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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담마코리아_고엔카지

담마코리아 10일 명상코스 후기 1

휴직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는 템플스테이나 명상 코스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어떤 프로그램이 좋을지 알아보던 중에 담마코리아라는 단체에서 주관하는 위빠사나 명상 10일 코스를 알게 되었다. 


실제 코스는 10일간 진행되지만 센터 등록과 마무리를 위해 앞뒤로 하루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총 12일을 비워야 했다. 게다가 휴대폰을 반납하는 등 외부와 연락이 불가하고, 일체의 읽고 쓰는 행위를 할 수 없으며 10일간 묵언해야 한다고 했다. 엄격한 채식이 제공되는데 12시 이후론 먹지 않는 오후불식이 원칙이고, 저녁은 간단하게 과일과 차 정도만 제공되기 때문에 하루 2끼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기간이 길고 규정이 엄격해 보여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12일간 자리를 비울 수 있겠냐는 생각에 신청서를 접수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이상한 사이비단체 아니냐며 걱정을 했다. 검색해보니 이 곳은 국제적으로 이백여 개 지부에서 동일한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순수 기부제로 운영되었다. 한국에서는 10년도 전부터 명상 코스를 운영해왔고 지금은 전북 진안에 센터가 있다고 한다. 가족들은 기부제로 운영되는 게 더 수상하다며, 다단계처럼 마지막에 금전을 요구하는 것 아니냐며 떠나는 날까지 걱정을 했다. 갑자기 불안해져 인터넷상의 거의 모든 후기를 읽어 봤는데 이상한 곳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말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올 한 해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이라는 명상 후기들을 읽고는 망설임을 버리고 전북 진안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눈이 많이 내렸던 전북 진안

첫날 도착하면 사무실에 귀중품과 휴대폰, 읽고 쓸 거리들을 자발적으로 반납하게 되어 있다. 다이어리를 반납할 때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쿨하게 모든 속세의 물건들을 반납하고 1인실 방에 들어가자 사방이 고요해지는 느낌이었다. 휴대폰 없이 산 적은 있어도 책도 노트도 없었던 경험은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했다. 게다가 묵언이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사색과 숨쉬기밖에 할 수가 없었다. 


명상코스 중에는 기본적으로 4시에 기상하고 9시 반에 취침하며 하루 3시간은 의무적으로 명상 홀에서 단체 명상을 하고 1시간 정도 법문을 들어야 했다. 그 외에 8시간은 자율적으로 명상 홀이 나 숙소에서 명상을 할 수 있었다. 즉 하루 12시간은 명상을 하거나 법문을 듣는, 완벽한 스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거의 하루 내내 눈을 감고 있는 셈이다!

담마코리아 10일 코스 시간표


나는 방에서 혼자 있으면 계속 잡생각이 들고 눕고 싶다,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명상이 잘 되든 안 되는 무조건 명상 홀로 나갔다. 겉으로는  11시간을 열심히 명상하는 성실한 수련생이었지만, 속에는 온갖 망상과 번뇌가 가득했다. 마음속에서 나는 10년 전을 회상했다가 10년 뒤를 계획했다가 혼자 상상 속에 울고 웃었다. 가끔 수련하다가 몰래 눈을 떠서 다른 사람들은 잘 하고 있나 보곤 했다. 선정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련생들이 정말 실제로 명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처럼 딴생각도 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처음 3일은 '아나빠나'라고 불리는 호흡명상을 하게 된다. 호흡에 집중하며 몸의 감각을 예리하게 만드는 연습이다. 첫날은 그저 호흡을 지켜본다. 둘째 날은 코 전체에서 시작해서 입술 위까지의 큰 삼각형 내에 감각에 집중한다. 셋째 날은 좀 더 범위를 좁혀 코끝부터 입술 위까지의 작은 삼각형 내에 감각을 집중한다. 이 아나빠나 기간 동안은 자세를 바꾸거나 다리를 편하게 하는 것도 허용이 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랫동안 앉아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처음엔 갑갑하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다. 말이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지 마음속에서는 온갖 망상이 가득했다. 문제는 딴생각을 해도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라리 명상에 집중하는 게 시간이 잘 갔다. 


명상하다가 자꾸 눈물이 났다. 첫날은 가족들 생각에 눈물이 났다. 둘째 날은 회사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 눈물이 흘렀다. 셋째 날은 명상 마지막에 챈팅을 듣다가 울어버렸다. 여기서는 모든 명상의 마무리에 고엔카 선생의 챈팅이 함께하는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이라고 말하면 수련생들이 ‘사두 사두 사두’(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동의합니다)라고 답하며 명상을 마무리한다. 어떤 종교적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동의하는 사람만 답을 하면 되었다. 늘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세상 모두가 행복해도 너만은 불행하면 좋겠어,라고 뾰족하게 떠 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 나는 ‘사두 사두 사두’를 말하지 않았다. 셋째 날도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그 사람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가 가장 용서하지 못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상황에 끌려다녔던 나 자신이었다. 나는 ‘사두 사두 사두’를 거부하면서, 그렇게 무력하고 어리석었던 나 자신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절대 행복해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나 자신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진심으로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사두 사두 사두’를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넷째 날부터 위빠사나 명상에 들어간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에서 확장하여 이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이 몸의 미세한 감각을 순차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이때부터 하루 3번의 단체 명상 시간에는 1시간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쥐가 나고 몸이 가려워도 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감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딧타나’(강한 결정심)이라고 불렀다. 첫 아딧타나는 충격이었다. 단지 앉아 있는 게 이토록 힘들 수 있다니 놀라웠다. 처음 30분은 할 만하다가, 45분째가 되면 미칠 것 같았다. 마지막 10분은 명상을 포기하고 머릿속으로 아이돌 노래를 불렀다. 노래 하나에 3분이라고 가정하면 대략적인 시간 계산을 할 수 있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다리 저림을 참지 못하고 몰래 다리를 움직여 자리를 바꾸었는데 바꾼 그 자리에서 쥐가 날 때였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인체공학적으로 방석을 배치해서 고통을 줄여보려 해도, 한 자세가 오래 계속되면 무조건 어딘가가 아팠다. 영원히 안 끝날 것 같던 한 시간의 명상이 끝난 후 나는 또 눈물이 났다. 편안히 앉아있는 것조차 한 시간이 되면 고통스러운데 세상에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이란 건 없겠구나,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동안 내가 해 온 모든 일들은 그저 한 자세가 고통스러우면 다른 자세로 도망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고통이 찾아왔다. 이젠 정말 자리를 바꾸지 않은 채 현재의 고통을 직면하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움은 부정성이 시작되는 때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 무의식에서 시작되는데 의식으로 올라올 때쯤에는 너무나 강렬해져서 우리를 압도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관찰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개인 비서를 고용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날 때마다 비서가 말하겠지요, "보세요. 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나 화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으므로 하루내내 교대로 일하는 세 명의 비서가 필요합니다. 그럴만한 경제적 여유가 된다고 칩시다. 화가 나기 시작할 때, 비서가 갑자기, "보세요. 화가 일어났어요." 라고 합니다. 나는 맨먼저 그를 타박할 것입니다. ‘멍청아, 나를 가르치라고 월급을 주는 줄 알아?’ 나는 이미 너무 화가 나서, 그런 좋은 충고도 효과가 없습니다.

지혜가 있어서 그를 꾸짖는 대신, “아주 고마워. 이제 앉아서 내 화를 관찰해야겠어.” 라고 말한다고 해 봅시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내가 두 눈을 감고 화를 관찰하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사람이나 사건의 대상이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화 그 자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지요. 나는 단지 그 감정의 외부적인 자극요인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를 더 크게 만드는데 기여할 뿐 해결책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부정성이나 감정을 그 원인이 된 외부 대상으로부터 따로 떼어내어 관찰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한 어떤 사람이 진정한 해결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서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동시에 신체적으로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호흡이 정상 리듬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부정성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의 호흡은 거칠어집니다. 이것은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미세한 수준에서는, 생화학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몸에 어떤 감각이 일어납니다. 모든 번뇌는 몸 속에서 이런 저런 감각들을 발생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마음 속의 추상적인 번뇌, 즉 추상적인 공포, 화, 열정 등을 관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훈련과 연습으로 호흡의 움직임과 신체의 감각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정신적 번뇌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호흡과 감각들을 관찰함으로써 사실상 정신적 번뇌를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면하고 있는 것이죠. 그 결과 번뇌는 힘을 잃게 되고, 번뇌가 더 이상 과거처럼 우리를 제압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한다면 번뇌는 자연스럽게 모두 사라지고, 부정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 스위스 베른 고엔카 선생님 강연 내용 중에서 


전문은 담마코리아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korea.dhamma.org/ko/reference/%EC%82%B6%EC%9D%98-%EC%98%88%EC%88%A0art-of-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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