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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초기불교 순례_임승택 교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61-70

61.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

느낌을 알아차림 대상으로 삼는 명상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수념처受念處)이란 무엇인가.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념처의 명상에서 두 번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좋거나 나쁜 느낌들에 몰입되지 말고 다만 그들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다. 편안하거나 좋은 느낌도, 불편하거나 거북한 느낌도 지긋이 관할하다 보면 잠시간에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갖가지 느낌들에 부화뇌동하지 않고서 관찰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을 깊숙이 실천하는 셈이다. 인간의 삶에서 느낌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느낌을 추구하고 싫어하는 느낌을 배척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구하는 따위의 거의 모든 행위가 그러하다. 좋은느낌이란 인간의 행위가 지향하는 한결 같은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느낌이 과연 무엇이고 또한 싫어하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반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느낌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느냐는 곧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느낌을 분명히 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지 냉철히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사돈이 땅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치자.

혹은 경쟁 관계에 누군가가 큰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치자. 은근히 배가 아파올 수 있다. 혹은 괜히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불쾌한 느낌들은 대부분 놓치고 지나가기 십상이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것의 실체를 깨닫는 경우가 많다.

느낌이 발생하는 순간에 그것을 알아차린다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최소한 예의에 벗어나는 언사를 내보이는 실수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의 유혹은 강렬하기 때문에 저항하기 힘들다. 좋거나 싫은 느낌을 억지로 붙잡아 두거나 없앨 수도 없다. 이와 같은 느낌들에 대해서는 다만 깨어 있는 마음으로 지긋이 응시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봄 햇살 아래 쌓인 눈이 서서히 녹아내리듯이 어느덧 느낌의 응어리가 녹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 같던 그 느낌이 일순간 약화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느낌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서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또한 느낌이라는 강력한 족쇄마저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자각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대념처경'에서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따위에 대해 언급한다(DN.Ⅱ.298). 또한 거기에'육체적인 것samisa'과  '정신적인 것niramisa'의 구분을 덧씌어 도합 9가지 유형의 느낌을 열거한다.​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그들 모두를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만 깨인 마음으로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이라든가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 따위에 대해 주시하라고 가르친다. 혹은 깊은 선정의 상태에서 포착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에 대해서도 관찰자로 남아 있으라고 권한다.

즐거운 느낌은 탐내는 마음을 조장하고, 괴로운 느낌은 성내는 마음을 증폭시키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어리석음과 연결되어 있다. 즐거운 느낌의 발생과 변화를 깨어 있는 마음으로 주시한다면 그것은 즐거움 자체로 남아 있다가 언젠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의 발생과 변화를 알지 못하고 둔감한 상태로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탐냄에 빠지게 된다.

혹은 괴로운 느낌이 증폭시키는 성냄에 휩쓸리게 된다. 혹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과 통해 있는 어리석음에 매몰되게 된다. 따라서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진 경지인 열반涅槃의 성취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매우 중요한 실천법이라고 할 수 있다.


 

62.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

마음 주시하며 알아차리는 명상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심념처心念處)이란 무엇인가.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념처의 명상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긋이 주시하면서 알아차리는 명상이 곧 이것이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은 마음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예컨대 산란한 상태에 있거나 탐욕에 빠져 있을 때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응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을 실천하는 셈이다. 이렇듯 자신의 대해 '산란한 마음' 혹은 '탐내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또한 이것은 일상에서 이미 자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원숭이에 비유되곤 한다. 따라서 마음이 움직이는 그대로 행동한다면 어떠한 실수를 범하게 될는지 알 수 없다. 그만큼 마음이란 쉴 새 없이 여러 경계를 넘나든다. 그렇다고 마음의 동요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것도 힘들다. 마음이란 본래부터 멈추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마음을 집중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강제적인 집중과 억제는 더 큰 반발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한 상태를 벗어나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더욱 산란한 상태로 치달아 나갈 수 있다. 

원숭이와 같이 부산한 마음을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다음의 비유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린 소녀가 홀로 빈 방에서 춤을 추며 논다고 치자. 지켜보는 사람 없이 마음껏 폼을 부리면서 춤을 춘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어느 순간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엿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더 이상 춤추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 또한 이와 비슷하다. 끈기를 가지고 지긋이 응시하면 대부분의 산란함은 제풀에 지쳐 가라앉는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방황과 동요의 상태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념처경'에서는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따위의 16가지 유형의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DN.Ⅱ.239).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이들 모두를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는다. 거기에는 고요한 마음이라든가 해탈한 마음 따위의 긍정적인 상태도 포함된다. 이들 16가지 부정적·긍정적 마음상태는 사념처 명상이 현재 포착할 수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며, 내면의 동요를 강제적으로 억누르거나 가라앉히는 방법이 아님을 드러낸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서 알아차리라는 의미이다. 설령 고요한 마음이라든가 해탈한 마음이 발생하더라도 멈추거나 동요하지 말고 명상을 지속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일부러 집중된 경지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태도는 무언가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갈애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으며 더 큰 아만과 집착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현재 펼쳐지고 있는 자신의 마음과 화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다. 산란하거나 우울한 마음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잠시 스쳐가는 현상일 뿐이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은 마음현상 자체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일깨운다. 마음이란 간교한 마술사와 같이 갖은 기교로써 우리를 현혹한다.

치솟는 분노와 물밀듯한 탐욕은 당장에라도 무엇인가에 뛰어들도록 재촉한다. 바로 그때 마음지킴이라는 내면의 빛을 스스로에게 쪼여줄 필요가 있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은 모든 유형의 마음현상이 나의 것(mama), 나(aram), 나의 자아(me atta)가 아님을 깨닫도록 해준다.



63. 법에 대한 마음지킴

명상체험을 깨달음으로 정착시키는 과정


법에 대한 마음지킴(법념처法念處)이란 무엇인가.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념처의 명상에서 마지막 네 번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법이란 몸이나 혹은 마음을 주시하는 가운데 경험하거나 알게 되는 진리를 가리킨다. 예컨대 몸에 대한 마음지킴(신념처身念處) 을 실천하면서 '이와 같이 육체적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라고 알아차린다고 치자. 이러한 체험 자체는 일단 몸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이것을 통해 '이와 같이 육체적 현상이란 일어나는 것이고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법에 대한 마음지킴으로 옮겨 온 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법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수행의 진척과 더불어 알게 되는 내용들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다섯 장애(오개五蓋), 오취온五取蘊,여섯터전(육내외입처六內外入處), 일곱 깨달음의 조목(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聲體, 등에 대한 일련의 깨달음이  포함된다(DN.Ⅱ.300~314). 

이들은 몸·느낌·마음에 대한 관찰을 통해 얻게 되는 깨우침을 대략적인 경험 순서에 따라 일괄 제시한 것이다. 명상의 진행과 더불어 체험하게 되는 깨달음의 계기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분명한 앎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이 곧 법에 대한 마음지킴이다. 다섯 장애에는 악한 마음,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따위가 포함된다. 사실 이들은 명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발생하는 번뇌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을 지긋이 응시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진리를 꿰뚫는 과정이 법에 대한 마음지킴의 첫 번째 세부 내용이 된다.

"악한 마음이 있을 때 '나에게 악한 마음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혹은 악한 마음이 없을 때 '나에게 악한 마음이 없다'고 알아차린다(DN.Ⅱ.301)." 이와 같이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다 보면 어느 순간 변화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신적 장애에 해당하는 갖가지 부정적 정서들이 어느덧 무상無常의 진리를 일깨우는 매개로 바뀌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오취온이란 육체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이라는 경험적 요소들(오온五蘊)에 집착하여 '나'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법에 대한 마음지킴이 무르익으면 이러한 경험적 요소들 모두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여섯 터전(육입처六入處)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음지킴의 능력이 커지면 눈眼과 시각대상色, 귀耳와 소리聲 등으로 이루어진 감각영역에 대해 다만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잡다한 감각적 현상들에 뒤엉키지 않고서 방관자로 남아 그들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전 과정을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일곱깨달음의 조목이란 이상과 같은 실천을 통해 얻는 정신적 능력에 해당한다.

마음지킴을 한결 같이 유지하는 염각지念覺支, 경험하는 현상들을 그때그때 올바르게 분별하는 택법각지擇法覺支, 멈추지 않고 노력을 계속하는 정진각지精進覺支 따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개발하는 관건은 경험하는 현상들을 다만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남겨 둘 수 있느냐이다. 바로 여기에 숙달하게 될 때 자신의 감정과 정서로부터 초연해지는 탈동일시disidentificantion의 체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태란 거짓된 자아를 구성하는 안팎의 현상들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는 무아無我의 경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법에 대한 마음지킴은 사성제의 체득으로 최종 마무리된다. 

즉 사념처의 명상을 진행하면서 경험하는 여러 단편적인 깨달음의 계기들은 사성제의 실현이라는 큰 틀 안에 포함된다. 결국 몸·느낌·마음· 법을 통찰 내용으로 하는 사념처는 고苦·집集·멸滅·도道라는 사성제의 실현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64. 사념처의 실천 순서

몸 관찰에서 느낌·마음 알아차림으로


사념처의 실천 순서는 어떠한가.

몸·느낌·마음· 법의 4가지 가운데 과연 무엇부터 마음지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주시하면서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실천의 절차에 관한 의문은 이것만이 아니다. 몸이나 느낌 따위의 어느 한 대상을 선택하여 일정 기간 그것만을 관찰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들 각각을 수시로 옮겨가면서 알아차려야 하는가. 혹은 어느 하나만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다보면 나머지 대상들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가.

사념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대념처경'에도 이것에 관한 명확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가르침들을 종합하면 얼마간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대부분의 경전에서 몸·느낌·마음· 법이라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사념처의 가르침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권장되는 마음지킴의 대상은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몸의 움직음은 가장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초보자라도 어렵지 않게 몸에 대한 마음지킴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

목숨이 유지되는 한 호흡의 들고 남은 멈추지 않으며 또한 언제라도 포착이 가능하다. 팔을 구부리거나 펴는 따위의 동작은 어떠한가. 이들 역시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는 한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다. 몸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바로 이들을 지속적으로 응시한다. '대념처경'에서는 호흡이나 동작 따위를 관찰하다보면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러한 깨우침이란 몸에 관련된 것인 동시에 법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정한 수준이 되면 그때부터는 몸에 대한 마음지킴과 법에 대한 마음지킴이 병행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지념경'에서는 몸에 대한 알아차림만으로 궁극의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고 가르친다(MN.Ⅲ.88~99). 또한 '입출식념경'은 호흡에 대한 마음지킴이 느낌·마음·법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MN.Ⅲ.78~88). 예컨대

호흡을 지속적으로 응시하다 보면 호흡에 수반하여 발생하는 즐겁거나 불쾌한 느낌들도 인지하게 된다. 또한 갖가지 느낌들에 대해 깨어 있다 보면 거기에 반응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산만하거나 침체된 마음 따위를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줄곧 몸을 중심으로 관찰해 나가지만 나중에는 느낌이나 마음까지도 관찰하게 된다.

이러한 절차에는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처음부터 모두를 한꺼번에 주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리 선택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대상들까지 관찰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된다. 특히 초보적 단계에서 권장되는 몸에 대한 마음지킴은 알아차림의 상태를 흩트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호흡의 들고 남을 놓치고서 엉뚱한 생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의 단계에 이르면 그러한 노력이나 의지마저 내려놓아야 한다. 그때부터는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오로지 깨어 있는 것만이 요구된다.

몸으로부터 느낌을 거쳐 마음과 법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마음지킴의 능력여하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어느 시기에 무엇을 선택하여 주시하느냐의 문제는 열정과 의지만으로 결정될 수 없다. 물론 초보적인 단계에서 품는 열정과 의지는 수행의 여정에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집중하거나 알아차리려고 애쓰는 그것이 곧 탐욕이라는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명상이란 더 이상 해야 할 무엇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65. 사마타와 위빠사나

깨달음에 이르는 명상의 두 날개


사마타止는 무엇이고 위빠사나觀는 무엇인가. 사마타란 고요 혹은 평온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들뜸과 산란함을 가라앉혀 집중된 경지를 가리킨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는 몇몇 단계로 나뉜다. 감각적 쾌락에 동요되지 않는 경지인 첫 번째 선정初禪이라든가 언어적 사고語行가 정지한 두 번 째 선정(第二禪) 따위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마타는 여덟 단계로 구분된다. 거기에는 생각과 정서가 가라앉은 정도에 따른 '물질적 영역의 4가지 선정(색계사선色界四禪)'과 '비물질적 영역의 4가지 선정(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는 2가지 구분법이 포함된다(Ps.Ⅰ.98). 

한편 위빠사나란 있는 그대로(여여如如,yathabhūtaṁ)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몸과 마음에 관련된 제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주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몸의 움직임이나 느낌 따위를 관찰하면서 모든 현상이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이치를 통찰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다. 나아가 괴로움에 대한 통찰(고수관苦隨觀), 무아에 대한 통찰(무아수관無我隨觀), 소멸에 대한 통찰(멸수관滅隨觀) 따위가 그것이다(Ps.Ⅰ.98~99). 

초기불교 이래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명상의 양 날개 구실을 해왔다. 수행에 처음 입문한 사람에게는 일단 사마타를 통해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절차가 권장된다. 탐욕이라든가 의심 따위에 동요되는 상태에서는 정신적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사마타를 통해 마음을 비우고 가라앉히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사마타의 사례로는 특정한 색깔로 이루어진 원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 떠올리면서 몰입하는 방법이 있다(Ps.Ⅰ95). 혹은 불佛·법法·승僧의 삼보를 지속적으로 떠올림으로써 잡념을 차단하고 몰입된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이 제시되기도 한다.

한편 위빠사나는 특별한 집중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상에 상관없이 경험하는 일체의 현상에 대해 본질적 특성을 통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전혀 다른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무상에 대한 통찰이 반드시 평온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괴로움에 대한 통찰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집중된 상태에서는 괴로움이라는 느낌 자체가 잘 포착되지 않는다. 마음상태가 거칠면 거친 대로,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그때그때 경험하는 안팎의 현상을 놓치지 않고 통찰하는 과정이 위빠사나이다.

그러나 실제 수행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서로 혼합된다고 할 수 있다. 사마타를 체험해보지 않고서 내면을 반조하는 능력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예컨대 탐냄이나 성냄에 휩싸여 있다고 치자. 사마타를 통해 가라앉은 마음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한 발짝 물러나 통찰하는 여유를 지닐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탐냄과 성냄에 뒤엉켜 자기 자신이 과연 어떠한 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하나의 쌍으로 언급되고 하며, 특히 전자를 닦은 연후에 후자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다.   

사념처四念處 명상을 사례로 들어보자. 사념처란 몸·느낌·마음·법을 지속적으로 주시함으로써 경험하는 현상의 본질을 깨닫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측면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  몸이나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은 고도로 집중된 경지인 사마타의 상태를 가져오는 동시에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의 요소를 포함한다. 

한편 마음과 법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더욱 유연한 태도로 기민하게 깨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진행하는 와중에는 위빠사나의 측면이 강조되지만 사마타 또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사념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골고루 계발시키는 균형 잡힌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66. 다섯 장애

수행 진전 방해하는 대표적인 번뇌


다섯 장애란(오개五蓋)란 무엇인가. 수행의 진전을 방해하는 5가지 대표적인 번뇌를 가리킨다. 쾌락에 대한 욕망(탐욕貪欲), 악한 마음(진瞋), 혼침과 졸음(혼침수면昏沈睡眠), 들뜸과 회한(도거掉擧,악작惡作), 의심疑 따위이다.  이들은 마음을 오염시켜 지혜를 가로막는다. 여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 명상의 진척을 기대할 수 없다. 장애에 부딪힌 대부분의 초보 수행자는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그러나 사념처四念處의 마지막 관문인 법에 대한 마음지킴(법념처法念處)은 바로 이들에 대한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자체를 통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면 사념처 명상의 완성 단계에 이른 셈이다.

쾌락에 대한 욕망은 성적性的 욕구에 휘둘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출가자는 물론이고 재가자들 또한 경계해야 한다. 어찌 보면 성적 욕구는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일 수 있다. 이러한 생리적 현상 자체를 문제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 부화뇌동하여 휘둘리는 상태에 이르러서는 곤란하다. 그것으로 인해 불안과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법에 대한 마음지킴에서 바로 이러한 상태를 관찰하면서 무상無常의 이치를 깨우치도록 유도한다. '있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 일어남과 사라짐의 진리를 자각하도록 한다(DN.Ⅱ. 300).

쾌락에 대한 욕망이란 본능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쉽사리 제거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방안은 일단 그러한 현상의 발생을 인정하고서 주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저항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력감이 느껴질 수 있다. 심지어 욕망과 하나가 되어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지긋이 초점을 모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어느덧 약화된 욕망의 틈새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지가 드러난다. 혹은 불가항력적인 경우에는 환경을 바꾸거나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번뇌를 억지로 없애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우선 번뇌에 빠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때 번뇌에 수반하여 발생하는 부차적 느낌이나 상념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찌 이것을 없앨 수 있을까'라든가 '과연 이것이 없어질까' '아니야 난 틀렸어' '이번 한번만…' 따위의 동요로 인해 마음의 중압감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진다. 이러한 모든 상념을 내려놓고서 다만 지긋이 번뇌를 그 자체로서 응시할 때 자연스럽게 변화는 일어난다.

악한 마음,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의심 등도 이러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악한 마음이란 자신과 타인에 대해 품는 공격적 성향을 가리킨다. 혼침과 졸음은 몸과 마음이 둔해져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들뜸과 회한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와 과거에 관한 후회로 요동치는 마음상태를 나타낸다. 마지막의 의심이란 이리저리 의심하고 반신반의하면서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불안정한 마음을 말한다. 이들은 한결 같이 넘어서기 힘든 내면 장애이며, 여기에 지배되는 한 정신적으로 고양된 경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확고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은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열어준다. 내면의 장애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이기적 본능의 사슬을 결코 끊을 수 없으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이로운가를 깨우치지도 못한다(AN.Ⅲ. 230).

​그러나 이들 장애에 대해 분명한 자각과 인식을 갖게 되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게 된다. 마음지킴이 전제될 때 번뇌는 저절로 변화하여 깨달음의 매개로 바뀐다. 번뇌가 곧 보리菩提인 셈이다.



67. 다섯 기능

정신적 향상 가져오는 심리적 기능들


다섯 기능(오근五根, panca-indriyani)이란 무엇인가. 정신적인 향상을 가져오는 5가지 심리적 기능을 가리킨다. 원래의 말인 빨리어Pali인 인드리야indriya란 막강한 지배력을 지닌 하늘의 신 인드라(제석천帝釋天,indra)에서 유래한다. 인드라처럼 다섯 기능은 바른 실천에 전념하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능력을 지닌다. 

믿음信, 노력(정진精進), 마음지킴(염念), 삼매(정定), 지혜(혜慧) 등이 그것이다. 이들을 통해 불신不信, 게으름(해태懈怠), 부주의(방일放逸), 들뜸(도거棹擧), 어리석음(無明) 따위를 가라앉힐 수 있고, 종국에는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닦음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Ps.Ⅱ.1).

초기불교의 사념처四念處는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마음지킴과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통찰의 내용을 망라한다. 이것은 명상의 와중에 주시해야 할 대상들과 그것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깨달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프로그램화 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념처 관련 경전들에서는 이것을 실천하는 와중에 지녀야 할 내면의 심리적 기능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을 별도의 가르침으로 드러낸 것이 다섯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잘 계발하고 활용하면 사념처 명상을 원만하게 성숙시킬 수 있다.

첫 번째 기능인 믿음이란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다.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믿음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를 믿고서 그것을 지표로 삼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의심에 찌든 마음을 가라앉혀 실천의 여정에 과감히 뛰어들게 된다. 두 번째의 노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꿋꿋하게 수행에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해로운 마음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로운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이미 생겨난 이로운 마음에 대해서는 더욱 충만히 하기 위해 꾸준히 힘쓰는 것이 노력이다(Ps.Ⅱ.15쪽).

세 번째의 마음지킴이란 사념처 자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매순간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며, 몸이나 느낌 따위에 대한 통찰을 진행해 나가는 실제 원리이다. 지속적인 마음지킴을 통해 내면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는 지혜를 발현시키게 된다. 네 번째의 삼매란 마음지킴을 통해 얻게 되는 고요함과 평온의 경지를 가리킨다. 마지막의 지혜란 삼매로 얻어진 안정된 마음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아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다섯 기능은 수행의 진척에 따라 차례로 계발시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가. 그러나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그 이후로는 균형과 조화에 힘을 써야 한다. 예컨대 믿음은 지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삼매는 노력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혜가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맹목으로 흐르기 쉽고, 믿음이 없는 지혜는 교만으로 이어진다. 

또한 삼매가 수반되지 않는 노력은 들뜸으로 이어질 수 있고, 노력 없는 삼매는 무기력에 떨어지기 쉽다. 한편 마음지킴은 이상의 4가지를 원활하게 해주는 동시에 이들 모두의 조화를 돕는다. 이것은 천칭저울에 비유될 수 있다. 마음지킴은 다른 기능들을 떠받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는가를 알게 해주는 눈금 역할을 한다.

사실 믿음만을 강조하다보면 지혜를 등한시하기 쉽고, 지혜만을 중요시하다보면 믿을을 잃기 십상이다. 또한 노력만을 앞세우다 보면 격앙되기 쉽고, 안정만을 강조하다보면 침체될 수 위험이 있다. 어리석은 믿음도 문제이지만 교만한 지혜 또한 스스로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 

이것은 깨달음의 여정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유념해야 할 교훈이다. 이렇듯 초기불교에서는 조화롭고 균형 잡힌 실천·수행을 가르친다. 다섯 기능의 균형이라는 원리를 터득할 때 사념처 명상은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68. 자애

편안하게 잠들고 깨어나는 방법

자애(자慈,metta)란 무엇인가. 남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선사하려는 마음으로 풀이된다. 자애로운 마음은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을 유도하고 관계를 개선시킨다. 따라서 이것은 남을 보호하는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된다. 다음의 경구가 있다. "어떻게 남을 보호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가. 인내와 비폭력과 자애와 연민에 의해서이다(SN. V. 169).”자애로운 사람은 항상 개방된 태도로 자신을 다스리고 타인을 대한다.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억지나 강요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여유를 지닌다.

자애는 내면의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간과할 수 없는 덕목이다. 특히 이것은 분노라는 심리적 장애를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권장된다(MN. I. 424). 분노는 화풀이 당하는 사람에게도 상처가 되지만 화를 내는 당사자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순간의 분노로 남겨진 상처와 회한은 오랜 동안 지속된다. 따라서 자애는 번뇌를 다스리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으로 권장된다. "자애를 잊지 않고서 한량없이 닦아나가는 사람은 번뇌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며 【정신적】족쇄들을 엷어지게 한다(AN. IV. 150).”

자애의 계발은 본격적인 명상의 실천에 앞서 권장된다. 이것이 잘 닦여 있지 않으면 원인을 헤아리기 힘든 갖가지 난관에 직면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어떠한 집이라도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면 도적이나 밤도둑의 해침을 받기 쉬운 것과 같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지 않거나 반복하지 않으며 귀신amanussehi에 의해 해침을 받기 쉽다.… 그러나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닦고 반복하면 귀신의 해침을 받지 않는다(SN. II. 264쪽).”

자애의 결실을 일괄하면 다음과 같다. 

"편안하게 잠든다. 편안하게 깨어난다. 악몽을 꾸지 않는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여러 신들이 보호한다. 이러한 사람은 불이나 독이나 칼이 해치지 못한다. 마음이 빠르게 삼매에 들어간다. 안색이 맑아진다. 노망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다. 설령 꿰뚫지 못하더라도 브라흐마의 세계에 도달한다(AN. V. 342).”이들 11가지 결실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어찌 독이나 칼로부터 해침을 당하겠는가. 설령 신이 존재하거나 내세가 있다면 이러한 사람들부터 우선 배려되지 않겠는가.    

초기불교를 대표하는 명상프로그램으로서 사념처四念處가 있다.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제반 현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모은다. 그런데 이 방식만을 고수하다보면 자칫 지나치게 예민해지거나 엄격해질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추구하는 와중에 따스한 배려의 마음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여정에서 때로는 차가운 통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오래 지속되거나 과도해지면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 결국 유연성을 상실한 채 외골수 수행자로 남겨질 위험이 없지 않다. 

과연 자신에게 자애의 마음이 충만한지 돌이켜 볼 일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선 자신에 대해 자애의 마음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부디 나에게 자애의 마음이 충만해지기를,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평안하기를, 그리하여 더욱 행복하기를…" 이와 같이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것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굳건히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르익으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확대·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대가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평안하기를, 그리하여 더욱 행복하기를…"



69. 사띠 논쟁

불교학계 달군 번역어와 경지 문제


사띠(念, sati)란 무엇인가.

마음지킴, 마음챙김,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되는 그것이다. 이것의 원래 의미는 잊지 않음(불망不忘)으로, 과거에 경험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이 용어의 쓰임과 관련하여 잊지 않음을 유지할 때의 각성된 상태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어떤 사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산란하거나 부주의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용도로 활용한다. 이렇게 해서 사띠의 의미는 잊지 않음 혹은 기억으로부터 주의집중, 깨어있음, 알아차림 따위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확장된 의미의 사띠는 명상의 상태에 이르도록 해주는 심리적 기능을 나타낸다. 이 경우 기억이라는 뜻은 약화되고 집중이라는 뉘앙스가 부각된다. 즉 현재 경험하는 사태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의 방황을 막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용도의 사띠는 감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비유된다(SN.Ⅳ. 194). 보거나 듣는 현상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스스로를 다잡는다는 것이다. 한역에서는 이것을 염念, 억념憶念, 수의守意, 의지意止 등으로 번역해 왔다. 앞의 둘은 잊지 않음이라는 원래의 의미에 가까우며, 뒤의 둘은 산란함이나 부주의함을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통한다.

한편 사띠는 삼빠쟌냐(知, sampajanna)라는 용어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곤 한다(DN.Ⅱ.223). 삼빠쟌냐는 '경험하는 현상을 그때그때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작용'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삼빠쟌냐와 대비를 이루는 사띠의 고유한 의미는 '마음을 모으고 단속하는 것'에 한정된다. 사띠는 매순간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명확한 알아차림이 발생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작용이다. 반면에 삼빠쟌냐는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결과적 측면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들의 세분화된 쓰임을 고려하여 전자에 대해서는 마음지킴으로, 후자에 대해서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한다.

사띠 즉 마음지킴의 기능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의 깊은 각성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삼빠쟌냐 즉 알아차림은 그러한 각성된 마음으로 경험하는 현상을 기민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들 둘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에 놓인다고 할 수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음지킴은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해 전제되어야 하고, 그렇게 생겨난 알아차림은 최초의 마음지킴을 더욱 굳건히 해준다. 이들은 고요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사마타止와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觀에 도달하도록 해주는 실제적 수단으로 강조된다(AN.Ⅴ.99~100).

초기불교를 대표하는 명상프로그램으로서 사념처四念處라든가 입출식념入出息念 따위가 있다. 이들 명상법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은 없어서는 안 될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통해 몸이나 느낌 호흡 따위에 대해 집중을 꾀하게 된다. 또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진리를 꿰뚫는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 원활하게 작용해 주어야만 사념처라든가 입출식념에 전념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실현하게 된다.

2000년 대 이후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띠논쟁'은 한국불교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논의의 쟁점은 이것을 어떻게 번역하느냐는 것과 과연 이것이 어떠한 경지에서 행해지는가에 관한 의문이었다.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은 이 용어가 지닌 의미와 쓰임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상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미완성의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일상의 경지에서부터 스스로를 추스르기 위해 실천해 나가는 것으로, 다섯 장애(오개五蓋)라든가 감각적 쾌락欲 따위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도구가 된다(AN.Ⅳ.457).


70. 오온의 이해

현상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오온이란 무엇인가.

현상계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상세계란 '나'에 의해 경험되는 세계를 가리킨다. 곧 '나'에게 비추어지고 '나'에 의해 이해된 세계를 말한다. 이렇듯 오온이란 '나'에게 포착된 경험적 요인들을 다섯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오온으로 구성된 세계란 '나'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오온의 가르침은 오로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며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며 '나' 자신에 대한 분석이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혼자만의 존재이다. '나' 자신과 더불어 '내'가 처한 모든 환경은 '나'대로의 경험과 이해가 빚어낸 결과이다. 설령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을 떠올리는 '내'가 우선 존재해야만 한다. 결코 그분들이 '나'일 수 없으며, 세상의 여늬 존재와도 다른 '내'가 지금 이렇게 있을 뿐이다.

'나'란 존재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 비유할 수 있다. '나'에 대한 관념이 강해질수록 폐쇄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질식의 공포는 더해 간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내'가 존재하는 한 밖으로 빠져나갈 여지는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또한 밀폐된 공간 너머의 또 다른 '나'를 상정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 라는 생각마저 폐쇄공포증으로 야기된 정신착란의 결과일 수 있다. 어떠한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현재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이 밀폐된 공간 속 혼자만의 이야기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오온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실재론이다. 물질현상·느낌·지각·지음·의식 따위를 객관적 실재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이것에 따르면 오온은 마치 원자와 같은 알갱이로 존재하며, 이들이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걸치면서 '나'를 포함한 일체의 사물을 이루어진다.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물질현상이라든가 느낌 따위의 낱알들로 해체될 수 있고, 그러한 해체가 완료되면 남김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오온설의 취지를 망각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낱낱의 요소로 해체되고 나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를 조장하거나, 해체되기 이전에 실컷 즐기고 보자는 쾌락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

오온설의 본래 의도는 '나'라는 신화神話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데 있다. 대부분의 중생은 오온의 장벽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심지어는 오온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것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물질현상을 자아라고 관찰한다.… 느낌·지각·행·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SN.Ⅲ.102)." 이러한 잘못된 관찰을 통해 '현재의 몸에 매인 견해(유신견有身見,sKKyaditthi)' 가 발생한다.

'현재의 몸에 매인 견해'는 스스로를 더욱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물질현상이라든가 느낌이라든가 충동·생각·이미지 따위에 달라붙어 그들과 하나가 되도록 부추긴다. 이처럼 달라붙어 뒤엉킨 상태에서 경험되는 오온에 대해 '5가지 집착된 경험요소' 즉 오취온五聚蘊이라고 달리 일컫는다. 붓다는 오온 각각에 대해 질병과 같은 것으로, 종기와 같은 것으로, 죄악으로 보라고 이른다(MN.Ⅰ.435)

그리하여 오취온의 상태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오온에 대해 나의 것mama, 나aham, 나의 자아me atta가 될 수 없음을 꿰뚫어 스스로를 특정한 모습으로 고착화하거나 한정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출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 산책|작성자 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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