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누군가를 안다는 것



<누군가를 안다는 것>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을 향한 기대와 감정을 믿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북인도 바라나시에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갠지스강 바로 옆 라자가트라는 곳으로, 가트 계단에 앉아 강 건너 숲에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감상할 수 있다. 강에 떠가는 많은 배들과 순례자들도 명상 분위기를 더해 준다.

해마다 가다 보니 그곳 돌 계단에 유리잔과 생강 빻는 돌멩이와 낡은 가스 스토브 등을 늘어놓고 짜이(인도식 밀크티)를 끓여 파는 노인과 가까워졌다. 그가 끓이는 짜이가 입맛에 맞아, 일출을 보며 생강 짜이를 음미하는 것이 바라나시에서의 나의 정해진 아침 일과였다. 내가 나타나면 노인은 더 많은 생강을 빻아 일교차에 시달리는 목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가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달려내려가 재빨리 갠지스 강물을 떠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마신 짜이가 더러운 강물로 끓인 것이라니! 실망과 배신감이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이후 라자가트에는 가지 않게 되었다. 노인이 권하는 짜이를 거절할 수 없어서 차라리 그곳에 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냥 재빨리 지나치거나 외면하면서 다른 가트로 걸어가곤 했으며, 노인은 갑자기 멀어진 나를 서운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오랫동안 좋아한 장소를 잃은 아쉬움이 컸다.

지난해 겨울 다시 바라나시에 갔다가 이른아침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노인과 딱 마주쳤다. 노인은 반갑게 포옹까지 하면서 "언제 왔느냐? 얼마나 있을 거냐?" 물으며 짜이를 권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갠지스 강물 짜이 한 잔에 죽진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계단에 앉았다. 역시 그의 생강 짜이는 맛이 있었다! 혹시 내가 갠지스 강물 체질이 아닌가 생각하며 남은 짜이를 마시는 순간, 노인이 또다시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달려내려가 강물을 길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서 노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의 짜이를 좋아하고 이 장소가 좋긴 하지만 더러운 강물로 끓인 짜이까지 좋아할 순 없다고. 매우 비위생적이며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지 않느냐고. 그러자 노인은 강물로 짜이를 끓인 적이 없다며 펄쩍 뛰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는데도 부인을 하니 인격이 의심스러웠다.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짓는 내게 노인은 계단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며 계단을 내려가서 살펴보니 강 바로 위쪽에 파이프가 있고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십 미터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지하수였다. 그런 지하수가 몇 군데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지역 사람들이 믿고 마시는 청정수였다.

수돗물은 낡고 부식된 수도관 때문에 신뢰하지 않는다고 노인은 말했다. 나쁜 물은 짜이 맛을 떨어뜨린다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갠지스 강변에서 짜이 장사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인했다. 그들 모두 지하수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물로 짜이를 끓이진 않았다. 강 쪽에서 물을 떠오는 것을 보면 나처럼 외국인이나 외지인들이 강물로 짜이를 끓인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행 안내 책자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고 했다.

'안다'는 단어만큼 그 정반대와 동의어는 없다. 가까운 관계라 해도 누군가에 대해 전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향하는 방향만을 보고, 그가 어떤 지하수를 길어올리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 우리가 평생을 걸고 깨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편견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편견이다.


photograph_Sayed Wasi Haider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