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물질현상色
내 육체와 외부 물질적 환경까지 망라
물질현상이란 무엇인가. 오온의 첫 번째 항목으로서 느낌이나 지각 따위의 정신현상과 대조를 이루는 물질적 경험내용을 가리킨다. 자신의 몸을 비롯하여 외부적으로 보거나 듣는 감각적 대상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땅의 요소(지대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 라는 4가지 요소(四大)와 4가지로부터 파생된 물질현상(사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설명한다(MN.Ⅰ.185).
이들은 '나'의 육체를 비롯하여 외부의 물질적 환경까지 망라한다. 물질현상은 '나'라는 스펙트럼을 투과하여 경험된다. 뻣뻣하거나 부드러운 것은 땅의 요소에, 흐르거나 적시는 것은 물의 요소에, 뜨겁거나 차가운 것은 불의 요소에, 움직임은 바람의 요소에, 배대된다. 물질현상이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이거나 혹은 이들이 뒤섞인 양상으록 경험된다. 이들은 계량화된 수치로 그 뻣뻣함이나 뜨거움 따위는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에 의존할 뿐이다.
물질현상은 자명하게 포착된다. 몸으로 경험되는 뻣뻣함이라든가 뜨거움 따위는 무엇보다 직접적이다. 이것은 사고나 추리를 통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알려진다. 혹자는 이러저러한 물질현상을 두고 "이들은 과연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라는 따위의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물질현상은 그러한 의문에 앞서 존재한다. 이점에서 그때그때의 물질현상이 먼저이고 그것의 원인이나 조건에 대한 반추는 나중에 속한다.
오온의 물질현상은 관념적 분석이 아닌 즉각적인 경험의 대상이다. 그러나 물질현상은 있는 그대로yathabhutam의 실재가 아니다. 예컨대 어젯밤에 마셨던 시원하고 달콤했던 음료가 아침에 깨어나서 살펴보니 해골에 담긴 빗물이었다고 치자.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시원함도 달콤함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현상은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나' 자신이 처해 있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에 대해 '나'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는 객관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붓다는 물질현상에 대해 무상無常으로, 괴로움苦으로, 무아無我로 관찰하라고 이른다(SN.Ⅲ.21). 무상이란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변화를 가리키지 않는다. 무상의 진리는 물질현상을 통해 드러난 '나' 자신에 이야기이다. 붓다는 오온설을 통해 '내'가 지닌 관점과 태도만을 문제삼고자 했던 것이다. 즉 '나'에 의해 포착된 물질현상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일깨우는 데에 주력하였다. 괴로움과 무아의 가르침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할 때 무리 없는 이해가 가능하다.
붓다는 물질현상에 대한 의욕chandaraga를 없애라고 이른다. 그리하면 그것은 제거될 것이고 뿌리가 잘린 야자수처럼 다시는 자라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SN.Ⅲ.27). 물질현상은 '나'의 바람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원하여 몸을 받은 것이 아니며 또한 늙거나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물질현상에 매달리는 이들은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그리하여 그것의 허구성과 맞딱뜨리게 될 때 비로소 존재의 가벼움에 몸서리를 친다. " '물질현상이 바로 나다' 라는 견해에 사로잡힌 자에게도 물질현상은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바뀐다. 물질현상이 변화하여 다른 존재로 바뀌는 까닭에 근심·슬픔·괴로움·불쾌·절망이 일어난다(SN.Ⅲ.3)."
72. 느낌受
감각적 접촉으로 발생하는 여러 감정들
느낌이란 무엇인가.
오온의 두 번째 항목으로서 지각想이나 지음行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감각적 접촉觸을 통해 발생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 따위가 그것이다. "느껴지는 것을 느낌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느껴지는가. 즐거움도 느껴지고 괴로움도 느껴지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껴진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것을 느낌이라고 한다(MN.Ⅰ.293)."
느낌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라는 3가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눈·귀·코·혀·몸·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이라는 6가지 분류법이 사용되기도 한다(SN.Ⅲ.60).
또한 '대념처경'에서는 앞서의 3가지에 육체적인 것samisa과, 정신적인 것niramisa에 의한 2가지 분류법을 추가한다. 그리하여 즐거운 느낌,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이라는 방식으로 도합 9가지 느낌을 나열한다(DN.Ⅱ.298).
6가지 분류는 보거나 듣는 일체의 과정이 느낌의 발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9가지 분류는 정신적 수준에 따라 느낌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류 방식이야 어떻든 인간의 삶에서 느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즐거운 느낌을 추구하고 괴로운 느낌은 배척한다. 사실 삶의 전 과정이 이것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예컨대 좋은 학교에 다니거나 좋은 직장을 얻고자하는 것도결국 느낌을 추구하고 괴로운 느낌을 배제하려는 노력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법은 느낌으로 모아진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AN.Ⅳ.339).
오온의 느낌이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나'를 강제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좋은 소리를 듣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부드러운 감촉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즐거운 느낌은 집착의 대상이 되어 '나'를 유혹한다. 한편 추한 것을 보거나 불쾌한 소리를 듣거나 입에 맞지 않은 것을 먹거나 부드럽지 못한 감촉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괴로운 느낌은 분노의 상태로 '나'를 몰아간다. 이렇듯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를 수취온受取蘊 즉 '집착된 느낌의 경험요소'로 일컫는다.
느낌에 집착하면 느낌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예는 동물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물의 삶은 먹고자 하는 욕구와 생식의 욕구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느낌에 매이지 않는 능력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만이 옳음을 위해 배고픔이라는 느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아랑곳하지 않는 결연한 의지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어쩌면 바로여기에서 인간만의 존엄이 찾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느낌이란 한순간에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결코 '나'자신과 하나일 수 없다. 이러한 느낌을 대처하는 '나'의 태도는 곧 '나'의 됨됨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느낌에 대해 무상한 것으로 알거나 보면 무명이 제거되고 밝은 앎(명,vijja)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SN.Ⅲ.50). 느낌이란 그 자체로는 유혹거리에 불과하지만 통찰의 대상이 될 때 깨달음을 이끄는 매개로 바뀐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뛰어난 지혜로써 알고 두루 알게 되면 탐욕이 바래고 버려져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SN.Ⅲ.18)."
73. 지각想
감각적 접촉 대상 떠올리는 과정
지각이란 무엇인가.
오온의 세 번째 항목으로서 느낌受이나 지음行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감각적 접촉觸을 통해 느껴진 대상을 마음에 떠올리는 과정이 그것이다. "지각하는 것을 일컬어 지각이라고 한다.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푸른색도 지각하고 노란색도 지각하고 붉은색도 지각하고 하얀색도 지각한다. 이와 같이 지각하는 것을 가리켜 지각이라고 한다(SN.Ⅲ.87).
지각이란 외부로부터 전달된 감각적 내용을 내부적으로 재확인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퍼뜩 스쳐가는 찰라 간의 대상일지라도 그 특징을 붙잡아 떠올리는 순서를 밟아야만 한다. 이렇듯 인간은 내부적으로 떠올리는 과정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인식된 모든 것은 마음에 떠올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푸른색을 푸른색으로 노란색을 노란색으로 인식할 수 없다. 동일한 현상에 대해 제각기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지각과 더불어 구체적인 모습과 빛깔로 파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지각을 통해 드러난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다. 감관으로부터 전달된 사물은 접촉觸이라든가 느낌受의 단계를 거친 연후에 지각의 과정으로 넘어간다(MN.Ⅰ.111~112).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은 지각에 앞서 존재하면서 지각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지각을 통해 드러난 푸른색 혹은 노란색 따위에는 즐겁거나 괴로운 개인적인 느낌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 지각이란 눈·귀·코·혀·몸으로 포착된 현상을 이미지화하는 과정이다. 또한 이것은 마음이라는 내부의 감관을 통해서도 발생한다. 기억이라든가 생각 혹은 이미 지각했던 내용을 다시 떠올리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데 마음에 의한 지각의 경우에도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이 추가적으로 개입될 수 있다. 그리하여 최초의 감각적 지각에서 생겨났던 이미지가 마음에 의한 지각을 거치면서 새로운 이미지들에 의해 덧씌워질 수 있다. 이것이 반복되면 과도한 이미지의 누적으로 인해 현실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각은 편견과 착각을 조장할 수 있다. 여기에 지각의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무더운 여름의 마지막 달 한낮에 신기루가 생기는데 눈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쳐다보고 면밀히 살펴보고 근원적으로 조사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텅 빈 것으로 드러나고 공허한 것으로 드러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비구들이여, 신기루에 무슨 실체가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어떠한 지각이라 할지라도 바로 이와 같다(SN.Ⅲ.141)."
그러나 지각은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무상에 대한 지각(무상상無常想), 무아에 대한 지각(무아상無我想), 부정함에 대한 지각(부정상不淨想) 따위를 의도적으로 떠올리는 명상이 그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육체적 질병이라든가 괴로움이 제거되는 효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An. Ⅴ.109). 이렇듯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지각은 통찰의 힘을 기르고 부정적인 생각을 다스리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
지각은 망상(희론戱論)을 발생시키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매개로 바뀔 수 있다. "지각에 대해 뛰어난 지혜로써 알고 두루 알게 되면 탐욕이 바래고 버려져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Sn.Ⅲ.27)."
74. 지음行 상카라 sankhara
마음으로 짓는 모든 의도적 움직임
지음이란 상카라sankhara이란 무엇인가.
오온의 네 번째 항목으로서 지각想이나 의식識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마음으로 짓는 모든 의도적 움직임이 여기에 망라된다. 따라서 이것은 의도sancetana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보이는 것에 관련된 의도, 소리에 관련된 의도, 냄새에 관련된 의도, 맛에 관련된 의도, 감촉에 관련된 의도, 마음현상에 관련된 의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들을 지음이라고 한다(SN.Ⅲ.60)."
지음이란 상카라sankhara를 번역한 것으로, 초기불교의 개념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내용을 지닌다. 이것은 내면의 다양한 의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러한 의도가 바깥으로 체화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포함한다. 한편 그러한 의도가 바깥으로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현상계이다. "일체의 상카라는 무상이다(제행무상諸行無常,sabbe sankhara anicca라고 할 때의 그것은 현상계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현상계란 '나'의 방식으로 경험된 세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다. 현상계의 성립에는 '나'의 존재가 전제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서 드러난 세계란 결국 '내'가 지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표현하는 용어가 곧 지음이다. 지음은 현상계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업業kamma)개념과도 통한다. 그리고 이 경우의 지음은 언어적 지음語行, 육체적 지음身行, 마음에 의한 지음意行으로 나뉜다(MN.Ⅰ.301). 이들은 몸身·입口·마음意라는 3가지 측면에서 현상계를 조건 짓는 '응보적 힘'으로 작용한다.
지음은 현상계의 경험적 요인들(오온五蘊), 느낌受, 지각想 따위가 생겨나고 유지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지어진 것을 계속해서 짓는 까닭에 지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지어진 것을 계속해서 짓는가. 물질현상色으로 지어진 물질현상을 계속해서 짓는다. 느낌受으로 지어진 느낌을 계속해서 짓는다. 지각想으로 지어진 지각을 계속해서 짓는다. 지음行으로 지어진 지음을 계속해서 짓는다. 의식識으로 지어진 의식을 계속해서 짓는다(SN.Ⅲ.87)."
오온으로 이루어진 현상계는 '내'가 지어낸 '나'만의 이야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음은 오온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를 중심에 둔 '나'만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지어낸다. '나'라는 신화神話는 지음에 의해 연출된 허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지음이란 '나'의 실존을 이루는 오온 각각에 대해 오온 자체로 존속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지음의 작용을 다스리면 '나'라는 족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갖가지 편견과 집착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초기불교의 수행에서 지음은 가라앉혀야 할 타깃이 된다. 오온의 속박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될 수 있다. 사마타止와 위빠사나(관觀)의 명상은 지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한 쌍의 실천적 수단이다. 지음은 가라앉히는 순차적 과정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두 번째 선정(제이선第二禪)에 들어간 이에게 지속적인 생각伺에 언어적 지음語行이 그친다.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들어간 이에게 들숨과 날숨에 의한 육체적 지음身行이 그친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상수멸想受滅)에 들어간 이에게 지각想과 느낌受이라는 마음에 의한 地음意行이 그친다(Ps.Ⅰ.97~98)."
75. 의식識
어떤 현상을 식별해 아는 작용
의식이란 무엇인가.
오온의 다섯 번째 항목으로서 지각想이나 지음行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곧 어떠한 현상에 대해 '인식하는 작용' 혹은 식별하여 아는 작용'을 가리킨다. "의식하는 것을 일컬어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 것도 의식하고 쓴 것도 의식하고 단 것도 의식하고 떫은 것도 의식하고 떫지 않은 것도 의식하고 짠 것도 의식하고 싱거운 것도 의식한다. 이와 같이 의식하는 것을 가리켜 의식이라고 한다(SN.Ⅲ.87)."
의식은 문헌에 따라 다양한 용례를 보인다. 특히 이것은 후대의 대승불교에 이르러 형이상학적 주체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이란 외부의 대상에 대한 인식적 반응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의 의식은 감관의 종류에 따라 통상 여섯으로 구분된다. "여섯 가지 의식의 무리가 있다.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몸의 의식, 마음의 의식이다(SN.Ⅲ.61)." 이들은 각각에 상응하는 감각대상들에 대한 정신적 반응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최초의 감각적 의식은 감각대상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들은 느낌受이라든가 지각想 따위가 개입되기 이전의 것이다. 따라서 이 단계의 의식에는 아직 온전한 경험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이후에 전개될 구체적인 인식의 조건으로 기능할 뿐이다. 예컨대 파란색 물체를 마주했을 때 최초로 발생한 눈의 의식意識은 단지 어떠한 빛깔의 존재를 알아챌 뿐 그것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아직 느낌受이라든가 지각想 혹은 지음行 따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식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구체화되는 특성을 지닌다. "의식識은 물질현상色을 수단으로 삼아 분명해지고 확립된다. 물질현상을 대상으로 삼아, 물질현상을 기반으로 삼아, 즐거움의 자리로 삼아 성장하고 증가하고 풍만해진다. [의식은]느낌受을 수단으로 삼아…,[의식은]지각想을 수단으로 삼아…,[의식은]지음行을 수단으로 삼아 분명해지고 확립된다. 지음을 대상으로 삼아, 지음을 기반으로 즐거움의 자리로 삼아 성장하고 증가하고 풍만해진다(DN.Ⅲ.228)." 이렇듯 의식은 느낌이라든가 지각 따위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숙성의 과정을 거친 의식은 최초의 감각적 의식과 다르다. 이것은 구체적인 경험내용과 함께 다양한 마음현상을 수반한다. 따라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정신적 주체로 여겨질 수 있다. 혹은 정신적 실체 혹은 정신적 실체 혹은 내면의 영혼과 같은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실제로 초기불교 경전에는 의식을 두고 윤회의 여정을 통해 거듭 태어나는 영혼과 같은 것으로 잘못 이해했던 사례가 언급되기도 한다(MN.Ⅰ.256)."
영혼으로 오인된 의식은 집착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영원시 존재하는 '나'라는 그릇된 견해를 부추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 집착한 상태 즉 식취온識取蘊에 빠져 있는 경우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조건(연緣)이 없으면 어떠한 의식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MN.Ⅰ.259)." 또한 이것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닦을 것을 권한다. "의식을 자아로 관찰하지 않고, 자아가 의식을 소유한다거나, 자아가 의식이라거나, 의식 안에 자아가 있다거나, '나는 의식이다거나, 나의 의식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에게는 근심·슬픔·괴로움·불쾌·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SN.Ⅲ.5)."
76. 십이처十二處
현상계 일체를 포섭하는 12가지 영역
십이처란 무엇인가.
여섯의 내부적 영역(육내처六內處)을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눈眼과 시각대상色,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몸身과 감촉觸,마음意과 마음현상法이라는 감관과 감감대상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들은 통상 6가지 안팎의 영역(육내외처六內外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보거나 듣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12가지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십이처는 현상계 일체를 포섭한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 따위의 오온五蘊은 '나'의 실존을 이루는 경험적 요인들을 다섯의 갈래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반면에 십이처는 그러한 요인들이 어떠한 토대 위에 성립해 있는가를 밝힌다. 오온의 주객이 혼융된 '나'의 현실을 가리키는 반면에 십이처는 그러한 현실의 발생 배경을 드러낸다. 이것을 통해 오온이 여섯 쌍의 감관과 감각대상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십이처는 안팎의 영역이 서로 의존하면서 현상계를 이루어내는 양상을 묘사한다.
십이처 가운데 6번째 쌍에 해당하는 마음과 마음현상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마음을 제외한 여타의 감관은 그때그때의 감각대상과 관계할 뿐 경험한 내용을 비교하거나 종합하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면서 기억하거나 예상한다. 또한 감각적 차원을 벗어난 내면의 원리들을 사고하는 능력까지도 지닌다.
마음현상은 이러한 모든 것을 내용으로 하면서 마음이라는 감관의 대상이 된다.
마음은 이러한 마음현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통합적 인식을 수행한다.
붓다는 십이처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앎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SN.Ⅳ.15). 십이처를 벗어난 무엇은 그 존재의 여부마저도 따질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십이처라는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 안에 갇힌 죄수에 비유할 수 있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에서부터 사회적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혹은 지구적 차원을 넘어 범우주적 차원에 이르는 거대한 사태에 이르기까지 따지고 보면 십이처에서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따라서 붓다는 십이처가 곧 세상loka이라고도 말한다(SN.Ⅳ.52).
그런데 십이처가 세상과 동일하다면 십이처를 통해 세상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도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초기불교 경전에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열쇠가 다름 아닌 여섯 감관에 있다는 언급이 나타난다(SN.Ⅳ.95). 또한 여섯의 감각적 접촉의 영역을 잘 길들이고 잘 지키고 잘 단속하면 괴로움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등장한다(SN.Ⅳ.70). 이 점을 고려할 때 십이처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이처를 통해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례는 어떠할까. 다음의 경문은 새겨 둘 필요가 있다. "말룽끼야뿟따여, 보거나 듣거나 감각하거나 의식하거나 사물에 관련하여, 보았을 때는 본 것만 있고, 들었을 때는 들은 것만 있고, 감각했을 때는 감각한 것만 있고, 의식했을 때는 의식한 것만 있어야 한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렇게 된다면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라는 것이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그것에 의함'이라는 것이 없다면 말룽끼야뿟따여,그대에게는 '거기에'라른 것이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라는 것이 없다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양쪽의 중간도 없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SN.Ⅳ.73)."
77. 십팔계十八界
독자적 경계지하며 경험세계 발생
십팔계란 무엇인가.
여섯의 감관(육근六根)과 여섯의 감각대상(육경六境) 그리고 이들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여섯의 의식(육식六識)을 내용으로 한다. 십팔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독자적인 경계를 유지하면서 경험세계를 발생시킨다. 십팔계에서 '계界'란 다뚜dhatu를 번역한 것으로 풀이하자면 '확립된 원리'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여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뒤따른다. 이것은 '확립된 원리'이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는 것이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SN. II. 25).”
계란 특정한 사물이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원리이다. 이것을 지님으로써 해당 사물은 다른 무엇과 뒤섞이지 않는 독특성을 발하게 된다. 물이 기름에 섞이지 않듯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다른 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계에 따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린다. 저열한 신념을 가진 중생들은 저열한 신념을 가진 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좋은 신념을 가진 중생들은 좋은 신념을 가진 중생들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린다(SN. II. 154).”
십팔계는 구체적으로 눈眼과 시각대상色과 눈의 의식眼識, 귀耳와 소리聲와 귀의 의식耳識, 코鼻와 냄새香와 코의 의식鼻識, 혀舌의 맛味과 혀의 의식舌識, 몸身과 감촉觸과 몸의 의식身識, 마음意과 마음현상法과 마음의 의식意識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각각의 요소는 일체의 경험이 전개되는 최소 단위에 해당한다. 이들을 상정함으로써 인식과 경험의 발생에 관한 정연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접촉하거나 느끼거나 지각하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러한 18가지 원리界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십팔계는 있는 그대로yathabhutam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십팔계설의 의의는 미망의 현실이 전개되는 경로를 밝힌다는데 한정된다. "눈과 시각대상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발생한다. 이 셋의 부딪힘이 접촉觸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있다. 그는 느끼는 그것을 지각한다想. 그는 지각하는 것을 생각한다(尋심). 그는 생각하는 그것을 망상한다(희론戱論),… 이와 같이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눈으로 의식되는 시각대상에 관해 망상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생겨난다,… [귀와 코 등도 마찬가지이다](MN. I. 111-112)."
십팔계는 오온五蘊 및 십이처十二處와 비교되곤 한다. 오온은 '나'의 현실을 주객이 혼융된 단순한 경험의 갈래들로 뭉뚱그려 분류한 것이다. 십이처는 오온을 여섯의 감관과 감각대상으로 환원해 놓은 것이다. 십이처는 오온의 발생 배경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십팔계는 십이처의 마음意에서 의식識을 분화시킨 후 여섯의 감관에 배대하여 별도의 항목들로 추가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여섯의 의식은 그들이 의존하는 감관과 감각대상에 대해 고유의 원리로 작용할 뿐 십이처의 마음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십팔계는 경험세계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상정된 원리이다. 이것을 이루는 개개의 요소들은 변화하지 않는 근원적 실재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오온이라든가 십이처의 항목들과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하고 버려야 할 대상이 된다(SN. IV. 81).
"어떠한 온蘊과 계界와 처處이든 그것을 헤아리지 않고, 그것에서 헤아리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헤아리지 않고, '그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헤아리지 않는다. 그와 같이 헤아리지 않는 자는 세상에 대해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SN. Ⅳ.24)."
78. 십이연기설의 취지
무명 제거해 괴로움 없애려는 처방
십이연기十二緣起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현실이 전개되는 과정을 12단계 분석해 놓은 것이다. 무명無明, 늙음·죽음(노사老死) 따위가 그것이다. 붓다는 늙음·죽음이라는 실존적 괴로움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방식으로 있음이라든가 집착따위라든가 집착 따위를 거슬러 올라가 결국은 무명을 조건으로 일체의 괴로움이 생겨나는 과정을 밝혀냈다.
십이연기는 여래如來가 출현하건 출현하지 않건 확립된 원리로서의 의의를 갖는다(SN. II. 25). 붓다는 이 원리를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깨달았다. 이것은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이다. 만약 괴로움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에게는 십이연기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늙음·죽음으로 대변되는 괴로움의 현실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십이연기는 불변하는 진리이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에서 우선 유념해야 할 사항은 그 취지이다. 십이연기는 객관적인 실재의 발생과 소멸을 규명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다. 이것은 괴로움의 현실을 해명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이점을 망각할 때 십이연기는 세계의 구조를 밝히는 형이상학적 논리로 바뀌고 만다. 유감스럽게도 일부 학자들이 십이연기를 그러한 방식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형이상학자도 자연과학자도 아니었다. 다만 그느 괴로움의 극복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러한 이유에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경로를 드러냈을 뿐이다.
십이연기는 각종의 형이상학적 견해들과 궤도를 달리한다. 예컨대 초기불교 경전에서 십이연기에 대한 해설 앞에는 대체로 다음의 정형구가 나타난다. "'모든 것이 있다'는 것도 하나의 극단적 견해요, '모든 것이 있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극단적 견해이다. 대체로 여래는 이들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가운데에서 가르침을 드러낸다(SN. II. 17).
”마찬가지로 십이연기는 단일성과 다수성의 문제, 괴로움의 주체문제, 영혼과 육체의 동일성 여부와 같은 형이상학적 극단에 치우친 견해들로부터 벗어난 가르침으로 묘사된다 (SN. II. 20~77).
붓다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이란 태생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뿌리 깊은 무지와 습관적 경향들 그리고 갈애와 집착 따위가 그 원인이다. 붓다는 유행했던 대부분의 사변적·형이상학적 견해들이 바로 이점을 간과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그러한 논리의 이면에는 탐욕과 증오 따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편견과 아만에 사로잡혀 자신과 타인에게 괴로움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붓다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견해들과 전혀 다른 맥락의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세계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인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여 실재로부터 유리되는 과정을 밝힌 것이다.
십이연기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로서 도출되었다. 이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명으로부터 시작되어 늙음·죽음이라는 괴로움의 실존으로 종결된다. 또한 무명이 소멸하면 나머지 지분들 또한 소멸하여 모든 괴로움의 갈래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밝힌다(SN. II. 1~2). 십이연기는 무명의 제거를 통해 괴로움의 해소를 꾀하는 처방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초기불교의 십이연기를 세계의 기원 혹은 구조를 해명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교설로 간주하는 것은 본래의 취지에 반한다고 할 수 있다.
79. 십이연기 해석
괴로움 전개와 벗어나는 이치 설명
십이연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선 연기(연기, paticcassamuppada)라는 용어부터 살펴보자. 온전히 옮기자면 '조건에 의한 발생' 정도가 적당하다.
특히 이것은 늙음·죽음으로 대변되는 괴로움의 현실이 특정한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괴로움이란 본래적인 것도 아니고 우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럴만한 조건에 의해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붓다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12 단계에 걸친 연쇄적 조건으로 설명하였다.
초기불교에서는 괴로움이 생겨나는 과정을 2단계, 3단계, 5단계, 9단계, 10단계, 12단계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한다. 이들 모두는 괴로움에 떨어지는 경로를 해명한다는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들 가운데 12단계의 십이연기가 가장 온전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는 괴로움(고苦), 괴로움의 원인(집集),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도道)이라는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과 사실상 동일한 맥락이다(AN.I. 177).
연기설이 지니는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연기를 보는 자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M. I. 190~191).”이 언급은 붓다의 모든 가르침이 연기로 집약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의 이치는 붓다가 깨달은 핵심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러한 연기설은 다음의 정형구로 집약된다. "이것이 있을 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SM. II. 70).”
12단계에 이르는 각각의 지분들은 위의 정형구의 형식으로 엮이어 있다. 예컨대 태어남生이 있을 때 늙음·죽음(노사老死)이 있고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죽음도 없다. 또한 태어남이 발생하므로 늙음·죽음이 발생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죽음도 소멸한다. 이와 같이 태어남은 있음有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은 집착(취取)을, 집착은 갈애愛를 조건으로 한다. 그리하여 결국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한다. 그리하여 결국 무명을 조건으로 나머지 11가지 지분들이 발생하고 소멸한다.
12연기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해석이 존재한다. 각각의 지분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해석과 순차적으로 발생한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전자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때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살생을 저지르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러한 행위를 발동시키는 어리석음이 무명이며, 그것을 저지르려는 의도가 지음行이며,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의식識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십이연기의 전체 지분이 동시에 작용한다.
한편 후자는 각각의 지분들이 순차적으로 발생하여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때의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자리한다. 예컨대 과거의 삶에서 누적된 무명과 지음이 현재의 삶에서 원초적 의식識으로 발현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앞선 지분들은 이후의 지분들에 대해 인과적 조건이 된다. 이러한 해석은 윤회설과 결합하여 전생에서 현생, 그리고 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십이연기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전자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괴로움에 처하게 되고 어리석음을 제거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이치를 잘 드러낸다. 반면에 후자는 괴로움이 전개되는 점진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미래의 괴로움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운다. 따라서 어느 한 해석만이 옳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이들은 십이연기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의 2가지 사례이다.
80. 늙음·죽음(노사老死)
고통으로 뒤엉킨 인간 실존의 대명사
늙음·죽음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에서 마지막 항목에 해당한다. 늙음·죽음은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발생하며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예외 없이 맞이하는 보편적인 괴로움이다. 이것이 가져오는 심리적 중압감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늙음·죽음은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따위의 수식어와 함께 묘사되곤 한다. 늙음·죽음은 괴로움으로 뒤엉킨 인간의 실존을 대변한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이 의도하는 궁극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데 있다.
경전에 나타나는 십이연기의 정형구는 다음의 형식을 취한다.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지음行이 있고, 지음을 조건으로 의식識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현상(명색名色)이 있고, 정신·물질현상을 조건으로 여섯 영역(육입六入)이 있고, 여섯 영역을 조건으로 접촉觸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수受)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있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있고, 집착을 조건으로 있음有이 있고, 있음을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등이 있다(SN. II. 2).”
위의 정형구는 늙음·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명으로부터 출발한다. 또한 무명에 대해 꿰뚫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언적으로 제시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무명의 교리를 미리 알지 못하면 이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순서는 무명 즉 '진리에 대해 모르는 상태'가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해준다. 나아가 무명을 제거하면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부각시킨다(SN. II. 4). 따라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처방으로서 십이연기의 취지를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를 다루는 대부분의 경전은 위의 정형구를 먼저 제시한다. 그러나 각각의 지분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로 옮겨가면 맨 마지막의 늙음·죽음부터 다룬다. 이것은 십이연기에 대한 세부적 이해가 현실의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됨을 의미한다. 갖가지 괴로움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불안하게 연명해 나가는 바로 그러한 상태가 십이연기를 깨닫는 첫 관문이 된다.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으로 가득 찬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십이연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시도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늙음·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에서의 늙음, 노쇠, 이빠짐, 머리희어짐, 주름짐, 수명의 감소, 감관의 쇠토이다.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또한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에서의 사라짐, 사라져감, 파괴됨, 무너짐, 죽음의 신에 의한 죽음, 임종을 맞이함, 경험요소(온蘊)의 무너짐, 시체로 놓여짐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늙음·죽음이라고 한다(SN. II. 2~3).”
위의 내용은 대체로 생리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늙음·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제삼자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그냥 무덤덤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사뭇 다른 무게로 느껴진다. 한 발짝 한 발짝 '나'에게 다가오는 늙음·죽음은 결코 후퇴하는 법이 없다. 십이연기는 이렇듯 절박한 '나'의 현실에 대한 자각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
[출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 산책|작성자 제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