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초기불교 순례_임승택 교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91-94

91. 무명無明

무명은 편견에 빠진 상태

사성제 모르는 것도 무명 무명 제거가 12연기 취지


무명이란 무엇인가. 

늙음·죽음老死으로 귀결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처음 등장하는 항목이다. 이것을 조건으로 지음行 이하 의식識이라든가 정신·물질名色 따위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나머지 십이연기의 모든 지분들은 바로 이 무명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무명이 있을 때 나머지 지분들이 있고 무명이 없으면 나머지 모든 지분들도 없다. 무명이 발생하므로 나머지 지분들이 발생하고 무명이 소멸하면 나머지 모든 지분들도 소멸한다"

결국 늙음·죽음老死이라는 괴로움의 실존은 무명이라는 장막에 갇힌 까닭에 맞이하게 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이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이러한 최초의 무명을 제거하는 것을 본래의 취지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무명이란 빨리어Pāli로 아비디야avidyā이며 '지식의 결핍nescience'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십이연기의 무명이란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능동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은 어떠한 사실에 대해 순박하게 모르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무명이란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부적절한 사고와 정서에 휩쓸리는 경우를 가리킨다.

무명의 의미는 뒤따라 발생하는 지음行을 떠올릴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예컨대 누군가를 오해하여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해졌다고 치자. 그러한 불편한 심경은 몸身이나 말口이나 마음意의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알게 모르게 더욱 뒤틀리게 한다. 거기에서 그 상황을 야기한 최초의 오해를 무명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불편하고 부적절한 정서와 행위는 지음 이하의 지분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이와 같은 왜곡된 과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무명이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로 일관되게 설명된다(SN. II. 4 등). 즉 인간 존재가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고성제苦聖諦), 그것의 원인은 내면의 갈애에 있다는 것(集聖諦), 그러한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滅聖諦),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道聖諦)에 대해 모르느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결국 사성제를 모르는 까닭에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적·육체적 과정들이 촉발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명이란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서 헤매는 상태에 다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탐욕과 갈애를 제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실 사성제를 깨닫는 과정에는 괴로움에 대한 완전한 이해pariññāta, 갈애의 끊음pahīna, 소멸의 실현sacchikata, 팔정도의 닦음bhāvita이 포함된다. 따라서 무명의 제거를 통해 십이연기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이러한 사성제의 체득과 동일한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부 경전에서는 십이연기의 전체 내용을 사성제의 구조에 편입시켜 설명하기도 한다(AN. I. 177).

십이연기에 대한 통찰은 단순한 두뇌게임이 아니다. 이것은 사성제에 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즉 깨달음의 체험이 있어야만 지음行이라든가 의식識을 걸쳐 늙음·죽음老死으로 연결되는 연쇄적 과정에 매이지 않게 된다. 비로소 초연한 관찰자로 남아 괴로움이 증폭되는 양상을 꿰뚫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십이연기는 깨달음을 이미 실현한 상태에서 얻는 통찰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가르침에 대한 묘사는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의 붓다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반조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92. 법法의 이해

붓다의 가르침이자 귀의 대상

종교로서 불교의 성립 근거

사성제-십이연기가 대표적


법이란 무엇인가. 

가장 대표적인 용례로는 다음을 꼽을 수 있다. "법을 귀의처로 삼아 의지합니다(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이때의 법이란 귀의의 대상으로서 불교하는 종교의 성립 근거가 된다. 따라서 법이란 현실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니는 것으로 반드시 실재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에 근거하여 "목숨을 다하여 귀의합니다(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ṃ).” 라고 표현되는 믿음의 맹세가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귀의의 대상이 되는 법이란 무엇인가. 불교라는 종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그와 동일한 인격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법이란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붓다의 가르침은 경전으로 집성되어 후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경전의 가르침은 붓다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경전은 그 자체로서 법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사성제四聖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는 경전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들은 괴로움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원인과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밝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즉 귀의의 대상이 되는 법이란 '괴로움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것(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붓다는 바로 이것을 통해 스스로의 괴로움을 해소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점에서 나머지 다른 가르침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이란 붓다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며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먼 옛적부터 깨달은 분들이 걸었던 길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한다(SN. II. 106).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일정한 양상과 패턴이 존재한다. 붓다는 이것에 대한 인식을 통해 괴로움을 차단하거나 제거할 수 있었다. 이렇듯 모든  현상은 나름의 인과적因果的 절차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 따라서 법이란 인과적 절차에 해당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아가 사물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원리 혹은 법칙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대의 해석가들은 법에 대해 '실체實體로서 있는 것(dravyaḥ sat)’, '자신의 특성을 유지하는 것(svalakṣanadhāraṇa)’ 등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의 법이란 물리적 법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무명無明으로부터 시작하여 늙음·죽음老死으로 귀결되는 십이연기의 전개 과정은 고정된 법칙이 아니다. 즉 7번째 지분인 느낌受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8번째 지분인 갈애愛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이란 조건에 의한 가능성만을 나타낼  뿐이다.

한편 법이란 논의의 대상이 도는 모든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때의 법에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뉘앙스가 망라된다. 예컨대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와 행위를 표현하는 용어들에도 법이라는 수식이 적용된다(AV. IV. 432).

이것에 근거하여 아비담마불교(Abhidhamma)에서는 실재하는 모든 정신적·물질적 현상을 개념화하여 법의 목록에 포함시킨다. 그들에 따르면 법이란 구체적인 지시 대상을 지닌 개념 일반에 해당한다. 한편 법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자아ātman라든가 영혼jīva 따위는 실제 대상을 지니지 않은 관념적 허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법 해석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만을 다루었던 붓다의 가르침을 계승하려는 취지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비담마의 시도는 개념으로서의 법 또한 약정의 결과에 불과하며 실재성이 없다고 보았던 대승불교와 부딪히면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었다. 



93. 유위와 무위

인간 경험세계 자체가 유위

무위란 열반과 동일한 의미 팔정도 등이 무위 이르는 길


유위有爲는 무엇이고 무위無爲는 무엇인가. 

유위란 빨리어Pāli로 상가따saṅkhata이며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지어낸', '조작되지 않은' 따위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유위란 '만들거나 지어낸 인위적인 것'을 의미하고 무위란 '지어내지도 조작되지도 않은 본래적인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들은 스스로의 눈높이가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인식한다. 이것은 개구리가 움직이는 물체만을 식별할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듯 중생들은 자신의 눈 위에 덧씌워진 색안경을 통해 본 색깔만을 진실한 것으로 오인하고 고집한다. 그러나 그렇게 포착된 색깔이란 사실 색안경을 통해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다섯의 구성요소들 즉 오온五蘊이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경험세계는 결국 스스로 '지어낸 것'이고, '조작해낸 것'이다. 유위란 오온을 비롯하여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일체의 대상dhamma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무위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까. 색안경을 벗고서 있는 그대로를 마주할 때 드러나는 세계로 설명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구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이 무위이다(SN. IV. 359).”이것에 비추어 '지어낸 것'도 아니고 '조작된 것'도 아닌 무위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라앉았을 때 나타나는 경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위란 초기불교 이래로 피안彼岸의 세계로 일컬어진다. 또한 번뇌에 물든 차안此岸의 중생들이 떨치고 건너가야 할 이상향으로 묘사되곤 한다(SN. IV. 373).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소멸된 경지는 열반涅槃으로 풀이되곤 한다(SN. IV. 251). 따라서 무위란 열반과 동일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열반과 무위의 실현은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에 해당한다. 실천·수행이란 결국 유위로부터 무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도, 삼매의 닦음도, 사념처와 팔정도도 무위에 이르는 길로 설명된다(SN. IV. 360). 이들을 닦음으로써 스스로 지어낸 경험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면 그것으로 무위에 도달한 셈이다.

그러나 무위의 성취란 쉽지 않다. 인간이 살아가는 경험세계 자체가 유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구사하는 개념들 역시 유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지금 언급하고 있는 '무위'라는 명칭마저 언어적 관습을 통해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도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얼마든지 개입될 수 있다. 무위를 마치 손안에 거머쥘 수 있는 전리품인 양 오해하는 사례들이 곧 그것이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오인하는 것과 유사하다. 개념적 사고의 틀 안에서 획득하는 무위란 착각에 불과하다.

무위란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무위를 잡으려는 시도는 물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어리석음에 비유할 수 있다. 무위란 그러한 시도들마저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란 의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비우고 버리는 것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무위에 이르는 길로 언급된  사마타와 위빠사나, 삼매의 닦음, 사념처와 팔정도 따위도 이러한 맥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이 무위에 도달하는 길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스스로를 비우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

94. 무아·윤회 논쟁

무아 실현은 윤회 없는 상태

무아·윤회 모순 주장은 잘못

'나' 고집 않으면 윤회도 없어


무아란 무엇이고 윤회란 무엇인가. 

무아란 '나'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고 윤회란 그러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당혹감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중대한 모순이 내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사실 '무아·윤회 논쟁'은 한국 불교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쟁점의 하나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나름의 논지를 펼쳤다.

붓다는 오온五蘊으로 드러나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질현상色이든 느낌受이든 경험세계의 모든 것은 '나'의 바람이나 소망과 상관없이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무지 없다. 요컨대 오온이란 '나의 것'도 아니고 '나'도 아니며 '나의 자아'도 아니다. 그렇다고 오온 밖의 또 다른 '나'를 설정할 수도 없다. 설령 그러한 '나'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지음行이나 의식識 따위의 오온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온과 별개인 '나'를 내세우는 것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한 이유에서 무아이다.

윤회輪廻란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괴로움의 현실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괴로움의 지속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일컬어 윤회라고 한다. 이것은 무아를 망각한 상태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거짓된 '나'를 내려놓지 못한 까닭에 초래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의 연속이 곧 윤회이다.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인 열반 혹은 해탈이란 바로 이 윤회로부터 벗어난 경지에 다름이 아니다.

무아와 윤회의 가르침은 거짓된 '나'에 붙잡힌 상태로부터 벗어나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회란 무아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즉 무아와 윤회는 본래부터 모순적이다. 무아의 실현은 곧 윤회가 없는 상태이다. 혹은 반대로 윤회에 매여 있다는 것은 무아를 모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아와 윤회가 모순된다고 해서 당혹감을 느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이들의 관계에 당혹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곧 이상과 같은 교리적 맥락을 놓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윤회란 없다. 바로 이러한 경지야말로 초기불교에서 지향했던 이상향이다.

후대의 아비담불교Abhidhamma는 윤회의 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한다. 그들은 극복해야 할 타깃을 명확히 하려는 취지에서 그러한 작업을 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비담마의 정교한 윤회 해석은 윤회 자체를 옹호하려는 취지로 오인되는 듯하다. 그 결과 아비담마적 분석을 통해 무아와 윤회를 짜깁기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연기설緣起說을 바탕으로 무아와 윤회를 회통시키려는 견해들이 그러하다. '무아·윤회 논쟁'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억지스러운 입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무아·윤회 논쟁'의 파장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논쟁 자체에 내포된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했더라면 이러한 수고로움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기불교 순례'라는 본 연재를 마치는 시점에서, 필자는 초기불교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자체의 논리에 충실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그렇게 할 때 붓다의 가르침이 오해의 소지 없이 온전하게 그 의미를 드러내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본 연재를 집필하는 내내 견지하였던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끝>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