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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초기불교 순례_임승택 교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81-90

81. 태어남(생生)

 늙고 죽어가는 괴로움의 원인

 현재 마음따라 고통극복 가능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11번째에 해당한다. 이것은 늙음·죽음(노사老死)의 조건이 되며 또한 자체적으로는 있음有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태어남은 특정한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생명체의 종류만큼 다양한 양상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인간으로의 태어남, 동물로의 태어남, 천신으로의 태어남 등이 있다.

태어남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 안에서의 태어남, 생겨남, 들어감, 자라남, 경험요소(온蘊)의 나타남, 영역(처處)의 획득이다. 이것을 태어남이로 한다(SN. II. 3).”바로 이것으로 인해 12번째 지분인  늙음·죽음이 발생하게 된다. 만약 애초에

태어남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노쇠라든가 사라짐의 괴로움을 겪을 이유가 없다.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감관의 쇠퇴라든가 육체의 무너짐이라는 늙음·죽음의 괴로움을 걸머지게 된다.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을 윤회설에 결부시키면 태어남이란 죽고 난 이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내세來世의 재생을 의미한다. 다음의 경문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다른 몸을 받는다. 그는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남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늙음·죽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이라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SN. II. 24).”이 경우의 태어남은 전생前生에서 누적된 어리석음이 후생後生의 다른 몸으로 이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일단 태어나면 바로 그 생에서는 늙음·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한평생 받아야 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업에 의해 미리 고정된다는 잘못된 견해에 빠지게 될 위험성도 없지 않다(SN. III. 212).

이러한 사고는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더라도 괴로움의 완전한 종식은 불가능하다는 자포자기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나아가 실천·수행의 목표가 현생에서 얻어지는 인격적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세에 재생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이점에서 십이연기의 태어남을 죽음 이후의 재생에 국한시키는 해석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붓다는 전생이나 후생이 아닌 당면한 현실로서 드러난 태어남과 죽음에 관심을 가졌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일 것이다.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세상에 출현하지 않을 것이고, 여래가 가르친 법과 율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이러한 세 가지 법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하였고, 여래가 가르친 법과 율도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AN. V. 144).”

붓다는 전생에 압도되어 현생의 삶을 체념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현재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극복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법을 제거하지 못하면 태어남도 제거할 수 없고, 늙음도 제거할 수 없고, 죽음도 제거할 수 없다.

무엇이 셋인가. 탐냄을 제거하지 못하고, 성냄을 제거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 법을 제거하지 못하면 태어남도 제거할 수 없고, 늙음도 제거할 수 없고, 죽음도 제거할 수 없다(AN. V. 144).” 



82. 있음(유有)

집착을 조건으로 발생

십이연기 지분 가운데 가장 난해한 개념 간주


있음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10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있음은 태어남生의 조건이 되며 또한 자체적으로는 집착(취取)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이것에 대한 경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있음에는 이러한 3가지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의한 있음(욕유欲有), 물질현상에 의한 있음(색유色有), 물질현상을 지니지 않은 있음(무색유無色有)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있음이라고 한다(SN. II. 3).”

초기불교 경전에서 있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의 인용문 또한 해설이라기보다는 양상의 나열에 불과하며, 이것만으로는 명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있음은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개념의 하나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태어남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그 의미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있음이란 태어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무엇이다. 이것은 태어남의 여건 혹은  배경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있음에 대한 이해를 위해 삼계三界의 가르침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삼계란 감각적 욕망에 지배되는 세계(욕계欲界), 물질현상에 지배되는 세계(색계色界),물질현상을 벗어난 세계(무색계無色界) 등을 가리킨다. 이들 삼계는 다시 지옥계·축생계·아귀계·수라계·인간계·천상계 등의 육도(六道, 六趣) 윤회의 세계로 나뉜다. 이들 중에서 앞의 넷은 괴로움으로 점철된 세계이며 뒤의 둘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인 세계이다. 특히 뒤의 둘 가운데 인간계는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를 가리키며, 천상계는 신神들의 영역으로서 물질현상을 벗어난 차원의 세계까지를 포함한다.

삼계는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반복되는 장소이다. 인간계에 속한 중생들은 어머니의 모태를 통한 태생胎生의 방식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축생계의 중생들은 태생胎生과 난생卵生 등으로, 지옥계·아귀계·수라계·천상계에 속한 중생들은 마음으로 홀연히 나타나는 화생化生으로 태어난다. 한편 인간계의 일부 수행자들은 현재의 상태 그대로 홀연히 천상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DN. I. 215 이하).

십이연기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은 바로 이러한 양상들이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SN. II. 3). 이러한 삼계는 앞서 언급한 3 가지 유형의 있음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있음에 대해 후대의 주석가들은 '업의 있음(업유業有, kammabhava)'으로 풀이한다. 전자는 새로운 몸으로 재생하도록 이끄는 '업 지음'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결과로서 받는 '과보로서의 업'을 가리킨다. 이  해석에 따르면 있음이란 내생來生의 태어남으로 연결되는 현생現生의 업 지음일 수도 있고, 또한 전생前生의 업을 조건으로 한 현생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있음이란 돌고 도는 윤회의 굴레에서 죽고 난 이후 새로운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씨앗과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있음은 갖가지 모습의 태어남과 늙음, 죽음이 펼쳐지는 연극무대에 비유할 수 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각자 고유한 대본을 지닌다. 그러하듯이 중생들은 자신이 속한 무대에서 자신들의 각본대로 살아간다. 그들을 위한 무대장치와 각본은 전생에 지은 업으로 구성되며, 또한 거기에 현생에서 품는 결의나 의지가 일부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업 지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존재로의 태어남이 펼쳐진다. 이러한 태어남이란 죽고 난 이후의 재생일 수도 있고, 현생에서 경험하는 거듭남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83. 집착取

집착은 특정한 대상을 움켜쥐려는 정신 작용(괴로움의 직접적 연료)


집착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9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집착은 있음有의 조건이 되며 또한 자체적으로는 갈애愛를 조건으로 발생한다. 집착이란 특정한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움켜쥐거나 붙잡으려는 정신적 작용을 가리킨다. 이것을 통해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펼쳐지는 있음의 무대가 뒤따르게 된다. "집착에는 이러한 4가지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욕취慾取), 

견해에 대한 집착(견취見取), 계율과 서원에 대한 집착(계금취戒禁取),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아어취我語取). 비구들이여,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SN. II. 3).”

감각적 욕망이란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욕구를 가리킨다. 이것은 매혹적이거나 유혹적인 대상들로부터 발생한다. 농토, 대지, 황금, 소나 말, 노비나 하인, 부녀나 친척 따위가 그것이다(Sn. 769게송). 특히 이것은 본능적 쾌락 가운데 으뜸인 성적性的 행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용례로 나타난다(AN. V. 264). 감각적 욕망은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지만 반드시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건전한 경제생활의 동기가 될 수도 있고, 재가자의 경우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한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다.

한편 견해는 어떠한가. 이것 또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견해의 유무에 있다. 인간은 다방면에 걸쳐 바른 견해를 필요로 하며 이것을 통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여지를 차단한다. 그러나 견해란 양날의 칼과 같이 때로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견해에 갇혀 자기 자신을 경직되게 하고 또한 타인을 억압하게 된다. 바로 이것으로 인해 동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대규모 살육이나 전쟁 혹은 종교적·이데올로기적 박해가 발생하곤 하였다. 

계율과 서원에 대한 집착은 대체로 종교인의 경우에 해당한다. 계율을 준수하고 서원을 세우는 것은 종교적 삶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인격을 다듬과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거 또한 지나칠 경우 해로운 독약으로 바뀔 수 있다. 예컨대 모든 젊은이가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에 얽매여 군 입대를 거부한다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또한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는 사례로서, 종교적인 신념으로 수혈을 거부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이란 무엇인가. '나'로 여겨지는 현상들에 붙들려 스스로를 특정한 사고의 틀 안에 가두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의 몸에 매인 견해'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담마상가니'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물질현상을 자아라고 관찰한다. 혹은 자아가 물질현상을 소유한다고, 혹은 자아가 물질현상이라고, 혹은 물질현상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느낌·지각·지음·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Dhs. 212~213).”

이상에서 언급한 욕망의 대상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부정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들은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들에 대해 움켜쥐거나 붙잡으려는 집착이 생겨나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집착과 더불어 스스로의 모습을 고착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집착의 노예가 되어 욕망의 울타리 안에 갇히는 비극이 야기된다. 바로 이것을 조건으로 갖가지 괴로움의 실존이 펼쳐지는 있음의 무대가 뒤따르게 된다. 집착이란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이 불타오르도록 만드는 연료에 비유되기도 한다(SN. II. 84-85).


   

84. 갈애愛

갈애는 집착의 조건이며 나락에 떨어지는 원인

그 마지막은 권태와 절망


갈애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8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갈애는 집착取의 조건이 되며 또한 자체적으로는 느낌受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갈애란 목마름으로 물을 구하듯 특정한 대상에 온통 쏠려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것으로 인해 집착에 빠져 온갖 실존의 괴로움을 걸머지게 된다. "갈애를 기르는 자들은 집착의 대상을 기르는 자들이고, 집착의 대상을 기르는 자들은 괴로움을 기르는 자들이며, 괴로움을 기르는 자들은 태어남과 늙음·늙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따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SN. II. 109).” 

갈애는 눈·귀·코 따위의 여섯 감관을 통해 발생한다. "갈애에는 6가지가 있다. 보이는 것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마음현상에 대한 갈애이다(SN. II. 3).”이렇듯 갈애는 감관에 따라 여섯으로 분류된다. 이와 관련하여 거북이의 사지를 노리는 재칼의 비유가 있다. "이 거북이가 사지와 목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내밀면 바로 그것을 붙잡아 끄집어내 먹어야지… (SN. IV. 178).”이렇듯 여섯 감관을 통해 갈애에 붙잡히는 순간 괴로움의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

갈애는 십이연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교리적 가르침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특히 이것은 사성제四聖諦에서 괴로움의 원인(집성제集聖諦)으로 직접 거론되며,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욕애慾愛), 있음에 대한 갈애(유애有愛),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비유애非有愛) 등으로 다시 분류된다(SN. V. 421). 사성제에 대해 십이연기가 지니는 차별성은 바로 그것이 무명에서부터 느낌受에 이르는 연쇄적 조건들을 통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점이다. 또한 집착取과 있음有 따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란 생리적 욕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예컨대 식욕食慾이라든가 성욕性慾 따위가 그것이다. 물론 적절한 생리적 욕구는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전한 생리적 욕구에 갈애의 불길이 옮겨 붙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욕망의 불구덩이에 빠져 통제 불능의 상황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의 종착점은 '권태' 혹은 '절망'이다. 십이연기의 마지막 지분에 해당하는 늙음·죽음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있음에 대한 갈애'와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는 견해見의 문제와 관련된다. 전자는 죽고 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영원한 무엇에 대한 견해상주론常住論와 연관되어 있다. 후자는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허무주의적 견해(단멸론斷滅論)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현재의 자기를 영속화하려는 심리를 반영하거나 혹은 현실의 불만에 대한 자포자기적 경향과 통해 있다. 이들 두 가지로 대변되는 '견해에 대한 갈애'는 인류사를 통해 끊임없이 다툼·싸움·논쟁·상호비방·중상모략·거짓말 따위를 조장해 왔다(Sn. 862~877게송).

그렇다면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6가지 분류에서 보았듯이 갈애란 눈·귀·코·혀·몸·마음으로 와 닿는 현상들에 대해 즐겁거나 기분 좋은 것으로 간주하여 탐닉할 때 생겨난다. 당연히 갈애를 제거하는 방법은 이와 다르게 관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을 무상하다고 보고, 괴로움으로 보고, 무아라고 보고, 질병과 같은 것으로 보고, 두려움으로 본다면 그들은 갈애를 제거한다(SN. II. 110~111).”



85. 느낌受

접촉을 조건으로 발생

고락 등 일체감정 망라 느낌에 지배되면  '노예'


느낌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7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느낌은 갈애愛의 조건이 되며 또한 자체적으로는 접촉觸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이것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일체의 감정을 망라한다. 십이연기의 느낌은 발생 경로에 따라 여섯으로 분류된다. "느낌에는 이러한 6가지가 있다. 눈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귀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코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혀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몸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이다(SN. II. 3).”

느낌은 다섯의 경험적 요인 즉 오온五蘊의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즉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온은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는 전형적인 5가지이다. 오온의 가르침에서는 이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라든가 경과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순간순간 경험하는 이들 현상을 자기자신과 동일시할 때 괴로움이 증폭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오온설은 이들 각각에 대해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는데 주력한다. 오온에 귀속되는 느낌은 즐겁거나 괴로운 감정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십이연기에서의 느낌은 첫 번째 지분인 무명으로부터 비롯되어 마지막 지분인 늙음·죽음이 구체화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등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개념이지만 전달하는메시지가 다르다. 오온과 달리 십이연기의 느낌은 그것이 발생하는 인과적 조건과 함께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도 밝힌다. 따라서 이것은 각자가 경험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사색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에 입각할 때 무명無明이라든가 지음行 따위가 존재하는 한에서 느낌의 발생은 불가항력적이다. 전생에 지은 것이든 혹은 현생에 뿌린 것이든 이전에 지녔던 인식과 행위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금의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것이 6가지 감관의 접촉을 통해 드러나는 느낌의 양상이다. 예컨대 누군가를 오해하여 그에게 해로움을 끼쳤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그 앙갚음이 되돌아온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눈이나 귀나 몸을 통해 경험하는 괴롭거나 쓰라린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의 발생을 억지로 거스르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자체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설령 나쁜 행위의 과보로 괴로움을 겪는다손 치자. 마땅히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이러한 부류의 개인적인 느낌들은 어느 누구도 대신 겪어  줄 수 없다. 어쩌면 각자만의 고유한 인생은 감당하기 힘든 괴롭고 쓰라린 느낌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곧 그 사람의 인격을 의미한다.

느낌에 지배되면 본능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바로 그 순간부터 탐욕과 분노의 사슬에 매이게 된다. 갈애愛와  집착取과 있음有으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의 나머지 지분들은 그러한 과정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늙음·죽음老死으로 대변되는 괴로움의 실존은 그것의 최종 귀결이다. 느낌은 고귀한 삶과 저속한 삶으로 갈라지게 만드는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매이지 않고 느끼고,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에 매이지 않고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잘 배운 고귀한 제자이다.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에도 매이지 않는다(SN. IV. 209~ 210).”



86. 접촉觸     

안팎 대상과의 접촉 의미

희노애락 반응도 뒤따라 새로운 경험세계 출발점


접촉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6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접촉은 느낌受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 자체는 여섯 영역六入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접촉이란 눈 따위의 여섯 감관六根과 그들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六境 그리고 그들 각각을 식별하는 의식識이 만나 이루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접촉은 다음의 여섯으로 분류된다. "접촉에는 6가지가 있다. 눈에 의한 접촉, 귀에 의한 접촉, 코에 의한 접촉, 혀에 의한 접촉, 몸에 의한 접촉, 마음에 의한 접촉이다(SN. II. 3).”

접촉이란 말 그대로 안팎의 대상과의 접촉을 의미한다. 이것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따위의 정서적 반응이 뒤따르게 된다. 또한 구체적인 내용을 지닌 인식활동이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새로운 경험세계가 펼쳐지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은 그때 그때 발생하는 접촉을 통해 펼쳐지는 한바탕 놀이인 것이다. "괴로움이란 조건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접촉이다(SN. II. 33).”

접촉이란 외부 대상과의 무미건조한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접촉이란 번뇌를 지닌 것으로 집착을 낳는다(Ps. I. 22)."라는 경전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미 접촉의 단계에서부터 주관적인 편견과 왜곡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 동물들은 뱀 따위의 파충류 동물을 본능적으로 혐오한다고 한다. 덩치 큰 고릴라도 갑자기 뱀을 만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한다. 이것은 수백만 년 전부터 누적시켜 온 영장류 고유의 성향에 따른 것이다.

이렇듯 눈이나 귀로 안팎의 현상을 접촉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누적시켜온 습관과 성향이 작동한다. 눈으로 보든 귀로 듣던 무언가를 마주하는 그 순가부터 저마다의 성향에 따른 고유의 반응들이 전개된다. 이미 자신들만의 색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경험하는 색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동일한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감정들을 갖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경험세계에서 완전무결하게 객관적인 사물을 기대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한편 접촉은 정신·물질현상名色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Sn. 872게송).  특히 그때의 접촉은 언어적 접촉(명명촉命名觸)과 신체적 접촉(유대촉有對觸)으로 나뉜다. 전자는 개념적 사고에 의한 정신적 접촉을 가리키고 후자는 눈·귀·코·혀·몸이라는 다섯 감관에 의한 물질적 접촉을 가리킨다. 이러한 2가지는 접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느낌受과 갈애愛 따위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대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또한 경전에는 무명과의 접촉(무명촉無明觸)이라는 용례도 나타난다(SN. III. 46). 이것은 무지로 인해 그릇된 견해를 품게 되거나 혹은 잘못된 세계관에 빠지는 경로를 밝히기 위한 용도로 이해된다.

접촉의 다양한 용례는 경험세계 전반에 걸쳐 이 개념이 지니는 중요성을 나타낸다. 접촉은 느낌과 갈애와 집착과 있음이라는 십이연기의 나머지 지분들을 길러 내는 자양분에 해당한다.

따라서 접촉을 꿰뚫어 아는 것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접촉이라는 자양분을 두루 알게 되면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세 가지 느낌에 대해서도 두루 알게 된다. 고귀한 제자가 세 가지 느낌에 대해 두루 알게 되면 그에게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SN. II. 99).”



87. 여섯 영역六入

감관 중심으로 한 인식발생들

육체적 기관과 동일시는 잘못

왜곡된 경험세계의 매개 역할

      

여섯 영역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5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여섯 영역은 접촉觸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들 자체는 정신·물질현상(명색名色)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여섯 영역이란 눈이나 귀 따위의 감관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 발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안팎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여섯 영역이란 무엇인가? 눈의 영역, 귀의 영역, 코의 영역, 혀의 영역, 몸의 영역, 마음의 영역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섯 영역 이라고 한다(SN. II. 3).”

여섯 영역은 십이처十二處의 가르침과 일부 중첩된다. 십이처란 눈眼과 시각대상色,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몸身과 감촉觸, 마음意과 마음현상法을 가리킨다. 이들은 인간의 내용을 6쌍의 12가지로 단순 분류한 것이다. 이들 각각은 새로운 경험이 성립하는 토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들 각각에는 개인마다의 독특한 경험방식에 따른 왜곡과 변형이 얼마간 깃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동일한 맛이나   냄새라고 할지라도 저마다 다른 농도와 강도로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십이처의 가르침은 인식의  한계를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무지하면 자신이 보았거나 들었던 내용을 궁극의 실재로 오인하기 쉽다. 또한 경험세계를 벗어난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난제들에 휘말려 갖가지 사변적 유희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십이처가 가져다주는 교훈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십치처의 교설에서는 각각의 항목들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또 어떤 과정을 통해 괴로움의 실존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을 보완하는 가르침이 십이연기의 여섯 영역이다.

여섯 영역은 십이연기의 첫 지분인 무명無明에서부터 마지막 지분인 늙음·죽음老死으로 귀결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등장한다. 특히 여섯 영역은 4번째 지분인 정신·물질현상名色과 구분되며, 바로 그들을 조건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여섯 영역을 눈·귀·코 따위의 육체적 기관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여섯 영역이란 정신·물질현상이 6가지 감각채널의  방식으로 분화되는 양상을 묘사한  것이다. 바로 이 단계를 걸쳐 접촉觸과 느낌受과 갈애愛 따위의 연쇄적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여섯 영역은 눈·귀·코 따위의 여섯 감관(육근六根)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들은 보거나 듣거나 맡는 따위의 여섯 대상(육경六境)과 함께 눈의 의식이나 귀의 의식 등 여섯 의식(육식六識)까지를 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감관根과 대상境과 의식識이 6가지 패턴으로 한 데 어우러지는 과정을 포착해낸 것이다. 따라서 여섯 영역은 6가지 패턴의 감관과 대상과 의식 모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들로써 그 다음 지분인 접촉觸의 발생 조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이러한 설명은 여섯 영역에 앞서 3번째 지분인 의식識과 4번째 지분인 정신·물질현상名色이 미리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눈·귀·코 따위는 괴로움苦이며 무아無我로 설명되곤 한다. 또한 이들의 달콤함과 위험함을 바른 지혜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강조된다. 그러나 생리적 기관으로서의 눈 따위가 괴로움일 수 없는 문제이다. 또한 이들 자체가 달콤하거나 위험한 것일 수도 없다. 그렇지만 여섯 영역에 배속된 이들 각각에는 무명無明에서부터 지음行을

걸쳐 의식과 정신·물질현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기들이 전제된다. 바로 이러한 계기들을 포함하는 까닭에 여섯 영역이라는 인식의 틀은 왜곡된 경험세계로 넘어가는 매개 역할을 하게 된다. 



88. 정신·물질현상名色     ​ 

의식을 조건으로 발생, 개체 사물의 성립 근거,

고의 구체적 단계 양상

      

정신·물질현상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4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정신·물질현상은 여섯 영역六入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들 자체는 의식識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정신이란 빨리어Pali로 나마na-ma라고 부르며 '이름' 혹은 '명칭'이라는 원래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것과 짝을 이루는 물질현상이란 루빠ru-pa를 번역한 것으로 '명칭에 의해 지시되는 형태'를 가리킨다. 정신은 어떠한 형태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고 물질현상은 그것을 통해 지시되는 형태 혹은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물질현상은 이름과 형태를 지닌 개체화된 사물의 성립 근거가 된다. 이것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은 다음과 같다. " 정신·물질현상이란 무엇인가. 느낌受·지각想·의도思·접촉觸·마음냄作意이 있다. 이것을 정신名이라고 한다. [땅地·물水·불火·바람風의]4가지 요소四大와 4가지 요소에 의존한 물질현상(사대소조四大所造 色)  이 있다. 이것을 물질현상色이라고 한다. 후대의 해설가들은 여기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해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 전제되어져야 할 최소한의 심리적 요소들로 간주하였다.

정신·물질현상은 인식의 발생에 필요불가결한 사항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들은 '식별하여 아는 작용'으로서의 의식을 발생시킨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현상이 발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가 의존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정신·물질현상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고 또한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현상이 있다.(SN. II. 104). " 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괴로움의 발생을 10단계로 설명하는 십지연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두 지분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드러낸다

정신名이란 특정한 정신적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념적 사고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인식능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이라는 4가지 비물질적 요인(사무색온四無色蘊)들 전체로 규정되기도 한다('잡아함경'298경). 한편 물질현상色은 땅·물·불·바람의 4가지 요소와 이들에 의존한 것들로 언급된다. 그런데 이들 또한 차가움이라든가 뜨거움 따위로 경험된다고 언급되듯이 단순한 물리적 실재가 아니다(SN. III. 86).

따라서 물질현상 역시 인식능력과 긴밀한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신·물질현상은 명칭이라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으며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현실의 경험에 앞서 요구되는 정신적·육체적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전제될 때 여섯 영역六入을 통한 일상의 사고와 정서가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내면의 인지적 ·생리적 능력이 경험에 앞서 미리 작동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늙음·죽음老死이라는 실존적 괴로움이 전개되는 과정을 내부적인 원인으로 규명한다.

정신·물질현상에 배속된 느낌과 접촉은 십이연기 정식 지분 가운데 7번째와 6번째의 것들이기도 하다. 독립된 지분으로서의 느낌과 접촉은 여섯 영역이라는 감각채널을 통한 것으로 실제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느낌과 접촉은 꿈속에서와 같이 오직 마음에 속한 것으로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정신·물질현상에서 이후의 지분들로 넘어가는 과정은 실재론적 분화의 방식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예컨대 정신·물질현상에이 눈이나 귀 따위의 여섯 감관으로 분열·증식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괴로움의 실존이 구체화되는 단계적 양상 정도로만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89. 의식識

의식을 조건으로 발생

개체 사물의 성립 근거 고苦의 구체적 단계 양상


의식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3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의식은 정신·물질현상名色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것 자체는 지음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의식이란 어떠한 현상을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시거나, 맵거나, 쓰거나, 달거나, 쏘거나, 짠 것 따위를 알게 해주는 것으로 설명된다(SN. III. 87).  이와 같은 의식의 작용은 눈이나 귀 따위의 방식으로도 각기 다르게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의식은 감관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몸의 의식, 마음의 의식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의식이라고 한다(SN. II. 4).” 이렇듯 이식은 감관에 따라 여섯 갈래로 나뉜다. 그러나 십이연기에 배속된 의식은 실제 감관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십이연기에서의 의식이란 과거의 삶에서 누적된 지음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이들은 꿈속에서와 같이 감관에 직접 의존하지 않고서 작동하는 여섯 갈래의 정신적 흐름들이다.

의식이라는 용어의 대표적인 쓰임은 다섯의 경험적 요인들 즉 오온五蘊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가운데 마지막의 그것이다. 그런데 오온의 가르침에서는 의식의 발생 경위에 대해 따지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는 주요내용의 하나로서 의식이 존재하며, 바로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면 괴로움이 증폭된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초점을 모은다. 오온의 가르침은 경험적 요인들 각각에 대해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는 데 주력할 뿐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일부 경전에서는 의식이란 눈眼·귀耳·코鼻 등의 감관根이 시각대상色·소리聲·냄새香 따위의 대상境에 대해 일으키는 반응으로 설명한다(MN. I. 111~112). 그런데 그때의 의식 역시 오온에서와 마찬가지로 경험적 사실을 넘어선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십이연기의 의식은 정신·물질현상名色과 여섯 영역六入 너머의 심연에서 작동한다. 이때의 의식은 과거로부터 누적된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을 통한 잠재적 성향三行을 조건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6가지 감관의 형식을 취하지만 정신적 흐름으로만 존속하면서 경험세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바로 이것을 윤회의 와중에 새로운 생명체로 이어지는 '재생연결의식(결생식結生識, patisandhiviññāṇa)'으로 설명한다. 이와 같이 의식을 윤회의 주체로 바라보는 경우는 초기불교의 경전에도 종종 나타난다(SN. I. 120~122). 이러한 설명대로라면 의식이란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실체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이 실체화된 의식은 경험세계 안에서 그 존재 여부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난점을 지닌다.

또한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이라는 원래의 쓰임으로부터도 비켜난 느낌이 없지 않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무명이 소멸하면 지음이 소멸하고 지음이 소멸하면 의식도 소멸한다(SN. II. 1~2). 따라서 의식이란 무명이 존속하는 한에서만 작용하는 일시적인 것이다.

지음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누적된 지음의 방식을 통해 왜곡되게'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을 조건으로 괴로움으로 귀결되는 십이연기의 나머지 지분들이 뒤따른다. 의식을 온당한 정신작용의 하나로 간주하게 되면 무명이 제거되더라도 의식은 계속될 수 있다는 당혹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90. 지음行

지음은 무명 조건으로 발생 몸·말·마음

영역으로 진행 후대 해석가들 업과 동일시


지음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2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지음은 의식識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것 자체는 무명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지음이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쓰임으로 나타난다. 먼저 의식의 조건이 되는 용례로는 다음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획하고 어떤 것에 대해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의식을 확립시키는 바탕이 된다(SN. II. 65).”여기에서의 지음이란 내면으로 짓는 의도와 계획과 잠재적 성향 따위를 가리킨다. 이것의 누적을 통해 의식이 특정한 방식으로 굳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십이연기를 해설하는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지음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지음에는 이러한 세 가지가 있다. 몸에 의한 지음(신행身行), 마음에 의한 지음意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지음이라고 한다(SN. II. 4).”이것을 통해 지음의 작용이 몸과 말과 마음이라는 세 영역에 걸쳐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몸으로 드러나는 습관적 성향이라든가, 말로써 드러나는 은밀한 의향이라든가, 마음으로 꿈틀대는 의도 따위가 그것이다. 이들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식이란 '여러 겹으로 덧씌워진 지음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지음이란 무명에 기생하여 자라난다. 이것은 진리에 어두운 까닭에 품게 되는 내면의 정서와 감정을 망라한다. 예컨대 어떤 이유로 이웃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고 치자. 한번 뒤틀린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앙금은 깊어만 간다. 마주칠 때마다 불쾌함이 더해 간다. 심지어는 이웃으로 산다는 자체가 불편하게 생각된다. 제발 이사라도 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이웃집 아줌마가 어렸을 적 헤어졌던 친누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 동안 품었던 불쾌한 감정과 생각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지음이란 진리에 눈을 뜨는 순간 활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 없어진다. 한편 십이연기의 지음은 후대의 해석가들에 의해 업業과 동일시에 이른다. 이것은 이전의 삶前生에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으로 풀이되곤 한다. 업이란 미래의 삶으로 이어지는 응보적 힘을 지닌다. 바로 그 결과가 어머니 모태에서 현재의 몸이 이루어지는 첫 순간 작동하는 '재생연결의식結生識'이다. 이러한 의식은 내세에 또 다른 여인이 '나'를 잉태하는 순간 현생에서 지은 '나'의 업을 떠안고서 작동하게 될 그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 해석을 일컬어 '삼세양중인과론三世兩重因果論'이라고 한다. 이것은 업과 윤회의 관념을 십이연기의 가르침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어떠한 해석을 따르든 십이연기의 지음이란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의 것이다. 따라서 내부적이고 잠재적인 작용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지음이란 외부적 현상 일반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이것은 물질현상색·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이라는 五蘊의 하나로 언급된다. 이때의 지음은 잠재적인 것이 아니며 경험세계의 구성요인이 된다. 또한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sabbe saṅkhārā aniccā.'라고 할 때의 지음 역시 경험적 현상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지음이라는 개념은 내부적으로 잠재된 작용과 외부적으로 드러난 현상까지를 망라하는 포괄성을 지닌다. 이것을 통해 초기불교에서는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음이라는 용어에 비추어 '세상은 내면에서 지어가는 방식대로 드러나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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