장로는 붓다께 나아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붓다께 아뢰었다.
9.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목수 빤짜깡가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비구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목수 빤짜깡가의 주장 또한 옳았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느니라.
10. 참으로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제각기(의 근기에 맞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다툼을 벌여 신랄한 독설로 서로 상처를 주면서 논쟁과 논박으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에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여 언쟁하지 않고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 할 것이다.
11.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지의 (감각적) 욕망이 있으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가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가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 되는 맛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감촉; 觸)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아난다여, 이것들이 오감각(물질적인 다섯 가지 감각)의 감각적 욕망이다.
아난다여, 이 오감각의 감각적 욕망에 연하여 생겨나는(緣已生) 즐거움(sukha)과 기쁨(somanassa)을 관능적 쾌락(kāma-sukha)[46]이라 부른다.
[46] [역주] kāma-sukha : 감각적 욕망에 의한 행복, 관능적 쾌락. 한역은 욕락(欲樂). 영역은 happiness arising from sensual pleasure.
12. 그런데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뛰어난, 훌륭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고, 근원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불선법不善法)을 멀리한 채, 마음의 '탐색적인 작용(위딱까vitakka)과 회귀반성적인 작용(위짜라vicara)'의 반복 과정이 아직 있는 상태에서, 멀리 벗어남에서 생기는 고요한 희열(기쁨; 삐띠piti)과 즐거움(행복; 수카sukha)이 충만한 상태인 초선정 삼매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관능적 쾌락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즐거움이니라.
13.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ara)가 가라앉으면서 이선정 삼매에 들어 머무르는바, 이 삼매에는 내면적 확신이 있고,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ara)가 사라진 마음의 단일성(심일경성)이 있으며, 그런 삼매에서 생기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4.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온전히 사띠한(전념하여 알아차린) 채 평온에 머무른다. 성자(예류~아라한)들이 일컫는바 ‘평온한 채로 사띠하며 즐거움에 머무른다’고 하는 삼선정 삼매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5.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이미 괴로움도 즐거움도 버렸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에 기인한 사띠의 청정함이 있는 사선정 삼매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6.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색(물질)에 대한 지각(色想)을 완전히 초월했으며, 색(물질)의 경계(paṭigha)에 대한 지각도 사라졌고, 그 밖의 다양한 지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무한하구나, 허공은’ 하며 공무변처(空無邊處ākāsānañcāyatana)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7.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하구나, 식(識)은’ 하며 식무변처(識無邊處, viññāṇañcāyatana)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8.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없구나, 아무것도’ 하며 무소유처(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na)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9.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20.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지각과 느낌의 그침, saññāvedayitanirodha)에 들어 머무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서의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48]
[48] 상수멸을 성취하고 열반을 증득한 사리뿟따 존자는 《증지부》 아홉의 모음, 제34경에서 단호히 말한다. “열반은 행복이다. 벗이여, 열반은 행복이다. 진실로!” 그러자 우다이 비구가 물었다. “느낌이 없는 터에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리뿟따 존자가 대답했다. “거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완전한 행복이네, 벗이여.”
.
29. 청정한 출세간
2. 비구들이여,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곧 그 세 가지이니라.
3. 비구들이여, 세간적 희열(喜; pīti)이 있고, 출세간적 희열이있으며,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 또 있다.
세간적 즐거움(樂; sukha)이 있고, 출세간적 즐거움이 있고,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이 있다.
세간적 평온(捨; upekkhā)이 있고, 출세간적 평온이 있고,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 있다.
세간적 해탈(解脫; vimokkha)이 있고, 출세간적 해탈이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 있다.
7.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가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가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혀로 인식되는 맛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들이 오감각의 감각적 욕망이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욕망에 연하여 생겨나는 즐거움을 일컬어 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8.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즐거움인가?
여기 한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고, 불선법(不善法)을 멀리한 채, 위딱까와 위짜라의 반복 과정이 아직 있는 상태에서, 멀리 벗어남에서 생기는 고요한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정 삼매에 들어 머무른다. (또) 위딱까와 위짜라가 가라앉으면서 내면적 확신이 있고, 위딱까와 위짜라가 사라진 마음의 단일성이 있는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이선정 삼매에 들어 머무른다. (또) 그는,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온전히 사띠한(전념하여 알아차란) 채 평온에 머무른다. 성자들이 일컫는바 ‘평온한 채로 사띠하며 즐거움에 머무른다’고 하는 삼선정 삼매에 들어 머무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컬어 출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9.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인가?
여기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 비구가 있어, 탐(갈망,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마음, 진(혐오,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마음, 치(탐과 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 무명)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마음에서 생기는 완전히 평온한 즐거움과 기쁨에 머무나니 이를 일컬어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___________________
사진 : 설법(법法을 설명)하시는 부처님
;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은 '경험적+합리적' 가르침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통찰 '경험'으로 알아낸 법(法; 실상과 진리)을 듣는 사람의 근기(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가지 능력 등)와 처지(처한 환경, 상태)에 따라 '합리적'으로 설법(법을 설명)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